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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追尊 莊祖의 隆陵과 第二十二代 正祖의 健陵
*華城 隆陵과 健陵 -사적 제206호 -京畿 華城市 安寧洞
隆陵은 思悼世子와 夫人 惠慶宮 洪氏의 무덤이다. 正祖가 왕위에 오르면서 莊獻世子라 하고,
1899년에 莊祖懿皇帝로 追尊되고, 惠慶宮 洪氏도 獻敬懿皇后로 추존했다. 思悼世子가 처음
安葬된 곳은 楊州의 남쪽 中粱浦 拜峰山 기슭 垂恩墓였으나, 正祖가 卽位하면서 尊號를 莊憲으로
바꾸면서 永祐園이라고 했으며, 正祖 13년(1789) 華城 花山으로 移葬한 후에는 顯隆園으로,
光武 3년(1899) 莊祖懿皇帝로 追尊되면서 ‘隆陵’이라 일컬었다. (*懿: 아름다울 의 *顯: 나타날 현)
健陵은 22代 正祖와 妃 孝懿王后 金氏의 合葬陵이다. 正祖는 孝誠이 至極했으며, 많은 人才를
등용하고, 朝鮮後期의 黃金文化를 이룩했다. 正祖의 健陵은 顯隆園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孝懿王后가 他界하자 風水地理上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고 孝懿王后와 合葬했다.
追尊 莊祖와 獻敬皇后의 隆陵 -사적 제206호 -華城 隆陵과 健陵 -合葬陵
-京畿 華城市 安寧洞 -正祖 13년(1789), 純祖 16년(1816), 光武 3년(1899)
隆陵은 追尊 莊祖懿皇帝(思悼世子)와 獻敬懿皇后(惠慶宮 洪氏)의 合葬陵으로, 正祖 13년(1789)
楊州 拜峰山에서 현재위치로 移葬하면서 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園을 다시 조성했다.
進入 및 祭享空間에는 홍살문, 板位, 參道, 수라간, 丁字閣, 碑閣을 배치했다. 碑閣에는 2基의
表石이 있는데 1기는 朝鮮時代에 세운 朝鮮國 表石(朝鮮國/思悼莊獻世子 顯隆園)이고,
1기는 大韓帝國時代에 세운 皇帝國 表石(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祔左)이다.
陵寢은 欄干石을 설치하지 않고 屛風石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面石은 仁祖의 長陵 형태를 따랐으며,
石은 연꽃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長明燈, 魂遊石, 文·武人石, 石馬, 石羊, 石虎와
望柱石을 배치했다. 특히 文人石은 幞頭를 쓴 일반적인 王陵形式이 아닌 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空間構成의 특이한 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丁字閣과 陵寢이 이루는 軸이다.
대개의 王陵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一直線으로 軸을 이루는데 隆陵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圓形의 연못인 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風水的 論理에 의해
造成되었다고 한다. (*幞: 보자기 복 *坤: 땅 곤)
英祖 38년(1762) 思悼世子(莊祖)가 父王 英祖의 命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楊州의 남쪽 中粱浦 拜峰山 기슭(현 서울 東大門區 中浪橋 부근)에 垂恩墓를 조성했다.
正祖가 卽位하자 莊獻世子라는 尊號를 올리고 墓를 園으로 格上하고 永祐園이라고 했다.
正祖 13년(1789) 永祐園을 현재의 花山으로 옮기면서 顯隆園이라고 했으며, 純祖 15년(1815)
獻敬懿皇后(惠慶宮 洪氏)가 他界하자 이듬해인 1816년 顯隆園에 合葬했다. 그 후 大韓帝國
선포 후인 光武 3년(1899) 思悼世子가 莊祖 追尊되자 陵으로 격상되어 隆陵이라고 했다.
*莊祖懿皇帝(1735~1762)
莊祖懿皇帝는 英祖와 暎嬪 李氏의 아들로 英祖 11년(1735)에 태어나 英祖 12년(1736)에 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3세 때 이미 <孝經>을 외울 정도였으며, 隨時로 글을 쓰고
詩를 지어 大臣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王世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父王 英祖의 기대는 매우 컸다. 英祖 25년(1749) 英祖의 命으로 代理聽政을 시작하자,
그를 警戒하는 老論 僻派 大臣들이 王世子를 謀陷해 英祖와 王世子 間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英祖 38년(1762) 刑曹判書 尹汲의 청지기였던 羅景彥이 世子의 非行을 고하는 上書를 올리자,
크게 노한 英祖는 羅景彥을 處刑하고, 王世子에게 自決할 것을 命했다. 그러나 王世子가 命을
따르지 않자 英祖는 王世子를 廢庶人 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英祖實錄>英祖 38년(1762)
5월 13일의 記事)에는 아버지인 英祖가 王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悲劇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했다. 羅景彥이 告變한 후부터 임금은 王世子를 廢하기로 결심했다.
임금은 昌德宮에 나아가 世子에게 徽寧殿(貞聖王后의 魂殿)에 禮를 行하도록 했다.
임금이 行禮를 마치고, 世子가 뜰 가운데서 四拜禮를 마치자, 宮城門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禁한 후 世子에게 命하여 땅에 엎드려 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며, 차마
들을 수 없는 傳敎를 내려 自決할 것을 재촉하니, 王世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났다.
世孫(正祖)이 들어와 冠과 袍를 벗고 王世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侍講院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命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傳敎를 내려
王世子의 自決을 재촉하니, 王世子가 자결하고자 했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廢庶人한다는 명을 내렸다. 軍兵을 시켜 臣下들을 내쫓게 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翰林 林德躋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王世子는 林德躋의 옷자락을 붙잡고 哭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殿門에서 나와 春坊의 여러 官員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王世子가 哭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改過遷善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의 傳敎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王世子를 깊이 가두라고 命했는데, 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王世子嬪, 世孫 및 여러
王孫을 左議政 洪鳳漢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는데, 이때 이미 밤이 半이나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英祖는 자신의 행동을 곧 後悔하고, 哀悼하는
뜻에서 ‘思悼’라는 諡號를 내렸다.
그 후 1776년 正祖가 卽位한 후 ‘莊獻世子’라는 尊號를 올렸으며, 光武 3년(1899) 王으로 追尊되어
廟號를 ‘莊宗’이라고 했다가 皇帝로 追尊되어 ‘莊祖懿皇帝’라고 했다. (*僻: 궁벽할 벽 *陷: 빠질 함
*汲: 길을 급 *彥: 선비 언 *袍: 도포 포 *躋: 오를 제 *坊: 동네 방 *
*獻敬懿皇后(1735~1815) -本貫·姓氏; 豊山 洪氏
獻敬懿皇后는 永豐府院君 洪鳳漢과 韓山府夫人 李氏의 딸로 英祖 11년(1735) 漢陽 盤松坊
外家 私邸에서 태어났다. 英祖 20년(1744) 王世子嬪에 책봉되고, 英祖 38년(1762) 思悼世子가
他界하자 惠嬪에 책봉되었다. 1776년 正祖가 卽位해 호칭을 높여 惠慶宮이라고 했다.
惠慶宮의 父親 洪鳳漢과 叔父 洪麟漢은 外戚이면서도 廢世子를 주장하는 老論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叔父 洪麟漢은 심지어 英祖가 昇遐하기 넉 달 전인 英祖 51년(1775) 11월
‘三不必知說’을 내세워 훗날 正祖가 되는 世孫의 代理廳政도 노골적으로 반대한 인물이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惠慶宮 洪氏는 王世子의 慘變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正祖 19년(1795) 親庭 조카 洪守榮의 訴請으로 思悼世子의 慘變을 중심으로 한 自傳的
回顧錄 <閑中錄>을 남겼다. 史料의 가치가 풍부한 <閑中錄>은 <仁顯王后傳>과 함께 宮中文學의
雙璧을 이룬다. 純祖가 卽位한 뒤에도 王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純祖 15년(1815)
昌慶宮 景春殿에서 81세로 他界했다.
莊祖와 獻敬皇后의 隆陵 사진
(00) 華城 隆陵과 健陵 안내도 -사적 제206호
(01) 隆陵 全景 -사적 제206호 (*문화재청 사진)
(02) 隆陵 홍살문
마침 隆陵祭享行事가 열리고 있었다.
(03) 隆陵의 參道
參道의 가운데 조금 높은 길은 神이 다니는 神道, 오른쪽 조금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이다.
(04) 隆陵 丁字閣
(05) 隆陵 碑閣
(06) 隆陵 碑 (舊碑)
碑文 [朝鮮國 / 思悼 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篆書體로 刻字했다.
(07) 隆陵 碑 (新碑)
碑文은 [大韓 / 莊祖懿皇帝隆陵 / 獻敬懿皇后 附左]라고 刻字했다.
(08) 隆陵 陵寢部 (*문화재청 사진)
陵寢은 欄干石을 설치하지 않고 屛風石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面石은
仁祖의 長陵 형태를 따랐다. 陵寢 앞에 長明燈-魂遊石-石羊-武人石-
文人石-望柱石과 뒤에 曲墻이 보인다.
(09) 隆陵 屛風石 (*문화재청 사진)
(10) 屛風石 印石 (*문화재청 사진)
屛風石 위에 꽃 봉오리 모양의 印石에 文字를 새겼다.
(11) 元火皇橋
홍살문보다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元火皇橋는 禁川橋로 생각된다.
第二十二代 正祖와 孝懿宣皇后의 健陵 -사적 제206호 -合葬陵
-위치: 京畿 華城市 安寧洞 -조성: 純祖 1년(1800), 純祖 21년(1821)
健陵은 제22代 正祖宣皇帝와 孝懿宣皇后 金氏의 合葬陵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板位, 參道, 수라간, 丁字閣, 碑閣을 배치했다. 陵寢은 隆陵과 비슷하나 屛風石을 설치하지 않고
欄干石만 둘렀으며, 長明燈, 魂遊石, 文·武人石, 石馬, 石羊, 石虎, 望柱石 등을 배치했다.
正祖 24년(1800) 正祖가 昇遐하자 父親 莊祖의 顯隆園(隆陵) 동쪽언덕에 능을 조성했으나,
純祖가 卽位한 후 健陵 不吉論이 있었으며, 純祖 21년(1821) 孝懿宣皇后 金氏가 他界하자
隆陵의 遷葬이 결정되었다. 이후 顯隆園 서쪽 언덕으로 陵자리가 결정되면서 合葬陵으로 조성했다.
*正祖宣皇帝(1752~1800) -在位; 1776~1800
正祖宣皇帝는 追尊 莊祖(思悼世子)와 獻敬懿皇后 洪氏의 次男으로 英祖 28년(1752) 昌慶宮
景春殿에서 태어났다. 英祖 35년(1759) 王世孫으로 책봉되고, 英祖 38년(1762)에 父親
思悼世子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 英祖는 正祖에게 王位繼承의 名分을 주기
위해 夭折한 長子 孝章世子의 養子로 入籍하게 했다. 英祖 51년(1775)부터는 英祖를 대신해
代理聽政했으며, 이듬해인 1776년 英祖가 昇遐하고 卽位했다. 먼저 父親 思悼世子의 名譽回復에
노력했으며, 王權을 위협하는 老論 僻派를 政界에서 물러나게 했다. 王權을 강화하고 體制를
정비하기 위해 英祖의 蕩平策을 繼承·發展시키고, 奎章閣 설치, 辛亥通共(禁亂廛權 廢址 등) 실시,
身分의 制約 없이 능력과 學識爲主로 人材를 등용했으며, 壬辰字 등을 새로 鑄造해 印刷術의 발달을
기하고, <增補東國文獻備考>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그리고 理論이 重視되는 學問에 치우치지
않고, 實學을 발전시켰으며, 朝鮮 後期의 文藝復興期를 가져왔다. 가난한 百姓의 救濟를 위해
<字恤典則>을 공포하고, 制度改編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正祖 24년(1800) 昌慶宮 迎春軒에서
49세로 昇遐했다. 純祖는 廟號를 ‘正宗’이라 올렸으며, 大韓帝國 宣布 後 光武 3년(1899) 高宗의
直系 5代 祖上 追尊으로 正祖宣皇帝로 追尊했다. (*廛: 가게 전 *恤: 불쌍할 휼)
楊州의 남쪽 拜峰山 思悼世子의 永祐園(垂恩墓)을 正祖 13년(1789) 正祖가 華城 花山으로
移葬하고 顯隆園이라고 하면서 華城(水原)에 新都市를 건설하고 城郭(*史蹟 제3호 水原華城)을
築城했으며 正祖 14년(1790)에서 正祖 19년(1795)에 이르기까지 漢陽에서 水原에 이르는
중요 經由地에 果川行宮, 安養行宮, 肆覲行宮, 始興行宮, 安山行宮, 華城行宮 등을 설치했다.
그 중에서도 華城行宮은 규모나 機能面에서 단연 대표적인 行宮이라고 할 수 있다.
正祖 20년(1796) 華城을 築城한 후 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行宮을 건립했으며,
그 전까지는 正祖 13년(1789) 水原邑治를 花山에서 八達山으로 옮기면서 官衙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行宮으로 改築 후에도 평상시에는 華城府 留守가 집무하는 內衙로 활용했다.
正祖 13년(1789) 10월 顯隆園 遷園 이후 이듬해 2월부터 正祖 24년(1800)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陵幸할 때마다 正祖는 華城行宮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華城行宮은 城郭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啓蒙君主 正祖가 지향하던
王權强化政策의 상징물로 政治的, 軍事的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肆: 방자할 사 *覲: 뵐 근)
(*肆覲行宮: 正祖가 顯隆園 行次를 위해 세운 行宮 중 하나로, 지금의 儀旺市 古川洞에 있었던
行宮)
*孝懿宣皇后(1753~1821) -本貫/姓氏: 淸風 金氏
孝懿宣皇后는 淸原府院君 金時默과 唐城府夫人 洪氏의 딸로 英祖 29년(1753) 嘉會坊 私邸에서
태어났다. 英祖 38년(1762) 王世孫嬪, 1776년 正祖가 卽位해 王妃로 冊封되었다. 天性이 공손하고
溫厚하여 60세가 넘어서도 貞純王后 金氏와 獻敬王后 洪氏를 供養해 稱頌을 받았다고 한다.
純祖가 卽位해 王大妃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 수 차례에 걸쳐 尊號를 올렸으나
“先王께서 尊號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至痛으로 남아 있는데, 未亡人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可當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고, 純祖 20년(1820) 여러 大臣들이 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그 후 純祖 21년(1821) 昌慶宮 慈慶殿에서 69세로 他界했다.
孝懿宣皇后는 先天的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으나
孝誠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德望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純祖實錄>에 실린 孝懿宣皇后의 行狀에는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반드시 誠意와 信義로 대하여 일찍이 賤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虛心坦懷하게 말했다. 그러나 私的인 恩情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宮中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親戚 중에 過失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했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罰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했다. 또,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服飾과 器物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治罪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坦: 너그러울 탄 *懷: 품을 회)
正祖와 孝懿宣皇后의 健陵 사진
(01) 健陵 홍살문
(02) 健陵 參道
(03) 健陵 丁字閣
(04) 丁字閣으로 올라가는 階段 東階
參道를 따라 丁字閣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왼쪽의 소맷돌이 있는 계단은 神道와 연결되고
오른쪽 소맷돌이 없는 계단은 御道와 연결된다.
(05) 望燎位. 祭享을 지낸 뒤 祝文을 불사르는 곳이다.
(06) 健陵 碑閣 (*문화재청 사진)
(07) 健陵 碑
碑文은 [大韓 / 正祖宣皇帝 健陵 / 孝懿宣皇后 祔左]라고 篆書體로 刻字했다.
(08) 健陵 陵寢 空間
(09) 健陵 陵寢 (*문화재청 사진)
(10) 健陵 陵寢 欄干石 (*문화재청 사진)
병풍석은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11) 健陵 長明燈 (*문화재청 사진)
懿昭世孫의 懿寧園 -사적 제200호 -高陽 西三陵 境內 -單墳
-京畿 高陽市 德陽區 元堂洞 -조성: 英祖 28년(1752), 高宗 7년(1870), 1949년
懿寧園은 조선 21代 英祖의 孫子이며, 追尊 莊祖(思悼世子)의 長男 懿昭世孫의 園이다.
懿寧園은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世孫의 墓所形式에 맞게 조성하여 丁字閣, 表石, 長明燈, 魂遊石,
文人石, 石馬, 望柱石, 石羊과 石虎를 배치했다. 그러나 1949년 西三陵으로 移葬하면서 園寢에
있는 石物과 表石만 옮겨왔다. 表石의 전면과 후면의 글씨는 英祖의 親筆이다. (*懿: 아름다울 의)
英祖 28년(1752) 懿昭世孫이 他界하자 鞍峴 남쪽기슭(현 서울 西大門區 北阿峴洞)에 墓를
조성하고, 이름을 [懿昭墓]로 했다가 高宗 7년(1870) 懿寧園으로 格上했다. 이 후 1949년
高陽 西三陵 境內 현재 자리로 移葬했다. (*鞍: 안장 안)
*懿昭世孫(1750~1752)
懿昭世孫은 追尊 莊祖(思悼世子)와 獻敬懿皇后(惠慶宮 洪氏)의 長男으로 英祖 26년(1750)에
태어났다. 英祖 27년(1751) 王世孫으로 冊封되었으나, 英祖 28년(1752) 昌慶宮 通明殿에서
3세에 他界했다.
懿寧園 사진 (*문화재청 사진)
(01) 懿寧園 園寢
園寢으로 封墳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02) 懿昭世孫 表石
[朝鮮 懿昭世孫之墓] 글씨와 뒷면의 陰記는
英祖의 글씨라고 한다.
(03) 懿寧園 文人石
文孝世子의 孝昌園 -사적 제200호 -高陽 西三陵 境內 -單墳園
-위치: 高陽市 德陽區 元堂洞 -正祖 10년(1786), 高宗 7년(1870), 1944년
孝昌園은 22代 正祖의 첫째 아들인 文孝世子의 園이다. 孝昌園은 처음 朝鮮時代에 世子의
墓制形式에 맞게 조성해 정자각, 비각, 문인석,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으나 1944년 高陽 西三陵으로 移葬하면서 園寢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 표석만 옮겨오고,
神道碑는 입구에 세웠다.
正祖 10년(1786) 文孝世子가 他界하자 高陽 栗木洞(現 서울 龍山區 孝昌公園)에 묘를 조성하고,
묘소의 이름을 孝昌墓로 했다가 高宗 7년(1870) 孝昌園으로 格上했으며, 1944년 日帝가
戰爭犧牲者를 위한 忠魂塔을 세운다는 名目으로 朝鮮王室 무덤을 高陽 西三陵으로 移葬하면서
孝昌園은 孝昌公園이 되었으며, 文孝世子의 孝昌園은 ‘孝昌洞’과 ‘孝昌公園’이라는 이름을
남긴 채 현 위치로 移葬했다.
*文孝世子(1782~1786)
文孝世子는 正祖와 宜嬪 成氏의 아들로 正祖 6년(1782)에 태어났다. 正祖 8년(1784) 王世子로
冊封되었으나, 2년 뒤인 正祖 10년(1786) 紅疫으로 昌德宮 別堂에서 5세로 他界했다.
처음 諡號는 ‘溫孝’라고 했다가, 文孝로 바꾸었다.
*宜嬪 成氏(1753~1786) -正祖의 後宮 -文孝世子의 母親
어릴 때 宮中에 들어왔으며, 正祖의 承恩을 입고 尙儀(정5품 벼슬의 內命婦)의 직책을 얻었다.
正祖의 後宮 가운데 유일한 宮人 出身이다.
正祖 6년(1782) 아들을 출산해 昭容(정3품 벼슬의 내명부)으로 봉해졌으며 이듬해인 1783년
그의 아들이 文孝世子에 책봉되자 嬪(정1품 벼슬의 내명부)으로 進封되어 ‘宜嬪’이 되었다.
正祖 8년(1784)에 딸을 낳았으나 첫돌을 넘기기 전에 사망하고 뒤이어 文孝世子도
正祖 10년(1786) 5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宜嬪 成氏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文孝世子의 葬禮를 지낸 지 약 2개월 후 출산을 앞두고 他界했다.
宜嬪 成氏의 묘는 西三陵(사적 제200호) 경내의 後宮 墓域에 있다.
文孝世子의 孝昌園 사진
(01) 孝昌園 園寢
(02) 孝昌園 神道碑
(03) 孝昌園 文人石
- (23) 第二十三代 純祖肅皇帝와 純元肅皇后의 仁陵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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