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서 니콜로 파가니니는 작곡 실력보다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바이올린 연주 실력으로 더 유명한 음악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파가니니를 가리켜 ‘악마의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의 귀신’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귀신과 같은 솜씨로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별난 복장에 괴팍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괴짜였습니다. 귀부인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약속한 연주회를 펑크 내 파산지경에 빠져 옥살이를 하고 도박에 미쳐 애기(愛器)인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히기도 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연주회도 자주 열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불쌍해 보이는 거리의 악사를 보면 그 앞에서 즉석에서 연주를 해서 돈을 모아 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가 일세를 풍미한 걸출한 연주가였던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그의 연주 기교는 사실 초인적이었습니다. 연주 도중 줄이 끊어져도 당황하기는커녕 남은 줄로 쉬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고, 일부러 바이올린 줄을 차례로 하나씩 끊고 나머지 한 줄로만 연주하는 묘기도 선 보였습니다. 당시의 만화 중에 파가니니가 줄 한쪽 끝을 발가락에 매고 한쪽 끝은 입에 문 채 활로 켜는 모습을 그린 것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그는 1825년 43세 때 한 여인으로부터 자신의 아들 아킬레스를 낳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즉시 호적에 올렸습니다. 유럽의 스타였던 그는 연주여행이 일상인지라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유럽 전 지역을 유람했습니다. 이런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840년 5월 27일, 57세의 나이에 열네 살밖에 안 된 아들 아킬레스의 품에 안겨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 영화 <파가니니>에서
* 정처 없이 떠도는 파가니니의 시신
생전 어린 아들과 고단한 삶을 살았던 파가니니는 사후에도 고달픈 여정이 계속됩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파가니니가 신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교회법에 따른 장례식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후 55년 동안 그는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떠돌게 됩니다.
왜 그랬는지 알아봅니다. 당시 교회법에 의하면 고인이 자기 땅에 묻힌 경우 교회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동묘지에 묻힌 경우에는 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교회는 파가니니를 신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당사자인 파가니니는 공동묘지에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특히 파가니니의 공동묘지 매장은 아들 아킬레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장례문화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후 교회묘지를 통해 천국으로 가는 것이었으므로 매장은 고인의 명예와 직결되었습니다. 물론 파가니니는 연주로 많은 돈을 벌었기에 소유한 땅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킬레스는 아버지를 교구 공동묘지에 묻고 싶어 했습니다.
평생 아들을 위해 살다시피 한 아버지였던 만큼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파가니니가 신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걸까요? 아마도 교회에서 종부성사를 문제 삼았다는 얘기가 가장 근거가 있을 겁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임종 때 하는 마지막 고해성사인 종부성사를 파가니니가 거부했기에 교회가 매장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파가니니의 임종 장소는 니스였습니다. 임종할 당시 종부성사를 위해 신부가 방문했을 때 이미 파가니니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 종부성사를 받을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도 어째서 교회는 그가 ‘종부성사를 거부했다’고 했을까요. 여기서 당시 니스의 주교인 갈바니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바니는 파가니니에게 교회에 큰 액수의 돈을 기부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파가니니가 내심 주교를 탐탁치 않게 생각해 매번 다른 이유를 들어 거절을 했고, 이에 주교가 앙심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차에 파가니니가 죽었고, 니스 주교는 파가니니가 신자가 아니어서 공동묘지 매장을 거부한 것입니다.
니스의 많은 예술가들이 파가니니의 장례미사를 봉헌해달라고 청원했지만 교회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파가니니가 임종한 1840년 그의 변호사와 아들 아킬레스는 니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니스 법원은 장례가 종교법원 관할이라는 이유로 주교의 편을 드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킬레스는 이듬해 종교 법원인 로마 법원에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 파가니니의 죽음
항소를 하기까지 이미 1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파가니니의 시신은 방부 처리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습니다. 니스의 집 지하실에서 니스의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또 친구의 집인 라자레토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파가니니의 고향인 제노바에서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커지면서 제노바 근처의 파가니니 소유의 농가로 반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니스 법원에 의해 '니스 반출 금지'라는 주교의 명령이 내려져 있어서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니스 주교와는 달리 파르마 시의 주교의 호의로 파르마 교외의 본인 별장 가요나에 묻혔습니다. 파가니니 측은 파르마의 공동묘지에 묻히길 원했지만 이것만은 거절당했습니다.
아직도 이 사건은 로마 카톨릭 종교법점에서 계류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갖은 우여곡절 끝에 로마 카톨릭의 종교법원이 최종 판정을 내리게 됩니다. 니스 주교의 원 결정을 파기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파가니니의 임종 당시 내려진 법적 결정이 니스 주교의 사적 감정에 의한 오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종교 재판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 제노바 파가니니 기념관의 그의 바이올린 과르네리
이렇게 해서 마침내 파가니니의 시신은 아들이 그토록 원했던 대로 파르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장장 55년 동안이나 유랑해온 시신이었습니다. 이제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들 아킬레스는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이장할 당시에는 손자가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곤 했는데,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고 아버지를 위해 평생 소송을 벌인 아들 아킬레스의 간절한 소망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부지지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제노바 파가니니의 묘지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
이 곡은 파가니니 최고의 대표작입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곡은 그 스스로 가장 많이 연주했던 곡이기도 했습니다. 이 곡에는 파가니니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초절(超絶)적 기교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 곡은 낭만성에 있어서도 최고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노바 시청에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은 1년에 단 한번, 방탄 진열장에 나와 그 전설적인 소리를 세상에 냅니다.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제노바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파가니니를 계승하는 우승자가 시청의 과르네리로 영광의 수상 공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긴 머리칼에 큰 키를 구부정하게 하고 바이올린을 켜는 파가니니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원한 방랑자요, 낭만파의 대명사로 남을 것입니다.
제1악장
상쾌하고 리듬감 있는 선율이 제1주제를 노래합니다. 이어서 감미로운 선율이 제2주제를 선물합니다. 전개부는 행진곡풍입니다. 웅대하고 극적인 분위기 속에 독주 바이올린이 뛰어난 선율들로 다양한 변화의 기교를 마음껏 뽐내며 서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제2악장
극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시작됩니다. 독주 바이올린이 시적이고 뛰어난 멜로디를 근사하면서도 정감 어리게 노래합니다.
제3악장
독특한 스타카토 주법에 의해 주제가 뛰듯이 경쾌하게 연주됩니다. 이것은 파가니니가 창안한 것으로 파가니니가 연주할 무렵 청중들은 이 대목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