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Well-being)과 수식관(數息觀)
『증일아함』제18권「사의단품(四意斷品)」제7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독실한 재가 불자인 파세나디 왕이 외출한 사이에 왕의 어머니가 임종하자, 불사밀(不奢蜜)이라는 신하는 왕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한 꾀를 냈다. 500마리의 흰코끼리와 말, 500명의 보병과 기녀, 500명의 바라문과 사문, 500벌의 의상과 보배로 장엄한 상여를 꾸몄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왕은 이 화려한 행렬을 보고 신하에게 누구의 행렬인지 물었다.
“어떤 장자의 어머니가 임종했는데, 저것들을 염라대왕에게 보내 죽은 이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보내는 행렬이라 합니다.”
“그것은 미련한 짓이다. 코끼리와 말을 대신 희생해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 바라문과 사문들이 빌어도 안 되고, 기녀를 보내 달래도 어림없다. 군사를 보내 싸워도 안 되고, 보물로 뇌물을 써도 안 될 일이다. 태어난 사람이 죽지 않을 방법은 없으니, 슬퍼해도 소용없다.”
그 말을 들은 대신이 왕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실은 오늘 모후께서 임종하셨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왕은 슬픔을 누르고 궁으로 돌아가서 절차에 따라 장례하고,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파세나디 왕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이여. 일체중생은 다 죽음으로 돌아가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소. 사람의 몸은 눈덩이나 흙덩이를 뭉쳐놓은 것 같아서 반드시 부서지게 돼 있소. 아지랑이 같아서 허망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빈주먹으로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소. 그러니 이 몸을 믿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마시오.”
부처님은 또 이렇게 죽음의 불가피성을 말씀하셨다.
“죽음은 교묘한 말이나 주술이나 약이나 부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늙음은 청춘을 부수어 아름다움을 없애고, 병은 건강을 부수고, 죽음은 목숨을 부수고, 항상 할 거라고 잘못 믿을 뿐, 언젠가 덧없음을 알게 된다오. 대왕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소. 그러나 이런 것을 미리 알고 몸과 마음을 다스려 법을 깨닫게 되면 죽은 뒤에 천상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한동안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했는데, 본래 ‘안녕(安寧)’ ‘복지’라는 뜻이다.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은 2000년대 이후 심리학계에 급부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웰빙(well-being)’ 대신 로마자를 그대로 옮겨 ‘웰빙(wellbing)’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생각했던 웰빙과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웰니스(wellness)’이다. 그래서 건강식품을 ‘health food’ 또는 ‘wellness food’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다소 변질됐다. 2003년 이후 웰빙 열풍이 불면서 ‘웰빙족’을 겨냥한 의류, 건강, 여행, 식품 등 각종 상품에 이어 잡지까지 등장하면서 유사 웰빙 상품들이 많아졌다. 인스턴트커피에 폴리페놀을 조금 넣고는 ‘웰빙 커피’로 홍보하거나, 각종 채소를 넣은 ‘웰빙 버거’를 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모두 단종되었다. 이렇듯 웰빙 열풍이 상업적으로 변질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웰빙의 원래 의미는 퇴색되었고,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지 편하게 산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긍정심리학 분야에서 연구되던 웰빙이 대중에게 주목받으면서 삶의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문제와 함께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서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최종적 목표로서의 웰다잉이 제안되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교육을 통해 미리 죽음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잘사는 것(Well-bing)’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잘 죽는 것(Well-dying)’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는 빠름과 느림, 삶과 죽음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지를 늘 알아차리면서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한다. 그래서 ‘죽음체험학교’를 개설하여 내가 오늘 죽는다고 가정한 후에 유서를 쓰거나, 관속에 들어가는 체험을 했다. 이를 통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미리 정리해 보거나, 그동안 잘못한 일들을 반성하며 남은 시간을 잘살겠다고 다짐했다.
『증일아함』제5권「일입도품(一入道品)」제8경에 보면,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그 무렵 데바닷다는 승단을 어지럽히고, 부처님의 발을 다치게 했으며, 아자타사투를 시켜 그 부왕을 살해하도록 교사하고, 아라한인 비구니를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고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악이 어디 있으며, 악이 어디서 생기는가. 누가 그 악을 짓고, 그 과보를 받는가. 나는 어떠한 악행을 해도 그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이 왕사성에 걸식을 나갔는데, 데바닷다가 여러 사람 앞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제자들은 걸식을 마친 뒤, 발우를 챙겨 부처님이 계신 기사굴산으로 돌아왔다. 부처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으로 물러가 앉은 뒤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부처님. 데바닷다는 ‘어떤 악을 지어도 재앙이 없고, 어떤 복을 지어도 과보가 없다. 선행은 복을 받고, 악행은 재앙이 따른다는 말은 다 틀린 말이다’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선행과 악행의 과보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선행에는 복이 따르고, 악행에는 재앙이 따른다. 선악의 행에는 모두 다 과보가 있다. 만일 저 어리석은 데바닷다가 선악의 과보가 있는 줄 알았다면, 언짢고 초조하고 근심스러워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악의 과보를 모르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선악에는 과보가 없다. 악을 행해도 재앙이 없고, 선을 행해도 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아는 척하면서 악을 행해도 복을 받는다고 한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선과 악에는 반드시 그에 맞는 과보가 따른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조심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악을 멀리하고 복 짓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라.”
불교 윤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행위에는 과보가 따른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인데, 악행이나 선행 모두 행한 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잘살기도 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못살기도 한다. 이럴 때 인과응보를 믿지 않게 되고, 제멋대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지은 업을 소멸하지 않고, 언젠가 인연이 도래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된다. 인과를 믿는다면 악행은 하지 않고 선행을 하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게 되어 있다.
『증일아함』제7권「안반품(安般品)」제1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 비구가 찾아와 안나반나(安那般那, 數息觀) 수행법을 묻자,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라훌라여, 안나반나 수행을 하고자 하면 먼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부좌를 하고 앉으라. 그런 다음 일체의 잡념을 없애고 의식의 초점을 코끝에 집중시켜라. 날숨이 길면 긴 줄 알아채고 들숨이 길면 긴 줄 알아채라. 날숨이 짧으면 짧은 줄 알아채고, 들숨이 짧으면 짧은 줄 알아채라. 날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 알아채고 들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 알아채라. 날숨이 따뜻하면 따뜻한 줄 알아채고 들숨이 따듯하면 따뜻한 줄 알아채라. 이렇게 온몸의 들숨과 날숨을 관하여 모두 다 알아채야 한다.
어떤 때는 숨이 있으면 있다고 알아채고 어떤 때는 숨이 없으면 없다고 알아채야 한다. 만일 그 숨이 폐장에서 나오면 폐장에서 나오는 줄 알아채며, 혹은 그 숨이 폐장으로 들어가면 폐장으로 들어간다고 알아채야 한다. 라훌라여. 수행자가 이처럼 안나반나를 닦아 행하면 곧 근심과 걱정을 없애고 온갖 번뇌가 사라지며 큰 과보를 성취하여 감로(甘露=不死)의 법을 얻게 되리라.”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네 가지 선정(禪定)을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이미 모든 욕심과 좋지 못한 법을 여의었으나 심(尋 : 명상 대상에 마음과 마음 작용을 의식적으로 기울이는 것)과 사(伺 : 마음을 대상에 지속적으로 초점화하는 것)가 있으면 첫 번째 ‘이생희락정(離生喜樂定)’이라 하고, 만일 비구가 심(尋)과 사(伺)를 쉬고 마음이 깨끗하며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해서 심과 사가 없으면 이것을 두 번째 ‘정생희락정(定生喜樂定)’이라 하며, 만일 비구가 기쁨을 탐하지 아니하고 보시행을 좋아하며 몸이 경쾌하고 묘한 즐거움을 얻으면 이것을 세 번째 ‘이희묘락정(離喜妙樂定)’이라 하고, 만일 비구가 즐겁다는 생각을 끊고 괴롭다는 생각도 없으며, 기뻐하는 마음도 없고 고뇌하는 마음도 없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으면, 이것을 네 번째 ‘사념청정정(捨念淸淨定)’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