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1905~1982
인상주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여 향토색과 어울리게 사용했던 화가.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낸 화가..
오지호는 1905년 오씨 집안의 동복지주 오재영(吳在永)과
그의 처 김선군(金宣君)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4남 4녀의 집안에 막내아들이었지만
그의 맨 위 두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 두 형제만 남았던
손이 귀했던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지요..^^
'천하게 키우면 명이 길다.'라는 속설에 따라
그의 형 진(鎭)을 '똘봉이'라 하고
오지호는 '죽지만 말아달라'라는 의미에서
'점수(占壽)'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서도 아들의 명이 안심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의 형 진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일본인 친구에게 양자로 보내버려
훗날 장성한후 형이 돌아오긴하지만,
오지호가 장남으로 자란 셈이지요..
로텔담 항구.오지호
보성군수를 지냈고 양복을 즐겨 입을 만큼 개방적이었던 오지호의 아버지는
민족의식이 남달라 한일합방 후 우울증을 앓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상경하여 삼일운동의 현장을 지켜보고
3월 3일 거행된 인산(因山)을 돌아보고 고향에 돌아온 오지호의 아버지는
나라 잃은 설움과, 그 슬픔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오지호의 나이 15세때 였지요..
이러한 사실은 훗날 오지호의 민족미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항구
휘문고보 3학년 시절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화가로 일컬어지는
나혜석의 유화를 보고
"이것이 유화로구나! 새로운 그림이란게 이것이었구나!"
" 이 강렬한 색채,이 힘찬 필치!"
라고 감탄을 하며, 화가로서의 길을 결심하게 됩니다..
항구..오지호
일제의 창씨개명요구를 묵살하고,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하면서 전쟁기록화를 그릴 것을 강요받으면서도
도도한 자세로 자신의 예술세계와 민족정신을 지켜갔던 그는
서양화의 기법을 우리네 정서에 맞도록
자연스러운 유화의 접근으로 재해석한 한국적작가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작고하기전까지 인상파의 외길만을 달렸던 유일한 작가였습니다.
작고전 아프리카를 여행하던중 인상깊게 보았던
세네갈 소년들의 원색의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내려던 그는
결국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세네갈 아이들(미완성)
우리는 항상 사물과사람을 대할때마다
그 사물이 눈에 비치는 모양이나,
겉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 오지호는 그와는 달리
자연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모든것을 하나의 색체로 보고,
그것이 시간과 장소와 그외의 것들에의해
움직여지고 때로는 속삭이는 모든것을
색체로 표현했던 것이죠..
늦은밤..오지호님의 그림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우린 그의 그림처럼 나무에 가려진 그림자 하나에도
또 다른 빛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왔는지..
때묻은 얼굴 뒷면에도 고운 빛을 발하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진 않는것인지..
자료:moca.go.kr..야후백과사전..글: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