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도착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문정희(1947-)
‘역’은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의미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어떤 단계나 대목, 혹은 막다른 곳을 함께 뜻한다고 보아도 좋겠다. 아니면 지나온 일과 여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어떤 언덕 같은 곳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일이 잘 풀려서, 뜻밖에 행운도 좀 얻어서 근사한 곳에 이르고 싶어 하지만, 혹은 그럴듯하게 괜찮은 곳에 도달하려고 애쓰지만 기대한 만큼 성사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에 낙담하고 실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거꾸러지고 깨지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탈이 없고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저 가을의 열매를 보라고 권한다. 벌레 먹고, 바닥에 떨어져 마구 뒹굴고, 설익고, 한쪽이 떨어져 나간 열매를 쥐게 되더라도 눈물이 나게 좋은 일이라고, 감격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해도 좋다. 도착한 역은 충분히 환하고, 꽤 빛나고, 넉넉하게 곱고, 제법 아름다운 곳이니까.
✵문정희 시인은 1947년 5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석사과정을 마친 후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한국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북인, 2008), <아우내의 새>(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나남, 1989),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미학사, 1992), <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1),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4), <응>(민음사, 2014), <나는 문이다>(민음사, 2016), <작가의 사랑>(민음사, 2018),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미음사, 2022)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목월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스웨덴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조선일보 2024년 09월 30일(월)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문태준 시인)〉,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