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이 재 무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나는 왜 죄도 없이 작아져 부끄러운가
성실, 근면하게 한 해를 살아온 나무 앞에서
나는 누군가 부실한, 얇은 내 生 훔쳐볼 것만 같아
쫓기는 도적처럼 걸어온 길 자꾸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 마주보는 잘 익은 은행잎 하나하나는
일 년 내내 나무가 착실하게 부어온 적립금 같다
저 많은 황엽
나무는 신용 좋은 은행처럼 부자로구나
그러나 나무는 누구처럼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날 저물면 날 저문다고
애써 모은 재물 검불 털 듯 뚝뚝 떨어뜨린다
지난 세월 무거운 시간도 있었다고
서러운 때도 , 기뻤던 날도 있었다고
동그란 웃음 지상에 떨어뜨린다
아, 여기저기 발에 채이는 生의 느낌표!
《위대한 식사》(세계사,2002)
첫댓글 내 생에 악착같이 계산서를 들이밀던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군요!
반가워요, 여름의 정령님. 가을이 되니 무더운 여름을 잘 견디어 스스로 기특해집니다. 부디 영혼까지 살찌는 즐거움 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