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말하는 '밀양'
영화배우 전도연씨가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영화 '밀양'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기독교인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 '밀양'은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고 또 기독교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불편한 영화, '밀양'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어느 날,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신앙을 버린다는 내용이 영화 '밀양'의 대략적 줄거리다.
<친절한 금자씨> <천하장사 마돈나> 등 지금까지의 영화에서 기독교가 대부분 조롱거리로 등장했던 것과 달리
영화 '밀양'은 신앙과 고통, 구원이란 묵직한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만들뿐, 속 시원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비신앙인들에게도,
또 신앙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신앙인에게도 이 영화는 불편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임성빈 교수(장신대 기독교윤리학과)는 이 영화는 "인간과 신, 양쪽의 한계와 가능성에 말하고 있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는, 경계선상에 있는 영화다."라고 평했다.
기독교의 리얼리티를 최대로 살린 영화
영화 밀양의 제작진은 기독교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목회자와 기독교인의 자문을 얻었을 뿐 아니라
밀양 시내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다큐로 촬영해 분석했다.
또, 부흥회 장면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전국의 부흥회 현장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또, 밀양시내 기독교인들이 집회와 부흥회 장면에 출연할 정도로
밀양 지역 교회들은 영화 '밀양'에 최대한 협조를 했다.
영화 '밀양'은 교리를 전하는 선교영화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에 악의적이지도 않다.
신학과 영화, 모두를 공부하고 밀양의 자문으로 참여한 송주화 목사(분당 할렐루야교회)는
"신애와 같이 배신감을 느껴 교회를 등지는 성도는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다."라고 평했다.
너무나 객관적인 그래서 불편한 '밀양'
기독교에 대해 대놓고 악의적이지는 않지만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니
기독교인들은 다소 불편하게 느낄 만한 요소들은 눈에 띈다.
절망에 빠진 여주인공에게 전도를 하는 이웃 주민인 여약사가
‘신애씨처럼 불행한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무례한 전도 방법' 등이 그 한 예다.
임성빈 교수(장신대 기독교윤리학과)는 "이 영화 속엔 사회에 비춰진 기독교의 모습이 등장한다.
함께하는 삶 속에 복음을 전해야하는데, 너무나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은
무례하고 값싸게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영화 속 여약사가 무례한 기독교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끼리 간직하고 싶었던 영역이
미숙한 자화상으로 비춰지는 모습에 기독교인들은 불편해 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놓은 영화
한편, 이 영화는 이렇듯 사회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줘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도록 과제를 던지고 있기도 한다.
비록 신앙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신애'와
교회를 계속 다니기로 했다는 '종찬'(송강호 분)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정말 신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세인의 관심사로 부각된 영화 '밀양‘이 기독교 신앙과 세상을 소통시키는 대화의 통로가 되고
또,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떻게 고통 속 이웃에게 다가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상처 받은 자는 아픔의 깊이를 안다
[리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밀양>
여기 한 여인이 있다. 태양 아래 모든 아픔을 드러내고 서 있는 여인.
갈기갈기 찢긴 그녀의 상처는 밝은 빛 아래 그대로 드러나 그 뜨거움을 감내한다.
하늘은 여인을 조롱하는 듯하다.
아프다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여배우 전도연을 칸의 여왕으로 승극하게 한 영화 <밀양>.
<뉴욕타임즈>는 초반부가 '물 밖의 물고기처럼 어색한 코미디(Fish-out-of-water Comedy)'여서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인 전도연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상처 받은 여인의 깊은 아픔
<밀양>은 한 여인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의 고향을 찾아 온 여자와 아이.
밀양의 초입에서 여자는 "참 좋다"고 말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이곳은 여자와 아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좋다.
하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불행이 닥친다.
남편을 잃었지만 씩씩하게 새 삶을 시작해 보려는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그녀에게 닥친 듯하다.
연약해 보이는 피아노 학원 원장 여자의 어깨는 세상의 각박함과 무서움 속에 파묻혀 버린다.
그녀에게 손길을 내민 것은 바로 기독교 신자들.
하나님께 마음을 의지하면 평온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비로소 상처를 극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다.
아들은 죽인 자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간 교도소에서
그녀는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짐을 느낀다.
상처받은 한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여인을 지켜주고자 노력하는 카센터의 김 사장(송강호 분)도,
교회의 좋은 가르침들도, 피아노 학원 주변의 다정한 사람들도
그녀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지 못한다.
여자는 세상을 향해 부르짖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
미친 듯이 괴롭고, 죽을 것만 같이 슬프고,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프다고….
세상에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누구나 한 번 쯤은 깊은 슬픔에 빠져 실의를 겪어본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 고통의 늪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린다.
그 깊은 아픔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가슴을 쥐어짜며 울고 싶다.
이 영화는 이런 경험이 한 번 쯤은 있는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영화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끔찍한 기억을 열연한 전도연의 연기는 어둡고 무겁다.
영화의 주제성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는 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하다.
관객들은 자신의 아픔과 주인공의 아픔을 동일시하며 그녀의 연기에 빠져들게 된다.
원작과 다른 주제 의식의 영화
▲ 영화 <밀양>의 포스터
<밀양>은 1985년 발표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서술자이자 관찰자인 '나'가 아들을 잃은 여 주인공의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다.
냉정한 듯 보이면서 아내의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역할을 하는 관찰자 '나'는 영화에서 빠져 있다.
하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소설과 영화가 비슷하다.
주인공 여자는 아들을 잃고 기독교에 의지하다가
'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찾아 교도소를 방문한다.
자신이 그의 죄를 용서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살인범을 만났지만
자기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죄인을 보고
여자는 커다란 혼란을 느낀다.
하늘을 향해 '왜 나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외치는 여자.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이렇게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작가 이청준이 전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과 종교의 차원을 뛰어 넘는 인간 자체의 존엄성'이다.
누군가를 용서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분명 있어야 한다.
그것마저 박탈하는 종교의 억압성을 고발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인가를 밝히는 <벌레 이야기>.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에 주목한 영화 <밀양>
신에게 의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의 본능이리라.
소설은 이처럼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과 세상의 부조리함은 한 여인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든다.
작가 이청준 특유의 실존주의적 사고는 이 작품에서 큰 울림으로 작용한다.
원작의 뚜렷한 주제의식에 비해 영화는 그 주제성이 매우 미약하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이 "참 마음이 답답한 영화다"라고 평하는 이유는
아마도 끝나지 않는 여주인공의 상처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결말에서조차 그녀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계속되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관객들은 상처 받은 한 영혼의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 결말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슬프고 답답하다.
소설이 전달하려는 주제 의식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문제였다면
영화는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의 측면에 더 주목한다.
내면의 깊은 아픔을 열연한 전도연의 연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소설과 같은 실존적 주제는 스토리에 파묻히고 만다.
그래서인지 소설과 영화는 비슷한 스토리를 토대로 하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아마 표현하는 사람, 작가와 연출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영화와 소설 모두 주제와 표현 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수작인 만큼
두 개의 서로 다른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영화 관람의 재미일 것이다.
세상에 아픔 없는 자는 없다
▲ 영화는 소설과 달리 주인공의 내적 상처에 주목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내적 고통의 강도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나에게도 저렇게 큰 불행이 한꺼번에 닥친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생각하기 끔찍하지만 그래도 이런 의문이 저절로 생긴다.
유행가 가사처럼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타인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런 이들을 생각하면 그런 아픔이 내게 닥치지 않았단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에 고개 숙여 위로를 하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내적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앉아서
자기 머리를 자르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미완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슬프다.
엔딩 직전에 비춰진 풀 그림자의 흔들림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 나약한 인간 존재의 삶을 상징한다.
그 고통을 해결할 만한 명쾌한 해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생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영화는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내적 아픔을 통해 우리에게 이 극명한 진리를 알려 준다.
세상에 아픔 없는 자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은 깊이 숨겨져 있을 뿐,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다는 슬픈 사실을 말이다.
‘최택용의 SS정치’를 시작합니다.
알다시피 과거 독재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권력의 불법성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최대한 유인하기 위해서 3s(SPORTS, SCREEN, SEX)정책을 추진합니다.
그 결과로 1981년에 ‘국풍81 개최’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창립’ 그리고 애로영화 범람 등등이 이어집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는 잘못된 말입니다.
그것을 범한 사람의 의도가 문제이지, 죄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같은 일이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독재 정권이 국민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행했던 3S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의 삶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지닌 스포츠, 영화, 섹스 등을 천박한 목적으로 악용함으로서
결국에는 그 분야의 올바른 발전을 저해했다는 것입니다.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야
한층 높은 성취를 이루고 있는 한국 영화,
스포츠클럽으로서의 건전한 선수육성과 지역 사회와 함께 공존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아닌
대기업의 홍보용 자본 논리에 의해서 좌우되었던 한국 프로야구 구단 운영,
성의 매매와 유흥 섹스 문화가 국민의 여가생활로 정착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삶과 역사의 교훈을 가장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중 예술입니다.
그리고 고단한 인간의 세속적 삶에 햇살 같은 따뜻한 희망을 주는 영화는
본질적으로 독재 권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화는 시대의 진보를 이끌 수밖에 없는 예술적 속성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의 현장에서는 본질적으로 학벌, 인맥, 특권과 반칙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땀 흘린 대가를 정직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의 장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인간이 주제인 살아있는 드라마입니다.
저는 영화와 스포츠를 통해서 한국 정치를 논해볼까 합니다.
한국 인터넷 신문의 주역으로 발전하고 있는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이런 기회를 얻게 됨을 행복하게 생각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는 전도연이 제60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이유로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이번 수상으로 인하여 이창동 감독의 영화적 성취의 질량이 본질적으로 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아시아에서 가장 인문학적 자질이 풍부한
한국 영화 예술들인의 또 한 번의 세계 영화계와의 소통,
그리고 지금 영화가에서 관객 순위 1위를 독주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의 물량공세에 맞서서
3대1에도 못 미치는 개봉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밀양'을 진지하게 관람하는 관객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유의미를 느끼고 싶다.
전도연은 ‘내 마음의 풍금’에서 짝사랑하는 총각 선생을 위한
소풍 도시락으로 산닭을 가져가는
순박하지만 용감한 17세 늦깎이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한국 여배우 중에서 누가 또 저렇게 저 역할을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을까하면서 감탄했었다.
외국인이 그 영화를 본다면 실제로 전도연을 시골 출신의 십대 여배우라고 믿을 만한 리얼리티의 구현이었다.
내가 그녀의 연기를 솜사탕처럼 얼굴을 파묻고 먹었던 바로 그 해에
연이어 개봉된 ‘해피엔드’에서 그녀는 자신의 갓난아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정부의 몸에 얼굴을 파묻는 욕정의 가정주부로 태연하게 변신해서
솜사탕이 달콤했던 나의 뒤통수를 쳤었다.
충무로의 주연급 여배우 중에서 가장 평범한 한국 여성에 가까운 외모를 소유한 그녀가
그려내는 한국 여성의 다양한 모습은 시대를 반영하는 한국 영화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산골 소녀,
바람난 가정주부,
사랑에 상처받은 직장여성,
범죄여성,
제주도 해녀,
엘리트 공무원,
가부장적 질서에 갇힌 조선 시대 여인 등의 한국 여성의 다양한 삶이
그녀들의 일반적인 외모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숨겨진 그녀들의 비밀의 빛을 탁월한 감수성으로 드러낸 그녀의 연기력으로
스크린 위에서 당당하게 활보하게 만든 전도연의 연기 인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평범하지만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닮은 제목의 영화
‘비밀의 빛(밀양)’으로 칸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것이다.
내게 더욱 중요한 것은 상업영화의 장르적 특성에 굴복하지 않는
흔치 않은 감독인 이창동 감독이 설계한 영화라는 점이었다.
연출한 작품 숫자가 많지 않지만
연출한 모든 작품을 내가 보게 만든 유일한 감독이 이창동 감독이었다.
난 그가 참여정부의 초대 문광부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안 그래도 느려 보이는 그가 이제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영화를 만들까 하는 걱정을 먼저했을 정도였다.
이창동에게는 삶의 모호하고 회의되는 의미를
팽팽한 내적인 감성으로 현실성 있게 버티어 낼 수 있는 공력 있는 배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전도연에게는 그가 다양한 모습으로 훌륭하게 변주해 왔지만
상업적인 틀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 연기를 넘어서는
진지한 모색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 그들이 만나서 만든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외아들마저 무참하게 살해된 여성이
‘너 이제 어떡할래’하고 묻는 잔인한 세상의 질문에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예상 답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품에서 살래요’이다.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처한 말도 안 되는 억울한 현실을
하나님의 숨겨진 뜻으로 해석하고 순종하는 것만큼
나약한 인간에게 효과적인 도피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서 면회를 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 살인범을 용서하기 전에
이미 그 살인범은 기독교에 입문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용서한 인간을 감히 인간이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녀에게는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처단은 고사하고 용서할 권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살인범은 자신이 살해한 아이와 그 가족들에게 진정한 참회와 용서를 구하기 이전에
기독교에 귀의해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종교가 주는 ‘특권’이다.
(한국 최대의 연쇄 살인범인 광주 학살의 수괴들도 종교에 귀의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창동은 차갑게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했다고 하는 ‘종교는 마약이다’가 아니고
솔직하게 ‘인간이 종교를 마약으로 사용한다’이다.
이창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를 폄하하거나 부정할 의도도 없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는 간판을 통해서 얻은 ‘특권’에
스스로 마약처럼 의지하는 인간들의 정직하지 못한 나약함에
슬그머니 쓴 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기도합시다” ,
“할렐루야”라고 외치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종교를 믿는 신자임을 대내외적으로 표현하고 확인하려는 모습은 안쓰럽다.
그런 말로 된 표현과 형식적 집착 보다는
자신들의 온전한 삶과 실천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을
비신자들이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선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나 자신의 위안과 안식으로 하나님이 사용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약한 인간이 그렇게라도 합당하지 않은 특권에 위안을 삼고 산다면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라고 타인에게도 권유하고 끌어들이는,
아니 무언가 엄청난 깨달음이라도 했다는 듯이 권하는 모습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과거 성경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했던 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종교를 마약처럼 의존할 뿐인 사람들을 활용한
거대한 권력으로 변질되어 사회의 통합과 진보에 저해가 되고 있는 일부 대형 교회가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비단 종교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진보는 무엇인가?
인간이 억압받지 않고 주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다양한 양식의 ‘특권’이라는 괴물을 지워가는 것이다.
“백성은 가난한 것에 분노하기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라는 명제는
권력을 가진 모든 이에게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불공정을 행하는 자기 자신은 그것을 ‘특권’이라고 깨닫지도 못하게 만들 만큼
인간은 특권이 주는 안락함에 취약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 ‘특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진보를 향한 저항이 지금 이 시간에도 치열하다.
기자실 통폐합 문제로 언론사가 시끄럽다. (여론이 시끄러운 것이 아닌!)
“참여정부가 언론 자유를 말살한다”고 대문짝만한 지면에서 자유롭게 외치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말살되고 있는 언론 자유를 위한 고귀한 투쟁이라고 강변하는 코미디가 자행되는 한국 사회이다.
정치 언론의 권력이, 검찰의 권력이, 사학재단의 권력이, 지역주의 정치세력의 권력이
오랜 시간 마약처럼 달콤하게 누려왔던 정당하지 않은
추가적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때로는 그 권력들의 특권과 맞서고 있는 국민이 위임한 합법적인 권력 내부에서도
특권의식을 소유한 자는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이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명확한 정답은 없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비판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흐름을 마냥 거부할 수도 없는 더 큰 현실에 우리는 갇혀있기도 하다.
이후의 각본이 없는 현실이 빚어내는 삶과 세상의 불안정함이
결과를 예상하기 쉽지 않으나
결국에는 확인할 수 있는 스포츠에 인간이 집착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가 알 수 없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밀양’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은 불행에 빠진 신애를
구원하지 못하고 길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은은한 빛처럼 그녀를 감싸 준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아주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모습이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향한 인간의 그 마음만이
암울하지만은 않은 미래를 여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밀양(비밀스러운 빛)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설픈 해석의 오류가 두렵지 않다.
이창동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공존의 화원으로 자신의 영화를 꾸미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관객이 영화를 통해서 관음하듯이 관객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이 사유하는 내면을 관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 장단에 맞추어서 영화 ‘밀양’이 주는 의미의 무거움을 각자 통과하고
극장 밖에서 만나는 비밀의 빛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인간과 신 문제 다룬 수작"
영화 '밀양'의 인기가 좀체 시들지 않는다.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더욱 유명해져 벌써 관객이 120만 명을 넘어섰단다. 하지만 '밀양'에 대한 이런 각광이 마냥 달갑지 않은 쪽이 있다. 기독교계다. '밀양'을 놓고 교계 내부에서 적지 않은 논쟁이 일고 있다. 인간과 신의 문제를 성찰한 수작이라는 평가와, 기독인들의 생뚱맞은 모습을 조롱하는 불쾌한 영화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이창동 영화는 죽어도 관람하지 말자." 개신교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 게시판에 최근 올라온 김모 목사의 주장인데, 그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불신앙 그 자체"라며 노골적으로 '밀양'에 반감을 나타냈다.
그는 또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일반적인 기독교신앙으로 확대되어서 표현됐다는 것이며, 이 영화가 교묘한 것은 전도연(신애)의 처절한 눈물로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무마시켰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이 영화의 초점은 인간의 용서가 먼저이지 하나님의 용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신을 실존적으로 인정한 영화라면 신애는 끝까지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따뜻한 햇볕'을 ID로 쓴 이도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더 증대시킬 영화로 보여졌다. 기독교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신에게만 용서받으면 맘의 평안을 누리는 종교처럼 묘사됐는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며 우려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에 대한 반론도 곧바로 제기됐다. ID가 '광야'라는 이는 "밀양은 기독교를 술안주 거리로, 혹은 개그 대상으로 전락시킨 한국 사회에서 진지하게 신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다룬 영화"라며 "영화 속에 설령 기독교인이 불편한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잘못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 있다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조세형, 김태촌, 조양은 등은 주님을 만났을 때는 죄를 뉘우치고 평안을 얻었을지 몰라도 결국 다시 죄악의 길로 파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원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점이며,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혹은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이요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CBS기독교방송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밀양'에 대한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 강모씨는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할 때 올 수 있는 신앙의 갈등을 잘 묘사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신애의 신앙이나, 주님을 만나고 용서받았으므로 마음 평안하다고 하는 살인자의 신앙은 오늘 우리 기독인들의 잘못된 신앙형태를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는 주장을 펼쳤다.
논쟁은 개신교 선교단체인 문화선교연구원 홈페이지에서도 진행됐다. 기독교영화제 심사위원인 정혁현 목사는 "영화 속 신애는 신이 자신을 배신했다며 복수하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배신한 자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마당에서 스스로 가위를 들고 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 속의 기독인들은 신애와 하느님 사이를 매개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신애와 마찬가지로 미망 속의 군상이다. 그런 한계는 먼저 자인(自認)이라는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돌파할 수 없을 것"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모씨는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결국 진리의 빛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시니컬한 엔딩을 말하고 있다. 영화의 장치들이 일관되게 지향하는 바는 조롱 그 자체였다. 부끄러움도 크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앞선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처럼 '밀양'을 놓고 개신교계 내부에서 논쟁이 확산되자 문화선교연구원 측은 아예 14일 오후 7시 서울 높은뜻숭의교회에서 '밀양, 기독교에 말 걸다'라는 제목으로 포럼을 개최한다.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기독인으로서 '밀양'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선교연구원 임성빈 원장은 "기독교인들로서는 신앙이 온전한 희망으로 제시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영화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교회와 신앙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과 이웃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임 원장은 또 "분명한 점은 '밀양'이 인간의 비극적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는 희망의 가능성을 다룸에 있어 기독교 신앙에 주목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도록 요구한다.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밀양'은 예우를 갖추어 대화를 건네야 할 손님과도 같은 영화다. 신앙인으로서 '확신'의 진정성을 점검하고, 또한 그 확신을 대중들과 나눔에 있어 요구되는 '교양'을 배울 수 있는 계기로 삼자"고 당부했다. 임광명기자 kmyim@busanilbo.com
문화에 대해서는 정말 우주 최고이신 종정님의 추천영화 '밀양'
전도연이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것밖엔
밀양에 대해 난 전혀 몰랐다.
그런데 밀양을 보면서
분명히 이 스토리를 어디서 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 분명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은적이 있었다.
그래서 '밀양 원작'이라고 쳐봤더니
역시나, 이청준 할아버지;의 벌레이야기가 원작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꺼내보니
소설의 엄마는 죽음을 선택했던것 같았는데,
영화는 원작이랑 좀 달랐다. '신애'는 끝까지 살아간다.
(끝인진 모르지만 영화의 끝에선 살아있다)
내가 당시(언제 읽었는지도 기억안난다) 이청준 소설집을 사서 읽을때 ,
그의 문체는 뭔가 무덤덤하면서도 슬프고 그랬다.
특히나, 이 단편을 읽고나서 답답해서 한숨 한번 내쉰듯도 하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작년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영화더군요.
저에겐 작년 최고의 영화가 아니라 한국영화사상 가장 위대하고 묵직하고 중대한 작품 (중 하나 ^^) 이었습니다.
밀양 정말 기억에 남는 훌륭한 영화죠^^ 개인적으로 밀양에 나오시는 약사님(전도연씨와 밀양 유일의 배드신(?)을 하시던..)께서 하시는 식당(술집??)단골인데 이런 저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철저하게 완벽주의적인 감독과 배우의 조화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