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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때 정평구가 하늘을 나는 기구, 비차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격렬한 전쟁이 한참이던 진주성에선
하늘을 나는 낯선 기구가 사람들을 구해냈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기구.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인류는 동력장치가 부착된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특히 1,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비행기의 위력을 실감한 선진 각국은 너도 나도 비행기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성능 좋은 초고속비행기를 보유하는 것이 곧 국가적 과제로 대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상공에 비행기가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1913년입니다.
일본군 나라하라 중위가 몰고 온 비행기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뒤로 일본과 미국이 연달아 시범 비행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도 비행기의 존재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비행기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씌여진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정평구이란 사람이 비차를 만들어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비차가 30리를 날았다."
비차.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구.
그렇다면 이건 비행기가 아닙니까?
이 기록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평구 뿐만 아니라
윤달규란 사람도 비차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고 하고,
이규경은 전해 들은 이 비차의 모양과 구조에 대해서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규경 뿐만 아닙니다.
실학자 신경준도 <여암전서> 중 '책차재'란 대목에 비차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비차를 만든다는 게 가능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떤 모양이었을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 조선시대 비행기,
비차가 그 시대에 과연 실제 존재하고 있었는지 조사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그 첫번째 단계로 이 책의 비차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비차를 만들었다고 하는 인물 중에는
조선시대 진주성 싸움에서 활약한 정평구란 인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는 비차를 이용해 성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냈다고 한다.
그는 과연 실제 인물이었을까?
또 다른 기록을 찾아보기 위해 진주문화원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적은 각종 문헌들과 읍지.
여기에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야사까지 모두 점검했다.
"십여 종의 읍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임진왜란 때 정평구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없습니다."
- 김범수, 진주시 향토사연구소장
진주에서 더 이상 확인이 어려웠다.
이번에는 주변 지역 각 문화원에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단계로 성씨 전문가를 통해 정씨 가문을 수소문 하던 중 김제에서 연락이 왔다.
김제문화원장이자 성씨 전문가인 김병학씨가 정평구를 찾아낸 것이다.
일제시대 정리된 <김제군지> 속에서
정평구가 그의 재간을 이용해 임진왜란에서 쳐들어온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이다.
<김제군지 - '정평구'에 대한 기록>
"그 때 비차를 만들어 포위되었던 것을 비차로 사람들을 밖깥으로 실어냈고
또 비차로 군대들이 먹을 식량을 운반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 외에도 진주성이 무너지고 왜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분이 벌통을 만들어서 왜적을 혼낸 일이라든지,
또 화약통을 만들어서 일본군들을 혼낸 일이라든지 그런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 김병학, 김제시 문화원장
전북 김제시 부량면 제월리 - 정평구 고향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정평구의 이야기가 야사를 통해 전설처럼 내려온다고 말해줬다.
그러나 정작 전설속엔 비차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평구는 정말 비차를 만들었는가?
<군지>를 토대로 정평구의 후손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인규 - 정평구 12대 후손,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
정평구의 후손들은 아직도 김제시에 살았다.
이들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들을 점검했다.
이 족보는 일제시대에 복원한 것으로 후손들이 지금까지 보존해오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로 확인한 것은 바로 유연이란 이름이다.
평구는 호, 그리고 여기엔 비차를 만들어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규경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평구는 남달리 재주가 뛰어난 인물로 기이한 물건을 많이 만들었고
화약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은 이런 특별한 기록을 지닌 정평구의 무덤을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비석에서도 비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그가 비차라는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었다는 내용만 전해질 뿐이다.
비차 발명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왜 족보 이외에 어디에도 남지 않은 것일까?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비차를 본 후손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그 업적을 보고했지만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기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취급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비차를 만들었다는 두 번째 인물 윤달규는 누구일까?
이규경은 그가 노송에 사는 명제의 후손이라고 밝혀 뒀다.
노송에 사는 명제의 후손이라면 17세기에 살았던 윤증을 가리킨다.
윤증은 당시 관념론으로 치닫고 있던 학문의 폐해를 가리키며
성리학 또한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지적한 학자다.
300년이 넘는 그의 고택에는 수많은 족보와 고문서들이 보존되고 있다.
과연 이 고문서 속에서 윤달규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윤민규, 윤달규의 후손
이규경의 기록 속에는 그가 살았던 시기나 활동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조사는 먼저 윤증 후대의 족보를 모두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결국 윤달규를 찾아냈다.
1778년에 태어나 1851년까지 살았던 윤증의 4대손이었다.
동몽교관.
아이들을 가르치는 관리였다.
정평구가 살았던 시기와 윤달규가 살았던 시기는 200여 년의 간격이 있다.
비록 비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분명 이들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것은 조선 시대 한 켠에서 끊임없이 비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 이야기가 100여 년이 흐른 뒤 이규경의 이야기에 나타난 것이다.
2. 건국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옛 기록에 의지해 비차를 제작하기로 하다!~
"정평구와 윤달규는 분명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비차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차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일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차는 어떤 기구였을까요?
이 기록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면 이규경은 전해 들은 비차에 대한 내용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비차를 만들어 네 사람을 태우고
복형 비슷한 풀무를 만들어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켜 떠서
공중에 올라가 백기를 달 수 있기는 했으나
겨우 각풍을 만나도 전진하지 못하고 떨어지며 광풍을 만나면 갈 수가 없다."
이것은 비차가 어떻게 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대목은 이렇습니다.
"이 기술을 모방하려면 하나의 수레를 만들어서 날으는 연처럼 깃과 날개를 달고
그 안에 사람이 타서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는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해서
바람과 기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두 날개가 움직여서 한순간에 천 리를 가는 형세를 짓고
또 줄을 가로, 세로로 엮어서 신축성을 있게 하고
그 비차 안에서 규칙적으로 풀무질을 하여 센 바람을 일으키게 해서 대기 위에 뜰 수 있다면
그 형세는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첫 번째 기록은 원주 사람이 만든 비차에 대한 설명이고
두 번째 기록은 정평구와 윤달규, 원주 사람이 만든 비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종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원해보도록 했습니다.
사실 이 비차를 완벽하게 복원을 하려면 설계도나 비차에 대한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기록 밖에는 없습니다.
조선의 기록에는 이 비차의 설계도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30리를 날았다거나 네 사람을 태웠다는 기록들은
이 비차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으로 지적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비차를 만든 사람들이
한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이 세간의 소문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그런 확신이 섰습니다.
조선시대 비행기. 비차.
이것은 과연 어떤 형태였을까요?"
이제껏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비차 복원을 위해
건국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들로 복원팀이 구성됐다.
설계와 기술적 자문은 우리나라 항공사를 정리하는 전초경량항공기협회장 이원복 교수가 맡았다.
복원팀을 이끌고 실질적인 제작을 맡은 팀장은 윤광준 교수,
그리고 설계 부분에 박훈철 교수가 합류했다.
복원팀은 이규경의 기록을 토대로 설계도에 착수했다.
비행기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설계도다.
그러나 비차는 설계도가 없는 상태라 이 기록을 충실히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규경의 비차변증설에는 비차에 대한 두 가지설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풀무라는 장치로 바람을 일으킨다는 구조만이 설명되어 있다.
또 하나의 대목엔 하늘을 나는 연에 깃과 날개를 달았다는 형태에 대한 묘사가 있다.
또한 날틀이 설치되었고 그 속에 사람이 타서 몸을 굽혔다 폈다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주 사람의 묘사 내용은 그 풀무의 추진력이나 새의 날개짓 같은 바람을 일으키는 형상이 기술 되어 있구요,
그 다음에 이규경이 종합한 내용은 연의 비상 원리나 간단한 수레의 형상을 합해 놓은 형태인데
그래서 저희는 두 가지 형태를 모두 실험해볼 수 있는 그런 모델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 윤광준 교수 복원팀장
설계 방침이 정해진 뒤 건국대 기계공학부 4학년생으로 비차 제작팀이 구성되었다.
지난 12월 첫 번째 회의. 모양과 크기를 결정해야 했다.
비차의 모양은 날으는 연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이라는 글자는 솔개라는 새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새의 모양이 비차의 기본 형태일 것이다.
연에 깃과 날개를 달았다는 기록 역시 새의 모양을 연상케 한다.
이를 토대로 부채꼴 모양의 기본형을 만들어냈다.
기록에는 여기에 사람이 탈 수 있는 틀이 설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물들은 모두 줄로 연결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어떤 형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날틀을 설치하고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줄을 가로, 세로 연결해 신축한다"
복원팀은 먼저 기본형에 날틀을 부착해보기로 했다.
날틀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설치된 위치 등은 언급된 기록이 없어 여러가지로 예측해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양 날개를 줄로 잇고 조종사가 이 줄을 조정하도록 만들어
양쪽에 날개가 움직이는 예측도를 만들어 냈다.
"현대 항공기의 경우도 구조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줄로 모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로줄의 경우에는 당겨서 날개틀을 할 수도 있고,
그대로 당기지 않을 경우, 양력을 많이 받을 경우
구조가 위로 접힐 가능성이 있는데 그 접히는 걸 막아줬을 것입니다."
- 윤광준 교수
이 예측도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이 기록이다.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면
바람이 생기고...
두 날개가 난다"
사람이 헤엄치듯 움직여 바람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바로 양 날개를 줄로 조정했다는 풀이가 된다.
이것은 곧 날개 치는 비행, 마치 새가 날아가듯이 움직이는 비행이다.
인류의 비행의 첫번째 상상도 역시 이런 비행이었다.
"원래 인류가 처음 비행하고자 할 때 새를 모방했다고 생각됩니다.
레오나르노 다빈치가 남겨놓은 스케치를 보더라도 새의 날개짓을 그려 놓았는데
이 비차도 역시 우리 조상들이 새 날으는 모양을 보고 그대로 모방해서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원복 교수, 건국대 항공우주학과 자문교수
다음은 비차의 크기를 결정해야 한다.
전체 크기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날개의 크기다.
기체와 조종사의 무게를 견디며 바람을 잘 받는 가장 적합한 크기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크기에 대한 기록은 사람이 탔다는 것 밖에는 없다.
복원팀은 사람이 타고 날았다는 큰 연의 크기를 검토해 보기로 했다.
"사람이 타고 날았다는 것은 아마도 방패연일 겁니다.
가장 바람도 많이 받고 또 조종하기도 편하니까.
그래서 그 크기를 말한다면 가로 5미터와 세로 7미터 정도 되면 충분히 사람을 실어 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비차는 새 모양이기 때문에 새 모양에서 날개폭은 적어도 8미터 정도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 강범구, 한국 민속연 보존회 교육국장
연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비차의 길이는 8미터로 정해졌다.
이것으로 기본형 설계는 완성됐다.
이제 복원팀은 기록이 되지 않는 장치들을 다각도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네 가지 형태의 모형비행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날틀의 형태와 크기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여러가지 형태로 보완되었다.
최종 모델을 결정하기까지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었다.
3. 비차의 원리, 날으는 연처럼 하늘을 날고!~
"이것이 기본 설계를 응용으로 해서 만든 모형 비차들입니다.
이 기본적인 형태들은 기록에 충실히 따랐지만
설계도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은 예측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는 자리, 조종석을 마차의 형태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또 조종사의 안전을 위해서 지지대를 여러 개 배치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치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비행을 하는 데는 부담이 됩니다.
비행기는 가벼워야 기본적으로 잘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비차를 만든 사람들도 이 비차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볍다고 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비행의 원리를 알고 그것을 토대로 하늘을 날아야만 날 수가 있는 것이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구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힘, 곧 중력입니다.
이 중력을 누르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힘을 양력이라고 합니다.
이 양력을 중력보다 세게 할 수 있다면 인간도 하늘을 날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맞바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현대 초고속비행기도 이 맞바람을 이용하면 쉽게 이륙할 수도 있고 또 연료도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비차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이 원리를 알고 있었을까요?
비차는 어떤 원리로 하늘을 날았을까요?"
바람을 이용해 하늘을 날려면 먼저 날개가 바람을 모아줄 수 있어야 한다.
날개와 비차 몸체의 구조가 이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비차는 어떻게 바람을 이용했을까?
복원팀은 그 방법을 이 기록에서 찾았다.
"날으는 연처럼
두 날개를 달고"
"문헌에 보면 연에다가 날개를 달아 날틀을 만들었다는 거죠,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연하고 비차하고는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같은 동적인 양력을 얻어서 뜨는 그런 기구를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에
비차가 연의 원리와 매우 비슷한 원리로 비행을 했을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 이원복 교수
길이가 10미터 이상 되는 연을 하늘에 떠 올리는 것은 양 날개와 몸체를 가는 줄로 연결하고
각각의 줄의 길이를 조정하여 무게 중심을 완벽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을 오래 가장 잘 날게 하는 방법, 무게 중심을 잡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목줄의 중심을 가운데로 하면 뜨질 않죠. 또 위로 했다면 바람을 못 받고요.
목줄의 중심을 아래로 하면, 무게 중심을 아래로 하면 가장 좋죠.
바람을 가장 유리하게 받고 또 안정성도 있는 지점이 어디냐 하는 것은 연의 대한 경험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 강범구, 한국 민속연 보존회 교육국장
30년 동안 연을 만들고 경험한 전문가도 무게 중심을 잡는 법은 경험에 의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6세기에 비차를 만든 정평구는 이런 원리를 알고 있었을까?
연의 역사는 대략 1,300여 년.
신라 진덕여왕 때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연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이 정도면 정평구 역시 연의 원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차 복원팀은 연의 원리를 적용시키기 위해 연전문가의 자문을 받기로 했다.
비차의 무게 중심을 잡는 문제와 상승 기류를 받았을 때
좀더 오래 날 수 있도록 날개와 몸체의 구조틀을 상의했다.
이 과정에서 비차 복원팀은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지지대의 수와 위치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재료를 알아내야 했다.
재료의 강도를 확인한 뒤에야
날틀과 조종사의 무게를 지탱할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비차 날개를 이루는 천은 어떤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기록에는 이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전혀 없다.
하지만 날개는 바람을 모아줘야 하기 때문에 촘촘하고 가벼운 천을 사용해야 한다.
조선시대 가장 많이 사용된 천은 비단, 삼베, 광목이다.
복원팀은 이 중에서 광목을 재료로 선택했다.
돛배의 재료가 광목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많이 사용하는 돛배에서도 사용하였다면 여기서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음은 비차의 골격을 이루는 재료 검토에 들어갔다.
강한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조종사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 당시의 비행기가 날개를 쳐서 비행을 했다고 했습니다.
날개를 칠려면 날개 골조 자체가 굉장히 유연성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럴려면 대나무가 가장 적합하고,
또 그 당시에 진주 지역이 대나무 생산지였기 때문에 대나무를 쓰지 않았겠나 추측한 겁니다."
- 이원복 교수
검토 결과 탄력성은 대나무가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 강도는 얼마나 되는지 실험에 들어갔다.
조선시대 골재 재료로 많이 쓰인 소나무는 5.5킬로그램의 힘을 받자 부러졌다.
참나무 역시 가구를 만들데 많이 사용하는 재료다.
참나무는 7킬로그램의 무게에서 부러졌다.
그러나 대나무는 참나무보다 두 배 이상의 무게를 견뎌냈다.
복원팀은 탄력성과 강도가 월등히 좋은 대나무를 재료로 확정했다.
이제 비차의 형태는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크기 또한 예상치가 정해졌다.
기록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연결 지지대는
재료의 검토 결과와 연의 구조를 참고로 설정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단 하나 비차의 추진 장치의 열쇠를 푸는 일이다.
복형으로 풀무를 만들고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켰다는
비차의 추진 장치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기록을 보면 비차는 단순히 바람을 이용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 비차의 기록을 보면
풀무와 같은 장치가 있어 이것이 공기를 일으켜 비차를 날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풀무와 같은 장치는 비차의 추진 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 그림을 한 번 보시죠.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풀무질을 하는 소년이 있습니다.
이 풀무질은 주로 대장간에서 하는 장치인데
펌프질 하듯이 피스톤을 움직여 바람을 나오게 하는 그런 장치입니다.
자, 이쪽 그림을 한 번 더 보시죠.
이 그림에는 좀더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손이 아니라 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풀무가 있었는데
주로 일반 서민들이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차 복원팀은 이 부분에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풀무의 원리를 이용해서 비차를 날게 하는 추진력을 내는 추진 장치는 어떤 형태였으며
또 어떤 원리로 이것을 비차에 장착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규경이 종합한 이 기록들을 보면,
이 비차는 단순히 풀무질의 원리로 날게 한 것이 아니라
양 날개를 움직여서 얻어지는 풍력에다가
자연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다 동원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 과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한국민속촌.
추진 장치를 검토하기에 앞서 보다 자세한 풀무의 원리를 점검했다.
풀무는 피스톤과 같은 장치를 밀고 당기면서 바람을 내는 도구다.
이것이 비차에 이용되었다면 풀무의 원리로 내는 바람을 추진 장치로 사용했다는 말이 된다.
"풀무의 원래 목적은 대장간이나 일반 집에서도 아궁이에 바람을 넣어서 불이 잘 피워나게 하는 그런 원리인데
이것을 거꾸로 사용을 해가지고 풀무에 바람이 나오는 그 힘을 이용해서 비차에 어디에 부착을 하면
그 비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하지 않았을까 판단이 됩니다."
- 윤광준 교수
이 장치가 실제 비행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비차 무게를 들어 올릴 만큼의 강한 바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도대체 이 장치는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을까?
기록에는 곡형으로 만들어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다.
"풀무를
곡형 비슷하게 만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여기 기록에는 배를 두들겨서 풀무질을 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로 봐서는 기계 장치가 별로 없고 인력으로 풀무질을 했다고 해석이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인력으로 그 많은 공기량을 분출할 방법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 이원복 교수
별도의 기계 장치없이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풀무라면 그것은 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복원팀은 배를 두들겨라는 기록대로 모형 풀무를 만들어 실험에 들어갔다.
이것은 고작 종이가루를 날릴 정도에 불과했다.
"비행기 무게나 사람 무게보다 일시에 더 많이 분출할 수만 있다면 비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력이 하는 풀무질 가지고는 사람의 힘이 연속적으로 낼 수 있는 게 2/10마력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힘 갖고는 도저히 그 막대한 양을 만들어서 분출할 방법이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것은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추측됩니다."
- 이원복 교수
추진 장치의 가능성이 풀리지 않자 복원팀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만약 풀무가 일으키는 바람이 더운 공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커다란 공기주머니에 더운 공기를 불어 넣어 하늘을 나는
열기구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대장간에서 풀무를 사용하는 것처럼 풀무를 이용해
불을 지피고 그 더운 공기를 아래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려 보낸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비차에 대한 기록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는 상태다.
"원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 비차가
열기구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은 됩니다.
왜냐면 풀무질을 숯 같은 걸 이용해 열을 발생시키고
그 열로 공기를 뎁혀서 오늘날의 열기구처럼 공중으로 띄워 올릴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 문헌으로 봐서는 커다란 공기주머니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헌에서는 새모양으로 만들어 날개를 쳤다든지,
풀무질을 해서 큰 기운을 아래로 내서 떴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그건 동적인 풍향을 이용했다는 말이지,
열기구 같이 공기보다 가벼운 장치로 만들어 띄웠다는 이야긴 없습니다."
- 이원복 교수
인력으로 움직이는 풀무 추진 장치는 비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열기구 형태로 단정짓기엔 기록이 부족하다.
따라서 복원팀은 추진 장치를 제외하고
바람과 조종사의 힘으로 비행하는 비차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비차 복원팀은 두 달간의 설계를 끝내고 실물 제작에 들어갔다.
비차 제작 중 나무와 나무를 잇는 부분은
황포돛배 기술보유자인 이봉수씨의 자문을 받아 전통 매듭 기법을 사용했다.
돛배는 이미 조선초부터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어서
정평구나 윤달구 역시 이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껏 대나무와 광목천으로 만들어진 비행기는 없었다.
복원팀은 날개를 지탱하는 지지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수차례 부러지는 과정을 거치며 날틀의 크기와 형태를 조절해 나갔다.
드디어 비차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4. 복원팀의 비차, 드디어 하늘을 날다!~
"우리는 지난 3개월간에 거쳐서 비차 복원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비행기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설계도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록과 당시 기술 수준을 고려하여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복원팀이 완성한 비차입니다.
우리는 이 형태를 최종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풀무의 원리를 이용한 추진 장치는 제외시키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면 이 기록만 가지고는 풀무를 추진 장치로 이용하는 방법을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좀더 상세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해석해낼 수 있다면
이 비차의 형태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복원팀은 추진 장치로 바람을 일으키는 원리 대신
기록에 있어서에 두 번째 경우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바람을 일으켜서 비행을 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과연 이 비차는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이 복원팀은 실험을 하기에 앞서 지형을 물색하던 중
정평구가 진주성에서 비차로 30리를 날았다는 대목에 주목을 했습니다.
자, 여기 지도를 한 번 보시죠.
이 지도를 보면 진주성 앞에 남강이 흐르고 있어서
이 남강의 강바람이 진주성의 성벽과 맞부딪히면서 강한 상승풍을 일으키는 곳입니다.
또 이 진주성 주변에는 낮은 구릉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바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비행하기에는 아주 최적의 조건입니다.
복원팀은 이 진주성과 같은 조건을 가진 지형을 골라서 비행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시대의 비차, 과연 비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비차 복원팀은 서울 시내에서 진주성과 가장 비슷한 조건을 가진 몽촌토성을 비행 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낮은 구릉 지대가 있는데다가 한강의 바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의 실험 비행에는 늘 위험이 뒤따른다.
이에 대비해 이번 비행은 경력 20년의 스턴트맨이 맡았다.
1차 시도.
드디어 모든 비행 준비가 끝났다.
복원팀은 바람이 최적일 때를 기다려 시험 비행에 들어갔다.
2차 시도.
두 번의 시도 모두 이륙하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3차 시도 실패.
옛날 정평구나 윤달규의 비차가 분명 하늘을 날았다면 그들 역시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스턴트맨 - "올라타면 내려 앉더라구요."
설계팀은 우선 비차를 조종하는 방법이 익숙치 않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와 함께 이를 점검했다.
네 번째 시험 비행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비차가 옆으로 기울면서 왼쪽 날개 한쪽이 부러지고 말았다.
복원팀은 이런 사태에 대비해 마련해둔 또 하나의 비차를 긴급히 조립했다.
계속 되는 실패와 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비차는 완성 되어질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이루어지는 비행 실험은 행글라이더 전문가에게 조정을 의뢰했다.
바람을 이용하는데는 행글라이더와 비차가 유사한 점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몇 번의 연습 끝에 비창의 앞부분이 자꾸 가라앉아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평을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니구요.
안쪽의 공기가 차야 비행이 가능하겠지요.
비행기는 안쪽의 공기가 안차도 압력때문에 날을 수 있는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행글라이더는 압력도 작용하지만 공기의 질량으로도 차이가 나니까요. "
- 김주진, 행글라이더 전문가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지
조종석 뒷부분에 10킬로그램의 모레주머니를 달고
날려보면서 상태를 점검해보기로 했다.
비차는 가라앉지 않고 30미터 이상을 낮게 날았다.
이것은 비차의 조종석이 잘못 설치 되었음을 의미한다.
상승풍을 만났을 때 날아오를 수 있는 무게 중심점이 너무 앞으로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평구와 윤달규가 하늘을 날았다면 이렇게 경험적으로 무게 중심을 잡아내지 않았을까?
비차복원팀은 이 실험을 토대로 무게 중심을 뒤로 옮겨 다시 제작하기로 했다.
이번엔 날개 크기도 8미터에서 10미터로 좀더 크게 늘려 바람 이용도를 늘였다.
이번 시험 비행은 행글라이더 전문 비행 연습장으로 옮겨 진행되었다.
날개는 창호지가 덧씌워졌다.
바람을 모아주는 더 촘촘한 재료가 필요하다는 판단때문이다.
첫번째 실험은 여전히 실패였지만
지난번 비차보다 비행 가능성은 훨씬 높아졌음을 확인했다.
다음 시험은 20미터 높이에서 진행했다.
비차는 비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비차는 드디어 비행에 성공했다.
고도 20미터의 높이에서 70미터를 날아갔다.
연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양력을 이용해 날아가는 비행기였다.
"현대 행글라이더의 경우 사람이 비행체에 매달려 있는 반면,
비차는 사람이 매달려 있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현대 행글라이더의 경우 비행기가 뜨는 양력의 원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비차는 오히려 연이 뜨는 원리를 이용해서 비행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윤광준 교수
조선시대의 비차,
그것 역시 연의 원리를 이용한 비차였을 것이다.
5. 18세기 실사구시의 실학은 비차의 기록을 남기지만...
세도 정치, 집권층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꺼리고~~
"자, 이것이 우리가 실험 비행을 한 결과 최종적으로 얻은 비차입니다.
특별한 추진 장치가 없이
연이 하늘을 나는 원리를 응용한 고전적인 형태의 행글라이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행 실험 결과 이 비차는 20미터 높이에서 70미터를 날았습니다.
이것을 현대의 활공 거리 측정에 따르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진주성과 같은 60미터 높이에서는 200미터를 날아서 남강을 건널 수 있는 그런 수준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종류의 추진 장치가 가미가 되었다면 비차 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밝혀내지 못해서, 추진 장치를 밝혀내는 일은 또 다른 숙제로 남겨 두도록 했습니다.
추진 장치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이 비차의 크기나 모양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추진 장치에 따라 비행 원리도 달라지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비차가 존재했고
그 비차가 하늘을 비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걸까요?
비차를 계속 발전시키지 못한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8세기 조선은 분명 그 이전과 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과학 기기들과 새로운 사상이 전해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에 유용한 학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실학이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낳았다.
역학과 기기 장치를 설명한 <기기도서>를 통해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낸 것도 이 중 하나다.
거중기는 정조의 개혁 정치의 하나인 수원 화성 건설에 사용되어
공사 기간과 비용을 절약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과학 기술이 실생활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입증시켜 준 것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여러 실학자를 배출한 곳이 바로 규장각이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학문을 다져 나갔다.
서자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까지 오른 이덕무도 이때 활동한 인물이다.
연행사로 청나라를 오가며 서양문물을 접하고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뜬 이덕무의 실학 정신은 곧 손자 이규경에게 이어진다.
비차가 영원히 전설 속에 묻히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실학이 있었던 것이다.
비차는
실학자들의 정신이 얼마나 폭넓고 다양했는지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비차 변증설을 남긴 이규경은
할아버지를 통해 실사구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실학자였다.
그는 6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백과사전식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집필함으로써
그의 관심이 학문의 모든 분야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수집한 자료를 단순히 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변증설'이란 이름을 붙여 고증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역사라든가 지리, 천문, 병법, 의학, 농업, 화폐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책이 1,417 항목에 달하는 모든 부분을
변증설을 통해 저자가 철저히 고증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학문을 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에서 펴려고 하는 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 신병주, 규장각 학예연구사
이러한 이규경의 실학 학풍은
자연과학과 과학기술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부록인 <오주서총>에
총포와 화포 등 여러 과학기술을 소개하면서 일일이 그림을 그려 원리를 밝혀 두고 있다.
기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규경은 이 책에서 자신이 비차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의도였다고 밝히고 있다.
명분 뿐인 성리학보다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과학 정신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경 고향 - 충북 제천시 덕산면 신흥리.
이규경은 생존에 아무런 관직도 얻지 못했고
그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과학 기술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국 강병을 이루려고 했던 이규경의 노력은
19세기 중엽 세도 정치로 혼란이 가중되던 조선 사회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규경이 살았던 시대는
세도 정치기라고 불리는 정치 형태로 특정 지어집니다.
이 세도 정치기라는 것은
권력이 소수 외척 가문에 집중되는 것으로,
이규경과 같은 선구자들의 학문과 사상이
수용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차단되어 있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 있어
조선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기 보다는
서양의 기술을 경계하고
서양의 군사적인 힘이 가져올 파급 효과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는 자세가 상당히 팽배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규경과 같은 실학자들이 축적해놓은
실용 정신, 과학 정신의 성과가 제대로 계승될 수 없었습니다."
- 신병주 학예연구사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정평구의 비차는 윤달규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실학 시대, 이규경에 의해 남겨졌다.
그러나 실학이 추구한 그 실사구시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비차는 우리에게서 잊혀져 갔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들에서 수많은 비행 실험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20세기초 라이트 형제에 의해서 비행기가 만들어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때 조선에 살고 있었던 학자 이규경과 신경준 역시 비차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 기록 덕분에 우리는 비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에 살았던 정평구,
18세기의 윤달규,
19세기의 이규경과 신경준까지 300년간 이어진 조선 시대의 비차.
그것은 과학 기술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실학자들의 꿈과 정신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김치가 최고다!!
이딴거 없어도 레드불만 마시면 하늘을 날수있음.
대신 다음날은 지하벙커에서 잠적해야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레드불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