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였다.
추석이 지나 동네 길가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맑은 초가을 날.
그날도 연년생 동생과 집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다.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이었으니 쉬운 가곡이었을까?
나름 화음을 넣어 이중창으로 곧잘 불렀던
<희망의 속삭임>이었을까.
심심한 이웃의 중학생 민도 오빠가 우리 곁으로 걸어 왔다.
민도 오빠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어서인지
극성스러운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듯 했다.
민도 오빠가 우리의 노래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 내가 노래 가르쳐줄까?
- 무슨 노래?
- 그지밥.
- 그지밥?
- 응. 학교에서 배웠어.
- 에이, 그런 노래가 어딨어?
- 있어. 좋아. 들어볼래?
나는 각설이타령과 비슷하거나 파생된 곡조이겠거니 짐작하고는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턱을 내밀며 비꼬듯 대꾸했다.
- 그래, 한번 해 봐.
민도 오빠는 진중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동생과 나는 경청했다.
오가며 그지바플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_ 알았다. 그지밥이 아니네..... 깔깔깔..... 그 집 앞 이라는 거지? 깔깔깔...
민도 오빠도 웃었다.
- 그지밥으로 들은 거야?
- 어, 거지 밥 노랜 줄 알았어. 깔깔깔...
민도 오빠가 선창을 하면 동생과 내가 1절은 따라 불렀던 것 같다,
민도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쪽으로 사라졌고
오며 가며 마주쳤는지 아닌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후 <그 집 앞>을 들을 때면 변성기에 접어든 까까머리 중학생의
투박한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르지만 덕분에 임팩트한 애창곡이 되고말았다.
한 남자의 짝사랑인지 옛사랑의 회한인지 모를 서정적인 가사와
애조 띤 멜로디는 오랜 세월 동안 숙성된 한 잔의 술 같달까.
#그지밥 #그집앞 #가곡 # 이은상 # 현제명
첫댓글 비가 주룩주룩 내리네요.
보리밥으로 친구와 점심 때우고 컴터로 카페들어와 봤어용.
예쁜 코스모스와 선생님의 글 읽고 "그지밥"을 불러봅니다.
잘 계시죠?
옛추억을 떠올리며 그시절 작품들도 감상해 봅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운 실이랑님, 오래 전 그곳도 그립습니다.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나올듯한 사연이예요. 단편영화름 감상한 기분입니다^^
CBS 아당 게시판에 함 써보까?^^
@Sera 신청곡은 그집앞으로 하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