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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과 소서노, 허깨비 사랑] 내용중
연타발과 소서노 이야기에 가장 근접한 기록으로 매우 일관성있게 여러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은 ‘부여의 왕 또는 부여의 왕자가 공손도(公孫度 : ? ~ 204)의 딸과 결혼하여 요동 만주 일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내용이다.
『北史』에는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 한다. (『北史』卷94 「百濟」).”고 적고 있다.
『수서(隋書)』의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기록 모두 부여왕의 후손인 구태(仇台)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문제는 그 시기가 AD 2세기말~3세기 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구태라는 분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는 AD 120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왕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 『後漢書』卷115). 이 기록들에서 나오는 위구태가 바로 구태인 듯 보이지만 활동 시기가 맞지 않아서, 위구태는 (구태와는 분명 관계가 있는 사람이지만) 구태는 아니다. 부여계의 왕 이름들은 비슷한 경우가 많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 백제는 없었다 참고).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와 『북사』의 기록을 보면 공손도는 구태와 함께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요동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AD 190년경에는 이들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공손도전『三國志』「魏書」公孫度傳 ). 이 때 한나라는 동탁(董卓 : ? ~192)의 집권 시기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울구태라는 분이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하는 구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태 또는 구태는 다른 왕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이름으로 사용할 때는 울구태가 정확하다. 물론 민족 시조 가운데 한 분의 휘(諱)를 함부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정확한 성을 알기가 어려우므로 ‘부여왕 울구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분이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의 시조이다.
부여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책이 없어서 부여왕의 계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가 승계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진수의『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① 공손연(公孫延) … ② 공손도(公孫度 : ?~204) … ③ 공손강(公孫康 : 204~) … 공손공(公孫恭) … ④ 공손연(公孫淵 : ?~238)
그러면 공손도의 가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요동 반도를 장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요동반도의 지배자인 공손역(公孫□)과 공손도의 아버지 공손연이 종씨(宗氏)라는 데 있다. 공손역과 공손연은 동성(同姓)이지만 직계 가족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공손연(公孫延)은 세력가(勢力家)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주] □은 王 + 或) 공손역의 아들 이름은 공손표(公孫豹)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공손도(公孫度)의 어릴 때 이름이 공손표(公孫豹)였기 때문에 공손역은 공손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했다고 한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즉 공손도는 공손역의 양아들인 셈인데 공손역의 후광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후일에 요동태수가 된다.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는 시기는 동탁(董卓 : ?~192)의 집권 시기에 해당한다. 즉 AD 190년을 전후로 공손도(公孫度)는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삼국지』의 영웅이자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는 그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하지만 요동반도는 중국의 중앙정부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정부에 가까운 상태였다.
조조(曹操 : 155~220 : 위나라 무제)의 집권기(후한 헌제)에는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은 『후한서』나 『삼국지』에 그대로 나오고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라고 한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구태는 바로 부여왕(扶餘王) 울구태(蔚仇台)이며 소서노의 부군(夫君)이 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이 분은 현직 부여왕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에서는 일 개 상단의 행수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중원 천하를 제패하려고 했던 공손도를 약삭바른 장사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도라고 하니 독자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다. 바로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버지요 공손연(公孫淵 : ?~238)의 할아버지인 인물이다. 공손강은 관도대전(200)에서 대패한 원소(袁紹 : ?~202)의 아들 원희(袁熙 : ?~207)와 원상(袁尙 : ?~207)이 피신해왔을 때 이들의 목을 베어(207) 조조에게 보낸 그 사람이다.
대부분의 경우 공손씨는 한족(漢族) 계열로 보고 있으며 연나라 왕실을 구성한 가문이기 때문에 드라마 ‘주몽’에서 공손도를 일개 상단으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중대한 실수이자 앞으로 뒷감당하기가 매우 힘든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소서노와 주몽의 결혼이라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진다. 이 기록상에 나타난 등장인물 가운데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은 AD 2세기 인물인 우태(울구태)와 소서노인데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AD 2세기 후반 ~ AD 3세기 초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3세기 쯤에 이르면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중원의 강력한 지배자인 위나라와 일전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태(優台,于台)는 원래 부족의 우두머리 의미였는데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관직명으로 부여,고구려에서 사용됨]
당시 고구려의 세력 변화 과정을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이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서(漢書)』에는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한서 권99 왕망전 시국4년『漢書』卷99 「王莽傳」始國四年).” 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가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 때가 BC 1세기말이다. 또 같은 기록에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 '예맥'을 사용하고 있다.
『후한서』에는 “(AD 118년) 고구려 왕이 마한과 예맥 등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왕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후한(後漢)의 주군 군사들과 함께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다(『後漢書』卷115).”라고 하는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AD 238년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가 공손강?공손연를 정벌할 당시 고구려는 사마의?관구검의 위나라 군대와 공조하여 공손씨(연나라)를 멸망시켰다. 238년 당시 공손강(공손도의 아들)?공손연 부자와 그의 혈족 대부분 참수당했다.
연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는 신속히 요동으로 진출하여 자주 위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AD 242년 고구려 동천왕은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위나라와 대치하고 한반도 남부지역도 경략한다. 이것이 결국 위나라 - 고구려의 요동전쟁(AD 246)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는 한때 수도가 함락당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했으나 밀우, 유옥구, 유유 등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한족(漢族)의 위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수도를 탈환하였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川王).
당시 위나라 군대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굳건히 대치함으로서 한족(漢族)의 침략으로부터 요동과 만주를 보호했던 것이다.
[백제 고이왕, 우태]
한국에서 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흔히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79쪽].” 라고 배워왔을 것이다. 위의 서술은 한국 사학계가 말하는 일반적인 성과를 모아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AD 3세기 중엽 백제는 고이왕 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체제 정비가 있었으며 바로 구이(仇台 ) 또는 구태(仇台)라는 분 즉 부여왕 울구태(우태)가 백제를 건설한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드라마 ‘주몽’의 우태이다.
(*주 台는 '태', '대', '이'로 읽을 수 있다.)
백제의 왕실 계보를 보더라도 무언가 심각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백제는 ① 온조왕 - ② 다루왕 - ③ 기루왕 - ④ 개루왕(128~166) - ⑤ 초고왕(166~214) - ⑥ 구수왕 - ⑦ 사반왕 - ⑧ 고이왕(236~286)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고이왕의 경우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다. 즉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 ④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166~214)의 아우로 한참 올라가 버린다. 그러면 고이왕의 수명이 거의 1백 50살은 되어야 한다. 심각한 정치변화가 백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2권 참고).
그런데 고이왕의 즉위원년(236)은 위나라 황제 조예가 공손연의 토벌을 명한 해이고 그 이듬해(237) 위나라 명장 관구검(?丘儉 : ? ~255)은 요동 입구인 요수로 출병했으나 가을장마 때문에 부득이 철군했다가 238년 사마의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공손연을 토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 인사 또는 장수들을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한다. 이로써 공손연의 사돈인 요동부여(남부여)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손씨와 결혼동맹을 맺은 부여왕 울구태 세력은 요동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울구태(蔚仇台)의 남부여(요동부여)는 미래를 대비하여 상당한 세력이 2십년 이상 한반도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AD 228[?]년 연나라 내부의 정변도 있어 이것도 부여계의 이동을 촉진했을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압록강 하구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南下)에는 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이왕대(236~286)에는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부여에서 시행되던 많은 제도들이 반도부여에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百濟)는 사실은 부여의 분국(分國), 남부여(南扶餘)라는 것이다.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東明王)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옛 정의를 돈독히 존중 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있다(『삼국사기』).
더욱 중요한 점은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三國志)』등을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온다. 즉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다.
중국 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5세기 중반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인데 여기서 말하는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이다. 그리고 이 『송서(宋書)』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한다. 따라서 적어도 AD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뀐다. 실제로 백제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1백년도 채 안된다는 말이다.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같다는 말이고 다만 그 중시조(中始祖)는 울구태(蔚仇台)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다. 후일 이들이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의 실체이다. 이것을 확인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제사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사중월(四仲月: 2, 5, 8, 11)에 왕이 하늘과 5제(五帝)의 신을 제사한다. 그 시조 구태(仇台 : 또는 우태)의 묘(廟)를 나라의 도성(都城)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한다고 하였다[생각건대 『해동고기(海東古記)』에는 시조 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 또는 우이)라 하였으며, 『북사(北史)』 및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손으로 구이(仇台)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대방(帶方)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조를 구태(仇台 또는 구이)라 하였다.](『三國史記』雜志 祭祀)”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다른 것은 혼돈스럽지만 백제의 시조가 동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백제는 부여와 다르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다(이 점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도 고씨 부여라고해도 될 것이다). 그러면서 동명왕에 대한 제사와 부여왕 울구태(구태 또는 우태)에 대한 제사는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잡지 제사조에 보면, 백제의 경우 대개 동명제를 왕의 즉위시 처음으로 맞는 새해 정월에 지내는데 이것은 태양신(조국신 :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실질적인 시조인 구태제는 1년에 네 번을 지내고 있다.
출처; 김운회(동양대 교수) 블로그 "역사카페"(다음)
참고 : 졸저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제 2 권
16. 백제는 없었다.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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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와 공손도], [발기와 공손도]
[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게시판 정성일 (2007-03-19 16:53:23, Hit : 1243, Vote : 54)
북사와 수서에 의하면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구태는 누구인지 추적해야 겠습니다.
'구태'왕을 알려면 '공손도'를 알아야 합니다.
삼국지 '공손도'전을 읽어도 '구태'라는 사람이 없는데 북사와 수서의 내용이 잘못 된 것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고국천왕, 산상왕시기의 '발기'라는 사람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국천왕, 산상왕 시기의 '발기'는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야 할 적장자이면서도 불초하다는 사유로 왕위을 잇지 못하고 동생들에게 왕위를 빼앗깁니다.
두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긴 불초한 사유란 구태와 발기가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공손도는 부산의 적(부여)을 공격하여 몰아내는데 부여가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은 공손도의 사위인 '발기'가 그 땅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발기가 고구려와의 싸움에 패하고도 비류수 강가에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역학관계 때문입니다.
고국천왕 사후 동생 연우가 산상왕에 즉위하자 '발기'가 공손도에게 병사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쳐들어 가지만 패하고 왕의 동생 '계수'가 왕을 죽이지 않고 자살하도록 하지만 '발기'는 자살하지 않고 공손도의 배려로 대방고지로 이동합니다.
후한서의 '부여'왕이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왕의 선조라는 말이 없습니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기의 발기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분명이 다른 것으로 삼국사기는 적고 있습니다. 산상왕 즉위년 발기는 공손도에게 병사3만을 빌려 고구려을 침입해 동생 계수에게 패배해 배천에서 자살하고 발기가 자살하자 계수가 슬피 울고 시체를 묻어 주었다는 내용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서 대로만 해석해서는 진실을 발견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의 주 관점은 '공손도'와 '구태', '공손도'와 '발기'가 유사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네티즌 자유게시판에 게시하였으니 참고하시고, 끝으로 안파견ㅋ님의 의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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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노가(涓奴加)와 소수맥(小水貊); 발기와 공손강】
개국 2530(197)년 5월, 고려는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제위 계승 다툼으로 큰 내란에 휩싸인다.
1-a. (故國川王)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故國川王)
(고국천왕) 19년, 서토가 대란하여, 많은 토인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에) 귀순하여 왔는데,
이 때가 서토 유한국주 협 건안 2년이다. 5월 여름에 왕이 붕어하다.
1-b. 山上王, 諱延優(一名 位宮), 故國川王之弟也.... 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至翌日
質明, 矯先王命, 令群臣, 立延優爲王. 發岐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
發岐者. 發岐知難, 以妻子奔遼東.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山上王)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일명 위궁)요,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왕후 우씨는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이튿날 날이 샐 무렵 선대왕의 유명이라 속여, 군신으로 하여금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는 (연우가 거짓 유명으로 제위에 올랐음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들로 왕궁을 에워쌌다.... 연우는 3일동안이나 궁문을 닫아 지켰고, 국인들도 발기를 따르지
않으니, 발기는 자신의 처지가 어려움을 깨달고, 처자를 데리고 요동으로 도망하였다.
이 발기의 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산상태왕 원년에 일어나, 개전 초기 발기의 친위군이 국내성을 3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하는등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또 다른 아우 계수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점차 진압 되어 갔으며, 발기는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한다.
2-c.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建安中,.. 拔奇怨爲
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신대왕) 백고가 죽으니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발기요, 소자는 이이모라 했다. 장자 발기가
불초하니 국인들은 이이모를 공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건안 중에.... 발기는 형으로써 제위에
오르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가와 더불어 각각 장수와 하호 삼만여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투항하고, 비류수에 돌아와 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발기의 반란에 가담 했던 연노가涓奴加(통전에서는 소노가消奴加)를 주목하게 된다.
연노가는 연노부의 커칸(大加=大韓)으로 수장(王.侯)을 의미하며, 연노부는 고려를 구성하는 5개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이다.
3-d.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삼국지 위서 부여전 三國志 魏書 夫餘傳)
공손도가 해동을 점거하고 그 새력을 넓히자, 부여왕 위구대(위구태,위구이)는 요동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도는 부여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므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부여를 백제와 연결하여 서술한 글이 다수 있다.)
공손도가 요동에 웅거한 때는 개국 2522(189)년으로 이 시기에는 고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계속된 출병과
요동제민의 항거로 사실상 요동전역이 황폐화 하였는데, 공손도가 요동출신 군벌로써 요동을 장악하고,
아울러 요동제군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무렵 뜻밖에 고려에 내전이 발생하여 발기와 연노부의 수장이
고려 정부군에 쫓기어 피신하여 오니 공손도가 대희하여 그 딸(종녀)를 연노가에게 준 듯 하다.
3-e.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高麗)國, 焚燒邑落.-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건안 중에 공손강은 군대를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3-f. 建安 中,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 (三國志 魏書 韓傳)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 이남의 황폐한 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블러 모으고, 군대로 한예를 벌하니 옛 백성 들이 차츰 다시 돌아왔다.
요동군의 고려 침략과 대방군 설치는 공손강이 그 아비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을 차지한 개국 2537
(204)년 이후의 일로 보인다. 발기의 군은 요동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에게 대패하여 발기는
자결하고 연노부는 고려 조정에 투항하여 고향인 비류수로 돌아간듯 하다. 공손강은 비록 뜻한 바는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 내분을 이용하여 낙랑내 대방 지역을 차지한듯 하다.
4-g. 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
小水貊. -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소수맥이 있다. 고려는 대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서안평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의 다른 족속이 이 소수에 나라를 세워, 그로인해 소수맥이라 하였다.
발기의 반란군이 공손도에 투항하고 요동의 지원군을 얻어 재차 고려를 치기까지 요동에 다년간 거하
였는데 혹 이들이 요동 서안평 소수가에 주둔하여 이들을 일컬어 소수맥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삼국지에 소수맥을 왕망 이전의 사실로 기록하여, 혹자는 소서노의 비류 백제라 하고,혹자는 동부여
대소의 이제가 세운 갈사국이라고도 하여,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주몽과 소서노에 관한 내용 전체부분을 알고 싶으면 밑에 링크달았으니 참고하세요.
주몽과 소서노, 그 허깨비 사랑 역사글모음/고대이야기 2006.09.30 11:06
출처: https://emoonk0.tistory.com/459 [베른호수]
*어떤 이는 고구려인들이 자기 나라를 '가운데 자리잡은 누리' 즉 중심에 위치한 나라(中國?)라는 뜻으로 가우리라고 발음했다고 하지만 과연 고구려(고려)의 원래 의미가 중국일까. 그렇다면 당나라가 이세민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멸하는데 집착(?)한 까닭이 서로 천하관이 다르고 특히 고구려는 태왕(왕 중의 왕, 황제와 같은 표현)이라고 천자를 참칭한 죄가 명백하기 때문.
여담이지만 당태종 이세민과 그의 태자는 틈만 나면 천막을 차리고 사냥하는 유목식 생활을 즐겼고, 황제보다 대칸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다는데..실제로 당나라 황제는 위세가 대단했던 돌궐족을 제압하면서 북방민족의 여러 추장들에게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존칭을 받았음.
한족 출신 황제 유철(한무제)은 서역정벌을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와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한 적이 있었음.(신하들은 점령해도 다스리기 어렵고 본래 우리 땅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강경하게 반대했음)
이세민을 포함한 당나라 황제들은 자기 집안이 선비족 출신이고, 초원지대를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하는 한족 신하들의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서역정벌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고 합니다.(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공을 세웠으나 안록산의 반란 이후 모함에 걸려 사형당함)
첫댓글 고구려인들은 의외로 고려라는 국호를 자주 사용했던 것 같군요. 그들이 세운 중원고구려비에도 고구려왕이 아닌 고려국왕이라고 기록..재미있게도 발해도 고려국왕을 자칭했고 일본도 그것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음. 그럼 왕건고려는??
어떤 설에 의하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고려인이고 중국인들이 자주 쓰는 고구려라는 명칭으로 구분지었다는데..이건 사실이 아니며..수,당 시대의 기록들을 봐도 고구려가 아닌 고려라고 부르고 있죠.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조선족을 비하할 때 쓰는 '가오리방쯔'는 고려봉자(高麗棒子)입니다. 본래 고구려인들이 포로로 잡힌 수나라 병사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음.
흠...
고구려에서 일부 세력이 내려가 백제가 된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부여에서 고구려 또 고구려에서 일부 세력이 마한으로 내려가 다시 부여와 합하면서 백제가 된거라는거죠?
크게보면 부여가 쪼개지면서 내전상태 비슷한거려나?
동부여의 왕족이었던 주몽은 왕실의 권력암투에 휘말려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졸본부여로 피신했죠. 때마침 남편(구태)과 사별한 소서노와 결혼해 고구려를 세웁니다. 고구려 최초의 수도가 졸본성..나중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국내성으로 천도함.
저의 상상이지만..주몽이 고구려왕으로 등극하고 집권 초기에 자국민은 고구려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을테고, 타국인도 마찬가지일 것. 주몽 자신도 동부여 출신의 이방인이니 민심을 자극하지 않게 고구려와 (졸본)부여를 공식국명으로 함께 사용했을 수도 있음.
(고)구려와 부여는 자음만 빼고 모음이 똑같고, 고구리(가우리)라고 해도 구리는 구이(구태?고이왕?)와 어감이 좀 비슷하지만
혹시 위 내용이 대륙백제설과 관련이 있을까요? 부여가 백제로도 불리었다면 연도가 비슷할 경우 대충 설명이 되는 듯 한데...
일본서부의 유력한 다이묘였던 오우치 가문은 임성태자의 후손인데, 임성태자의 이름이 부여의조(백제왕가의 성은 부여씨, 간편하게 여씨도 씀. 여포도 부여씨?)백제 성왕이나 위덕왕의 아들이었던 걸로 추정하고 있음.
태자라고 부르지만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왔다면 왕위계승서열이 낮고, 장남이나 차남은 아닐 겁니다.
오우치 가문 족보에 백제국마한황제제왕(百濟國馬韓皇帝齊王)이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백제는 서토(중국땅)한족들에겐 제나라, 북방민족들한테 부여라고 자칭한 것 같음(한반도는 마한?)
덧붙여서 임성태자는 도요다(타)가문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일본대기업 토요타[豊田]도 관계있을까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