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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저서 『면암집』에서는 그의 상소, 편지, 상대방의 편지까지 부록으로 실려있는데 덕분에 최익현이 누구에게 어떤 편지를 받았고 어떤 편지 답변을 했는지 볼 수 있었다.
해당 기록에서 1895년 최익현과 유길준은 어떻게 편지를 주고 받았는지 나오는데 최익현이 단발령 거부로 인해서 옥에 갖히는 상황까지 발생할 즈음의 일이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을미년(1895, 고종32) 선생 63세 ......12월초하루는 정묘 3일(기사)에 체포되어 서울에 들어와 전동(典洞)의 사관(私館)에 갇히었다. 선생이 성묘(聖廟)에서 통곡하고 단발령을 따르지 않음을 듣고 유길준이 순검(巡檢) 10여 명을 발송하여 즉시 서울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데, 유기일도 평소에 고을의 명사라 하여 같이 체포되었다. 이때 향중의 사민(士民)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되, 선생은 옛날 의관 차림으로 의연(毅然)히 길에 올랐다. 초운공이 멀리까지 나와서 전송하며 말하기를, “형님께서 오늘 죽을 곳을 얻었습니다.” 하였다. 최영조(崔永祚)와 최영설(崔永卨)이 배행하였다. 서울에 이르니, 유길준이 경무사(警務使) 허진(許璡)으로 하여금 관소를 정하여 가두고 청졸(廳卒)로 수직하게 하였다. 또 사람을 보내어 단발 조칙(斷髮詔勅)을 보이며 말하기를, “금령이 내리면 머리를 깎고 상복(上服)을 버리고서 성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옛날 의건(衣巾)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 하니, 신자의 도리에 어떻겠습니까? 혹 시골에 있어서 황상의 조칙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하였다. 이에 내부 주사(內部主事) 정극경(丁克慶)ㆍ이규진(李奎鎭)의 무리를 연달아 보내어, 처음에는 속여 유인하고 마침내는 위협하므로 선생이 엄중하게 꾸짖기를, “내가 이 한 몸을 시배(時輩)에게 내맡기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할 것이지 물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 동향인 서성(徐姓)을 가진 자가 적(賊 유길준 등을 말함)에게 공을 세워 자랑하려고 자청하여 순검과 같이 가서 반드시 최모(崔某 최익현을 가리킴)의 머리를 깎고 와서 보고하겠다고 하니, 유길준이 허락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밤에 와서 순검을 밖에 숨겨 놓고 먼저 들어와서 매우 친절하게 인사를 드린 다음, 조금 뒤에 밖으로 나가 순검을 불러 흉계를 지시하였다. 순검이 깜짝 놀라며 꾸짖기를, “우리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이 대감의 머리에 칼을 대겠는가.” 하고 크게 욕을 하고 가 버리니 그 사람의 흉계가 드디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름은 선비이면서 처신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금수만도 못하다.” 하였다. 이때 유기일도 같은 관소에 있었고, 최영조ㆍ최영설도 모두 곁에 모시고 있었다. 선생이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빌려 오게 하여 밤낮으로 깊이 정독하였다. |
해당 기록에서 유길준이 최익현에게 단발을 시키려고 한게..
○ 사람을 보내서 단발 조칙(왕이 쓴것)을 보이면서 '황명을 어기는 거임? 아니면 시골 살고 있어서 못본거임?'이라고 비꼼
○ 여러 사람들을 보내서 회유하다가 안되니 협박
○ 누군가가 유길준에게 "제가 최익현 상투 잘라오겠습니다." 했나봄. 유길준이 허락했고 순경에게 그걸 지시하니 순경왈 "우리가 죽으면 죽었지 최익현 대감에게 어찌...ㅠㅠ"
○ 순경이 그러고는 욕을 하니까 그걸 듣고 유길준을 까는 최익현
○ 그 와중에 송자대전을 읽는 최익현 선생
캬~!
유길준 "선생께서 충신이면 상투 자르시죠!"
○ 유길준에게 답서하여 죽어도 변치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선생이 갇힌 지 3일째 되는 날 유길준이 장서(長書)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어버이가 병이 들면 자기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를 베어 어버이를 죽음에서 구하는 것이 효자입니다. 나라가 병이 들어 구원하려 하는데 한 묶음의 상투를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선생은 대부(大夫)의 반열에 있으니, 고을 자제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방금 성천자(聖天子)의 조서가 계신다.’ 하고 먼저 머리를 깎아 한 고을의 선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서로 이끌고 부자(夫子 공자)의 사당에서 곡을 하니, 가령 공자가 오늘날 있다 하더라도 역시 머리를 깎았을 것입니다. 선생은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지하에는 부모의 영이 반드시 ‘내 아들이 불초하여 임금의 명을 순종하지 않았다.’ 할 것이요, 다른 데로 가자니 우주 안의 만국이 모두 머리를 깎았으며, 만주ㆍ청국 사람들도 두개골 주위를 깎았으니, 선생도 또한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선생은 양찰하기 바랍니다.……” |
위 편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유길준 "임금=부모임. 나라 구하려면 상투 싹뚝! 공자께서 살아도 머리 깎았을 것. 우주 안의 만국이 상투 짤랐는데 선생도 상투 싹뚝 OK?"
선생이 보고 놀라며, “그가 성인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으므로 모후(母后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를 가리킴)를 시해하고 임금의 머리 깎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은 것이니, 진짜 역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금수에게 예의를 말하는 것과 같다.” 하고 내버려 두고 답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유길준이 연달아 사람을 보내어 답서를 요구하였으나, 선생은 종시 답하지 않는 것을 의리로 삼았는데, 유기일이 ‘답하지 않는 의리는 없다.’ 하므로, 선생이 최영설(崔永卨)을 돌아보고, “네가 초잡아 오너라.” 하였다. 최영설이 명을 받고 초안하여 올렸는데 말이 자못 준열하였다. 선생이 보고는, “부득이하여 답해야 한다면 이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유기일도 자기가 지은 초고를 내놓으면서 ‘이것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좌우의 의논이 모두, “저들의 계책이 문자로 복종을 시키려 한다면 한 번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답사(答辭)는 부드러운 말로부터 준열한 말에 이르게 하여 ‘범의 꼬리를 밟아도 사람을 물지 않는’ 상(象)에 응해야 하므로, 먼저 유기일의 글을 쓰고 뒤에 최영설의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니, 그것은 선생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에 최영설이 시초점(蓍草占)을 쳐서 이괘(履卦)의 단사(彖辭)를 얻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유기일과 변론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의 글을 보니 ‘미련한 천성이 돌과 같아 만번 찍어도 깨지지 않는다.’라는 어구가 있어, 대의(大義)를 굽힘이 없으므로 기일과 연명하여 써서 보냈다. |
유길준의 편지를 받고 최익현의 반응은 이렇다.
최익현 "이놈이 위대한 성인을 모욕하네!?(유길준이 공자도 지금 살았다면 상투 짤랐다고 한 부분) 국모 시해한 놈들이라서 그런가보다. ㅉㅉ 나 너님과 말 안할끼다!"
유길준이 "단발령 따르는게 충신"이라는 논리에
최익현은 "역적은 당신들!"
이라고 대답하는게 참 여러모로 높은 사람들에게도 덤빌 깡이 있는 위인이라는게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끝장낸 인물이고 저 시대에 지부상소의 상징인 인물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몇차례 답서 요구 끝에 나온 답 편지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면암선생문집 제14권 / 서(書) 유길준(兪吉濬)에게 보내려던 답서 을미년(1895, 고종32) 12월 7일 익현은 체포되어 경사(京師)에 이르렀으나 혼미하여 죄를 살피지 못하고 오직 날마다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대가 성상(聖上)의 전지(傳旨)로 말미암지 않았고 또한 법사(法司)의 고문 치죄(拷問治罪)에 말미암은 것도 아닌데, 홀연히 집사(執事)가 편지를 보내서 처음에는 타이르고 마침내는 꾸짖고서, 마치 애석한 것처럼 하였으니 무슨 일입니까?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풍문만 듣고서 경솔하게 체포한 일과, 죄상(罪狀)을 논죄하지 않고 의논에 맡기는 것은 모두 권세를 담당한 자로서 법령을 확립하고 시행하는 체통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보내온 글을 보니, 서신에서 종횡으로 농락하고 변괴(變恠)가 여러 가지로 나타난 것이 모두 사람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켜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대체를 요약하면 오늘의 사세는 경장(更張)하고 개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다음은 위에서 이미 먼저 단발(斷髮)하였으니, 신하는 마땅히 임금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공경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집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담론하여 온 나라를 억제하는 것이 이미 이 점에 있고, 어리석은 내가 방황하면서 여러 차례 미혹(迷惑)함을 깨뜨리기를 추구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한 것도 이 점에 있는 것이니, 한번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떳떳한 일로서 때에 따라 알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가의 성법(成法)은 비록 매우 주밀하고 좋더라도 경장(更張)이니 변통이니 하는 말이 이미 중세(中世)의 선현(先賢)들에게서 나왔는데, 하물며 지금 말세(末世)가 되어 백성은 병들고 나라는 패하여 오랑캐가 번갈아 침범하는 때이겠습니까. 변경하는 것이 진실로 옳으며 고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또한 본말(本末)과 경중의 구분이 있습니다. 삼강오상(三綱五常)과 중화(中華)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과 같은 대경대법(大經大法)은 근본이고, 부국강병하는 일과 기예와 술수는 말엽(末葉)입니다. 근본을 중하게 여기고 말엽을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폐법(弊法)을 경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만 보았고, 강상을 떨어뜨릴 수 없으며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문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부강해져야 열강과 병립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고, 강상이 이미 실추되고 화이(華夷)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을 모르니, 상하의 질서가 없고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부강하고 싶어도 그러기 전에 이미 패망할 날이 머지않아서 어떻게 할 기초가 없게 됩니다. 이제 지나간 일을 가지고 입증한다면, 진(秦) 나라가 예의(禮義)를 버리더니 이세(二世)에 망하였고, 당(唐) 나라가 오랑캐의 칭호를 뒤섞어 쓰더니 마침내 오랑캐에게 망하였습니다. 항적(項籍)ㆍ수 양제(隋煬帝)는 모두 군부(君父)를 시해(弑害)하더니 자신이 멸망하였고, 후예(后羿)ㆍ왕망(王莽)ㆍ동탁(董卓)ㆍ조조(曹操)ㆍ후경(侯景)ㆍ진회(秦檜)의 무리들은 군부(君父)ㆍ모후(母后)를 시해하거나 오랑캐와 결탁하여 임금을 위협하였는데 바로 제 몸이 주륙되었으니, 저들이 부강하지 못하여 그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이 강상(綱常)을 범하고 중화를 오랑캐로 만들어서 죄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니 천지와 신인(神人)이 다 함께 그들을 죽인 것입니다. 근본이 한번 문란하여지면 말엽이 비록 갖추어졌더라도 오히려 이처럼 믿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말엽도 구비하지 않고서 한갓 근본만 없애버리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켰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서 인의(仁義)의 가르침과 예악의 풍속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명 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우리나라는 또 《역경(易經)》 박괘(剝卦) 상구(上九)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상(象)과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늘이 재화를 내려서 더러운 왜인(倭人)과 양인(洋人)들이 온 나라 안에서 괴이한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니,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같습니다. 종놈처럼 남에게 알랑거리는 비루한 무리들이 이를 따라 조정에 가득차 있으면서 적의 창귀(倀鬼)가 되어서 흉악한 행동을 마음껏 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우리 임금을 기만하여 가리고, 아래로는 충언(忠言)을 막아서 여러 번 쌓이고 점점 침투되어 금년 8월과 11월 15일의 변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온 나라의 신민(臣民)을 모두 난적(亂賊)의 죄과에 빠지게 하여 천하 대계(大界)에 미세한 양기(陽氣)도 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더 이상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천도가 영원히 가 버리는 이치는 없고, 인심은 반드시 돌아올 시기가 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천심(天心)이 바뀌어 선악과 화복이 각기 유파(類派)에 응하게 되면, 아마도 오늘날 의기양양하여 스스로 오래되어도 패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대낮의 도깨비처럼 용납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돌이켜 생각할 줄 모르고 감히 큰소리로 기탄없이 말하기를, ‘이것은 시대를 따라 추이(推移)하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을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심하게는 위로 공자를 속이며 어려워함도 없이 단안하여 말하기를 ‘공 부자(孔夫子)가 오늘 있었다면 역시 단발하였을 것이다.’ 합니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며 대의(大義)를 수십 가지 만들었으나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을 가장 큰 대의로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단발을 하겠습니까. 집사께서는 또 단발하는 것을 우리 주상(主上)에게 돌려서 걸핏하면 바로 핑계를 대며 온 세상의 입을 봉쇄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도 순종할 만한 것과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모든 것은 의(義)에 합당한지 여부를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일 수 있으나 도(道)는 훼손할 수 없고 머리는 벨 수 있으나 뜻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어찌 죽음을 달갑게 여기고 화란을 즐겁게 여겨, 고의로 군명(君命)에 항거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또한 선왕(先王)에게서 받은 바가 있어서 백세토록 성현(聖賢)의 문정(門庭)을 지키고 한 시대의 풍속의 떨어짐과 높아지는 것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의 중대함이 어찌 첩부(妾婦)와 같은 태도로 순종하는 것만을 바르다고 하는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물며 오늘의 명령은 결코 우리 임금께서 한 바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집사(執事)와 같은 자들이 위협하고 제압하여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구차하게 순종하는 것이 공경이 아니며, 순종하지 않는 것이 거역이 아니며 바로 공경을 다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집사께서 또 어떻게 이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신의 말단(末端)에서 말한 ‘변고(變故)가 겹쳐 일어나는데 말 한마디 없다.’ 한 것은 내가 읽다가 이곳에 이르러 기(氣)가 산처럼 솟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어서 또 부끄러워 죽고 싶었습니다. 변고는 시역(弑逆)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죄는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우리나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종류는 모두 우리 임금이 함육(涵育)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갑신년부터 금년 8월까지는 역적들이 조정에서 마음대로 날뛰며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만약 왕법(王法)을 가지고 논죄한다면 내가 마땅히 이 역적들보다 먼저 복죄(伏罪)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집사께서 스스로를 아는 것이 밝고 남을 꾸짖는 것이 지극히 어리석지 아니하면, 혹 이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도 이로 인해 집사에게 의혹되는 것이 있습니다. 집사가 진실로 변괴를 항상 있는 일이라 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리가 매우 현저하고 인심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사께서는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이 변괴를 일으킨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고, 또 반드시 손을 머리에 얹어서 그 까닭을 찾아 ‘지금의 내가 예전과 같은데 어째서 모습이 이와 같이 달라졌는가?’ 한다면, 마땅히 슬프게 느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저절로 흐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사의 죄는 이미 집사의 판단에서 저절로 정하여져서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집사께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나 같은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본래 세상 물정을 모르며 성글고 학문도 어둡고 정돈되지 않아서 구습에 안주하고 있으니, 진실로 집사가 말한, 매우 늙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돌아보건대,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되고 손상이 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년 시절부터 63세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한 바는 선왕(先王)의 말이고, 입은 것은 선왕의 의복이며, 뜻과 말을 크게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러러 앙찬(仰鑽)한 것도 선왕의 덕행(德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맹세코 이 짧은 머리털에 옛 의복의 차림으로 돌아가 선왕을 지하에서 뵙고, 또 그것으로 우리 임금에게 보답하는 바탕으로 삼겠습니다. 가령 소진(蘇秦)ㆍ장의(張儀)를 시켜서 앞에 달려와 달래고 부월(斧鉞)의 형구(刑具)가 뒤에서 위협할지라도 어찌 만에 하나라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집사는 강적(强敵)을 등에 업고 세상의 권세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 위세의 불꽃이 닿는 곳이면 꺾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두어 건의 일로써 어리석은 나의 죄를 단안(斷案)하여 죽음을 시행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도를 지키고 정의를 지키는 일은 해서는 안 되며,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하고 억지로 임금의 머리를 깎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습니까. 도리어 성묘(聖廟)에서 통곡한 작은 일로써 구구하게 구실을 잡으며 여러 말을 길게 늘어놓아서 스스로 위중(威重)함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불행히 늙었는데도 죽지 않아 차마 이런 때를 보게 되었으나, 지금의 역적 무리들과는 의리에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미 내가 역적을 죽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역적의 손에 죽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만 마땅히 입을 닫고 명을 기다릴 뿐이고, 반드시 여러 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내온 서신이 회답을 더욱 급히 독촉하므로 급히 회답을 써서 대략 가슴속에 있는 생각의 만분의 일이나마 털어놓습니다. 저 경장(更張)과 개혁(改革)의 득실 여부에 대하여는 논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양찰(諒察)하기 바랍니다. |
최익현의 편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 난 체포되서 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너님이 편지로 타이르고 협박하는건 뭔 짓?
○ 풍문만 듣고 체포하고 하는거 왜 법대로 안하냐?
○ 보낸 글 봤는데 대략 요약하면
① 오늘의 사세는 경장하고 개혁해야함
② 위에서 단발 했으니 신하는 마땅히 어명을 따라야함
이라고 날 설득하려는건데 변론하고자 함
○ 법이 문제 있으면 변경하고 고치는건 옳음.
그. 러. 나! 부국강병은 옳으나 오랑캐와 구분이 없어지는건 옳지 않음.
○ 예를 들까?
-진나라가 예의를 버려서 이세황제 때 망함
- 당나라가 오랑캐 칭호를 써서 오랑캐에게 망함
- 항적·수양제는 임금과 아버지를 시해한 결과 자신이 멸망함
기타 등등의 사례가 부강하지 못해서 망한게 아님.
근본이 문란하면 국력이 강해져도 소용없음.
○ 우리는 예로부터 예의가 제대로 된 나라.(기자~지금부터)
지금 더러운 왜인과 양인들이 나라에 괴이한 짓을 저지르니 마음은 짐승과 같음.
그런 놈들 따까지들이 조정에 있어서 일어난게 뭐였음(을미사변을 말함)
○ 너님이 공자 살았다면 단발 했을거라고 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음
○ 단발 하는거 우리 주상 핑계 대면서 내 입 막으려고 하는데 임금 말도 따를 수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음.
○ 그리고 이 어명은 너님 같은 사람이 협박한거 아니냐?
(생략)
○ 보내온 서신이 답변을 재촉해서 급하게 답변을 써서 털어놓음
이 상투논쟁에서 입장차이가 확실히 보이는게 흥미롭고 재미있다.
최익현 시각에서 비판하는 내용이 어느정도 일리 있어보이는 부분도 있고
한계로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단발령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간의 논쟁이라서 더욱 의미있지 않나 싶다.
지금봐도 네임드 개화파와 네임드 척화파의 키보드 배틀인 셈이니...
첫댓글 유구한 역사속에서 이뤄진 키배는 구한말이라고 딱히 다를게 없군요....-0-;;;
입으로 싸우는 게 체화되어서 지금도 입으로 싸우는데 일가견 있는 민족입죠.
@_Arondite_ 편지로 주고 받는 논쟁도 그 나름의 품격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면전에서 봤다면 서로 쌍욕할 수는 있겠지만 편지 속에서 존중을 하면서 비꼼과 조롱이 베여있으니까요.
@삼한일통 비꼼과조롱..ㅎㅎ우아하게 돌려까기..
@루드비히 베크 유길준과 최익현이 시대의 논객이었다면 tv에 나와서
<임금께서 하셨던 단발령, 유림들도 해야할까?>
찬성측 패널: 유길준
반대측 패널: 최익현
해서 서로 자기가 애국자이고 상대방이 매국노라고 디스했겠죠.
@삼한일통 서로에게 저놈이 바로 사문난적!!!하는겁니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