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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이란 무엇인가?
조선후기 실학의 형성과 전개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본다. ―기획: 실학박물관
실학(實學)은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한국유학의 새로운 학풍을 말한다. 실학이 태동하는 시기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전환기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농업 생산력이 점차 회복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이 발달하여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었다. 당시 학문 세계는 ‘사장학(詞章學)’이나 ‘예학(禮學)’이 발달하여 백성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경향이 강하였다. 이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등장한 실학은 ‘실용(實用)’을 중시하는 학풍 경향을 띠었고 고대 유교 경전을 연구하여 국가의 전반적인 개혁에 도움이 되고자 한 학문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실학박물관 소장. 다산 정약용이 지방 관리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1818년에 완성되었다.
실학의 탄생
실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 요청에 부응한 학문이었다.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라는 낡은 시대의 자폐적인 정신 상황을 반성하는 한편,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학문의 사명으로 삼았다. 17세기 중엽 명ㆍ청(明淸) 교체에 따른 화이(華夷) 질서의 해체가 그 신호탄이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강대국인 청나라에 대해 겉으로는 사대외교(事大外交)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야만국 오랑캐[夷]로 여기며 중화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생각들이 점차 변화하여 “충실한 예(禮)의 질서를 이루면 어느 나라나 중화(中華)가 될 수 있다”고 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말처럼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생각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조선일 뿐”이라는 성호 이익의 생각은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조선 문화의 독자적 가치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이어서 청은 결코 오랑캐가 아니며 오히려 훌륭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으므로 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논의가 18세기 후반 서울의 진보적인 지식인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북학(北學)의 선두주자였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화와 이는 마찬가지다(華夷一也)”라면서 금기에 가까웠던 화이론(華夷論)을 흔들어 놓았다.
화이론의 변화와 함께 17세기 이후 전래된 서양문물의 전래도 실학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서학(西學)으로 명명되는 서양문물과 천주교는 조선의 선각적 지식인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이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컸으나, 과학문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예컨대 아담 샬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주도로 청나라에서 채택 시행된 시헌력(時憲曆)은 1654년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다. 18세기 실학자 가운데 서양문물에 호의적이었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지금 실시하는 시헌력은 곧 서양사람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 1591-1666)이 만든 것인데 해와 달의 교차인 일식과 월식이 하나도 틀리지 않으니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다.”라며 극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경학(經學)에 자주 등장하는 상제(上帝) 개념 또한 천주교의 영향이었다.
일식 <출처: By Takeshi Kuboki @Wikimedia Commons (CC BY)>
실학의 발생과 발전에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개혁 정책도 큰 힘이 되었다. 1608년에서 1708년까지 100년의 노력 끝에 실행하게 된 대동법(大同法), 1750년에 이루어진 균역법(均役法), 1774년 공사노비의 신공(身貢) 폐지, 도망한 공노비에 대한 추쇄(推刷) 폐지 등은 백성들의 처지를 크게 개선하는 조치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들이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데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것은 현자(賢者)가 해야 할 일로서, 시대 흐름에 따라 제도가 변화되어야 함은 세상의 도리이자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임진왜란 이후 온갖 법도(法度)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하여 털끝 하나도 문제 아닌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여 정부의 과단성 있는 개혁 조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국가 개혁을 향한 정약용의 욕망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국가의 제도를 바꾸는 것이 벼슬아치들만의 전용물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반계 유형원이 법을 고치자고 논의했어도 죄를 받지 않았고, 그의 글도 <반계수록(磻溪隧錄)>이란 이름으로 나라 안에 간행되었으니 다만 이용되지 않았을 뿐이었으며, 그가 말한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비록 현직에 있는 관리가 아니더라도 충신과 지사라면 팔짱만 끼고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는 것이 정약용의 확고한 가치관이었다.
실학의 형성과 전개
17세기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실학적 학풍은 18세기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학문적 혹은 지역에 따라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첫째가 토지제도 및 국가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조선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학풍으로,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 출신의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서울과 가까운 농촌에서 생활한 덕분에 도시 양반들과 달리 농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농민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성호 이익을 종주로 하여 성호학파를 이룬 이들 실학자들은 조선후기 농업 생산력 발전과 이에 따른 토지 소유 문제를 농민의 처지에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때문에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신분제도, 관리 선발과 임용, 중앙과 지방의 행정 체계 등에 대한 개혁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은 정상기(鄭尙驥, 1678-1752), 이중환(李重煥, 1690-1752),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신후담(愼後聃, 1701-1761), 이병휴(李秉休, 1711-1776),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이맹휴(李孟休, 1713-1751),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우하영(禹夏永, 1741-1812),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용(丁若鏞, 1761-1836) 등에게 이어졌다.
박지원 초상화, 19세기 <실학박물관 소장>
다음으로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등 기술 혁신을 통해 조선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실학 학풍이 있는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를 중심으로 한 서울 출신의 실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적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의 뒤떨어진 경제사정을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개발을 통해 일신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빈곤하여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다. 선비들은 경제 생산과 동떨어진 학문에만 골몰했고 일반 백성들의 삶에 유용하고 생활을 두텁게 하는 이른바 이용후생적 학문에는 등한히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동네에서 하루 두 끼를 먹는 집도 두세 집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절약할 여력이 없으니,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업의 진흥과 기술 개발, 외국과의 통상무역이 필요하다.”는 박제가의 주장은 조선의 빈곤에서 나온 현실적 경제관이었다.
서울 출신의 실학자들은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허위의식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허위의식은 신분 차별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자 출신의 실학자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중심으로 한 조선사회의 신분적 차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사행단에 속하여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는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북학파(北學派)’라고도 지칭되는데, 중국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흡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잘 표현된 명칭이다.
<백련관잡록(白蓮館雜錄)>, 실학박물관 소장. 박종채가 부친인 박지원의 초고를 편집할 때 저본으로 활용된 것으로 ‘백련관(白蓮館)’은 삼청동 백련봉 아래 거주하던 때 사용한 호이다. 1767년부터 1769년 전후에 쓴 연암 박지원의 글이다.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전반에는 국가 개혁에 대한 관심보다는 학문적 고증을 위주로 한 실학적 학풍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조선 학계에 적용한 실학자가 바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였다. 그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통해 헛된 논의를 숭상하지 말고 성현의 도를 직접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제에서 올바름을 구해야지 공허한 이론으로 그릇된 곳으로 달아나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비판적인 안목에서 엄정히 살펴보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사실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김정희 초상화(1857년, 화원 이한철), <출처: Wikimedia Commons>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금석학(金石學)·문학ㆍ서예에 이르기까지 김정희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 업적을 이루었으며, 신분과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학풍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함께 금석학을 연구한 신관호(申觀浩), 이상적(李尙迪),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이 이들인데, 19세기를 거치면서 실학 학풍이 중인층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다
실학은 본래 관념적인 학문을 지양하고 인간의 일상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지향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탐구, 즉 조선의 역사, 지리, 언어, 정치, 경제 및 문화 등에 관한 연구로 발전하였다.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 표현된 새로운 세계관은 종래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과 달리 둥근 지구 표면에 수많은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세계지도가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는 근거가 없으며 세계 모든 나라는 중심이 될 수 있고 독자성을 가진 독립국임을 인식하게 해준 것이다. 조선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은 자국의 문화를 연구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졌다.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 실학박물관 소장
자국학에 대한 연구는 역사 분야에서 가장 활발했다. 성호의 삼한(三韓) 정통론 이후로 조선사가 독립적인 역사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마한, 통일신라 및 고려로 체계화하였으며, 정약용은 중화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민족은 다 중화라고 보았다. 언어학에서도 한글이 연구되기 시작되어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훈민정음도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훈민정음운해> 및 유희(柳僖, 1773-1837)의 <언문지(諺文志> 등이 간행되었다. 자국학에 관한 연구는 생활서 혹은 농서에서도 주목할 만한 저술들이 이어졌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색경(穡經)>,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의 <천일록(千一錄)> 및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이르러 조선 농서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실학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등장했나?
사실 실용을 중시하는 학풍은 조선후기 실학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고 자기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게 되면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실학’이 조선후기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라는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실학이라고 하면 오늘날 대부분 조선후기 ‘실학’을 가리키는 용어라 생각되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실학이 조선후기 실학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실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실학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한국 학계 최고의 이슈였다. 이슈는 성공적이었고, 실학은 오늘날까지 조선후기 정치ㆍ경제ㆍ사회ㆍ사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을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ㆍ정조대 진보적 학자들의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학문적 탐색과 문제의식이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얻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 논쟁은 아직까지 진행형이다. 우리가 아는 ‘실학’은 조선후기 ‘실학’만을 의미하는가? ‘실학’이라는 용어가 가진 통시대성으로 인해 현재까지 조선후기 실학의 실체성에 대한 찬반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학의 부활과 논쟁
우리가 알고 있는 18세기 실학은 20세기에 접어들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20세기 초,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목적에서 그리고 밀려오는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1년 김택영편의 <연암집(燕巖集)>을 시작으로 <흠흠신서(欽欽新書)>와 <목민심서(牧民心書)>가 각각 장지연(張志淵, 1864-1921)에 의해 광문사(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실로 우리 대한제국의 정치학 가운데 제일 신서(新書)가 <목민심서>이다.”는 1902년 5월 19일자 황성신문의 찬사도 이어졌다. 당대의 과제 해결로서 다산 정약용이, 서양 근대학문과의 만남 속에서 연암 박지원의 위대성이 부각된 것이다.
◀조선광문회에서 간행한 <열하일기>와 <연려실기술>, <해동역사>. 조선광문회는 최남선, 현채, 박은식 등에 의해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한국고전 간행 단체이다. 실학박물관 소장
현실 타개책으로 주목받았던 실학은 1930년대 들어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최남선이 1931년 <조선역사>에서 조선후기 신학풍을 근대 학술용어로서 실학이라 지칭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어서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정인보, 안재홍 교정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간행되면서 조선후기 새로운 사상 경향으로서 실학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지칭되기에 이른 것이다. 1930년대 실학은 여러 가지 용어로도 표현되었다. 예컨대 문일평(文一平)은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정인보는 ‘의독구실지학(依獨求實之學)’, 백남운은 ‘현실학파’, 홍이섭은 ‘실증학파’라 지칭하였다.
1930년대 시작된 실학 연구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에 더욱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실학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히 천관우는 최남선과 정인보의 견해를 계승하여 영조ㆍ정조 연간을 전후하여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실학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실학의 ‘실(實)’을 학문적 자유인 ‘실정(實正)’과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실증(實證)’, 그리고 현실성을 의미하는 ‘실용(實用)’의 실이라고 정의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을 근대정신의 태반이자 근대사상의 맹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다.
1960년대 들어와 실학 연구는 더욱 활발하여 유파별로 구분하기 이르렀다.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으로서 실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근대와 민족이 강조되던 시기를 지나 1980년대 이후에는 민족주의와 근대 지향적 측면을 북학파를 통해 밝혀보려는 연구도 진행되었고, 성리학과 실학의 개념 문제가 함께 논의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실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성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실학 용어의 무한대적 범람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해방 이전의 실학 연구는 진보적인 특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실학이 보수적인 사상체계였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이는 여말선초 기록에 보이는 ‘실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 관점대로라면 실학은 조선후기 실학이 아닌 통시대적인 명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동향은 그간 민족주의와 근대 지향적 성격을 띤 조선후기 실학 개념에 한계를 느끼고 세계주의와 현대 지향적인 새로운 개념의 실학을 모색하려는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학은 과연 실체로서 존재한 것인가? 실학 개념을 둘러싼 논의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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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이 그나마 이어져 온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서학이란 천주교를 일찍 받아드렸다면 서구의 문물도 함께 들어왔을 것이고
삶의 질도 좋아졌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