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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도로
내가 어릴 적 손가락사이에 옴이 올라 약방에 가기 위하여 아버님(작고하신 후면 ‘님’이라 칭함)의 자전거 뒤꽁무니에 앉아 김천의 시가지를 초행으로 가본 일이 있었다.
샛노란 약을 사서 손가락 사이의 피부가 없는 맨살에 바르니 특수한 냄새가 나며 팔팔 뛸 정도로 따가웠지만 견뎌야 낫는 줄로만 알았다.
그 냄새를 계속 기억하다가 내가 성인이 된 후 군에 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화학약품냄새를 이용하여 곤충을 쫓기 위한 군용이며 잔글씨로 영어만 가득히 써 놨으니 그 당시도 미제인줄은 알며, 병 주둥이가 이 쑤시게가 들어갈 정도로 가늘어서 피부에 대고 톡톡 치면 피부에 조금씩 발리는데 상처 난 곳은 피하라는 설명이 있었을 것이고 옴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의약품인데 상처 난 곳의 피부가 없어진 맨살이 타 흠집을 내어 오랫동안 흉터가 남았다.
[DDT와 같이 2차대전때 사용했고 1964년에도 한국군에서 사용, 녹이 쓴 양철뚜껑]
그 당시는 이 조약(造藥)조차도 못되는 문명의 이기가 낳은 다른종유[wrong kind]의 양약이었는데 아마도 약방 주인은 이미 알고 있었을것이고 부정행위(cheat)로 나는 생각을 굳힌다.
하기야 골퍼의 이야기로 피난시절 부산에 있던 전직의사는 약은 없고 돈은 필요하니 증류수 주사를 놓아주고 돈을 받아챙겼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나의 눈을 빛나게 한 것은 고가도로 밑을 휙 지날 때 내 나이 또래의 아이가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 만약 옆을 보았더라면 써클(circle)을 돌아서 올라가는 것이니 별것 아니었을 터인데 하도 신기하여 자전거 뒤에 탄 나는 몇 길 위에 서 있는 그 아이만 계속 쳐다보며 휙 지나갔으니 그냥 화닥닥 놀랄 수 밖에.…….
문명이 없는 시골에서 살던 시골뜨기는 이전까지는 사람이란 오직 땅만 밟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일본문명으로 철교를 놓아 공중에서도 걸어 다닐 수가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두고두고 생각이 났으며 다른 한 가지는 시내에는 유리창이 있는 2층집이 있어서 사람 위에서도 사람이 살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어릴 때 아이들 이야기로 “한국은 집집마다 지게가 한 개씩 있고 일본에는 자전차가 한대씩 있고 미국에는 집집마다 자동차가 한대씩 있다.” 라고 했다.
그 당시 조선낫은 대장간에 가서 벼리 가며 사용하는 것은 철도침목에 박인 쇠못으로 만들어서 쇠가 무른데 반(反)해 왜낫은 반대쪽은 무른쇠이지만 날이 있는 부분만은 강철이 되어 잘 드니 몇 년을 사용하고도 남으며 일본도끼도 날은 강철이고 윗부분은 무른쇠이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온 후 철교가 생기고 공진회(품평회+박람회)가 생기고 유리창으로 된 건물이 들어서고 비단양산, 비단으로 만든 치마저고리, 자전거 등을 들여왔다.
자전거포를 했던 내가 잘 아는데 상표로는 후지(釜士) 노리스(能率,) 마루이시(丸石), 미야다(宮田)제작소에서 만든 기야 에무(gear M)등이 되는데 부속은 모두 모양이 통일되어 어느 회사제품이던 모두 서로교환(interchangeable)이 가능했다.
쇠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달군 후 급 냉각이 필요한데 조선에서는 예로 섭씨 20도의 물에시키니 무르지만 그 당시 일본은 영하 80도의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하니 자전거의 허브(hub)수명도 길고 달릴 때 페달 밟기에 연하니 힘도 적게 들고 무릎이 덜 아프니 모두들 선호 했다.
한국전쟁 때 까지 생존하셔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동네 윤X섭 동장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생후에 처음 본 한 촌부는 “어르신네는 공중에 떠서 가는군요!” 했단다.
한국전쟁 중 김천서 피난을 온 사람이 기-타를 가져온 것을 보았다는 옆집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에게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프라이 팬 조차도 없든 시절이니 그는 둥근 쇠에 긴자루가 달린 다리미 같이 생겼다하여 줄 곳 그렇게 알고 있었고 월남사람이 있어서 한국인에게 눈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어와 차다고 하니 아마도 아이스크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감촉이 부드럽다고 하니 아마도 토끼털같이 생겼을 거라고 대답했고 희다고 하니 아마도 밀가루 생각을 떠올려서 설명으로는 불가능하니 그 당시는 내가 잠시 코끼리를 만지는 소경쯤 된다.
비등한 예로서 알라스카에서 녹용채취를 위하여 순록을 사로잡는데 그물을 일자로 쳐놓으니 옆으로 우회하면 되겠지만 생각이 짧은 그들은 우직하여 그물을 뚫고 나가려고만 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뿔을 잘린 후에 다시 자유를 얻는 이치이다.
이 세상에 나와서 먹어본 음식 중에 무엇이 가장 맛이 있었느냐고 물어 본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같은 날 시내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빵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떡만 먹었던 나에게 이스트(yeast)의 구수한 내음(방언)의 감미로움과 빵집의 생김세가 아직도 내 기억 속을 맴도는데 속이 꽉찬 떡만 먹던시절인데 빵은 공간이 비어있으니 그당시에는 양을 부풀려서 판매를 하는것 갗았다.
금방 따온 무화과의 감칠맛을 모르는 사람은 그동안 말린 무화과만 먹어 보았기에 그저 그런 정도로만 여기는 이치 같은 것들 이다.
무화과에 얽긴 이야기로 그전부터 꽃 없이 열매를 맺는다는 무화과(fig, 단어는 이미 알고 있다)를 도미 후 얼마 있다가 말린 것을 사와 먹어보니 이빨이 자그락거려서 내 생각에 아마도 캘리포니아에서 나왔을 것이고 사막의 모래바람이 일어서 먼지가 섞인 때문일 것 이라고 내 나름대로 상상을 했다.
그 후 20년이 넘도록 모래가 섞인 과일이라고 여겨진 무화과는 전연 먹지 않았는데 내가 뒷마당에 직접심어서 먹어보니 그 속에는 담배씨보다 더 작은 씨앗들이 있어서 바스러지는 소리 이었던 것이니 내가 촌한(村漢)이 라는 것을 부정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20리 떨어진 김천시를 초등학교 졸업이전 까지 학교에서 한 줄로 서서 걸어가는 몇 번의 단체 영화 관람 외에는 갈일이 없었던 완전히 촌넘이다.
그 후 삼촌과 나는 조흥은행에 중학교 입학금을 내려고 같이 갔으나 삼촌이 영남여관 식당주인에게 국밥 한 그릇을 주라고 돈을 지불한 후 가시고 나 혼자 마루에 앉아 기다리는 중, 육개장은 한 투가리를 개다리소반위에 뎅그러니 올려놓는데 밥이 영 나오질 않았다.
물어 볼 수 도 없고 옆에 다른 손님이라도 있으면 카피라도 하련만, 가만히 있으면 중치기는 되니 애처롭고 답답하게 마음조리며 계속 기다리니 눈치 빠른 안주인이 ‘척하면 삼천리고 척보면 3만리’ 라고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지“이 아야! 밥이 국속에 들었는데 왜 안먹노!” 라고 일갈이니
“예?” 시골뜨기 나는 화들짝 놀랐다.
‘따로국밥’ 은 2개의 단어지만 재래식 ‘국밥’ 은 한데 엉기면 밥은 갈아 앉아 보이지 않았으니 ‘용기와 경험의 결핍’ 으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이 국밥 한 그릇 때문에 내가 촌넘 중에서도 상(上) 촌넘으로 전락 되는데 디지털시대를 사는 지금의 나는 ‘지나칠 정도의 비약? 이 있는 것일까?’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는 5살 때 입궐을 했고 고종황제 사이에서 왕자가 태어나던 1897년부터 13년 동안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최단명(短命)의 국호를 사용했으며 노란 곤룡포를 입은 것은 그동안 종주국(宗主國)인 중국의 황제가 노란색갈이니 우리나라는 빨강 옷을 어쩔 수 없이 입었는데 그래도 제국이라는 말은 황제의 나라이니 자격이 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데 ‘한국’이라는 단어는 대한제국의 준말인데 이즈음의 국제 정세가 종주국이었던 청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조선도 황국이 되었으리라.
단군조선 이라고 시작한 국가명 을 일제시대에도 조선이라 불렀는데 해방후 북한이 조선이라 하니 우리나라는 선택이 없어져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황제(帝權)정치에서 백성(民權)정치]이라 바뀌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1899년 영친왕이 9살 때 시카고대학 사진학과 교수 엘리야스 버튼 홈스(Holmes)라는 분이 관광차 일본을 거쳐 서울에 왔다가 문밖(4大門)에서 그의 삼촌을 만났는데 별장에 초대가 되어 영사기(전기가 필요 없이 나비모양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비틀어 태엽을 감아서 사용하는 고리짝 시대의 골동품, 나도 골동품 촬영기와 활동사진영사기를 창고속 어디에 소장하고 있음, 사진과 사진의 경계가 지나가는 동안만은 포로펠러가 구멍을 막으니 고정된 사진 만 보인다.)를 보여 주는 바람에 임금님에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처음으로 궁중에 들어가 영사기를 빌려 주게 된 이틀 만에 횃불과 초롱불을 든 시종들이 와서 자는 그를 깨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야기로는 어린 왕자가 너무 좋아하여 밤에도 그의 품안에 안고 잤다고 했으며 그 보답으로 여러 필의 녹색 비단과 족자, 은제품 등을 하사받았으며 황실 전속 무용단의 무용을 구경하는 향응을 받았다고 한다.
나 자신도 포근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걱정이 없던 좋은 시절에서부터 수십 삭 세월 속에서 풍우(風雨)에 시달리고 세파(世波)를 넘어 표착(漂着)하니 다시 평화롭고 고요함이 나를 감싸주는데 땅위에서만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촌놈에게 처음대한 고가도로는 대단한 발견이고 너무도 충격적이어 지금까지도 생각나 몇 마디 끼적거려보는데 아무리 흐린 잉크도 가장 훌륭한 기억력보다는 낫다고 했는데 하루가 다르고 빠르게 바뀌는 세월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내가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저는 기술자출신이어서 말주변이 없고 또한 글쟁이가 아니니 군더더기가
많네요. 미안해요.***
왕눈이라고해서 많이 볼수는 없고, 뱀장어는 눈이 작아도 먹이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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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나라의 근대적 시절 생활사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