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는 이호나루, 조포나루, 새나루, 흔암나루, 찬우물나루, 상자포나루 등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한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나루는 한강 4대 나루로 불릴 만큼 유명한 나루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 여주 양근을 지나 광주 북쪽 회룡진에 이르러 한양의 면수(面水)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이나 육로로 200리가 안된다.
읍과 백애촌은 한들로 통하여 동남쪽이 넓게 트이고 기후가 맑고 서늘하며 여러대를 이어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강 북쪽에는 신륵사가 있으며 절 곁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을 임한 바윗돌이 기이하다."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여주 나루터서 대참변’ 경향신문 10월24일자 기사제목이다.
'조포나루 참변'으로 숨진 아이들 사연을 1면과 6, 7면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963년 10월23일 여주 신륵사 앞 남한강 조포나루터, 찢어진 일기장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내일 소풍을 간다.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신륵사에 가면 참 재미있을 거야.
부처님도 있다고 하는데 무슨 소원을 빌까? 중학교 합격? 그렇지 않으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엄마에게 무슨 선물을 사다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잠이 안 온다.”
일기장은 안양 흥안국민학교(초등학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 것이었다. 소풍 전날의 설렘이 고스란히 담겼다.
흥안국교 5, 6학년은 이날 신륵사로 소풍을 갔다. 귀갓길에 어린이와 교사, 학부형 등 150명이 나룻배를 탔다.
눈앞의 불행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기우뚱, 한 차례 흔들리던 나룻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어린이 38명을 포함해 49명이 익사했다.
위령비문
1963년 10월 23일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한 흥안국민학교(현재 안양남초등학교) 5.6학년 학생,교사,
학부모 총158명이 여주 신륵사 수학여행을 마치고 이곳 조포나루터에서 나뭇배를 타고 귀가 하던중
배가 기울며 침몰하여 학생,학부모,선생님 49인이 희생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이에 안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혼을 위로하는 비를 세우게 되었다.고히 잠드소서
서기 2006년 4월 15일
안양남초등학교총동문회
1963년 신륵사로 수학여행을 가기위해 이 나루를 건너다 참변을 당한 학생과 교장과 학부모의 이름이
이 위령비 건립을 후원한 인사들과 함께 위령비 뒷면에 새겨졌다.
남한강의 본류인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여주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의 4대나루로 불리던 조포나루로 충주에서 서울까지 수운의 이용이 번성할 시기에는
이곳 신륵사 하류에 보제원(普濟院)이 설치되어 통행자의 숙박을 제공 하기도 하였다.
도선이 침몰되는 대참변이 일어난 후 1964년 여주대교가 개통되어 유서깊은 조포나루는 폐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