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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3부 노어 회장과 세계적 확장의 시대
1) 네이선 . 노어
1942년에 조셉. 러더퍼드가 사망한 후, 제3대 회장에 취임한 것은 네이선. 노어였다. 그는 1905년 펜실베이니아주 베슬리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성경 연구생]에 참가하여, 18세에 뉴욕 브룩클린의 베델(워치타워협회의 본부)에 참가한 이래,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순수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노어는 1940년 이래, 러더퍼드의 아래에서 부회장으로서, 그의 오른팔이 되어 협회의 실무를 수행해 왔다. 그는 외면적으로는 러더퍼드와는 달리 몸집이 작고,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또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녀, 그것이 그의 임기에 행하여진 조직 오로지 협회의 세계적 확대에 공헌하였다고 한다. 그도 또한 러더퍼드와 마찬가지로, 내부에 있어서 자신의 비동조자나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 한편으로는 제1대. 제2대 회장에 비하여, 카리스마적 회장의 자세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적었다. 또한 전임 회장들과는 달리, 노어는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큰 결점은 고등교육의 결여였다. 그로인해 그는 전 회장들과 같은 대량의 문서를 집필할 수 없었다. 그가 회장이 되고난 후, 파수대 잡지 기사의 집필자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 하나의 이유에 노어가 회장으로서 주요기사를 집필할 수 없었던 것도 들 수 있다. 그런 그의 무교육을 보완해서, 그의 한 팔이 되어 일하며, 많은 기사와 출판물을 집필한 것이 프레더릭. 프랜즈였다. 그는 노어의 아래에서 1949년 이후 부회장에 취임하여, 1977년 노어의 사후에는 제4대 회장에 취임하지만, 워치타워협회 지도자의 역사 가운데 거의 유일한 대학교육을 받은 인간이었다. 프랜즈의 교육과 지식, 그 웅변은, 그를 노어의 실질적인 대변자로서 여기기에 충분하였다.
노어의 시대에 만들어졌다든지 변경되었다든지 한 교의의 대부분은, 프랜즈가 그 기초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2) 조직 확대의 노력
노어의 시대의 큰 특징은, 협회의 조직 확대의 노력일 것이다. 그의 시대에 현재의 지역, 순회구가 세계적으로 그물코와 같이 넓게 짜여 지고, 그 각각에 감독자를 두어 ,세계적 중앙집권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순회대회, 지역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된 것도 그의 시대였다. 1943년, 그는 각 회중에 신권전도학교를 설치하고, 뉴욕에는 길르앗 학교라는 선교사 훈련학교를 만들었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효과적인 선교기술을 가르쳐, 세계적으로 그물코와 같이 둘러 짜여 진 조직과 더불어, 워치타워종교는 흡사 방문판매 화장품처럼 세계를 석권하였다.
특히 길르앗 학교의 졸업생은, 워치타워종교의 미개지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목숨을 걸고 파송되어, 협회조직의 세계적인 확대에 공헌하였다. 1942년 노아회장이 취임할 때에 11만 명이었던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 1977년 그의 마지막 해에는 222만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 급성장의 원동력은, 노어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비즈니스 감각 외에, 이 시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전쟁을 싫어하는 분위기와 평화의 희망, 그리고 1950년, 60년대의 냉전의 긴박감으로 인한 절박한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과 그에 따른 세계 파멸의 공포는, 워치타워와 같은, 임박한 세계의 종말과 거기에 이어지는 지상낙원을 상품으로 하는 종교에게는 다시 또 없는 차려 놓은 밥상이었다.
3) 거대한 세계대회
이 시대의 급성장을 상징하는 것은 1950년대에 열린 거대한 세계대회일 것이다. 1950년의 뉴욕 양키 스타디움의 대회에서는 16만 명이상의 신자가 노어회장의 “당신은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입니까?” 라는 강연을 들었고, 그 시점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협회에 의한 신약성서(신세계역)가 배포되었다. 1953년에 열린 뉴저지의 세계대회는 1950년 대회와 비슷한 규모였지만, 1958년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상 최대의 세계대회가, 역시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려, 최종일에는 25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뉴욕시 전체에 영향을 미친 대행사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부회장인 프랜즈는 [그리스도교계의 성직자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비난 받아야 할 인간이다]라는 반(anti)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강조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 선언문은 대회 참가자 전원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노어회장의
[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 - 세상 끝은 가까웠는가 ? ] 강연이 있었다. 이 대회는 지나치게 큰 규모여서 뉴욕시의 기능에 악영향을 주어, 그 이후 이 정도의 큰 대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다.
4) 회중위원회와 사법위원회의 설치와 제명처분의 확대
조직의 규칙과 따르지 않는 증인에 대한 징벌제도는 노어회장의 임기 중에,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형태로 확립되었다. 그 골자가 되는 것은, 3명의 남성 신자로 이루어진 회중위원회의 설치였다. 이들 특별한 권한을 가진 자들이 순회감독자의 지지아래, 협회 본부 또는 혹은 지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회중의 장에 해당하는 회중의 종으로 될 수 있는 신자를 본부에 추천하고, 회중의 일반 신자의 지도, 특히 징벌에 관한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름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 각 회중에, 카톨릭과 비슷하게 성직자를 두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많은 증인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재판을 받았다. 이 위원회는 결코, 현재의 사법제도의 기본으로 되어있는 것과 같은 증거, 증언의 신빙성의 음미, 용의자의 기본적 권리 따위에 관한 고려는 일체 없이 일방적인 판정을 내리는 상황은, 이것 또한 카톨릭의 옛날 종교재판과 기본적으로는 동일하였다. 음행, 심한 술주정, 수혈의 경우 등 협회가 내세우는 가르침이나 규칙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자, 그리고 제명당한 이전의 증인과 교제를 계속하는 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회중위원회는 이와 같이 징벌을 위해 열릴 때는 사법위원회로 불리었다. 이 위원회가 결정한 제명처분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 가운데서 큰 영향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 개개인 증인의 교제 범위나 가족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까닭이었다.
5) 1975년 종말의 예언과 협회의 급성장
역사적으로 보아, 워치타워종교의 급성장이 일어난 것은 새로운 종말의 해를 예언했을 때와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또는 냉전과 같은 세계의 파괴가 가까이에 임박했다고 느껴질 때였다. 그러나 1960년대의 전반에는 상장이 침체상태에 빠지는 징조가 보였다. 이에 대응하는 것처럼 1966년 새로 출판된 서책 [하나남의 자유의 아들로 받게 될 영원한 생명] 가운데, 1975년에 인류창조로부터 6000년이 끝나고 새로운 천년통치가 시작된다고 하는 전혀 새로운 교의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1968년 이래,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 가운데 차례차례로 1975년을 향하여 준비하도록 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후에 이 예언이 보기 좋게 빗나간 후에, 협회는 결코 1975년에 종말이 온다고 확언한 일은 없다고 몇 번이고 자기변호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새로운 천년통치가 시작한다, 고 1966년의 출판물 가운데서 말해 놓고, 다음으로 대부분의 기사에서, 1975년을 향하여 마지막 날의 준비를 하도록 호소한다면, 가령, 1975년에 종말이 온다고 하는 문장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드래도, 다른 어떠한 논리의 귀결이 있을 수 있는가? 어차피 그 당시의 일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1975년을 거의 확실한 ‘년도’로서 워치타워의 권고에 따라서, 마지막 날의 준비를 하였다.
당시 “ 72년까지는 끝마치고 75년까지 살아 남는다 ”가 모토가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은 남은 얼마 남지 않은 몇 해를 학업에 쓰느니 보다 선교봉사에 활용하기 위해 차례차례 학교를 그만 두었다. 많은 사람들은 순조롭게 하고 있던 가업이나 직업을 그만 두고 재산을 처분하였다. 집을 판다든지, 보험을 해약하고 그 자금으로 개척봉사에 전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혼이나 출산을 늦추는 신자들이 잇달았다. 이 해( 1975년)를 좇아서 높아가는 신자들의 열심은 1970년 전반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 급성장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6) 협회조직의 개혁
1972년, 협회는 새로운 조직운영재도를 기재한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기 위한 조직]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다. 이 시대의 조직제도 개혁은 개인지배로부터 보다 집단지도체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맨 먼저 회장 아래에 11명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계급의 협회 간부들로 구성된 통치체가 설치되어, 이제는 회장의 개인적인 결정이 최종적인 힘을 갖는 일이 없게 되었다.
또한 각 회중의 운영도 [회중의 종]이라는 개인의 지배로부터 장로들과 [봉사의 종]의 집단체재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관리직은 순회감독, 지역감독, 지구감독과 같은, 일정의 임기에 따라 차례로 직무를 맡는 제도로 되었다. 이, 얼핏 보아 민주적으로 보이는 조직의 개혁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 가운데서 보다 자유로운 논의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권력의 분산화의 목적은 1975년의 전에 오게 될 세계적인 종교탄압을 향한 것이었다. 일단 종교탄압과 대환난이 오게 되면, 조직은 나뉘어져 각 지역, 회중은 어느 정도 독립해서 기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7) 1975년의 예언 실패
1975년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지나가고, 예언된 세계의 파멸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조직을 뒤로 하였다. 그것은 1976년의 신자증가율의 급격한 저하가 시작되어, 1977년의 신자(전도인) 감소라는 ,전후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신자수의 감소는 세계적인 현상이었지만, 흥미있는 것은, 왜 일본은 거의 유일한 예외로서, 1970년대 후반에 현저한 신자 수의 증가를 계속하였다. 이 우려할 만한 사태에 대한 협회 지도부의 반응은 다른 예언의 실패할 때와 마찬가지로, 변명과 정당화, 그리고 허물을 사전에 막기 위한 미봉책, 교의의 조정이었다.
거기에는 결코 겸허한 반성과 근본적인 교의의 재검토는 없었다. 이 당시 노어회장은 이미 진행된 뇌종양으로, 회장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있었다고 한다. 이 곤란한 시대에, 중심이 되어 대응했던 것은 차기의 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 였다 앞서의 두 회장과 마찬가지로, 노어도 또한 예언의 실패에 동요하는 조직을 눈앞에 두고, 1977녀 6월 7일 사망한다.
참고 문헌:
1. [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자 ]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 1993
2. “Apocalypse Delayed " M. James Pento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5
첫댓글 방대한 자료 올려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쉬엄 쉬엄 하세요. 미완성교향곡님!
갑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1966년 발행된 빨간표지 서책 <영문 > 한글 번역은 1968년 으로 기억되고요~그 제목은 "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 " 입니다.. 내 이전 책 뒤지면 있을겁니다.. 이책과 함께 발행된 초록색 표지 책이 또한권 있었는데. 그책명은 "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수없는 사실 " 책입니다. 줄여서 "명 " 책 " 사실책" 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는군요~~
ㅎㅎㅎㅎ그리고 또한가지 기억 1969 년 1 월호 깨어라 특별판 인가 하는 건데요~~ 1914~~ 부터 열차가 달려오면서 1975 년 의 내리막 < 마지막 - 아마겟돈 > 으로 빠지는 표지그림 이 생각나네요~~ 참내~~1975 년 천진무구한 사람들 을 얼마나 현혹 시켰던지~~ 에구 쯪쯔~~
심각한 역사인데도 소설같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평소에 궁금하게 여겼던 사법제도의 시작를 알게되었습니다. 자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회장 프랜츠는 자료실에 나온 레이먼드 프렌츠가 맞죠?
아닙니다. 부회장 프렌즈는 프레더릭 프렌즈입니다. 레이몬드 프렌즈는 프레더릭 프렌즈의 조카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