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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라! 열려라!
본문: 시 67
1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 (셀라)
2 온 세상이 주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의 구원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3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4 주께서 온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며, 세상의 온 나라를 인도하시니, 온 나라가 기뻐하며, 큰소리로 외치면서 노래합니다. (셀라)
5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6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온 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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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 첫 예배에서 '희망'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당연한 일' 또는 '통상적인' 일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지난 몇일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새해인사를 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라고, 하는 일마다 잘 되시라고, 당신의 가정에 사랑과 평화가 넘치기를 기원한다고.... 인간이 시간을 분할해서 달력을 만든 이유는 단지 농경에 필요한 때를 알기 위한 기능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인간은 새해인사를 하기 위해서 달력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해서, 거기에 가령 2024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동안 우리가 기대하기만 했던 일들이 새로운 시간에서는 이루어지기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대하는 바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나누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달력의 기능에 꿈이 착생한 것입니다. '희망', 바랄 希, 바랄 望..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바라고 또 바라는 것. 그것이 꼭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 사업이라든지, 이 땅의 정의와 평화 뭐 이런 것들이 아니어도 좋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바라고 또 바라는 것, 그것은 욕망의 대상일 텐데, 욕망에 관한 한 인간은 항상 삼자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대타자가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너 혹은 이웃,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삼자관계에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며 구체적이고 또 가장 큰 영역은 물론 나, 바로 주체겠지요. "너나 잘 해"라는 말이 인간에게는 결코 개인의 영역에 제한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변화는 너의 변화를 이끌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욕망에 충실한 방식으로만 너에게 충실할 수 있으며, 또 대타자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대타자에 충실하다는 말의 의미는 좀 복잡할 수 있겠지만요. 따지고 보면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방식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욕망에 대해 묻고, 잠정적이나마 얻은 대답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묻고 또 묻고,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것. 그게 욕망에 충실한 삶입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체로 욕망에 충실한 삶에 접근하지 못한 채 생애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인간은 대개 타자 혹은 대타자와 분리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통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즉 타자의 욕망에만 충실함으로써, 다른 말로 한다면 타자의 눈에 들게 되기를, 타자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타자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를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에 대해 묻는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됩니다. 타자를 위해 자기를 소진하는 삶입니다.
전에 교회가 있던 동네인 개미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인왕중학교가 있습니다. 학교 정문에 교훈을 크게 써서 붙여놓았는데 제 기억으로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였습니다. 쓸모? 누구의, 무엇을 위한 쓸모일까요? 미셸 푸코의 4부작 <성의 역사> 제2권은 "자기 배려' 혹은 "자기에의 배려"라는 제목인데, 주체가 자기와 관련해서 자기 자신의 쓸모를 탐색하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설마 인왕중학교 표어에 이런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나의 나에 대한 쓸모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할까요? 이는 주체이기를 포기하라는, 타자가 즐기는 대상이 되라는 말이 아닐까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쓸모에 관해서, 주체의 욕망은 차라리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가 되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요?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니요? 이 교훈이야말로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는 파시즘적 초자아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욕망에 접근하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자기의 욕망에 대해 묻기는 하지만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행동하지 못할까요?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걸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호한 자신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가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 '시간', '때' 그리스어로 'kairos'와 비슷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미'이지만 '아직 아니'입니다. 인간은 생성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나'에 관한 진실은 나에게 현재와 같이 '휙'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라는 존재가 마치 처음부터 결정되어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실체'라고 오인합니다. 이 오인에는 자기애가 크게 한몫하는데,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자기'는 대체로 나에게 누적된 타자의 흔적들, 내가 욕망했던 타자의 흔적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에 관한 질문에 머무르며 자기의 허상을 맴돌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나'의 실체 없음, 텅 빔과 마주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나의 실체성이라는 오인에 머무는 주체는 나의 텅 빔을 보존하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아니라 타자가 즐기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끝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끝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행동을 영원히 보류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보통 새해에 읽는 시가 아니라 추수감사절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6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와 더불어 홍수와 가뭄에도, 여름의 폭풍우을 맞으면서도, 창궐하는 병충해와 맞서면서 밭을 일구고 작물을 가꿉니다. 그러나 농부의 기대와 고된 노동이 결코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고 또 성실하게 노동해도 농사를 망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고 농부가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기대를 접거나 게으름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간절히 바라면서 일하는데, 가을의 풍성한 결실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지 존재하지 않는 풍성한 결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아직 가을은 멀었지만, 농부의 믿음에 근거한 수고 속에는 이미 풍성한 수확의 가을이 현재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우연히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두 사람의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레온 트로츠키의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손 떼라 ― 한 혁명가를 향한 중상에 대한 답변(1932, 6)"이었고, 또 하나는 빅토르 세르주의 "러시아 혁명 이후 30년"이라는 글이었습니다.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글 "볼셰비즘 역사의 몇몇 문제들"이라는 글을 레닌의 글과 혁명 과정의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자신의 혁명을 배신한 전제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레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아전인수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빅토르의 글 역시 1917년 혁명 이후의 30년을 회고하면서 스탈린 체제라라는 괴물로 화한 과정을 되짚고 있습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 스탈린 체제로 전화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혁명 그 자체에 대한 회의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암살당하기 8년 전에 이 글을 썼고, 빅토르는 47년에 사망하였으니 죽기 직전에 이글을 썼던 것입니다. 그것은 볼셰비키 혁명의 대의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혁명가의 유서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한 적도 있거니와 제가 혁명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비교적 소상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근현대 혁명의 기록을 통해서 예수운동과 바울의 초기 기독교 운동을 상상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빅토르의 글 중 짧막한 부분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 당이 저지른 가장 크고 무거운 잘못을 건드릴 것이다. 창조적인 사고를 함에 있어서는 늘 그러하듯이 여기에서도 잘못이 진실과 희망적 사고와 주관적 직관과 뒤섞인다. 그 어느 누구도 과업에 대한 믿음 없이는, 유형의 데이터를 평가하지 않고서는(의역: 자료를 통해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문제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들로 잘못 들어서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에도 착수하지 못한다. 모든 행동은 실재하는 현재로부터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던져진다. 이지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되는 행동이란 심사숙고한 연후에 전면을 향해 던져지는 그러한 행동이다."
빅토르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그리고 그런 잘못들이 스탈린의 야만을 낳은 단초를 제공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적 행위를 위해서는 필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주체의 삶에 오류는 필연적입니다. 행동은 성급하지 말아야 하지만, 마냥 심사숙고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주체는 성실한 심사숙고 과정에서 무르익으며 행동의 순간에 하나의 실체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휙'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욕망에 관해 참조할 수 있는 나에 관한 진실의 디딤돌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고유한 욕망을 창안해가는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2024년 새해가 열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과업에 대한 믿음 없이는, 성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에도 착수하지 못한다." 어떤 농부도 가을의 풍성한 결실에 대한 믿음 없이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실히 일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불모의 땅에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남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한다면, 주께서 온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며, 세상의 온 나라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찬송하지 못한다면,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될 그날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2024년은 일본의 대지진, 북유럽의 살인적인 한파, 남반구의 가뭄과 홍수, 잔혹한 전쟁, 이땅에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암살 기도 등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뒤숭숭한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증오와 비극과 아비규환 속에서도 주께서 주실 은혜, 가을의 오곡백과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며 너를 유기하는 것이고 세계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둠도 희망하는 인간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되는데, 절망은 그 자체로 삶의 중지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불확실성에 나를 여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우리를 엽시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들이 잉태할 가을의 결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깁시다. 행동하고 수고합시다. 우리의 지치지 않는 믿음 속에서 주께서 주시는 가을의 오곡백과는 무르익을 것입니다. "열어라!"에 응답하는 사람은 "열려라!"라는 풍성한 결실의 소망을 외칠 자격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를 기뻐하실 것이며 은혜를 내리실 것입니다. 이 소망 속에서 절망을 딛고 수고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열린 시간을 희망의 노래로 채웁시다!
첫댓글 문장으로 찬찬히 곱씹으며 읽으니 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