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목+내용 최신목록 윗글 아랫글 광주사태와 북핵위기의 이상한 공통점: 인질극 2004/02/28 01:57 광주사태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정부가 5.17긴급조치로 예방하려 하였으나, 광주에서 터진 것이 바로 518 광주사태였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이해찬, 심재철, 유시민, 박관현, 문익환 등이 김대중 지지 전국적 민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몰랐을지언정 또 하나의 세력, 즉 북한 간첩단 조직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즉. 김대중 선생측은 장갑차, 기관총, 예비군 무기,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등을 사용하는 폭동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장외 투쟁 혹은 궐기 대회를 하려던 것이었지만 그 전국적 민중봉기를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회로 삼으려던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그 강력한 증거로서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지지 민중봉기와는 별 관계가 없는 엉뚱한 인물 윤상원이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다. 그해 5월 중순에는 전국적 민중봉기 분위기를 띄우는 집회가 서울과 광주에서 열렸었는데, 서울에서는 심재철과 유시민 등이 주동하여 십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모였던 서울역 집회가 그것이요, 광주에서는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주동한 시위가 그것이었다. 이때는 아직 전경과 학생들간에 충돌은 없었으며, 화염병과 돌이 난무하던 서울에서의 시위와 달리 오히려 광주에서의 시위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현 국회의원인 심재철과 유시민 등이 서울대 마이크로 버스 타고 선동하였던 서울역 집회 때 학생들이 탈취한 시위대 버스가 가만히 서있는 전경 몇 명을 죽였으므로 내무부장관이 군의 개입을 요청한다. 더욱이 그 다음날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시위 주동 학생들 일부가 검거되면서 서울과 광주의 운동권 학생들은 모두 몸을 피했다. 그러나 엉뚱한 인물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광주사태에 점화하였다.
사실 광주사태는 크면서도 작았다. 윤상원은 한때 이십 만명의 시민군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십 만명의 무장 시민군이면 한군군 중 행정병, 의무병, 병참병 등을 제외한 총 전투 병력의 수와 맞먹는 대군이다. 그러나 파고 들어가면 크면서도 작은 것이 광주사태였다. 대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무기 반납을, 합리적인 해결을 원했다. 단지 총기 무장한 소수의 강경파에 밀렸을 뿐이다. 소수의 강경파, 즉 주동세력도 알고 보면 청소년들이거나 순진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윤상원이 시키니깐 마지 못해 국군에게 총을 쏘았을 뿐이었다. 당시 군인 중에는 총상에 의한 사망자 뿐만 아니라, 예리한 칼이나 낫에 잘려 살해된 군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설마하니 광주시민이 국군에게 그런 짓을 했겠는가. 당시 북한군 군인들이 그 시위대 속에 끼어 있었다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소수의 불순 세력을 제외하면 군경과 양민간의 유혈충돌을 원했던 사람은 윤상원 외에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단지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윤상원의 폭력 선동이 너무도 치밀하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준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무기를 그는 확보하고 있었으며, 또 무기 탈취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두고 있었음이 관찰된다. 폭도들이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하여 도청 지하와 광주에 폭파 장치를 한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의 양은 무려 8t트럭 분량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폭도들은 5월 21일 광주에 공산당 자치행정구란 의미의 해방구를 설치하자마자 시민군을 여러 조로 나누어 순식간에 사회주의혁명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우연하 하루 사이에 여러 대의 장갑차와 기관총, 카빈소총, M1소총 등 총기류 2천5백여정, 수만발의 실탄,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등의 폭약류로 무장한 시민군을 편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5월 22일 김대중 선생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때 사용하려고 치밀하게 탈취 준비를 해 두었다가 예정대로 광주사태 기간에 사용하였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광주사태에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이름 중에 학생대표 김창길군이었다. 그는 광주시를 사라질뻔한 위험에서 구한 이들 중 하나였다. 즉, 폭도들 중 누군가가 도청지하실에 이리역 폭발사고의 몇 배가 되는 분량의 TNT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그는 혹 폭도 중 누가 그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는 자진해서 감시하며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경파에 무기반납을 설득하려 애쓰던 김기홍 변호사가 25일 오후 5시에 김창길 학생대표를 만났더니 그는 "이 폭약이 폭발하면 직경 4㎞이내가 잿더미가 되어 버리므로 이를 지키고 있다며, 3일동안 잠을 못 잔데다가 인원이 부족하여 지키기 어려우며, 언제 폭도들이 들어와 폭발시킬지 모르니 어른들이 함께 지켜 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 날 밤에는 김변호사와 金成鏞 洪南淳 李成學 金天培 李永生 魏仁伯 등 수습위원들이 지켰다는 증언한다. 그들은 폭약 창고 바깥을 감시할 수는 있었으나 뇌관을 제거하는 방법은 몰랐다.
그런데,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창고 안에서는 한 명이 군인이 폭약과 뇌관을 분리해 놓고 있었다. 아마 광주시를 수복하여 광주 시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계엄군의 작전 중에서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전이 있었다면 바로 이 TNT 뇌관 제거 작전이었다. 당시 7인의 폭약류 관리반 중 梁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다행히 폭약류 관리반원들은 폭도가 아니라 성실한 시민들이었던 듯하다. 文영동, 金영복, 梁홍범, 朴선재, 姜남열씨 등이 폭약반이었는데, 그들은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에 폭약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였다. 다이너마이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창고에서 하루종일 그리고 날마다 지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폭탄을 빼앗아가려던 시민군 동료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폭약을 지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편, 도청 지하실 폭약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계엄군도 비밀리에 폭약반원들과 밀통을 시도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이 극비리에 지프를 보내 폭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상무대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사령관에게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즉시, 계엄군은 시민군 차림의 군인을 보냈으며, 그는 이날 밤 9시부터 다음날인 26일 오후 1시까지 뇌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당시 계엄군은 시민군에 붙들리면 예리한 칼이나 낫에 살해되던 상황에서 그 군인은 참으로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군이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 뇌관분리작업에 성공한 날이 광주에서 해방구(공산당 자치행정구)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계엄군은 안심하고 광주시를 시민에게 되찾아주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다음날(5월 27일) 새벽 한시에 도청을 포위한 계엄군이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라는 방송을 하였다. 폭동 주동자 윤상원이 다이너마이트를 찾았으나, 그러나 그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진정으로 광주를 사랑하는 용감한 시민들과 군인에 의해 이미 폭탄과 뇌관이 완전 분리되어 있었다. 윤상원이 사격 명령을 내리며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으나, 이미 도청 담을 넘은 계엄군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상황은 30분도 채 안되어 종료되고, 광주시민은 한주간 빼앗겼던 광주시를 되찼았으며, 청명한 새 아침이 밝아오자 계엄군은 신속하게 쌀과 생필품 등을 광주시민에게 배급해 주기 시작하였다.
폭도들이 도청을 한 주간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생필품 유통이 안되어 서민이 고통을 받고 있었을진대, 만일 그 상태가 한 달 혹은 일년 지속되었다면 광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한 용감한 군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 전날 폭약 뇌관을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계엄군은 도청을 시민들에게 되찾아주는 작전이 불가능하였을 것이요, 그 경우 도청은 여전히 윤상원이 통치하는 해방구 사령부 기지로 사용되고 있을지 모르며, 광주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영구히 고립된 해방구(공산주의 자치행정구)로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한가. 광주 시민의 생명이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윤상원이 계획하였던 두가지 인질 중에 하나는 외국인 인질이었다. 그는 광주에 있는 모든 외국인을 인질로 잡아들이자고 하였으나, 강경파도 그건 반대였다. 그런 반미적인 행동은 호응을 못 얻는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대신 그는 궐기대회에서 "미국이 광주를 구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부산에 입항시켰다"는 광고를 하였다. 미 항공모함이 입항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는 정반대였다." 북한군 무선 교신 주파수가 미군 정보부에는 감청되는데,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다음 남침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국이 한국 정부에 알려주면서 급히 미 항공모함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정부는 언론에 미 항공모함 입항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고 5.17 긴급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이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인질로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윤상원이 "국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 도청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터뜨려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 하였을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북한이 툭 하면 미국에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하였을 때 누구를 인질로 삼았는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다. 윤상원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겠다고 계엄군에 위협하였다. 북한이 미사일을 서울에 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두 경우에서 공통점은 광주시민이, 대한민국 국민이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21일 자정에 시민군이 장갑차로 도청 경비병들을 깔아죽이고, 이십 만명의 무장 시민군을 동원하여 총공격하며, 기관총 발사로 도청 경비병들이 전멸 아니면 철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 다음 전남도지사를 축출하고 윤상원이 우두머리가 되어 해방구(공산당이 통치하는 행정구)를 설치하였으며, 해방구가 설치되자마자 누가 8톤 트럭에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가득 실어 도청에 갔다 놓은 것이,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폭약으로 광주 시민을 인질삼은 후에 나주, 화순, 담양 등 외곽도시로 사회주의 혁명을 확산시키면서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게 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겠는가?
그때 북한은 남침하려고 하였는데, 예상 외로 27일 새벽에 광주사태가 끝났기 때문에 남침 기회를 놓쳤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남도청에 다이너마이트를 8톤 트럭에 가득실어 나른 자가 누구이며,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광주 시민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광주시민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다이너마이트 폭약--그것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의 무력화를 의미하였다. 당시 북한서적 독서가였다는 그가 간첩은 아니고, 단지 사회주의 혁명가였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꿈꾸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평양 공산주의자들과 거래하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여기서 우리는 전남도청 지하실에 여러 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쌓아두는 것이, 그리고 그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광주시민을 인질로 삼으며,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하여 윤상원이 왕노릇하는 것이 과연 민주화운동인지 김대중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잊혀진 무명의 용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는 전우들을 살해한 폭도들의 소굴에 들어가 이틀 동안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분리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하여 자기 생명의 위협을 무릅썼는가? 바로 광주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홍위병들은 그를 학살 군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광주시민을 인질극에서 해방시켰으며, 대한민국 국민을 인질로 삼아 미국의 참전을 무력화시킨 다음 남침하려던 김일성의 꼼수에 철퇴를 가하였다.
우리는 잊혀진 그 무명의 용사를 기억하여야 한다.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전남도청에 쌓아둔 이들을 민주화운동가로 칭송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다이너마이트 폭탄으로부터 뇌관을 분리하여 광주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려 하였던 용사들을 범죄자로 모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민주화운동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도청에 가득 쌓아두는 것이, 그것도 북한이 남침 기회를 호시탐탐하던 그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국군에게 기관총을 발사하고 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쌓아둔 윤상원을 이해하고 우정으로 추모하려는 우리의 의사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누가 우리에게 그를 민주화운동 열사라고 부르라고 강요한다면 과연 그것이 법치 민주주의일까?
광주사태와 북핵위기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인질이 자기를 인질로 삼는 자에 대한 태도이다. 만일 납치범은 민주화운동가라는 칭송을 받고, 인질 대신 납치범과 싸워 생명의 안전과 자유와 희망을 되찾게 하여준 자는 범죄자 취급을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이상한 나라이다. 북핵위기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우리를 핵인질로 삼는 김정일의 꼼수인가? 그것은 우리를 핵인질로 삼고 벼랑끝 외교로 밀어붙여 북미 불가침조약을 맺으려는 것이다. 그들이 평화를 위해 북미 불가침조약을 요구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남침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는 것이다.
노무현씨는 그의 꼼수로 유명하다. 반미촛불시위를 부정선거운동에 이용하는 꼼수를 부리던 노무현씨는 븍핵위기는 없다고 우기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바꾸어 (한국 편에 서는) 미국이 북핵 문제로 북한과 충돌하면 미국을 말리겠다는 꼼수 공약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김정일은 노무현씨의 당선 선물로 북핵 위기를 주었다. 문제는 노무현씨가 그 답례로 주한미군을 전방에서 철수시키는 선물을 김정일에게 선사하였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북핵 공갈인가? 우리 민족을 인질로 삼고 미국과 거래하여 이것 저것 뜯어내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노무현씨는 꼼수로 애국 반공 정당들을 와해시키는 일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한총련 등 남한 좌익에게 한나라당을 와해시키라는 지령을 내렸을 때 애국 반공 정당들을 와해시키는 일을 공작 정치로 거들어주는 것은 김정일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이다. 핵무기로 우리 백성을 인질삼는 강도 편에 서려 하는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그것을 국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s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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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스타 2004/04/21 얼마전 탈북자 고위 장교출신이 증언한 내용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탈북장교는 남한정부를 믿지 못하겟으며 온통 발갱이 세상이므로 미국의 교포 방송국에 제보하였습니다 김일성은 2개여단을 시민군으로 가장하여 남파시키고 (1000여명)광주를 접수한뒤 역으로 위로 치고올라오면 남침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도움인지 1000여명의 위장북괴군은 사살되고 오늘날 1000명이 묻힌 묘지가 북에 있는데 모두가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사학도 2004/05/12 레일스타님의 말이 맞습니다. 시민군 중에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입니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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