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론
시민 케인은 형식주의의 걸작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뉴스릴 시퀸스나 딥포커스 촬영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앙드레 바쟁 같은 사실주의 비평가도 이 영화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들은 역시 화려한 기교로 이루어진 시퀸스들 입니다.
웰즈는 영화사상 위대한 서정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보여 주는 현란한 스타일은 장식적인 화면, 어지럽게 움직이는 쇼트들, 고도로 질감을 느끼게 하는 음향, 변화무쌍한 편집 스타일, 고도로 분절화된 내러티브, 그리고 마구 뒤섞인 상징적 모티프 등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이 영화에 광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대담한 기법들입니다. 시민 케인이 작가의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웰즈는 이 영화의 제작자였으며, 또한 대본의 공동 집필자였고, 배우와 스텝을 직접 선택했고,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영화 전체의 제작을 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는 웰즈 특유의 주제인 복합적 성격에 탐구를 그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종의 작가의 자기 반영이랄 수도 있는 눈부신 스타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도 역시 전형적인 작가주의 영화에 속합니다.
웰즈는 언제나 자신의 동료들, 특히 배우들과 촬영 팀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전적으로 사령관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민 케인에 얽힌 흥행의 역사와 비평사는 그 자체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머큐리 극단이 파산한 직후 RKO 영화사는 24세의 웰즈에게 전대미문의 계약 조건을 제시했고 영화 한편당 15만 달러와 총 입장 수입의 25%를 보장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떤 영화든 제작자, 감독, 각본, 혹은 주연을 맡을 수 있었으며, 자신이 원할 경우에는 이들 네 가지 역할을 모두 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의 책임자였던 조지 쉐퍼만이 행할 수 있었던 미술 통제권도 전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RKO사는 그 짧은 역사 내내 그래 왔듯이 재정적인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RKO 스튜디오는 1928년 은행가 조셉 케네디와, RCA 사와 NBC 방송의 사장이었던 데이비드 사르노프가 설립하였다. 사르노프는 이 스튜디오가 '영화판 NBC'가 되어 주기를 희망했습니다.
케네디는 약 500만 달러의 이익을 얻고는 곧 손을 뗐습니다. 희망찬 출발을 한 뒤 RKO는 곧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 이는 주로 계속된 경영진의 교체와 이로 인한 일관성 있는 정책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과 달리 RKO에는 지속적인 일관성이나 독특한 스타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르노프와 그의 새 동업자 넬슨 록펠러는 RKO가 세련되고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 내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예술적인 가치와 흥행적 성공은 쉽게 일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쉐퍼가 웰즈를 고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들고 왔을 때 사르노프와 록펠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흥행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고급 영화를 제작하는 데는 이 젊은 천재, 브로드웨이와 라디오에서 이미 대성공을 거둔 바 있는 웰즈야말로 적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9년 웰즈가 할리우드에 올 당시, 분위기는 대단히 험악했고 대부분의 감독은 나이 서른 다섯 이전에 'A급 영화'의 연출을 맡을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여기는 판국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인이며 풋내기인 웰즈는 첫 작품에서부터 완벽한 자율권을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이건 어린애가 가져 본 제일 큰 전기 기차 같구먼." 웰즈가 RKO의 제작 시설을 둘러보고 던진 비아냥거림 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한 웰즈에 대해 대부분의 영화 관계자는 예술가인 척하고 시건방지며 오만한 녀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웰즈는 영화계를 공개적으로 비웃음으로써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웰즈는 "할리우드는 골펀 정원사, 평범한 사내들, 자아 도취에 빠진 스타 지망생들에게나 어울리는 황금의 도시" 라는 식으로 할리우드를 조롱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웰즈는 제멋대로인 젊은 수재였고 젊은 혈기에 멋대로 내뱉은 경솔한 농담 탓에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시작부터 시민 케인의 제작에는 불꽃 튀는 반대가 터져 나왔는데 홍보에 관한 한 전문가였던 웰즈는 영화계 전체가 공론으로 웅성거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촬영은 '철저하게 비밀 속에' 이루어졌는데 주인공이 어떤 인물과 비슷하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허스트 신문 그룹의 가십 칼럼니스트 라웰라 파슨스의 귀에 이 영화가 그룹 회장의 사생활을 다룬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어가자 그는 허스트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 영화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제작이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허스트의 캠페인도 치열해 졌습니다. 영화 개봉 전에 필름을 파기 하지 않으면 차례로 스캔들과 비리를 폭로하겠노라고 영화사를 협박했습니다.
허스트의 심복이며 영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MGM의 루이스 메이어는 RKO에 만약 네가 필름을 파기한다면 제작 비용과 약간의 이익금을 합쳐 배상하겠노라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허스트는 다른 스튜디오 산하의 극장에 영화를 걸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자신의 신문들을 통해 웰즈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으며, 징병 기피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RKO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웰즈는 이에 대해 영화가 개봉되지 않으면 법원에 제소하겠노라고 위협했고, 결국 RKO는 모험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민 케인은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보슬리 크라우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의 하나"라고 이 영화를 평가했습니다.
수많은 걸작이 쏟아져 나왔던 1941년의 뉴욕 비평가협회상에서 이 영화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에서는 아홉 개 부분에 걸쳐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웰즈는 야유를 받아야 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직 각본 부분에서만 오스카상을 받았다는 것이고 폴린 케일은 이에 대해, 할리우드 정통파인 맨키위츠를 지원하고 남우주연상,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에서 탈락한 웰즈를 일종의 벼락 부자로 깍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시민 케인은 흥행 면에서 참패를 기록했으며 이로써 웰즈의 할리우드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걸작인 위대한 엠버슨가는 비밀 시사회에서 관객의 호흥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고, RKO는 131분짜리 영화를 88분으로 줄여 버리는 대신, 엉뚱한 해피엔딩을 추가시켰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바로 이어 RKO는 경영진을 교체했고, 웰즈와 쉐퍼는 회사에서 밀려났습니다.
웰즈에 대한 비평가들의 애정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그러했습니다. 1950년대초부터 거의 대본에서 발췌된 내용이 "영상과 음향" 이나 "오늘의 영화" 같은 잡지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주도한 "카이에 뒤 시네마"지의 비평가에게 웰즈는 영감의 원천으로서 거의 우상 같은 존재였습니다.
장 뤽 고다르는 "우리 모두는 웰즈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트뤼포는 영화를 시작하는 수많은 프랑스 감독에게 시민 케인이 자각이 되었으며, 자신의 영화 미국의 밤에 이 유명한 영화에 대한 찬사를 포함 시켰습니다.
웰즈에 대한 비평적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고 웰즈가 사망한 1985년에는 그에 관한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영국의 고급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비평가를 대상으로 10년마다 실시하는 국제 설문 조사에서 시민 케인은 언제나 베스트10의 첫머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을 뽑는 투표에서도 언제나 가장 많은 표를 얻고 있는 감독도 오손 웰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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