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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와 내성천 은빛 모래알
2017.06.18.(일, 맑음)
영주SKY찜질방(10:20)→보리밥집(10:35~10:50)→영주여객터미날(11:00~30)→무섬마을(11:50~12:50)→외나무다리(12:55~13:20)→내성천따라(~13:50)→도토리묵(14:10~15:20)→버스정류장(~15:35)→안동역(16:10~17:58)→반곡역(19:35)
죽령으로 올라 연화봉 희방사로 하산 온천할까 했는데
초암사로 내려오는 길이 예상보다 길게 느껴졌는지....
냉온탕을 오가다보니 죽령행 첫차(08:00)를 타기엔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영주시민께 영주시에 가볼만한 곳이 어디냐고 여쭈니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요.
뭐 특별한 것이 없다는 듯이 하시더니만 무섬이라는 곳을 추천하신다.
무섬을 기역하고 나오자마자 관리인에게 여쭈니 무섬가는 버스가 있다며 정류장에 가보란다.
재래시장은 하나둘 문을 열기시작하는데 먹고픈 메뉴가 뵈지 않는다.
찜질방이 있다며 안내해 주신 분이 저렴하면서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보리밥 식당이 이 부근인 것 같다.
노점 아줌마에게 이 부근에 좋은 보리밥집이 있다는데 어느 골목입니까 여쭈니 첫번째 골목안에 있다 하신다.
골목안을 살펴보니 웰빙보리밥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문이 열려 있는데 예상보다 작게 느껴진다.
아줌마 두분이 찬거리를 만들며 바쁘신지라 나홀로 찾아온 첫번째 손님이 반갑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일찍 왔다며....
이것 저것 푸짐하게 넣고 먹을 수 있다 했는데 혹시 잘 못 들어왔나?
하지만 아침시간인지라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데 냉장고에서 찬거리를 꺼내 벌려 놓는다.
된장국과 시원한 냉국을 주시더니만 대접을 챙겨 먹는 방법을 안내해 주신다.
상취 가지나물... 이것 저것 넣고 보리밥 2주걱 떠서 시원한 냉국 마시며 늦은 아침을.....
시장부근 정류장에서 알아보니 무섬행 버스가 20번인데 11:30분에 영주출발이라고
여기서 무섬행 버스 탈 수 있습니까 여쭈니 영주터미날로 가보라 하신다.
영주여객터미날이 가까이 있다했으니 버스따라 걸어간다
승객대기실에 한두분이 계시는데 무섬가는 버스가 어떤 것이냐고 물어봐도 모른다며....
20번은 와현과 용혈 두곳이 있는데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기사대기실로 가서 확인하니 20번이 간다며 와현행을 타라신다.
출발시간에 맞추어 하나둘 떠나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차도 있는데 안내방송은 전혀 없다.
승객이 알아서 출발시간이 되면 출발대기선에 정차된 버스를 찾아가야 한다.
버스 이용객의 대부분이 고령이신지라 물어본다는 것도 어렵고 .....
현지 정보에 익숙한 자는 문제되지 않는 것 같은데...
나홀로 관광객이 감내해야 할 불편이라 보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만나보기 어려우니...
스마트폰 검색해도 잔글씨 확인할 수도 없고 눈만 아프니 여행도 젊었을 때 해야 하는가 보다.
와현행 버스는 영주역 뒷편길로 달려 좁은 시골길을 이리 저리....
정류장 안내방송이 나오지만 처음 가는 자에겐 뭐가 뭔지 빠르게 이해되지 않는다.
무섬마을을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는데 버스 종점 와현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
혹시 지나쳤다면 할 수 없지 되돌아가는 수밖에.....
종점같은데 관광버스도 보이고 무섬이란다.
와현이 무섬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와현지방에 무섬이라는 마을이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애초부터 무섬과 와현을 병기해 놓으면 좋으련만....
아는 분에겐 문제되지 않지만 외지인에겐 시행착오를 일으킬 법한데 ....
이럴때 카카오맵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스마트폰 이용술이 익숙하지 않으니...
관심 갖고 이용해 봐야 할 것 같다.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예전 방식만 의지해서야 되겠는가
드넓은 모래사장을 넓게 흐르는 물길이 무척 좋아보인다.
다리 건너니 전통한옥 집성촌이다.
박씨와 김씨 가문이 대를 이어 살았던 것 같다.
옛기역을 떠올리게 하는 전통 한옥인데 특이하게도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모래땅이라 우물파기는 쉬웠을 것 같은데 집터가 내려 안는다는 이유로 금지했나보다.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가 무척 예쁘고 보기 좋다.
몇개 따 먹고..
문화재청 예산으로 이 지역 일대를 전통한옥집성촌으로 꾸며 놓은 것 같다.
관리할만한 후손이 있는 집을 우선적으로 개량한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집은 잡초에 뭍혀 가는 것 같다.
무섬마을 자료전시관에 들어서니 자세한 영상 안내도 나온다.
그 옛날 선비 양반계층인 박씨와 사돈지간이 김씨 가문의 집성촌으로 타성을 가진 분은 끼어들 수 없었나 보다.
그만큼 양반계층끼리 단합이 강했던 것 같은데 무섬마을 주변엔 농지가 없고 낮은 구릉지 산이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가야 산구릉지 사면에 논밭이 있을 뿐이다.
비가 많이 오면 고립될 수 밖에 없는데 다리 건너편 토지는 전부 양반계층 소유였으니 하류계층은 소작농으로 근근이 목숨을 연명했으리라.
양반의 눈밖에 나면 소작농마저 할 수 없고 타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을테니
그야말로 주인과 종처럼 살았을 것 같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자들은 생계문제로 고민할 것이 없었을테니
온종일 하늘천 따지 사서삼경만 외우며 그야말로 품격있게 살았나 보다.
부모의 뛰어난 유전자는 대를 이어 내려 갔을테고 남보다 높은 학식을 갖게 됨은 당연하리라.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후예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살았던 집터는 전통한옥마을이라는 문화재로 탈바꿈되어 정부예산으로 품격 높은 한옥으로 꾸며져 관광상품으로 관리되는 것 같은데 ....
엄청난 규모의 전시관 건물을 보니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양반과 상놈으로 삶의 모습이 철저히 구분되었던 시대
상놈에 대해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양반은 상놈을 대할때 전혀 예가 없었다니
노인은 양반계층 아이를 도련님이라 존칭하지만 도련님은 상놈집안 노인을 향하여 이리 오너라 했다니....
상놈집안 후예들은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고 온종일 노동력을 받쳐야 그나마 연명할 수 있었을테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대가 있었나 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모양새만 바뀌었지 실제 모습은 예나 다름없이 여전하다 할 것 같다.
가진자의 횡포 학식이 높고 머리회전이 빠르고 명석해도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부귀영화를 도모하는데만 이용되었다면?
전시관을 둘러보니 이마을 출신중에 애국자도 있었다는데....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강자의 말은 언제나 옳고 개도 우러러 보이지만
약자의 말은 아무리 옮은 말이라해도 어리석게 취급당하기 쉬우니....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칼을 소지하지 못한 상사의 말은 자칫 부하직원들로부터 꼬투리를 잡히기 쉽고
말빨이 서지 않지만
부하직원을 향하여 잘 드는 칼을 갖고 있는 상사라면 분위기는 확 달라지지 않는가
아무리 어리석은 말을 해도 지당하십니다. 하며 예를 갖추며 아양을 떨지만
칼이 없어지는 순간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마저 들추어 내며 당장 잡아먹듯이 덤벼들지 않는가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리라.
살기 좋은 곳은 어딜가나 양반계층이 독차지 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곳 무섬을 휘돌아 가는 물길은 보기에도 좋지만 수정같은 맑은 물결속에 일렁이는 은빛 모래알은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다.
물고기도 많으니 천엽으로 한끼 매운탕 먹거리는 쉽게...
외나무 다리가 있어 갈수기 때는 건너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수량이 많아지면 아무래도...
지금의 외나무 다리는 오직 관광객만을 위한 볼거리이지만...
그 옛날엔 이마을 저마을을 이어주는 귀한 역활을 했으리라.
긴 가뭄으로 적은 수량인데 드넓게 흐르다보니 깊은 수심은 없는 것 같다.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어찌나 많은지 어떤분은 손으로 잡겠다며 이리뛰고 저리뛰며...
잽사게 한마리 잡았는데 꽤나 커 보이는데 은빛 비늘에 무지개 색이 돋는다.
살려 주면 좋겠다 하니 놓아주는데 기절했는지 꼼짝도 안하고 물살에 휩쓸려 내려간다.
신발 벗고 물길따라 걷고 싶은 충동이...
이런 기회도 또다시 올까 생각끝에 신발을 가방에 매달고 시원한 물길따라 부드러운 모래 밟으며...
외가리도 풍족히 먹었는지 먹이활동보다는 시원한 물가에 앉아 쉬는 것 같다.
물속 모래알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데 일정한 위치에선 더이상 밀려 내리지 않는지 같은 형상을 유지한다.
금새 깊은 곳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게도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밟아보니 수렁처럼 쑥쑥 들어가는데 좀 더 위쪽으로 이동하니 안정되었는지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보기엔 똑같은 모래밭으로 뵈지만 밟았을때 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달라지는 것 같다.
동강을 건너려 했는 지점 바로 아래는 수심이 깊었지만 바로 위 모래톱만큼은 낮아 보였는데
밟는 순간 죽처럼 푹푹 빠질테니 중심 잡기도 어렵고 물쌀이 센 곳이라 상당히 위험했을 것 같다.
역시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알기는 어려운가 보다.
겉보기엔 금새 건너갈만한 곳으로 보이지만...
나가는 버스는 15:00 영주발이니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가방속에 남아 있는 동강 막걸리가 있으니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기대했던 도토리묵이 내가 기역하는 그 맛이 아니다.
오이나 야채만 가득할 뿐 도토리묵이라는 것이 도대체 이런 음식인지....
전통마을이라면 최소한 우리의 고유 먹거리를 제대로 먹을 수 있어야 할텐데 관광지마다 돈독이 올랐는지 수익에만 급급한다면?
한번 속지 두번 속지는 않으리라.
왠만하면 이곳에서 먹지 않으려 할 것이고 들어올 때부터 준비해서 올텐데...
전통한옥에서 우리만의 전통 음식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관광중엔 그 지방의 고유음식도 중요한 추억으로 남는 법인데....
이곳에서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양반계층은 모두 출세해서 도시로 나갔고 빈집만 남겨진 것 같다.
이제까지 살고 계시는 노인(84세) 한분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여쭈어 보는데...
장마철엔 외나무 다리가 잠겨 학생은 물론 마을사람 모두가 같히고 때로는 가옥들이 침수피해로...
그럴지라도 이곳만큼은 양반들만 사는 곳이라며... 한때는 자긍심을 갖고 이곳을 고수했나 보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모든 것이 변했는지 이제는 돈만 있으면 그 누구나 양반대접을 받으며 양반처럼 품격 높게 살아갈 수 있으니....
돈만 있으면 종 부리듯이 마음대로...
돈이 없으면 아무리 품격이 높았던 자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외면당하고 종으로 추락할 수 밖에 없으니....
그뿐이랴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라 하지 않는가
그 옛날 양반은 자기 눈에 드는 여인을 마음대로 취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설령 알아도 입밖에 내는 순간 곤장을 맞고 목숨까지...
양반이라 해서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오직 양반이기 때문에 모든 허물이 감추어 지고
상놈집안은 오직 상놈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대접에서 제외되어야만 했으니....
양반 상놈을 구별하는 문화는 어디로부터 유래되었는지 참으로 한심한 것 같은데
오늘날에도 모양새만 바뀌었을 뿐 이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게 계속되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우애를 돈톡히 한다며 뭉쳐서 세력경쟁을 하고
자기들보다 강한 세력에겐 잘 봐달라며 극진히 모시고 자기들보다 약한 세력에겐 별 것 아닌 것으로도 버릇없다며 질타하며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으니....
우리들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동물과 무엇이 다르랴.
동물도 끼리끼리 뭉쳐서 외부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데
사람은 동물보다 교묘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으니...
동물보다 사악한 존재라 할만 하지 않을까
영주역광장 한때는 오가는 자들로 붐볐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매우 한산한 편이다.
대합실에만 몰려 있을 뿐....
갈수록 인구감소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한세대가 가고 또 한세가 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살아가는 모습은 끊임없이 변해갈지라도 그 속에 잠재된 문제들은 계속되나 보다.
요즘 아이들은 어찌나 영특한지 어른 못지 않은 모습도 있지만
어린애 답지 않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데 지혜로우면서도 사악한 방향으로 악화되어가는 것 같다.
부모를 없신 여기고... 이런 세대로부터 무엇을 바라겠는가
아이들이 귀엽다하지만 잠시잠깐이요 사악한 존재로 돌변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류멸망으로 향하는 징조는 아닌지?
식사할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무엇이 그리도 중요하고 알고 싶은지?
돈만 주어진다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세대들
그들에게 부모 형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세상이 이토록 변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더이상 속지 말자
남은 삶만이라도 나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인생 마무리를 의미있게 해 가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자식세대에게까지 부를 물려 주고싶다며 모든 것을 희생한 우리들 부모님 세대
평생토록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그분들의 수고는 말로 형용할 수도 없을텐데 지금 우리세대가 얼마나 그분들을 기역하며 감사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