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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차천자 없이 정읍 우도농악 없다 | ||||||||||||||||||||||||||||||||||||||||||||||||||||||||||||||||||||||||
권희덕의 정읍문화뿌리찾기...100인 농악대로 황궁소리 궁상각치우 관현악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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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천자로 자처했던 보천교주 차천자이야기를 황궁 농악수 신기남과 강증산의 손자이자 1958년 산성국교 교감인 강경석의 증언을 직접 듣고 문헌을 찾아 엮어본다.
증산교의 “전경(典經)”...“궁상가각치우소리안에는 위대한 기운이" 1979년 농악을 연구하는 기자에게 반갑다며 강경석(姜炅聲)이 증정한 강증산의 성경책 “전경(典經)”의 기록에 따르면 “궁상가각치우”소리안에는 위대한 기운이 들어 있어 사람과 신명이 화합하고 천지신명과 천하의 조화가 모두 농악속에 있음을 깨우쳐 주었다. 이것은 공자의 음악사상으로 천둥,바람 비,소리를 모방한 궁중아악의 원리이다. 정읍 입암에 대궁 짓고 조선 유교 궁중소리로 들려주다
강증산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894동학농민혁명이다. 증산은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와 좌절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됐다. 1897년부터 3년간은 동학농민혁명군들을 기도하기 위한 대 명상에 들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미륵불 사상의 성지인 모악산이다. 강증산, 동학농민혁명군을 기도하기 위해 大 명상
일제침략의 단계적 순서로 군사를 해산을 시키고 조선군 군인회관에서 1905 원각사 협율사 판소리 공연을 할 것을 병무대신 조중응에게 종용하였다. 천민을 계급 승격 시켜 기존 질서 혼란 유도 전략, 새롭지 않네~
흥선대원군도 농민을 부추겨 동학농민봉기를 하였고 민비는 양반 최익현을 부추겨 정읍에서 항일운동을 기획했으나 모두 1888년부터 연무공원에서 미국 군사훈련을 받은 관군과 일본국 군사들의 공격으로 무산되었다. 혜민서에서 기생의 가무기예를 관장하는 홍범식을 태인현감으로 1907 그 당시 조선 궁중 혜민서에서 기생의 가무기예를 관장하는 홍범식을 태인현감으로 발령하여 무속인과 서민에게 궁중정악 궁상각치우 격식으로 가르치게 한다. 동학교도로서 반전주의로 예언과 주술에 뛰어난 강증산은 패전한 동학군을 모아 궁상각치우(宮相角치羽;도레미솔라)소리의 궁중음악과 농악을 이용하여 교도하고 고향 고부, 태인현과 원평 금산사 모악산에서 음악으로 기도하는 무속 종교의 기반을 만들었다. 증산은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고 죽었다하나 독립군과의 연결로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최익현 의병 봉기 때 활약한 패잔 세력, 증산 따라 살다 귀향 태인현 무성서원에서 민씨등 최익현 의병 봉기 때 활약한 패잔 세력이 강증산의 신앙지 모악산 신앙터 구리실 주평 등지에서 살다가 1928년에 되돌아 와서 “구리골댁” “주평댁”으로 불리며 사는 이웃 분을 기자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항일 세력이 불안을 느껴 모악산으로 집결됐으나 강증산은 의문의 돌연사로 세상을 하직했다 모악산 무속이나 불교 야단법석과 무속음악, 농악 영상굿 대금, 가야금 산조 멜로디는 꾀꼬리 암수의 토탬소리와 아주 유사하다. 태인현감 홍범식 동학혁명으로 상처 받은 민심, 가무로 위무 동학농민군 전투와 최익현 양반군 봉기 등 연이은 항일 격전의 요새지에 오자 태인현감 홍범식은 가무 기예를 자주 보이고 반항을 방지하는 위문 공연을 태인지역에서 처음 시작했다. 한편 친일파 이용구가 또 다른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시천교라는 종교단체를 정읍지역에서 선교하였다. 그러나 1924년부터 교단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해 1928년에는 이상호(李祥昊)와 그의 동생 이성영(李成英)이 보천교를 탈퇴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아래서 동화교(東華敎)를 창건하였다. 1909년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이 죽고, 그의 부인 고판례(高判禮)가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아 1911년 일명 태을교(太乙敎)·훔치교·선도교 등으로 불리는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車京錫)이 교권을 빼앗은 뒤, 1921년 장차 세우게 될 나라의 국호를 시국(時國)으로 정하고 보화교(普化敎)를 선포한 다음, 이듬해 다시 교명을 보천교로 개칭하였다 증산교에서 나온 보천교
조선왕은 4선무, 중국황제는 8선무 였는데 100명이 넘는 대규모 농악대는 황제 위상의 음악으로 정읍농악 즉 우도농악이 탄생된 것이다. 100명이 넘는 대규모 농악대로 정읍농악인 우도농악 탄생시켜 전국의 모든 농악은 자진모리로 거의 비슷한 군사훈련 박자이다. 그러나 정읍농악은 반드시 그 태평소 소리가 백제가요 정읍사(수제천)의 소리에 맞게 연주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움직이는 관현악 반주로 예술가무의 농악대이다. 조선의 경복궁 궁궐을 우물바닥 같은 정읍 입암 대흥리에 짓게하여 일본의 감시망 안에 존재했다. 조선국의 군사 없는 종교국가를 만들고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뒤를 이은 차경석 교주를' 차천자(車天子)라고 황제의 칭호를 부르게 하였다. 차천자교 보천교, 입암 대흥리가 본부, 당시 일제 총독도 찾아와 면담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천교는 강제 해산되었는데, 당시 헐린 서울 포교당 건물은 조계사를 짓는 데 건축 재료로 쓰였다. 이 시기에 이용구의 친일 동학교인 시천교도 들로 가장해서 독립운동 무기를 갖고 있다하여 칠보면 행단마을에 관군이 야간에 사격하여 몰살시킨 사건도 있다. 동학반군의 정읍지역 평정은 위정자들의 난제중의 난제 일본이 조선을 합방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군사해산, 그리고 동학반군의 정읍지역 평정이였으므로 가짜 궁궐과 가짜 황제로 눈 가리고 조선 백성은 전혀 구경도 못한 황제신분만이 사용하는 궁중악으로 농민 마음을 돌렸다. 귀족만이 부르는 시조 등을 서민도 부르고 서민도 양반갓에 도포도 입고 긴소리를 내어 양반행세를 하려고 판소리, 시조를 배웠다. 이리하여 정읍지역에서 동학군의 위협이 모두사라지자 남원, 광주, 순천, 진주, 통영의 순서로 협율사 공연과 예기원 기생학교가 성행하였다. 시조 역시 서울에서 남산무당이 노래가락을 길고 낮게 부른 것이 유행되어 시조창이 되었다 한다. 시조창은 무당의 노래와 노래가락에서 나와 1906년경 서울 원각사 시절에 궁중사대부 노래를 천인이라서 모르니까 무당의 노래와 노래가락을 가지고 정몽주의 시조 “이몸이 죽고 죽어.....” 또는 남산-이-이-“ 라는 가사로 부른 것이다. 이 시조를 1957년 기자가 다닌 정읍국악원(배영고앞)에서 젊은 유종구 님이 배웠다. 이분은 경상도 대구 시조 교육의 창시자이다.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에서 최고의 명인 대접을 받으며 레코드 및 강의를 맡다가 작고했다.1984년에 기자의 동료 미술교사 (호남중학교 김동호 선생님의) 장인이신데 마침 대구에서 정읍에 들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뵌 적이 있었다. 판소리, 시조창, 농악, 가야금, 거문고 등등에서 정읍인이 명인이 된 이유는... 이처럼 판소리, 시조창, 농악, 가야금, 거문고 등등에서 정읍인이 명인이 된 이유는 서울 원각사, 정읍, 임순남, 부안, 김제, 광주, 순천, 진주, 통영의 동학군지역부터시작하여 군사시설 지역에서 이동백등 명창들이 순회공연하였고 그곳의 재인 서민들이 양반 계급에 올라서는 특진의 영광을 체험하였기에 궁상각치우( 늙은이 소리) 아악형 국악이 성행했다. 판소리 시조창은 무속의 노래였으나 황제의 품위에 맞게 아악음계로 변형 북한이나 영남 강원지방의 민요는 모두가 토속민요 노동민요이며 판소리, 시조창은 모두 정읍과 동학군 반항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판소리 시조창은 무속의 노래였으나 차천자 황제의 품위에 맞게 구성하는 아악음계로 변형했다. 즉 가사를 한문으로 고치고 길고 낮은 소리 일수록 더 양반적이어서 길게 부르는 경쟁이 유행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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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1월 03일 01:04:49 / 수정 : 2008년 01월 03일 10:4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