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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民族)의 성산(聖山) 백두(白頭)에 오르다!
(登頂記 前篇)
2006년 6월 2일, 해군사관학교(海軍士官學校) 개교(開校) 60주년 기념행사의 만찬장에 동춘 해운(東春海運)의 김갑중 회장이 동석했다.
동춘 해운이 바닷길로 백두산 가는 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라, 평생 가고 싶었던 백두산에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야겠다고 이야기했더니 직접 연락이 왔다.
백두산 천문봉(天門峯)에서 일박(一泊) 하는 단체여행이 6월29일부터 5박 6일간 일정으로 출항한다고 알려준다.
러시아 자르비노항
그때부터 여행 출발 하는 날 까지 Internet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백두산 기상관측 통계(統計)는 연중(年中) 일조량(日照量)이 50%인 때가 바로 6월 말에서 7월 초, 그리고 8월 말에서 9월 초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운이 좋으면 천지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나 봄,여름 야생화가 이때쯤 한꺼번에 핀다는 게시물을 보고 있으려니 조급한 마음에 가슴이 뛴다.
2006년 6월 29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버스 편으로 속초로 향했다.
동춘 호는 13시에 러시아령 연해주의 자루비노 항을 향해 출항했다.
장마전선이 접근해 폭우가 내린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바다는 조용했다.
갑판에는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부모를 따라 탑승한 러시아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며 멀어져가는 속초항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6월 30 일
자루비노 항은 서울보다 +2시간(GMT=그린니치 표준시간 + 11)의 시차다.
현지시각 0945시에 부두에 닿았다.
브라디보스톡항 에서 남으로 자동차길 20분의 거리에 있는 초라한 어촌 같은 항구다.
우리나라 초가을처럼 맑은 하늘과, 푸르고 작은 산들이 포근함을 안겨주는 정겨운 포구였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백두산 가는 육로가 시작된다.
보세구역(保稅區域)을 벗어나자 육중한 러시아제(製) 중고 고물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해주 국경 수비대까지 운행하는 관광객 전용 자동차로 냉방장치도 없고, 무표정한 얼굴의 러시아인 운전기사는 슬라브족의 표본 같으다.
버스가 부두를 벗어나자 광활(廣闊)한 초원지대에 아름다운 꽃들이 그림처럼 펼쳐 져있다.
그러나 그 옛날 그 꽃들이 아름답기만 했겠는가?
그 아름다움 속에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애환(哀歡)이 숨어 있는 것을...
이 넓고도 넓은 연해주(沿海州)의 주인은 고구려 발해를 거쳐 대대로 우리 땅이었다.
발해가 망하자 이 땅은 주인 없는 무주공산처럼 버려져 있다가 1860년 북경조약으로 청국이 러시아에 할양(割讓)함으로써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1937년, 척박한 땅을 옥토로 이루어 평화롭게 살던 조선족 17만 명이 스탈린의 강제 이주명령으로 영문도 모른 체 중앙아시아로 화차에 실려 떠났다.
그로부터 이 땅은 다시 인기척 드문 초원으로 변했고 그 자리에 노란 원추리, 자색 붓꽃, 흰색의 초롱꽃과 이름 모를 수 없는 꽃들이 그들의 눈물을 대신하여 초원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동포를 싣고 떠난 기차역을 지척(咫尺)에 두고, 지금은 극동의 동맥 구실을 하는 그 기찻길이 우리 일행과 함께 평행선을 긋고 대륙으로 이어져있다.
안의사가 머물렀던 유허지
또 다른 한편의 단상(斷想)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길목인 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安重根) 단지(斷指) 동맹(同盟)”터가 남아있으나 우리는 정차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내가 현지인 안내자를 통해 러시아인 운전기사에게 잠시 머물러 들꽃 한 송이를 남기려 했으나 일정에 없다고 거절한다.
1909년 2월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12명은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태극기를 펴놓고 각기 왼쪽 무명지를 짤라 “대한 독립”이라 쓰고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狙擊) 사건에 가담한다.
그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안의사(義士)의 총에 맞아 죽었고, 5개월 후인 1910년 3월 26일 안의사 께서는 여순 감옥 에서 순국하시니 우러러 빛나는 민족의 선구자이시다.
자르비노항을 출발한 후 1시간을 달려 중/소 국경 수비대에 도착했다.
까다로운 러시아 국경 통관 절차를 거치고 마지막 Check Point를 벗어나자 중국 땅 훈춘이다.
훈춘구안 장령자 세관은 비교적 간략하게 수속이 이루어졌다.
시차는 서울보다-1시간(GMT+8)이다.
보세구역을 빠져나오자 조선족 좌판 장사꾼들이 모여든다.
시루떡, 옥수수, 쌀 누룽지, 과일 등등 간식거리를 들고 버스 주위를 돌며 애원하다시피 매달린다.
우리 돈 1,000원을 주고 누룽지 한 봉지를 샀다. 구수한 맛이 옛날 고향에서 먹던 맛과 같다.
이때부터 현지 Guide가 안내한다.
연변 조선족 26세, 활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젊은이다.
우선 훈춘시내로 들어와 늦은 점심을 먹고 두만강(圈河)으로 간다.
얼마 가지 않아 권하구안(圈河口岸)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두만강 대교가 나타났다.
모두가 버스에서 내렸다.
강 건너 남쪽이 북 녁 땅이란다. 하얀 건물의 북한 세관이 이웃집처럼 가깝게 보이고 나무 없는 민둥산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간도(間島)는 중국의 동북 삼성(길림성/요령성/헤이룽장 성)일대를 부르는 통칭인데 압록강 상류 북안지역을 서간도(西間島), 두만강 북쪽 지역을 북간도(北間島)라 세분하였다.
이 땅 역시 부여, 고구려를 거쳐 조상이 소유했던 우리 땅이었으나 조선조 후기 한때는 봉금(封禁)정책으로 출입을 금지시켜, 버려진 땅이 되었다.
1881년 조선의 봉금령(封禁令)이 해제되자 함경도 일대의 조선족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여 1910년에는 간도 지역 80%가 조선족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더 많은 이주민이 정착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강 옆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나면서 잠시 머물렀던 유허지(遺墟地)가 있어 가이드의 안내로 찾아갔다.
볼품없는 초가에 몇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안방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방을 나오면서 방명록을 잡고 한참 묵념을 올렸다.
내가 감히 이 민족의 선구자 앞에 눈에 맺힌 이슬 이외에 감이 무슨 글로 위로를 드리고 경의를 표해야 할지 언 듯 생각이 나지 않는다.
“有口無言! 大韓民國 前海軍敎育司令官 權 丁 植 提督 肅拜”라고 쓰는 내 손끝에 가는 경련이 온다.
유허지 앞에 피어난 붉은 해당화는 가신님의 얼이 배어 있으리라!
두만강(내자 자매는 실향민/두만강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이제부터는 두만강 하류에서 강을 끼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의사 유허지를 지나자 연변 유일의 조선족 촌락인 밀강(密江)이다. 가옥들이 한결같이 붉은 기와에 하얀 벽돌담이다.
하얀 벽돌담은 조선족 거주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식이란다.
내 나라에서 살기가 어려워 강을 건넜건만 여진족 만주족 한족 틈바구니에서 유독 저들이 조선족임을 내세우는 그 내재된 자부심과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힘의 표출이 중국정부로 하여금 연변 일대를 통틀어 조선족 자치주를 허용케 만든 원동력이었다.
모든 간판의 상단에 조선어 표기가 의무화 되어 있고 만나는 대부분 사람들이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땅은 잃었어도 언어와 사람은 그대로인 연변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두만강뗏목을 타고 즐거워 하고있다.
밀 강을 지나 15만 인구의 두만 강변 도시 도문시(圖們市)를 지나간다.
위로 자라지 않고 아래로 뻗어 내린 “미소나무” 가로수가 이색적이다.
현지시각 오후 3시 반 조/중 국경 공원에 도착했다.
중조국경
양안(兩岸) 간에 다리가 놓여 있고 두만강에는 한국관광객을 태운 뗏목 놀잇배가 떠 있다.
우리 젊은이들 쌍쌍이 놀잇배를 타고 젊음을 이곳에서 만끽하고 있다.
그 옛날 백두산 통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운반하던 그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고 “두만강”을 구성지게 노래로 부르셨던 김정구 선생의 그리운 내 님은 호호백발이 되어 호구지책으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행상으로 변해있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오후 5시 연길시 에 도착했다.
인구 36만의 연변자치주 제일의 도시다.
모국(母國)의 수도를 가로 질러 흐르는 한강(漢江)이 부러워 연길시가 작은 강물을 막아 마치 우리의 팔당호처럼 시원한 수공간(水空間)을 만들어 시가지가 한층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말이 상용어로 쓰이고는 있으나 재미있는 차이점도 있다.
형광등을---불알
긴 막대 형광등을 -----긴 불알
여러 개 형광등을 ------떼 불알
가로등을------선 불알등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주주점(大洲酒店 DAZHOU HOTEL)에 짐을 풀고 TV를 켜니 반갑게도 우리 방송이 실시간 방송되고 있었다.
일행 모두가 장거리 여행으로 피곤하여 식후에는 연길 제일의 발 마사지로 휴식에 들어갔다.
발 마사지 비용이 우리 돈 15,000원이다.
백두산 가는 길
7월1일.
아침 5시에 기상했다.
TV를 켰더니 중국 방송 차넬마다 “천로개통(天路開通=티베트까지 철도 개통)”을 자축하면서 티베트 비경(秘境)들이 소개되고 있다.
MBC TV에서는 호남에 호우경보로 많은 비가 온다는데 이곳은 맑은 하늘이 초가을처럼 선선하다.
안내자가 백두산 숙영지에서 먹을 간식을 식당에서 나올 때 개인별로 준비하라고 일러준다.
로비에서 만난 어제 백두산 산행 팀들은 천지를 구경했노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우리 일행들 모두가 부러운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0730시에 백두산으로 출발하는데, Guide가 우리의 그런 기분을 눈치 채고 “오늘 날씨로 봐서는 90% 천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의 불확실성이 있으니 우리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합시다.”하고 힘을 돋운다.
1시간 반쯤 달려 백두산이 속해있는 안도현에 들어왔다.
길 왼쪽으로 안도현 상수원인 명월호가 우리의 파라호 만큼 넓게 보인다.
2만 명의 인력이 2년에 걸쳐 조성했다고 한다.
백두산 입구 매표소
여기부터가 장백산(長白山) 제3지대다.
고산지대 날씨 때문에 일반 농사 대신 인삼과 장뇌산삼이 주로 생산되고 있단다.
중국정부가 장백산 자연환경을 보존하려고 청정 구역으로 지정하여 외부인의 주거전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제2지대부터는 인삼재배 대신 원시림에서 벌꿀을 다량으로 생산하여 그 값이 설탕 값보다 싸게 팔리고 있다.
길 양옆으로 매발톱, 초롱꽃, 하늘나리, 말나리, 원추리 등등 야생화가 만발했다.
그 꽃길을 따라 가다가 강을 만났다.
그 강은 백두산 쪽으로 역류하면서 제2지대 중간쯤까지 함께 오다가 왼쪽으로 꺾어져 돌아가고 하늘에는 비가 내린다.
1636년 두만강 북쪽에서 발원한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우고는 자신들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족의 발원지 “부꾸리산”을 백두산이라 믿고 장백산이라 칭하며 이민족인 한족(漢族)이 성산(聖山)에 접근치 못하도록 봉금정책(封禁政策)을 폈다.
1712년 조선조 숙종 때는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백두산을 가로챌 심산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비로 인해 중국과의 국경문제 의문점이 아직도 속 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다.
12시경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한다. 여기부터는 임업이 주업인 장백 제1지대다.
백두산 관광수입권은 처음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다가 동북 공정이 시작될 무렵, 중국정부로 넘어가 길림성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먹고는 가는 길에 “백산다례교류중심”을 방문했다 백두산에서 생산되는 각종 차 맛을 보고 그 생산된 차를 홍보 판매하는 곳이다.
백두산의 묘미를 우선 이곳 차(茶) 맛으로 혀끝에서 처음 느끼면서 백산 국립 관리소(白山管理站)에 도착했다.
입장권을 구매하고는 버스를 관리소 차량으로 바꾸어 탔다.
그 버스는 다시 백두산 입구에서 6인승으로 환승하여 천문봉으로 오른다.
안전문제로 차량통제가 철저하다.
백두산 관리참의 6인승 승합차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잘 포장되었으나 길이 워낙 가파르고 꼬불~한데다가 중턱을 넘어서부터는 안개비가 심하여 오가는 관리참(管理站) 6인승 차량은 한결같이 비상등을 켜고 다닌다.
그러나 내 눈과 마음은 온통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꽃 양탄자에 머물고 있었다.
천지는 안개속에 잠겼다.(2006년 07월 01일 오후4시17분)
오후 3시30분, 백두산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땅은 화산 폭발 시 분출된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현무암이 오랜 세월 풍화를 거친 조약돌이다.
Guide를 따라 천지(天池) 표식지로 갔으나 안개비에 바람까지 거칠어져 낭떠러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참으로 아쉽고도 서운하다.
소문대로 백두산 날씨가 변화무상(變化無常)하다더니 여기까지 오는데 맑고 흐리고 비 오기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천지가 우리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숙소로 향했다.
장백산 기상참(기상참 중국측 요원들의 숙소에서 1박)
하차 지점에서 정상 쪽으로 10분쯤 걸어서 도착한 곳이 안도현 장백산 기상참(氣象站 : 중국 측 기상관측소)이다.
동춘 해운의 준여행사에 한하여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국 측에서 숙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방바닥이 전기장판이라 이런 날씨에는 적격이다.
잠자리 준비를 끝내고 저녁 시간까지는 자유시간이다.
그러나 여기가 백두산 정상 아닌가? 날씨 때문에 그냥 앉아있기에는 너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우산을 받쳐 들고 Internet 정보를 믿고 카메라를 챙겨 산비탈로 나갔다.
예상대로 경사지에는 백두의 꽃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꽃 접사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사이, 안내자 둘이 나를 찾아 정상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니 얼마나 걱정들을 했을까 미안하기도 했다.
19시부터 장백 기상 참에서 저녁 식사시간이다.
일행 모두가 안개비에 실망하면서도 백두산 소고기에 들쭉술로 내일의 쾌청한 날씨를 기원하는 기원(祈願) 배(杯)를 들고 중국 측에서도 우리의 이런 사정을 살펴서 준비된 폭죽을 터트리며 내일 날씨가 좋아지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