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공원은 현재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7호인 울산왜성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학성공원은 1963년 1월 21일자로 국가 사적 제9호 울산학성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으나 1997년에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이 되면서 울산왜성으로 재지정이 되어 이때 국가지정문화재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울산왜성이 처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다. 즉, 1935년 5월 24일자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제1조에 의해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가 고적 제22호로 지정한 것이다(같은 날자 조선총독부관보 제2507호).
◇ 태화강 건너 삼산나루터에서 찍은 일제강점기때 울산왜성(현, 학성공원) 엽서.(윤대헌씨 소장)
당시 울산왜성은 수원 화성, 개성 만월대, 부여 부소산성, 황룡사지 등과 함께 지정이 되었는데 특히 한반도에 있는 왜성 가운데는 부산진 자성대와 함께 최초로 지정된 경우가 된다. 즉, 울산왜성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그들 조상의 전적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경우에 해당된다. 더구나 이 지정일자는 위의 <보존령>에 의한 두 번째 문화재 지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왜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지정 내용이 해방 후 우리 <문화재보호법>이 생겨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도 반성해야 될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글에서 울산왜성의 문화재 지정이나 문화재적 가치를 논할 의도는 없다. 다만 법률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는 문화유산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지를 살펴 둘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다. 어찌되었든 문화재인 “울산왜성은 울산시민에게는 “학성공원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필자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초등학교 시절 2~3번은 이 공원으로 소풍을 갔었다. 이곳이 때로는 학생들의 백일장 장소였고, 사생대회 장소이기도 했다. 올해 일흔 둘인 어머니가 이 공원의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벚꽃놀이를 즐겼던 것이 아마도 삼십 전후 시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나섰던 필자의 나이를 역산해서 나온 추측이다.
◇ 일제강점기때 사진엽서 학성공원 정상.(윤대헌씨 소장)
이처럼 학성공원은 울산사람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공원이었다. 별다른 시설은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었고, 충혼탑과 서덕출 선생 노래비, 태화사지부도 같은 것이 있어서 시민들의 의식을 엮어주는 역할을 했다. 해마다 봄철이면 흐드러지던 벚꽃은 지금처럼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울산시민이 도보로 찾아서 하루를 즐기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1928년이었다. 당시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고적보존과 발전을 더욱 충분히 하기 위해>임학박사 혼다를 초청하여 설계를 하고 1927년 9월 16일 오전 9시에 시작된 공사에는 5,700원이 투입되어 부산에 있는 정원사 수자키 젠타로가 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공사 개시 후 7개월 만에 1만5,000여평의 공원을 조성하여 1928년 4월 15일에 울산면영 울산공원으로 개원한 것이다(조선일보 1928년 4월 17일자).
이날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4월 15일의 개원식에 울산민우회라는 단체가 <울산성지보존회>의 시설 설치를 반대하는 취지에서 행사 참석을 사절했다는 신문보도가 보인다(동아일보 1928년 4월 24일자). 여기서 울산성지보존회는 일제강점기 각지에 보이던 <보존회>중의 하나로 보이지만 그 사업대상이 울산성지 즉, 울산왜성인 것으로 보아서 일본인 중심의 단체이고, 그 단체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의 전적지라는 관점에서 공원정비와 시설을 하는 것에 울산민우회가 반대했다는 의미이다.
처음 이 자리에 공원이 만들어진 계기는 울산의 선각자인 추전 김홍조가 1913년에 땅 7천평을 사들여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고 가꾸어 훗날 이를 울산면에 기증했다고 하는데서 시작된다. 이 내용은 「울산유사」와 지역 일간지 기사에서 확인되지만 그 근거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일제시대의 지적도를 보면 학성도 68번지(638평)의 지목이 <전>에서 <공원>으로 바뀐 것이 보이고, 64번지와 66번지는 <공원>이 되었다가 다시 지목이 <전>이 되어 있는 등 정확한 사실은 확인을 하지 못하였다. 아무튼 <공원>이라는 지목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면적>에서는 차이를 많이 보인다. 김홍조는 1922년 7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1929년 4월 12일에는 학성공원에 김홍조 공덕비가 세워져서 당일 오후 영시 40분에 울산면 주최로 제막식이 거행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9년 4월 15일자). 이 공덕비는 예전에 시멘트로 만든 미니 골프연습장이 있었던 2지환(니노마루) 바위 위에 지금도 서 있다.
현재 학성공원은 도시공원 중에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면적은 2만2,385평이다. 면적과 역사에 비해서 우선 공원 시설이 절대적으로 열악하다. 벤치와 가로등 정도가 있을 뿐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변변한 시설이 없다. 찾는 사람이 적다보니 시설은 더욱 낙후되어 가고 있다. 또한 공원 주변의 도시계획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다. 공원을 둘러싼 수많은 광폭 도로에 의해 공원 접근로는 단절이 되었고, 태화강과 학성 제2공원으로 연결되는 녹지 축은 끊어져 버렸다. 시가지 조망장소로 탁월했던 지형적, 위치적 특성도 주변일대의 난개발과 무분별하게 조성된 수목으로 인해 방해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학성공원 사진을 보면 대형 수목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민둥산에 가깝다. 민둥산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도시공원이 무조건 나무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주민의 이용행태를 잘 반영한 공원계획이 절실한 부분이다. 또한 공원의 지형적, 위치적인 특성도 공원개발 계획에서 잘 반영이 되어야 한다. 조망을 살릴 것인지, 녹지대로 조성할 것인지, 산림욕을 할 것인지, 볕이 따가울 때 그늘을 제공하면 될 것인지 말이다.
◇ 울산학성(현 학성공원, 울산왜성지).
학성공원은 큰 틀에서 보면 지형적으로는 함월산에서 학성제2공원을 지나 태화강을 넘어서 돗질산으로 이어지는 도시 녹지축의 가운데에 있다. 역사적으로는 울산주민이 농업적 틀을 벗고 상업과 교역으로 발전할 때의 중심지였다. 통일신라 이후의 울산 중심은 이곳 학성제2공원과 학성공원, 그리고 반구동 일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울산 발전의 출발점을 가꾸는 의미도 공원개발 방향 속에는 들어가야 한다. 이런 측면을 살려서 학성공원이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슨 형태로든지 태화강과 학성제2공원을 연결하는 동선 확보가 관건이다. 또한 학성공원의 성격에 걸맞는 공원 시설 계획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학성공원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 선인들이 울산 최초의 공원에 담아내고자 했던 염원을 되살려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삼건 울산시민연대 도시모임 대표/ 울산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