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해뫼” 라 일컬어지는 해미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점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박해(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 이외에도 해미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그 중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진영에서의 천주교 신자 처형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년동안 처형된 숫자는 수천 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해 동안에 해미진영(지금의 해미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내포 지방에서 한티고개를 넘어 끌려 온 천주교 신자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이곳에서 10년간 옥살이 중 옥사하였다). 이 감옥 터에는 당시 손발이 묶이고 머리채가 묶인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가 지금도 그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이러한 감옥 터를 1950년대에 해미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였고 순교 기념비만 세워 놓았다. 그후 오늘날 그 터의 교회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진영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석형, 동사형, 백지사형 등으로 죽인 것이다. 특히 이곳은 다른 순교지에서는 볼 수 없는 처형방법이 있었는데, 즉 자리개질이라 하여 돌다리 위에서 두서 너 명이 천주교 신자의 팔다리를 잡고서 들어 메쳐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해미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은 해미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70여 평 정도의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 하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 돌은 1956년에 서산 동문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순교 현양비와 함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신자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편리함을 위해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곧 해미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나가 아무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 사람들을 묶은 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묻어 버리는 방법을 말한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신자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번거로움을 덕기 위해 개울 한 가운데에 있는 둠벙에 빠뜨려 죽이 는 수장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지역 외인들은 천주학 죄인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둠벙” 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이름조차도 변하여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으며 이때 나온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1935년(일제강점기)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아래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이 있었는데, 그 때 발견된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은 이곳 순교 터에서 12㎞ 떨어진 상홍리 공소 근처 백씨 문중선영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 터인 현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그곳에는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유해의 일부는 별도로 특수 처리하여 유해 참배실에 모셔 순례자들이 기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겨우 70여명만이 그것도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외는 모두 무명 순교자들이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 중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은 홍주(홍성) 및 공주등 상급고을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서민층의 신자들은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이곳에서 처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수천 명 해미순교자 가운데 인 언민 마르띠노, 이 보현 프란치스코, 김 진후 비오. 3분만이 시복시성대상에 올랐을 뿐 아직 성인성녀가 계시지 않다.
오늘의 해미성지 모습은 1985년 4월에 해미본당이 설립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 ”가 발족되었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이곳 생매장 순교지를 1998년말까지 약 7000여 평 확보하였으며 회원들의 성금으로 2003년 6월에 성전이 건립, 봉헌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순교자들이 이곳까지 죽음의 행렬을 하면서 기도하던 “예수 마리아! 예수마리아!” 소리를 "여수머리“ 로 알아듣던 당시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오늘날에는 ”여숫골“ 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해미순교성지 입구의 성지안내석
대성당 입구 모습
해미성지 모습..
성당 마당에 서 계시는 성모자상...
유해참배실...
유해참배실 내부 모습
유해참배실 입구에 있는 치아들...
아곳에서 찾아낸 유해인 듯 합니다...
저 멀리 덕산에서 한티고개를 넘어 해미읍성으로 잡혀오는 순교자들...
해미지역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띠노의 말씀...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여숫골 비석
해미성지 관한 시
진둠벙 안내석...
'팔을 묶여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둠벙속에 쳐박혀 죽게 하였다'
진둠벙 모습...
십자가의 길 안내석
14처중 1처의 모습...
감옥에서 의연한 순교자....
순교자 현양탑과 무명 순교자들의 묘...
무명 순교자들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