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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콘서트 1부】 현기영 소설가 & 맹문재 시인 대담
일시 : 2020년 5월 23일
장소 : 현기영 소설가 자택
■ 죽음에 대한 생각
맹문재 : 선생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살아가기 바쁘다 보니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네요. 오늘 경기민예총의 문학콘서트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바다와 술잔』(화남, 2002)이라는 산문집에 실린 표제작을 깊은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절망감, 폐결핵 말기로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 그것으로 인한 자살 시도 등의 이야기가 성장기를 거치는 한 인간 존재의 모습으로 선명하네요. 자살 바위에서 투신한 미대생 선배, 학생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인기가 꽤 있었는데 4·3항쟁 때 토벌대에 살해당한 자신의 형 망토를 입은 채 양잿물을 마신 동네 선배, 말고삐를 먹구슬나무에 걸어 목을 맨 선배,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두 친구 등의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네요. 선생님께서 몸속의 죽음을 달래고 길들이기 위해 이전보다 고향을 자주 찾는다고 하셨는데, 요즘도 제주에 자주 가시는지요?
현기영 : 죽음을 이야기하니까 성장기에 목격했던 선배님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에 겪었던 4·3항쟁의 수많은 죽음이 제 일생을 움직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 같아요. 죽음에 대한 감각이 지속적이니까 이것을 해소해야 하겠죠. 늙어간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데, 도시에 산다는 것이 회색 시멘트 공간 속에 갇혀 있어 죽음이 정말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도시를 벗어나서 제가 태어난 제주도라는 섬에 가면 그 특유의 풍광과 소년 시절에 겪었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되죠. 그러면 도시 속에 억눌려 있던 심성이 풀리고 해방감을 느끼게 돼요. 사실 저는 유년시절과 청년 시절까지 바다와 친숙하게 살았죠. 서정주 시인은 자신을 키우는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하는데(웃음), 저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다였다고 할 수 있죠. 서울로 공부하러 왔을 때는 제주도 바다를 가슴에 안고 온 거죠. 투명하고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가 도시의 삶을 살다 보면 혼탁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정화하기 위해서 제주도에 내려가죠. 노년에 들어서 더 자주 고향에 갑니다. 자연 속에서 죽음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감미롭게 느껴져요. 자연 속에서 풀꽃을 들여다보면 나의 혈연처럼 느껴져 가까이에서 풀꽃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고, 심지어 입도 맞추어 보죠. 풀꽃도 좋고 억새꽃도 좋고 광대나물꽃도 좋고, 거의 나라고 하는 인간과 대등하다는 느낌이 들죠. 식물 또는 풀꽃이 피었다 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땅에 묻히면 풀꽃이나 초목의 거름이 되어 자연 일부가 된다는 느낌이 와요. 그래서 죽음이 아주 자연스럽고 좋아 보여요.
■ 4·3항쟁의 작가
맹문재 : 소설가 현기영 하면 대부분 4·3항쟁을 그린 작가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제주도에서 태어나셨고,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4·3항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선생님께서 4·3항쟁을 작품화해온 동기 또는 의도는 무엇인지요?
현기영 : 저의 고향은 제주도 외곽이라고 볼 수 있는 ‘노형’이라는 마을입니다. 4·3항쟁 때 초토화 작전으로 불타버린 곳이죠. 그때 130여 개 마을이 완전히 불타서 없어졌는데, 노형마을도 불타서 없어졌죠. 그 후 다른 부락들은 재건되었는데, 제가 태어난 노형은 지금까지 재건되지 못한 상태로 있어요. 밭으로 되어 있는 고향을 생각하면 마치 현기영의 존재 일부가 타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늘 있어요. 소년 시절까지 제주도에서 지냈는데, 어른들이 행사 때 주위에서 수런수런하는 이야기가 다 4·3 때 이야기예요. 그때 누가 죽었고, 누가 어쩌고 하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어요. 그런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제주도 전역에 퍼져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저는 그 분위기가 싫었어요. 마치 유독성 기체가 가득한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들었어요. 그 때문에 빨리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었지요. 그런 것들은 성장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났는데, 와보니 말하자면 4·3을 피해서 육지로 온 것처럼 되었죠. 왜냐하면 4·3이 주는 슬픔과 공포와 가난이 싫어서 그것들을 버리고 탈출한 건데, 막상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시간이 지나니까 비참한 경험을 겪었던 제주도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주도에 있었을 때는 나이도 어렸지만, 그 분위기란 것이 슬픔, 공포 그런 것이어서 싫었어요.
소개한 것처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펜대를 굴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지요. 습작할 때는 4·3과 관계없는 글을 쓰다가, 데뷔하고 보니까 펜대가 무거운 거예요. 펜을 굴리는 것이 권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 특히 펜대를 가졌는데 제주 4·3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왔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말을 하는 편인데, 꽤 오랫동안 실어증 형태로 말을 더듬었어요. 그것은 4·3이 주는 억압이라고 생각해요. 유년시절 4·3의 공포가 심했죠. 이 억압을 풀어야겠다는, 이걸 해방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4·3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해방이 안 되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4·3에 대해서 글을 썼어요. 중편 하나, 단편 두어 편 쓰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지금까지도 4·3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마음 편하게 4·3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중간에 문학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4·3 소재를 그만두고 보편적 소재, 주제를 가지고 써보자 했는데, 악몽을 두어 번 꾸게 돼요. 지독한 악몽이었어요. 『순이 삼촌』을 쓴 뒤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에 끌려가서 3일 동안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의 고문 방식으로 악몽 속에서 당한 거예요.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깨곤 했는데, 고문하는 주체가 보안사 고문자들이 아니라 4·3 때 돌아가신 원혼들이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네가 4·3에 대해서 한 게 뭐가 있다고, 네가 경쾌하게 떠난다고? 매우 쳐라.” 하는 식의 악몽이었어요. 그래서 악몽을 두어 번 꾸고는 안 되겠다 싶어 4·3 진혼곡을 쓰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정의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 『순이 삼촌』의 수난
맹문재 : 악몽을 꾸었다는 말씀이 참으로 아프게 와닿네요. 아무래도 첫 소설집 『순이 삼촌』(창작과비평사, 1979)에 대해 여쭤봐야겠네요. 10편의 중단편을 모아 간행하셨는데, 문제가 되어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등 1개월간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다시 문제가 되어 종로서에 끌려가 1주일간 취조 받았고, 소설집도 판매 금지 당했습니다. 그 상황을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현기영 : 『순이 삼촌』이란 중편 소설을 쓴 다음에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등장했어요. 계엄령이 있을 때 『순이 삼촌』을 썼다고 잡혀갔는데, 정식으로 기소한 게 아니라 고문하고 매 때려서 내보내려고 했던 거지요. 죽음 직전까지 끌고 가는 것이 고문이에요. 죽지 않게끔 하는 기술이에요. 몽둥이찜질을 하는데, 두 사람이 달려들어 때려요. 한 사람은 몽둥이를 쥐고, 한 사람은 내 몸을 돌리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기술 부족으로 한 대를 잘못 맞아 엉치뼈를 맞게 되었어요. 지금도 안 좋아요. 고문을 견디는 것은 온몸의 세포가 매질에 저항하는 거예요. 처음 지하 감방에 들어가니까 0.5초 내로 갈아입으라고 군복을 내던지는데, 어둠침침한 데서 보니 군복 바짓가랑이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어요. 그래서 말했더니 “새끼, 눈은 좋구먼.” 하면서 다른 걸로 갖다 주더라고요. 사람 피인지, 돼지 피인지, 그때부터 겁을 주더라고… 본격적으로 몸둥이 찜질을 당하고 나니까 겁똥이 나오더라구요. 겁똥, 겁을 먹어 내가 똥을 지린 거지. 그 이튿날은 고문당한 데를 싸릿대로 또 조지더라고. 손 내밀라고 하길래 내밀었더니 “손 엎어”하더니 손등을 때리는 거야. 손등을 자근자근, 무 썰듯이……. 삼 일째는 고문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모둠 발차기를 하는 것이었어요.
한 달 동안 감옥에 있다 나왔는데, 내가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지 나를 고문했던 자가 한 달 후엔가 전화가 왔어요. 난 감옥, 그 지옥에서 벗어났으니까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서 “당신 나한테 해도 너무 했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장 반격을 하더라고. “이 자식, 다시 한 번 더 혼나봐야겠구먼” 이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자세를 낮추었어요. (웃음) 그랬더니 “그나저나 그『순이 삼촌』은 어떻게 되었어?” 묻길래, “재판(再版)에 들어갔습니다”라고 하니, “어! 재판(裁判)에 들어갔다고. 재판에 안 걸기로 했는데?” 하더라고. 그래서 “그게 아니라 초판이 다 팔려서 재판 들어갔다는 거예요”라고 했지요. (웃음) 처음엔 그들이 재판에 나를 걸려고 했지요. 재판에 건다는 것은 날 법정에 세우겠다는 것이니, 그러면 나도 변호사를 데리고 법정에 서야겠지요. 그런데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4·3에 대한 논의가 없었거든. 나를 법정에 세우면 4·3이 무엇인가가 공개되고, 공식적으로 논의해야 되니까 그들이 부담을 느껴 재판을 안 걸기로 했던 거지요. 그런데 『순이 삼촌』이 한 달 만에 다 팔리고 재판(再版)을 찍는다고 하니까, 유통되는 걸 막아야 하는 거라, 석 달 뒤에 경찰이 나를 또 끌고 갔어요. 거기서는 고문을 안 당했는데, 잠 안 재우는 것도 고문입디다. 일주일을 고생했어요. 종로서에서 취조 받고 책은 판금 당했지요. 약 14년 동안 판금 상태로 있었고, 그 사이에 대학생들이 많이 복사해서 보았지요.
■ 문학의 사회 참여
맹문재 : 선생님의 산문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청사, 1989)에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쓰신 지 30년 이상 지나 그동안 생각이 바뀌셨는지 모르지만, 워낙 원론적이고 중요한 의견이어서 다시 말씀을 듣고 싶네요. 선생님께서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현기영 : 사르트르가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을 얘기했던 작가인데, 앙가주망은 문학의 현실참여를 뜻하지요. 정치적 부당성에 대해서 문학이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산문집은 원래 에세이 원고가 아니라 강연 원고였어요. 1987년 6월항쟁 직전 네댓 곳에서 강연을 한 원고를 보완해서 책으로 냈어요. 그때는 문학의 효용성,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박정희의 파시즘, 군사독재를 뒤이은 전두환의 무지막지한 군사독재에 대해 “이것은 아니다”라고 문학이 발언을 해야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죠.…… 평상시나 평화시에는 문학이 미학에 골몰할 수도 있고, 인생살이, 사랑이라든지, 풍요로운 삶의 이야기라든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런데 사태가 엄혹해 민주주의가 죽어 널브러져 있으니, 대성통곡을 해야 하고 민주주의에 조곡(弔哭)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좀 과격하게 쓴 글이에요. 지금과는 다르겠죠. 그때는 전투 시기였잖아요. 문학도 전투에, 정의의 무기로써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좀 과격하게 썼지만, 지금도 그 발언이 어느 정도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정치적 독재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상품 문화가 대중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오도하고 있잖아요. 이것이 또 다른 독재 형태로 느껴져요. 문학은 자본주의 상품문화에 너무 찌들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봉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 30여 년 전의 발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 소설의 연극 및 영화화
맹문재 :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문학의 사회 참여를 말씀하셨고, 그것이 지금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여전히 유용하다고 하셨는데,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볼게요. 선생님의 소설집 『마지막 테우리』(창작과비평사, 1994)에는 7편의 작품 외에 1편의 희곡작품인 「변방에 우짖는 새」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편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각색한 작품인데, 어떤 의도로 작업하셨는지요? 그리고 극단 연우무대에서 다시 각색되어 1987년 김석만 연출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그 느낌이 어떠했는지요? 1999년 또다시 각색되어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상영되었는데, 그 느낌 또한 어떠했는지요? 이외에 희곡작품으로는 「일식풀이」(1985년, 극단 한올레 공연)가 있지요.
현기영 : 김석만 연출가나 박광수 영화감독이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고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되겠다 싶었던가 봐요. 김석만 씨의 연극은 참 좋았어요. 1987년 6월항쟁 기간에 작품이 공연되었어요. 거리에서는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동숭동 연우무대에서 그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지요. 공연 기간이 끝난 다음에도 시차를 두고 앙코르 공연을 했어요. 6월항쟁이 끝나고 노태우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고 소위 007가방을 들고 왔다 갔다 하던 때인데, 그 가방을 들고 노태우 씨가 『변방에 우짖는 새』 연극을 보러왔어요. 본인이 군인이지만 이제는 민간인이 되었다는 제스처였던 거죠.
연극에 비해 박광수 감독의 영화는 많은 제작비를 들였는데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관객이 많이 없었어요. 단점이라면 일관된 내러티브, 스토리라인이 있어야 하는데, 왜 민란이 일어나고, 왜 민중의 부르짖음이 있는가를 잘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어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 특이한 풍습의 묘사는 근사했어요. 그 지점에 문학과 영화의 갈림길이 있는 것 같아요. 문학이 더 풍요로운 면이 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순이 삼촌」이 창작 오페라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도 있는데요.
현기영 : 9월 제주도에서 공연하고,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예약이 되어 있어요. 「순이 삼촌」은 영화로 만들려다가 실패했고, 연극은 한 번 했어요. 이번에 오페라로 한다고 해요. 주인공이 아리아를 한 곡 만들어 노래하는 걸 들었는데 좋았어요. 「순이 삼촌」이 클래식 장르인 오페라로 재탄생되는 것이 저로서는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에요. 오페라가 화려하고 사랑이나 궁중이나 귀족 계층의 이야기, 뭐 이런 소재라면, 레퀴엠 즉, 진혼곡으로써 죽은 자를 위로하는 이러한 오페라는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없을 거예요. 좋은 작품이 되기를 기대해요.
■ 『지상에 숟가락 하나』 MBC 느낌표 추천도서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1999)를 출간하셨어요. 이 소설집은 2018년 ‘창비’로 옮겨 다시 출간하셨지요. 이 소설집은 2003년 MBC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얼마나 판매되었지요?
현기영 : 40만 부 정도 팔렸나 봐요. 아주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지요. MBC가 독서 운동을 한 거였어요. ‘사랑의열매’ 재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출판사가 2억, 나도 2억, 그렇게 기부했어요. 책이 많이 팔리는 것도 기분 좋았지만, 기부를 할 수 있는 것도 기분 좋더라고요.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도 4·3항쟁의 소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죠.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 속에서 자랐던 내 유년의 성장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자라난 공간을 보니 4·3이 끼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4·3에 대해 열정적으로 썼어요. 다 쓰고 보니까, “아, 이거는 성장 소설이라기보다는 4·3 소설이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 술에 대해서
맹문재 : 선생님의 창작집 서문이나 후기를 읽다 보면 술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와요. 술을 마시다 보니 작품을 많이 못 썼다고 반성하는(?) 말씀들이에요. 지금까지의 작품 연보를 살펴보니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1979)『변방에 우짖는 새』(1983. 장편) 『아스팔트』(1986)『바람 타는 섬』(1989. 장편) 『위기의 사내』(1991) 『마지막 테우리』(1994)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 『누란』(2009. 장편), 산문집으로 『젊은 대지를 위하여』(1989) 『바다와 술잔』(2002),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2016), 청소년 소설집으로 『똥깅이』(2009), 동화집으로 『테우리 할아버지』(2014) 『제주 해녀 간난이』(2015), 번역서로 『베니스의 상인』(2004) 등을 간행하셨어요. 과작은 아닌데, 선생님께서는 술을 어느 정도 좋아하시는지요?
현기영 : 사실 과작은 과작이죠. (웃음) 내가 20년 교사생활 했거든요. 거기에다 또 문예진흥원에 들어가서 2년 반을 허비하고, 위장병 때문에 1년을 허비하고 그랬죠. 개과천선해서 열심히 써야 했는데, 술은 술대로 먹고 이러니 언제 글을 써요. 그런데 오히려 술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봐요. 4·3을 쓰려면 일종의 기백을 유지해야 하거든요. 도청을 당하는 세월이었으니까 용기가 있어야 했지요. 술을 먹어야 쓸 수 있는 부분이 있었죠. 혼자 먹은 게 아니라 후배들하고 먹었지요. (웃음)
■ 아내 양정자 시인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의 동창인 양정자 시인과 1969년(28세) 결혼을 하셨어요. 어떻게 만나셨고 그동안 결혼 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요?
현기영 : 아이고 참, 어떻게 만났는지가 궁금하신 거죠. 대학교 1학년 때 군대에 갔죠. 군대를 다녀와서 2학년에 복학을 했는데, 아내하고 동급생이 된 거예요. 그러니 내가 선배죠. 오빠뻘이죠. 아내는 날 만만한 동급생 취급을 했지만요. 문학 동인을 같이 했어요. 지금 아내는 시인입니다만, 인문대 두 명과 사범대 두 명, 이렇게 네 명이 문학 동인을 했는데 그때 뜻이 맞았죠. 어느 날 양정자 씨가 본인 사주를 봤는데 해외로 시집간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는 재미 교포, 재독 교포하고 결혼하는가 보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그 사주 맞다. 그 점쟁이 용하네.”라고. (웃음) 제주도도 바다 밖이잖아요. 그러니 제주 교포와 결혼하는 것이 맞다고요. 슬하에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또 손주를 각각 두 명씩 두어 지금 우리집에는 여섯 명의 손주가 있어요.
■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맹문재 : 선생님의 사회 활동 경력을 살펴보니 제주4·3연구소 초대 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제주 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장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직책들을 역임하셨어요.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현기영 : 나는 문학 하는 사람이니까 문학의 활성화에 관심이 있어요. 문학이 1980년대나 그 이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술 장르였잖아요. 시는 아직도 중요한 위치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소설 쪽은 제2지망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제1지망은 시나리오가 됐고요. 사회적 이슈나 역사적 이야기를 소설이 담당했었는데, 영화 쪽에서 많이 가져간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소설가들은 감수성에 관련된 소재와 표현에 치우친 것 같아요. 굵직하고 강한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 소시민적이고 쇄말적인 이야기가 많아요. 사소한 것도 아름답게 재발견해 쓰면 좋긴 좋은 것인데,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독자를 잃게 되지요. 지금은 소설 독자들이 영화 쪽으로 많이 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설 문학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장편소설은 삼사일을 읽어야 하는데, 이것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면 두어 시간이면 끝나버리지요. 소설이 인생의 여러 가지 단면들을 심도 깊게 탐구하는 것에 반해 영화는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려 들죠. 선이냐 악이냐, 너무 단순화시켜요. 문제 해결이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인생이 그렇게 이분법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중요한 소설 문학을 격려해야 하는데, 지금 빈사상태에 놓인 것 같아요. OECD 국가에서 우리나라의 독서 인구가 꼴찌라는 거예요. 문학을 포함한 좋은 양서 읽기 운동을 정부가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후배 문인들에게 한마디
맹문재 : 마지막 질문이네요. 선생님께서 등단한 지 4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소설의 흐름도 상당히 바뀌었지요. 오늘의 소설을 보면서 후배 소설가들에게, 또는 후배 문인들에게 원로 선배님으로서 한 말씀 들려주시길 부탁드려요.
현기영 : 저는 소설을 쓰기 때문에 소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도 시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시라는 것이 꼭 활자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낭송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인은 혼자 있기도 하지만 독자와도 어울려야 되는데, 그러려면 좀 더 밀착되게끔 독자를 직접 만나서 낭송하고 웃고 떠들고, 그래야 하죠. 즉 연못이 독자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물고기로서 시인이 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낭송하기 위해서는 표정 관리며 제스처도 개발하고 심지어 분장까지도 할 수 있고 말이에요. 대중을 가까이하는 시인의 역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소설 문학에서 이야기하자면 지금 가짜 뉴스, 가짜 정보, 가짜 지식이 횡행하고 있죠. 대중은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고 허위로 많이 덮여 있는데, 이것을 벗겨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진실을 드러내 줄 필요가 있어요. 겉으로 보는 현상이 전부가 아니지요. 이것이 소설 문학이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과거의 역사, 즉 이승만 시대나 박정희 시대 그게 얼마나 허위의식으로 덮여 있나요. 진실이 안 드러나 있죠. 문학으로 형상화되지 않은 그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진실한 의미의 박정희 시대는 존재하지 않아요. 박정희 시대의 진실한 면모는 공포시대예요. 이게 드러나 있지 않아요. 이것을 소설 문학이 담당해야 해요. 잊어버린 것, 망각한 것, 그 당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지금 사람들은 모르는 것, 아니면 그 당시부터 허위인 것이 사실로 호도된 진실들이 있죠. 그것을 망각에서 건지고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을 소설 문학이 해야 하는데, 소설가 한강의 작업을 보면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한강이 선택한 5·18 소재를 많은 사람이 40년 전 구닥다리 소재라고 생각하고 건드리지 않는 거예요. 한강은 미체험 세대예요. 초등학교 초반에 겪은 일인데, 이렇게 미체험 세대가 관심을 갖고 쓰는 게 중요해요. 엊그제 들어가 보니까 한강의『소년이 온다』가 종합 베스트셀러 1위더라고. 그런 것을 써도 잘 팔리고 오히려 독자를 모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옛것이라고 해서, 지나간 것이라고 해서, 버려진 게 아니라 그것을 망각하지 말고 새로운 기법으로 조명하면 새로운 것이 되는 거죠. “오래된 것이 오히려 새로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젊은 시인들이나 소설가들이 좀 더 역사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또 뜻깊은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경기민예총 문학콘서트 행사로 현기영 선생님을 모시고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대담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무관중 상태에서 진행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현기영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된 이래 제주 4·3항쟁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되살리고 조명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아스팔트』『마지막 테우리』장편으로『변방에 우짖는 새』『바람 타는 섬』『지상에 숟가락 하나』『누란』 등이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노동 열사들을 기린 『기룬 어린 양들』을 비롯해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사북 골목에서』,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