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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 양봉철
도화제 문주이신 한당 선생님은 1964년 3월 24일 (음력 2월 14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부친 양병권 옹과 모친 이복선 여사 사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태몽은 어둡고 혼란한 풍경 속에서 어리둥절해 할 때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며 모든 것들이 노란 황금색으로 변하더니 황룡 위에 형태를 알 수 없는 한 신선이 올라탄 채 용이 승천을 하는 태몽이었습니다.
용 주위로 궁녀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하늘에 있는 신선 같은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는 그러한 꿈이었습니다. (후에 선생님께서 도통을 이루신 후 그 사람들이 11천 신명임을 아셨다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과묵하고 청렴하신 아버님과 자상하고 자애로우신 어머님 밑에서 티없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시다가 3살 되던 해에 전매청 공무원이시던 아버님께서 구례로 발령을 받으시자 여수에서 자라나시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은 보통 다른 아이들처럼 온순하고 부드러운 심성과 품성으로 밝게 자라셨다고 합니다.
후에 부친께서 여수 전매청으로 발령을 받으시고 그 당시 태어난 여동생과 함께 여수의 바닷가 동네인 종화동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었고, 그곳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스승에게는 태어난 전주보다 더욱 친근하고 포근한 고향 같은 곳이 되었고 바닷가에 대한 추억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승께서 중학교에 다니실 적부터 무술에 심취한 원인은 3살에서 4살 즈음 누구의 등에 업혀서 무술영화를 보았는데 비취색 옷을 입은 무인이 검을 앞으로 들고 전방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보신 이 기억 때문에 훗날 당신이 무예에 미치게 되셨다고 회고 하셨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이 어려워졌고 아는 형의 소개로 시작한 합기도는 중학교 2년 시절 본격적으로 합기도 입문, 매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심경을 토로하시길
“산 위에 있는 도장을 다녔는데 힘들었지만 굳이 다녔던 것은 이 도장에서 보는 형들과 사범님, 관장님이 왠지 형제나 가족 같은 느낌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
어릴 때 형제가 없이 자라서 그런지 다른 이들 보다 더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화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족 같은 분위기를 추구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결코 나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생각이 도화제를 만드시고 지금까지 모든 제자들과 회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게 되신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무술을 하게 되시면서 강한 열의와 승부욕으로 치밀하게 자기연마에 전념하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성장하셨습니다.
합기도의 달인이 되신 후 우연한 기회에 선배로부터 단전호흡과 동양사상에 대한 질문을 받으시고 답을 못하신 후 동양사상을 탐독하시어 음양오행과 원리를 깨치셨으며 다도를 배우시고 단전호흡을 스스로 하시게 되었습니다.
스승께선 어려운 환경 속에 누구에게 배울 형편도 못되어 독학으로 단전호흡 선도수련을 하시게 되었는데 때론 밥을 굶기가 다반사였으나 그런 힘든 환경 속에 오히려 구도에 대한 열정은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스승께서는 처음 호흡을 시작하니 운동을 심하게 해도 나지 않던 땀이 호흡 몇 시간 만에 몸에 땀이 나는 것을 보고 이 단전호흡이 정말 좋고 신기하다고 생각하셨고 몸에 개미 기어가듯이 기혈이 순환되는 것을 느끼시고는 정좌수련을 끈질기게 5년 동안 이어 가셨습니다.
단전호흡 수련 5년 만에 우연히 차가운 방에 누워계시다가 허리에서 마치 뜨거운 물이 흘러가듯 대맥을 유통하고, 소주천과 대주천을 이루고 나서는 현 미망인이신 이영란 사모님을 도안으로 보시게 됩니다.
그 후 대구에서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시다가 사모님을 만나러 수원에 오시게 되었고 우연히 해후하시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셨으며 슬하에 장남 세운군과 차남 세현군을 두셨습니다.
그 후 말할 수 없는 힘든 생활의 여건 속에서도 오로지 도에 대한 열정으로 1988년 11월 후천 도통을 이루시어 11천 도계에 오르셨습니다.
수원에서는 다음 끼니를 걱정할 상황에서도 무심한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도인의 초연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후에 석문호흡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하시고 1991년 7월 20일 세명 출판사에서 천서를 출간하시게 되었습니다.
천서 발간 후 출판사를 통해 연락이 온 여러 사람 중에 현재 문주대행이신 거산 김병무 문사님을 선택하시어 수원 우만동 자택에서 만나 석문호흡을 전수하시면서 앞으로 도화제 설립을 논의하시게 되었으며 11월 16일 서울 양재동에 도화제 선도원이란 명칭으로 도장을 설립하시게 되었습니다.
문사님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때 원주에 있는 어떤 분의 밤농장으로 스승님을 모시고 가려 했는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어. 내려가기로 한 날 내륙을 지나는 태풍이 있어서 스승님의 의향을 물어봤는데 별로 관여치 않으시더군.
스승님께서 어떤 능력을 부리셨는지 태풍이 동해로 빠져나가고 말았어.
그리고 농장에 가서 그곳을 한 바퀴 빙 둘러보시더니 관리인에게 20-30미터 전방에 서도록 하시고 나무를 하나 꽂으라고 하시는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약수가 나오는 곳이니 약수를 파라고 하셨는데 그 농장에 수련하기 좋은 정자가 하나 있어서 그쪽으로 물이 떨어지도록 직접 설계까지 해주셨지. 스승님께선 그 자리가 기가 모이는 자리라고 하셨는데 물맛이 참 좋았어. 나중에 갔더니 관리인이 그물을 먹고 위장병을 고쳤다고 자랑을 하더군. 그리고 나서 도장을 개원하기로 하였는데 스승님의 열의에 의해 11월16일에 양재동 도장을 열게 되었지.
내가 책을 본 것이 7월 도장은 11월이지. 그동안 서울 수원을 오가면서 공부를 배웠고 나에게 정말 좋은 시간이였어.”
그곳에서 1992년 1월 25일 회원 5명이 제1차 지방 회원 수련을 하게 되었고 1992년 11월11일 서울 삼성동으로 도화제 선도원이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전국각지에서 천서를 보고 인연이 있는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와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여 큰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3년 한당 스승님의 인생역정을 담은 시집 “ 천지에 선객 머무르니 강산에 다향이” 출간되어 스승님의 삶과 인간에 대한 정 그리고 풍류, 도에 대한 간절한 발도심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1993년 처음 지방인 전남 광양지원 개원을 필두로 전국에 도장이 개설되기 시작하였으며 부산, 경남, 대구, 경북, 전남, 광주, 전북, 전주, 익산, 대전, 청주, 충주 ,서울, 경기 등지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지원은 현재 전국에 60여개 지원과 해외인 미국에 엘에이 미주 본원과 오렌지 카운티 지원과 하와이 지원이 개설 되었으며 뉴욕지원이 지금 개설 준비 중에 있습니다.
1994년 6월11일 도화제 선학수련원으로 개명하였으며, 1997년 9월 선도에 관한 책을 직접 출판하고자 석문출판사를 설립하였습니다.
2002년 일문전자와 주식회사 아이앰내이쳐를 설립하시어 실무진 복지를 위한 기반을 만드셨습니다.
그 후 제자 일사단사를 통해“ 한당선생의 석문호흡법”을 발간하여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석문호흡법을 밝히시고 그해 석문출판사에서 도인들의 인간적 삶과 사상을 수필식으로 엮은 제자 일사단사의 “도시 속 신선이야기” 가 발행되어 선도에 목마른 마른 사람들에게 샘물 같은 역할을 하여 많은 회원들이 도문에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99년 4월 15일 “고대문명에서 종말론”이 발간되어 그동안 우주의 시원과 종말에 대한 궁금점을 스승님의 어록에 근거하여 명쾌하게 제시하였습니다.
2001년 도의 원리와 도안을 통한 새로운 도방 한의원 석문한의원 송파 본점을 개원하시어 새로운 음양 침법과 도적인 처방으로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후 상계, 안양, 대구에 석문한의원 지원을 설립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선 1년 전부터 이미 하늘에 있는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시기 위한 준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넘기신 후 스스로 가족들과 주위 인연에 대하여 마지막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6개월 전부턴 가족을 잘 부탁한다. 서로가 화합하여 도법을 잘 펴고 도문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을 나투시고 3개월 전부턴 소풍 왔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다. 구름타고 노닐던 때가 그립다 하시며 하늘로 돌아가심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뒤늦게 불충한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바꾸려 정성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정성의 미흡함인지 하늘의 뜻인지 스승께선 결국 11천 신명님들의 호위 속에 2003년 1월 9일 오전 7시 30분경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에서 승천하시고 말았습니다.
승천하신 후 계속 머무시면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미안하구나! 너희가 나를 그리워하듯이 나도 너희가 그립다. 너희가 나를 믿듯이 나도 너희를 믿는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듯이 활짝 필 날이 곧 올 것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가 무엇인가? 삶 이후의 세계가 또 있지 아니한가?
공부가 깊어지면 내가 거하는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젠 내려오셔서 장시간 거하시면서 내가 항상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나와 내 가족을 대하라 하시고 청월경사에게 11천 인가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믿는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스승께선 도통을 이루시어 12천 지존의 자리에 오르시어 12년 동안 인간이 천상의 도계에 올라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진법인 석문호흡법을 천서를 통해 세상에 내 놓으시고 제자들을 받아들이시어 참으로 훌륭한 도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중 거산 문사님과 청월 경사님이 도계 입문하시어 스승의 큰 공부를 증명하였고 그 밑에 양신수련 중인 제자들이 5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스승께선 우주를 넘나드시고 천하를 주유하시며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없는 가운데 그 권능과 위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생활 속에선 항상 형식과 불필요하고 번잡한 절차를 싫어하시어 평범한 모습을 나투시었습니다.
참다운 도인은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씀과 함께 기운을 운기하기 전에 마음을 먼저 닦으란 간결한 말씀으로 가르침을 대신하셨으며, 제자들의 어떤 잘못에도 바로 지적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면서 스스로 깨우쳐 스스로 고치도록 하셨습니다.
스승의 그 넓고 깊은 사랑을 어찌 다 사량하고 잴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가신 이 자리엔 모든 제자들의 못 다한 사랑이 한이 되어 머물고 있습니다.
이제 못 다한 스승에 대한 사랑을 서로 화합하여 도문을 발전시킴으로 대신하고자 하오니 스승이시여! 굽어 살피시옵소서!
제자 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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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우리 모두 인데, 저 혼자만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아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가득합니다.
해서, 생각이 나는 데로 눈에 보였던 광경들을 짧게나마 여기에 올려볼까 합니다.
우리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께서 우리와 이 지상의 고통과 아픔을 다 품에 안고 상천(上天)의 당신의 자리, 권능의 자리에 오르실 때에 그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하늘이 크게 열리고, 꽃비가 내리듯 수많은 형형색색의 빛들이 천하를 덮었다. 그 빛줄기를 타고 천상의 선녀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당신을 영접하려 내려왔고, 뒤이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상천(11천)의 신명들께서 큰 무리를 지어 구름타고 내려오셨습니다.
스승께서는 지상에 계셨을 때에 제자들과의 정(情)을 잊기 어려워하시어 지상에서 당신께서 즐겨 입으셨던 모양의 옷을 입으시고 제자들에게 미안함과 아쉬움, 그리고 믿음을 남겨셨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보내시고, 영접하려 내려온 주위의 보좌신명들께서 권능을 상징하는 의복을 입히시고, 머리에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왕관을 씌우시니, 이내 신명심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내 위(11천 당신의 자리)에 올라갔다 내려오마" 하시는 한 말씀을 남기시고 주위 신명님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빛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당시 영접하려 내려온 신명님들 외에 천지의 신명님들께서 수백만이 당신께서 다시 권능의 자리에 오르신 것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안타까움을 같이 가지고는 못내 아쉬움을 뒤로 하였습니다.
" 이와 같은 영롱하고 은혜로운 분을, 그 끝과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분을 천상에서도 한 번의 만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는바, 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머물러시어 가끔씩 들어내심에 은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가 없으시기에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렇게 승천하시는 것을 뵈오니, 감사와 축복의 마음과 함께 안타까움이 절로 일어납니다." 라고 입을 모아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당신께서 본래의 그 자리에 그 분께서 다시 임하심을 알기에, 이내 기쁨과 환희심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렇게 승천하시고는 장례식장에서 다시 빛으로 나투시어 소식을 접하고 찾아오신 많은 제자들을 어루만지시고, 달래셨습니다.
이때에 스승께서는 때로는 사진 속의 모습과 옷을 입으셨고, 때로는 권능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권능의 모습을 보이실 때에는 좌우의 신명들이 부복한 채로 맞으셨는데, 지상의 모습과 옷을 입으셨을 때에는 편안하게 맞으셨습니다.
당신께서 하루하루 내려오셔서, 많은 것을 역사하시고, 배푸심에 그 은혜가 무량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내 너희를 믿노라." 라는 한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분의 믿음에 보은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선궁 신하이자
지상의 제자 청월이
여기에 그 날의 광경을 적습니다..
스승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올라왔으나,
너희가 너무 슬프하고, 불안해 하기에 한가지 선물로써
이를 달래려 하노니, 너는 이것을 전해서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 "
스승께서는 얼국 가득 인자하고, 자애로우신 표정으로
말씀을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 지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수도를 하다보면,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넘기 어려운 고(苦)가
단 한 번식은 찾아오노라.
너희가 내 육신 벗음에 너무나 슬퍼하고 불안해 하니,
내 너희에게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게 소멸시켜주겠노라.
허나, 스스로도 의지를 세워야 함도 잊어서는 아니된다.
내 너희를 위해서 전체가 아니라, 너희의 의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만 소멸시키노라.
나는 너희가 나와 같은 세계, 이 영원한 세계에 거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나는 너희에 대한 믿음으로 지켜보고 있겠노라.
이제는 마음것, 너히의 역량것 도를 펼치도록 하여라.
내 너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리라."
제자 청월,
스승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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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년의 여름이었던걸로 생각됩니다. 천서를 처음 본게 말이죠..
설레이는 마음에.. 출판사로 바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선생님 연락처를 가르켜 달라는 말에.. 그분께서는 댁에 전화가 없으시니..
출판사에 연락처를 남겨놓으면.. 추후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 후로.. 몇개월이 흘렀을까요..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갑자기 천서와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떠오른건
왜 였는지 모르겟습니다.. 무작정 다시 한번 출판사로 연락을 했고.
때 마침 도장이 오픈 한다는 말을 듣고서.. 얼마나 가슴 설레고 기뻣는지
모릅니다.
91년의 겨울 바람은 꽤 매섭더군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서.. 도장에
찾아가서 바로 실무진으로 생활하고 싶다고 청을 했고..
샌생님께서는.. " 이 공부 해 보려고 ? " 라는 말만 하셨고..
저는 " 네 " 라는 대답을 드린게.. 선생님과의 만남의 시작이었습니다..
막상 시작한 도장 생활이.. 나이어린 저에게는.. 때로 고단하게 느껴질때가
많았습니다.. 19살에 들어와서.. 한달이 지나니.. 20살이 되더군요..
선생님을 뵙고.. 위에 사형분들을 만나고.. 어린 세운이를 안고 계신 사모님
을 만나고.. 저에겐 모든 것 이 새롭고 낮설은 환경이었지만.. 도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과 .. 스승님을 만났다는 기쁨에.. 하루 하루 생활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한달이 지나서 .. 막내인 제가.. 주방에서 밥을 하고.. 요리를 해서..
사형들과 선생님께 식사를 올릴때도.. 마냥 좋았고..
고추창을 풀어 만든 수제비를.. 맛있다..하시며.. 3 그릇을 드실때는..
괜히 기분이 좋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했습니다..
때론.. 외롭고.. 도장생활이 너무도 힘들때엔..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울곤했었죠..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 막내야 오늘 외식하자.. 하시고는.. 밗에서 밥을 사주셨던게
생각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텅빈 도장에서.. 족구를 하시자며.. 사형들과
도장에서 야참내기 족구를 할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새벽반 지도인데도.. 밤을 새고. 족구를 한 뒤.. 새벽 수련지도를 하다가
수련 시켜놓고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눈 뜨니.. 회원들이 다 가고 없던일이
생각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도장 살림까지 제가 맡았었죠..
재정을 보다보니.. 임대료가 비싼 건물탓에.. 생활비 하고.. 여기저기
돈이 들어가다 보면.. 도장에서 생활 하시는 선생님께.. 제대로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봉투에 5만원을 넣어드리며.. 용돈이라도 하시죠 ..하고 드릴때엔.
왠지 죄송한 마음만 가득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들은.. 그때엔.. 지금은 받는 선수금이라는 월급도 없이..
장부에.. 목욕비..이발비 적어가며.. 생활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그 때가 그립습니다..
그런 저희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걸 늘 마음 안타까워 하시던 모습에
지금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매달 오만원씩 밗에 드리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제가 집에 갈일이 생길 때..
잠깐 보자고 하시며.. 손에 오천원짜리 쥐어주시며.. 가다가 뭐라도 사먹으라고
주시며.. 언젠가는.. 만원을 주고.. 십만원을 주게 되겠지.. 라고 하실때엔..
그져 죄송스런 마음에.. 서둘러 도장을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도장에서 기거하시는걸 안스러워하신 한 회원님께서..
전세집이라도 얻으시라고.. 목돈을 주신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동생분이.. 집을 얻는데 그 돈을 보테줘 버리시고는..
도와주신 그 회원님께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하시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러고는.. 난 도장에서 너희들하고 같이 생활 하는 게 좋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울립니다..
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커서일까요..
10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을 버리고 떠난 사형들이 있었죠..
너희들이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난 절대로 너희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평소 말씀 하셨지만.. 제자들이 선생님을 버리고 간 그 날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셔서.. 맥주 한잔 하고 싶다던
선생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한동안.. 사람들이 싫어진다고.. 사람들에게 정을 주기가 싫다고 하셨죠..
도법을 접고 싶다고도 하셨었죠.. 아무말 못하고 그져 고개 숙이고 있는
저를 보시며.. 내가 도를 접으면.. 너는 뭐 할까.. 하시며..
너희들 때문에 접을 수도 없겠다고 하실 땐.. 죄송한 마음보다는..
다행이다 라는 마음이 들어서.. 속으로는 기뻣답니다...
선생님은 차를 참 좋아하셨죠.. 하루에 녹차를 40잔까지 내어드린적도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다관과 다기들을 아끼셨는데..
제가 그만.. 다기를 옮기다가..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다기를 깨뜨려 버렸을 때.
선생님은.. 서둘러 일어나시며..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하시며..
그깟 다기야 새로 사면되니까.. 안 다쳤으니 다행이라고 하실 땐..
너무 죄송스러워서.. 감사한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했었습니다..
지방에 새로 생긴 도장들을 다니다 보니.. 영장이 나왔더군요..
군대를 가면서..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통장 번호를 하나 적어달라고
하셨죠.. 얼마 안 되지만 군대 생활 하면서 쓰라고.. 매달.. 돈을 주셨죠..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아.. 5만원씩 주시던 돈이.. 어느날 20만원이 들어와
있더군요.. 잘못 된거 같아.. 연락을 드리니.. 이제부턴 약간 여유가 있어서..
올려서 보낸 거라고 하셨죠.. 저는 도장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왠지.. 거금이 들어온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제가 쓰지는 못하고..
도장 식구들 숫자에 맞춰서.. 내의를 사들고.. 휴가 때 찾아뵙고..
내의를 돌렸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대하고서.. 도장에 복귀를 하니.. 지방에 도장들도 많이 생기고..
사제들도 많이 들어와 있더군요..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고..
대접만 받으려니..죄송스러워서.. 복귀 하면서.. 서울로 오라시는 걸..
지방 도장으로 먼저 가겠다고..자청해서.. 지방에서 6개월 정도 수련지도로
바로 복귀한 뒤.. 올라간 일이 생각납니다..
제대한 뒤 에 잠시 하던 컴퓨터 게임을.. 재미있다고 해보시라고 했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26시간을 밤새워 게임을 하실 때 엔..
괜히 알려 드렸다 싶었지만... 우리 게임으로 내기 하자라고 하시며..
같이 밤새워가며.. 게임을 했던 시간이.. 지금은 더없이 소중할 뿐입니다.
바둑을 좋아하시던 선생님께.. 제가 통신바둑을 알려드렸었죠..
천리안에 모뎀으로 연결한 뒤.. 바둑 두는 걸 좋아하셨고..
통신을 통해서.. 많은 분들을 알게 되고.. 사귀게 되신 걸 즐거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꾸 눈물이 나서.. 기억이 끊깁니다..
노래 가사처럼.. 눈물샘이 고장난나 봅니다..
눈앞에 뿌예서.. 자판도 잘 안보이고.. 모니터도 흐려지네요..
더 적고 싶은데.. 더 적고 싶은데.. 왜 자꾸 눈물만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못난 제자가.. 선생님 제대로 보필해 드리지도 못하고..
속만 잔뜩 썩여드렸는데.. 눈물 흘릴 자격도 없는 놈인거 알지만..
멈추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지상에서 선생님 뵙지 못해서.. 너무나 아쉽지만..
하늘에서 보면.. 선생님께서 육신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시고..
오셨던 자리로 되돌아가신.. 기쁜날이라고.. 기쁜날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지만..
못나고 부족한 제자를 이렇게 남겨두고 가버리신.. 선생님이 한없이 밉습니다
미워서.. 자꾸 눈물이 흐릅니다.. 너무 너무 밉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도 없고.. 시키시는 일 도.. 도망 다니고..
속만 잔뜩 썩인 제자지만.. 야단 한번 안치시고...
그져 묵묵히 바라 봐 주시고.. 지금까지 이끌어 주셨지만..
이제는 홀로 서야겠지요.. 그래야 겟지요..
선생님이 전하신 법 을 잘 지키며.. 펼치는것이.. 해야 할 일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다시금 지상에 오고 싶어하시도록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기쁜 것 이 없겠습니다..
더 적고 싶은데.. 자꾸 눈물이 나서.. 선생님과의 여러 시간들이 머리속에서
엉키기만 합니다..
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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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님 말씀
'우리가 하는 공부가 무엇인가? 삶 이후의 세계가 또 있지 아니한가?
공부가 깊어지면 내가 거하는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화합하라..화합하면 도성구우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미 도법을 전할만큼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은 것은
지상 도인들의 몫이다.'
'너희가 나를 그리워하듯이..나도 너희가 그립다.
너희가 나를 믿듯이, 나도 너희를 믿는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듯이
활짝 필 날이 곧 올것이다,'
'너무 어둡게 생각하지 말아라.
어둠이 있은후에 여명이 밝아오듯이,
곧 밝아질 날이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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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함께
춤추는 모습
젊은 시절
한당님 글씨(도성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