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천행 김동오 동행,
뒷풀이 응원으로 힘을 보탠 이재진교수님,
반진수대표님와 함께한 남한산성 종주 산행
2023년2월18일(토)
오늘 등산코스는 걸어서 삼전주민센터 출발 송파둘레길따라
장지동지나 하고 복정역 경유해서 산성역1번출구앞 김동오 미팅하고 출발-
불망비-남문 (지화문)-동문-장경사-동장대-벌봉,한봉 방향-남한산성 정상석-
북문(전승문)-서문(우익문)-전망대-
산할아버지 한국연극협회산악대 시산제자리-꼭대기집식사-
학암동-5호선 마천역-9호선
삼전역 4번출구앞에서 이재진교수,반진수대표 미팅
남한산(청량산)은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
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
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원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
이라고 불렸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1744년(영조 20)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1779년(정조 3)에 다시 원성을 고쳐 쌓을 때
기와로 덮었던 것을 전돌로 바꾸었다.
현재 남아 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타구(垛口)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올려 놓았다.
성벽에는 원성 4곳, 봉암성과 한봉성 사이
1곳 등 5곳의 치(雉)도 설치되어 있다.
한편 7곳의 포루가 있는데, 제1남옹성 8곳,
제2남옹성 9곳, 제3남옹성 5곳, 장경사 부근 원성 2곳,
장경사 신지옹성 2곳,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칸,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성 안에는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이밖에도 비장청과 교련관청,
기패관청, 군관청, 별군관청, 서리청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자리하였다.
또한 행궁 및 관아의 소요 물품과
여러 가지 관수 물자를 비축하고 군량을 보관하기 위한
영고, 수창, 신풍창, 별창, 동창, 군기도 등 많은
창고도 들어서 있었다.
한편 산성 안에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옥정사,
남단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