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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박영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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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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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라고 일차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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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다스리심이 온 세상에 미쳐 그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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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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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라고 말할 때?나라?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에 초점을 두어 생각하시는│
│ │
│것이 좋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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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하려는 것은「하나님의 나라」입니다.?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성경에서
보통「천국」이라고 많이 썼습니다. 요즈음에는「천당」보다도「천국」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한번 묘사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라 하면 대표적으로 무엇이 생각납니까?
성경이 천국을 얘기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천국」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나라」를 영어로는 왕국(kingdom)이라고 씁니다.
왕국(kingdom)이라는 이 말이 원래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느냐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나라?라 하면 맨처음 들어오는 개념이 어떤 것입니까? 일차적으로
장소적 개념, 즉 공간적인 개념입니다.?나라?하면 일단 땅덩어리가 생각납니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삼대 요소를 말할 때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얘기합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의 이러한 국가 개념은 자원경제 사회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자원이 없는 나라는 손해를 보니까 우선적으로 땅덩어리가 넓고 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말하면서 우리 머리에 그림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지금 우리는 벌레같은 사람들 하고 더러운데서 살고 있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럴 때마다 하늘에서 강한 빛과 함께 구름에 떠 있던 황금집이
내려오는 멋있는 그림이 그려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만 성경이 얘기하는 나라의 개념은「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짐은 곧 국가다』 그 말은
지금 시대의 감각으로 볼 때는 정신나간 소리지만 그 당시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국가를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국가의 전요소입니다.
성경에 이런 개념이 어떻게 나오는가 봅시다.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계(譜系)가 이러하니라"(스 8: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보를 지금 기록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위(位)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번역을 잘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In the kingdom of Artaxerxes?입니다. 아닥사스다 국가 때입니다.
그러니까?아닥사스다 국가 때에?라 하면 마치 무슨?이씨조선 때에?하는 기분이 들죠?
나라의 이름 같죠? 그게 아니라?그가 통치하고 있을 때에?라는 뜻입니다. 아닥사스다가
통치를 할 때에, 우리말로는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라는 말을 왕국(kingdom)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성경에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사용하는 왕국이란 단어가 이런 개념으로
쓰여졌다고 해서?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단어도 과연 그런 개념으로 쓰여졌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시편 103:19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이런 표현법을 평행법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한 말과 같은 뜻을 얘기하는데 동일한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난 것을 얘기할 때『그의 자태는 하늘을 나는 용이요, 그의 모습은
땅 위를 달리는 백호라』이렇게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같은 얘기를 하는데 한번은
?자태?로 다음은?모습?으로 교대로 씁니다. 만약 그의?자태?는 청룡이요, 그의
?자태?는 백호라 하면 벌써 시로서는 낙제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다른 단어를 써서
강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설명하는 데『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두셨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위엄과 그의 권세가 최고로 높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를 뒤에서는?정권으로 만유를 다스린다?즉 그가 다스리는 대상이 어느 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만유란 말입니다. 그의 정권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가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여기서 "그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 그의 정권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정권이란 단어가 바로 왕국(Kingdom)입니다.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는 말을 이렇게(His kingdom rule's over)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정권?으로 되어 있습니다만?나라?라고 해야 직역을 하는 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나라?라고 하면 당장 장소라는 개념으로 꽉차 있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힘드시겠지만 고치셔야 됩니다.
그래서 시편 103:19을 이렇게 읽어야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나라는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통치권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때 어느 정도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U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임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u 이런 개념을 이해하면 우리가 안고 있던 여러가지 문제가
풀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장소적으로 가깝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천국을 장소적으로만
이해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고 가시적이고 현물적인 얘기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치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며 동시에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복음서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통치권임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9:11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유대를 회복시킬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하면 정치적으로 로마를 내어쫓고 이방의 나쁜 놈들을 다 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원토록 평안하게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실 힘있는 통치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습니다. 죽으러 오신 일들을 하나씩
이루시고 마침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이제 때가 왔구나. 우리 주께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시면 싸워서 이겨내시고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거다』라는
기대 속에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개념을 고쳐
주시기 위하여 므나비유(눅 19:12-27)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중에 기억하여야 할 대목은 왕위를 받으러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로는?왕위를 받으러 갔다?그렇게 되어 있는데 원문은 그대로 왕국(kingdom)을
받으러 갔다는 얘기입니다. 나라를 받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어떻게 받으러
갑니까? 나라를 받으러 가면 땅 덩어리를 받는다는 것입니까? 나라를 받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즉 통치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유대인들에게 이해되기
쉬운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에 속국이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떤 권세든지
잡으려면 로마 황제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누구에 의해서 왕이
되느냐 하면 씨저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왕위를 받기 위해서입니다만 사실은 나라가
아니라 통치권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서 이것이 명백해지면 천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거의 다 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어디까지가 러시아냐? 옐친이 다스리는 데까지가 러시아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미국이냐 클린턴이 다스리는 그 통치권이 미치는 데까지입니다. 클린턴의 명령이
시달되는 곳까지가 미국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미국입니까?
한국입니까? 미국이란 말입니다. 한국 대통령의 명령이 시달되는 곳이 아니라 클린턴의
명령이 준수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주기도문의「나라이 임하옵소서」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안하면서 외우면 구약시대 같으면
당장 문둥병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나라이 임하옵소서!」@U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여기까지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u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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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 비유(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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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음에도 그 영광과 권세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숨겨진│
│ │
│모습으로 이 땅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죄인들을 구원에로 초대하시려는 하│
│ │
│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오히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경│
│ │
│멸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그 나라의 신비한 실현의 형태로 그의 백성들을 부│
│ │
│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고난에 대하여 담│
│ │
│대함과 기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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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진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왜 그런 모습으로 천국이 왔는지에 대한 문제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24-30을 보시면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밭에는 가라지들도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지를
뿌렸다고요? 아닙니다.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가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를 뽑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알곡이 뽑힐까봐
그럽니다. 세상 끝까지 가라지와 곡식은 섞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시기로 한 것입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풀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남겨 두었던 문제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연기하십니까? 왜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게 오는 날에는 추수 때와 같이 가라지와
알곡을 갈라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영광과 의와 거룩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날 그때 의인이 아닌 자는 모두 심판의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의 나라에 부르려 할 때 불러야 할 대상이 지금
의인으로 있습니까? 죄인으로 있습니까? 죄인으로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을
제시하되 심판은 보류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영광과 거룩을 잠시
보류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는 형태로 천국을 임하게 하십니다.
또 다른 비유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31,32입니다.『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비유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로
출발하지만 모든 새가 깃들이는 큰 나무로까지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비록 적은 수로
모였으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자!」마치 어떤
전도 단체의 구호 같지 않습니까?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그것은 망상입니다. 되지 않는 일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은 이 땅이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었다
깨어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인지 잘 들어보십시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새들이 집을 질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최소한
개나리보다는 큰 나무일 것입니다. 저는 겨자나무를 본 적이 없어 잘 모릅니다만 큰
나무가 되어 새가 집을 질 만큼이라면 까치가 집을 짓는 포플라 나무쯤 되겠죠. 그런데
그 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좁쌀보다 더 작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겨자나무와 그 씨를 비교해 이 나무를 상상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작은 씨로 그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천국은 가장 큰 나무가 가장 작은 모습으로 묶여져 들어온 것만큼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런 모습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씨를 보고 나무를
짐작이라도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천국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천국은 그렇게
신비한 모습으로 임했기 때문에 내가 구원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천국이 지금 어떻게 자기의 영광과 힘과 권세를 감추고 보류해 놓고 초대만을
위해서, 설득하기 위하여 들어와 있는가를 아십니까? 이 천국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대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씻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실지언정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심판하는 형태로는 한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초대의 기간이 끝나는
날, 즉 그 나라가 완벽하게 임하는 재림 때에는 심판의 권세를 행사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배우시면서 여러분들이 명심하셔야 하는 결론입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마십시오! 누가『야, 예수를 믿어?』그러거든 그저 속으로
웃어 주십시오. 또 누군가가 나를 너무 고달프게 만들고 내 가정을 고달프게 만들거든
왜 그런 고달픈 인생이 되었는가를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이렇게 고통
당하는 순간이 연장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인내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많이 나 같은 사람을 은혜 가운데서 거두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는
눈을 뜨십시오.
│ 천국 비유(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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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배웠던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관련된 비유를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천국이 이미 들어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 눈에 제대로 보여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비유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비유를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우리말에 있지만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하면 이스트입니다. 빵을 만들기
위하여 밀가루 속에 이스트를 넣을 때 몇대 몇의 비율로 넣습니까? 1:1로 넣지 않습니다.
밀가루가 한 자루면 이스트는 한 스푼 정도로 넣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스트를 넣으면
무엇이 무엇이 삼킨 꼴이 됩니까? 밀가루가 이스트를 삼킨 꼴이 되어서 이스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트를 넣었는지 아직 안 넣었는지는
넣은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U마치 천국이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 같다는
말입니다.@u 그러면 천국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와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천국은 마치 세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모습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교회와 세상을 비교할 때 언제나 세상이 더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가 그들을 부풀게 할 누룩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다음 44절에 가시면 비유가 이렇게 연결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비유를 한번 풀어보십시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것입니까? 천국입니다.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만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본문을 가지고
만일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한다면 어떤 목적으로 어디에다 핵심을 둬서 메시지를
만들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밭에 감추인 보화까지만입니다. 가서 샀다,
기뻐했다는 것은 이 비유에서는 핵심이 아닙니다. 소도구에 불과합니다.
기뻐하며 전소유를 팔았다. 이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어떤 밭에 보물이 있는 걸
누가 알았습니까? 그럼 그 밭을 다른 땅보다 3배쯤 비싸게라도 사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그 안에 보물이 있으니까」 그것은 메시지가 아닙니다. 상식입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비유의 포인트는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 밭에 감취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제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길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런데 금 목걸이, 금 반지, 보석 반지 등을 파는데 무조건 골라잡아 천원
합니다.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어, 가짜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진짜 금보다 훨씬 번쩍거리고 훨씬 예뻤습니다. 가짜인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싸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똑같았습니다.
또 하나는 그것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지에 싸놓고 하나는 보석 상자에 싸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집으시겠습니까? 신문지에 싼 걸 집으신다고요? 신문지에 싸
놓았으면 좋은 것일리가 없다는게 상식입니다. 좋은 것은 소중하게 보관하는 법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짜 진주가 걸레에 싸여져 있단 말입니다. 보물이 왜 밭에 있습니까?
보석함 속에 들어 있거나 진열장에 있어야 누가 알아보죠. 그러나 밭에 있으니까
지나가면서 번쩍거리는 게 있어도「누가 유리를 깼구나」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밭에 널려 있으니까 오는이 가는이 다 보면서 유명한 시조처럼 「흙이 흙이
아니고 옥이 흙에 묻혔으니 오는이 가는이 다 흙이라 하는 모양이다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듯이 있거라」 그런 얘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신비입니다. 밭에 있는 것이 무우나 배추였으면 오히려
알아 봤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석이 있는 바람에 우리는 아무도 그것이 보석일 것이라고
상상을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죠? @U천국은 우리가 기대하는 천국의 모습과
방법으로 와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모릅니다.@u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는 이 비유에서
나타낸 것같이 그것이 보물인 줄 알 때 모든 것을 버리고 팔아서라도 그것을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팔아서 이걸 사고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바보가 되고 있습니까! 말도 안되는 것으로 사람을 괄세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보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면서 거듭거듭 확인하고 확인해야 될 문제가 있다면
이 사실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것으로 칭찬을 받거나 상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괄세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괄세와 어려움을 당할 때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합니까? 「하나님 너무 억울합니다」라는 기도를 하시기 전에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45절에 가시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그 가치에 있어서는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소유를 다 팔아야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나보다 부모나 자식이나
아내가 남편을 더 사랑해도 안된다」 참 심각한 싸움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 우리가 걷는 길이 이 진주를 사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느냐를 일차적으로 알아야 됩니다. 그만큼 값비싼 것이라는 시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이 비유를 통해 재미있게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값진 것을 사기 위해서 쓸데없는 것 몇 개를 주고 파는 것을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희생을 하라고도 하고 봉사하라고도
합니다만 사실 그 단어는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쓰고 있지 희생도 없고 봉사도
없습니다. 그것은 더 값진 것을 얻어내는 당연한 지불입니다. 이것을 아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원통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원통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는 것은 우리가 어린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살고 있고 그 나라의 자녀로서 크고 있는 문제에서 우리가 지불하는 것, 우리가
얻는 것은 다 이미 자랑거리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걷는 길이 무의미한 고난의 연속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누가 보고 있습니다. 훈련을 받는 것은 뽑혀진 사람만이
걷는 과정입니다. 마치 사관생도가 그들의 제복이 자랑이고 훈장이듯이 우리가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잠시라도 잊으면 금방 넘어집니다. 대부분의 신앙
문제에서 넘어지는 이유는 이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7절은 이렇게 마지막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7-50)
참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답니다. 고기를 잡을 때
"야, 요건 돌맹이다"고 가려내면서 그물질하는 것을 봤습니까? 그물은 일단 그 포위망
속에 든 모든 것을 훑어내는 법입니다. 끄집어 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고기와
사이다 병을 나눕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국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무조건 오십시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꼭 신자만 있지 않습니다. 초대를 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물질을 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없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때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한 대표적인 성경의 내용이 있습니다(마 22:1-14). 어떤 부자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손님들을 불렀더니 초청받은 사람들이 뭘 한다고 합니까? 오늘은
치과에 가야 되고, 오늘은 테니스 치러 가서 못 오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하인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장터에 나가서 누구든지 잡아다가 내 자리를
채우라." 그래서 누구든지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나타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아버려라.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입니다. 오라 그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쫓아냅니까? 분명히 절름발이도 좋고 소경도 좋고 가난해도 좋고 말랐어도 좋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쫓아내랍니다.
지금 천국의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설명입니다. 지금은 초대하는 때입니다.
심판하는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천국은 설득을 하러
왔지 갈라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왜 저런 사람이 장로가
됐나, 왜 저런 사람이 목사를 하나, 저런 사람들이 교회를 사고 팔고 이상한 짓 다
하는데도 벌을 받기는커녕 잘 먹고 잘 사나 하는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두어라!」그런 때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신비입니다.
지금은 초대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아닌 군화짝이 들어와 있고 꽁치 통조림이
들어와 있어도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가 생선인데도 불구하고 미꾸라지 노릇을 하거나 망둥이 노릇을 해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멸치같이 보이지만 그때 가서 용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기다려야 되는 때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상대방에게도 용서를,
자기자신도 역시 용서해야 합니다.
신앙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남을 못 참기도 하고 자기를 못 참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10년이나 믿었는데 이것밖에 못 한단 말입니까? 못 하지요! 뭐가 잘나서
더 하시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참 기특한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세파트가 잘하면 어느만큼 잘하겠습니까? 신문 갖고 오라면 신문 갖고 오지 신문을
읽어 주겠습니까? 아셔야 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위치입니다. 왜요? 하나님
나라의 진행이 그 정도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유는 그것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선포하시고 의를 다 드러내시는 그날은 더 이상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는 순간까지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는 자만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그 즉시 죄인으로 낙인 찍혀
던져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기 위하여 감추다보니 우리는 고통과 이 불안전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까지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었는데 내일이 있으므로
내일 구원 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고통은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 아픔을
참고 계신다는 사실에 놀라셔야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내가 안타까워하고 내가
답답해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답답해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들입니다. 천국은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맛보고
있고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모습으로 와 있습니까? 얼마나
이상하게 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실족하게끔 들어와 있는가 보시고 놀라셔야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우리는 복된 자라는 인식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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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Ⅰ) ┃
┕━━━━━━━━━━━━━━━┛
┌────요 점────────────────────────────────┐
│ │
│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곤 합니│
│ │
│다. 그러나 의외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
│ │
│고 그냥 "내가 믿는다"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 │
│가장 중요한 요구라는 관점에서 "예수 믿으라"는 선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 │
│를 알아 우리가 '나는 예수를 믿어!'라는 선언을 할 때마다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 │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
│ │
└───────────────────────────────────────┘
우리는 이제껏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양면성을 갖고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래에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지금 이 땅에
이 시대 속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신비롭고 어렵습니다.
보는 자가 보지 못하고 듣는 자가 깨닫지 못하는 신비로운 형태로 이 땅에 들어와
있고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맛보고 있습니다. 그 맛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것들로 죄 사함과 영생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인 사귐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수준까지 요청되고 있는데 그 수준은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것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이 수준에 우리를 도달케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부분에서는 여태컷 제시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요구
조건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중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임했고 그리고 완성으로 곧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든지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보든지 정말 이 세상은 망해야지 마땅하고 하나님 나라는
빨리 오셔야만 되게 됐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심판을 보류하고 계시는 것은 구원할
사람들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구원의 시간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음을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동안 구원을 얻을 백성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시킨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로마서 10:9을 읽어주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는 지난 몇 시간에 걸쳐서 공부해 온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는
다 같은 얘기였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주를 네 입으로
시인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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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31에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이것이 또 하나의 요구 조건입니다. 요한복음 20:31은
어떻습니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것을
기록한다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끝내면서 기록합니다. 예수를 믿으라!
믿으십시오! 이 말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얘기들입니다.
우리가 믿음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혼동을 하고 있게 되는 이유는 이 "믿음"이라는
말을 잘못 생각하는 데서입니다. 믿으라는 말을 결단을 촉구하는 형태로 쓰기 때문에
믿음이 결단해야 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믿으라고 얘기하는 데는 언제나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를 믿으라」얘기할 때는 예수를 안 믿어도 좋은데 믿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됩니다.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좇아갔던 길에서의 돌이킴은 세상으로 갔던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편차 수정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와야만 되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것을「회개하라」고 하며「결단하라!」고 합니다. 간 것만큼 되돌아와야 합니다.
부산을 가야 되는데 평양가는 열차를 타고 황해도까지 넘어 갔습니다. 개성까지
갔습니다. 그러면 간 것만큼 되돌아와야 됩니다. 부산 갈 것을 개성으로 갔습니까?
개성에서는 간 길을 되돌아오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공존하는 곳이 털 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므로 믿으라는 얘기는
지금 방법이나 조건으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세상의 길과 겹치는 부분이 없는 전혀 다른 요구인가를 설명하는 데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세상에는 어떤 것으로도 예수를 믿는 것과 결부되는 게 없습니다.
갖고 있던 어떤 것으로도 예수를 믿는 데는 더 나은 조건이 없습니다. 학식이 뛰어났다거나,
이스라엘 민족이었거나, 무엇이든지 인간이 가진 것으로써 예수를 믿는 데 한치라도
더 유리한 조건은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전도적 입장에서, 선교적 입장에서 방법론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쉬운 등식입니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그 단어가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 얘기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그 나라에 가는 데 조금도 겹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니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얘기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U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켜주셔서 얻습니다.@u 우리가 인식하는
것 때문에 구원을 얻지는 않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구원을 얻고 난 후에 "아하" 하고
깨달아서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깨달은 날
비로소 이제부터 부모로 섬기겠노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은 옛날부터 자식인데
새삼스럽게 그때서야 비로소 부모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부모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인식을 한다는 것과
그렇게 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훨씬 먼저고 깨닫게
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구나, 나에게 이런 축복을 허락하셨고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그때 알아서 이제부터 효도를 해야지 이렇게 해놓고서 본인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했노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본인의 열심이고 성장입니다만
그것 때문에 부모가 그를 자녀로 허락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면 오해하게끔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를 쓰느냐 하면 그렇게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뭐라고 표현을 하시겠습니까? 제가 믿음에
대해서 누차 설명을 드린 것처럼 믿음은 방법론입니다. 우리의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의 방법입니다. 즉 우리에게 원인이 없는데 우리에게 결과를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네가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 원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결과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을 얘기합니다. 원인이 없고 결과가 생기는 방법, 행위의
법칙이 아닌 것, 믿음의 법칙,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요구, 즉 예수 믿으라는 요구는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조건으로서의
제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38을 보십시오. "또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 여기서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요구 중에서 제일
어려운 요구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된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어떠한 타당한 생각과 본성과 자연스러운 것들,
내 생태적인 본질적인 어떤 감각도 무용화시켜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타당해 보이는
어떠한 생각도 이 길을 좇는 데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안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포기한다는 것, 이것이 사실 이 천국의 요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요구에로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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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Ⅱ) ┃
┕━━━━━━━━━━━━━━━┛
┌────요 점────────────────────────────────┐
│ │
│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지금 여기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면 당연히 우리가│
│ │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소원을 가질 것입니다. 이에대해 예수님은│
│ │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
│ │
│습니다. 이 말씀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
│ │
│들이라는 뜻으로 앞 과에서 배웠던 "예수를 믿으라"는 요구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수│
│ │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여야 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
│ │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까?
마가복음 10:15에 보면?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최대의 특징이 뭡니까?
모두가 순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순진하다고 누가 그럽니까?
절대 안 그렇습니다. 요즘 국민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놀라는 것은 국민학교 학생들도
이미 성인용 잡지와 비디오를 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런 현장을 여러분들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근래 가장 큰 쇼크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 국민학교 1학년인데
어디서 배웠는지 존대말을 썩 잘합니다. 얌전하고 거친 말도 한 적이 없고 뭐라고
하면 금방 눈물이 글썽글썽 할 정도로 순진해 보입니다. 하루는 우리집에 함께 사는
신학생에게?요즘 애들이 왜 그렇게 상소리들을 잘하냐?그랬더니 그 신학생이 저를
이상하다는 식으로 보더라구요. 그래서?우리 애를 봐라! 어디 욕하는 것 봤느냐?라고
했더니 아주 저를 비웃었습니다. 자기가 한번 우리 아이에게?야! 너 욕 할 줄 모르지!?라고
했더니?아저씨! 내가 왜 할 줄을 몰라요??그래서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아주 기가
막히게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애가 벌써 아버지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제 앞에서는 못하는 척 하는 것으로 저를 봐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답답할
노릇이 있습니까? 어린아이의 특징은 순진함에 있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어린이가 순진해 보이는 것은 악을 행할 힘이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다?악이 없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힘이 적기
때문에 백원을 훔쳐가지 백만원을 훔쳐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 세계에서
백원은 쓸 데가 있어도 백만원은 쓸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천원짜리를 훔쳐가도
십만원짜리 수표는 훔쳐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진하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애들은 절대로 순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특징은 다른 데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애들은 자신의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치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특징입니다. 순진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에 의해서 받아야 하는 존재,
그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이다움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어린아이같이 받들지
아니하면?여기서 받든다는 것은 영어로 수납입니다. 우리는 받든다고 하니까 높여
올리는 기분이 들지만 그게 아니라 시행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느냐 하면 통치권으로 임합니다. @U그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느냐 안 임하느냐는 내가 그 명령을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아니면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신자들의 매일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u
여러분의 매일의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비교해 볼 때 주로 어떤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대한 항변의 싸움입니다. 내가 내 일에
대한 주권을 가지려는 싸움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나에게 시행하기를 요구하는
것과의 충돌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우리는 종종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보다
매를 맞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통치권을 실행시키는 과정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차원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이때 그의 나라는 통치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그의 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많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나라?와 그의?의?를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라가 빨리 내려오시고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같이 나로 하여금 의롭게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두 가지를 다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않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의 나라를 구한다라는 이 말을
주님 재림시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사실
독백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틀림없이 그 천국은 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아직 성경이 약속한 여러가지 재림 이전의 증거들이 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도 우리가 고달픈 인생을 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낮 하나님으로부터 이 요구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아니 내일 안 오는 것이 너무나 뻔한데 무엇 때문에
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통치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됩니다.
신자의 신앙생활 중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데
나의 주인으로는 믿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이냐의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셨습니까? 그러면 그가 하라고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고 믿기로 작정하십니까? 내가 보아서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분이 옳다고 하면
옳고 그분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그건 메주라고 믿기로 작정하십니까?
그것을 통치권에 굴복한다고 하며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이 시행되는
모습입니다.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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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점────────────────────────────────┐
│ │
│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을 오늘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의 사│
│ │
│건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오게 된│
│ │
│첫 관문이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하여 되었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의│
│ │
│백성다운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다음 단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나라의 능력│
│ │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
│ │
└───────────────────────────────────────┘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내 힘으로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마태복음 19:23-26 말씀을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만 그 뜻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떤 분들은 혹시 가난한 자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 가능성이 1%도
있을 수 없음을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며 제자들이 물었습니다.?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인간의 능력으로는 구원
얻는 길, 즉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없음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여기서의 부자는 단순히 물질적인 부자를
지칭한다기보다 어떤 성격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 부자였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가지고 있던 그 생각을, 그 마음을 가난한 자도 가지고 있다면
그도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부자는 한 마디로 계명을 지켜 그 공로로 영생을 얻으려 했던 부자입니다.
즉 구원 얻을 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마19:16-22). 이런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얻을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참으로 실천해 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는 일이였습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생각과 자신의 의로부터 떠나야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서야 하나님이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그 마음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께 은혜를 구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의를 의식하였다면
이제는 그런 태도를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를 온전히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바로 회개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우리의 여러 죄에 대한 뉘우침이겠지만 그 죄의 근본적 성격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힘으로 살려고 했던 것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천국의 선포와 함께 회개를 외쳤던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감과 회개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마3:2).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의로운 나라이기에 회개하지 않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없이 살던 삶을 보면서 내가 이 상태로는 도저히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며 거기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한 자는 그의 삶에 있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대로 완전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나가는 것입니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엇을 행하여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 자신의 죄인된 정체와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을 분명히 보여 주심으로 회개케 하십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길을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천국을 받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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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점────────────────────────────────┐
│ │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
│ │
│서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 표현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
│ │
│겠지만 실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결과인 천국의 기쁨에 동참하고│
│ │
│있음을 알 때 새로운 신앙의 각성이 있을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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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행되는 것이기에 미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이 어떤 모습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28을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천국이 현재 임한 증거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장됨으로 인해 귀신이 그 힘을 잃고 쫓겨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통치권 사이의 충돌은 한 쪽이 이기고 있는 곡선을 그릴 때 한 쪽은 쇠퇴하고 있는
곡선을 그리는 관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흑판에 흰 색깔을 칠하는 만큼 검은 색깔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붙잡고 있던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먼저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을 얻고 있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권이 시행되어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또 다른 예는 히브리서 2:14에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여기에서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는 표현은 멸망(destroy)시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망시키셨습니다.
언제 일어난 사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완전히 멸망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멸망시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꼼짝마! 꼼짝하면
죽어!"(put out of action)라는 뜻입니다. 즉 사단이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을 꼼짝 못하게 몰아넣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총 가지고 잘난
척하는 친구한테 가서『자네가 굉장한 것을 가지고 있다며!』『그래 너 까불면 검정
콩알 하나면 가는거야!』『그래 어디 한번 쏘아볼래!』『어, 이 친구 왜이래! 나랑 한번
해볼까!』『어디에 쏠래』 복부에다 쐈습니다. 총알이 복부를 뚫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끄떡이 없습니다. 가슴에도 쐈습니다. 그런데도 끄떡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엔 뇌에다 쐈습니다. 그런데도 끄떡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권총을 든 자에게 권총은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까지 그것으로 행세했는데 그것이 쓸모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빨리 항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단을 멸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제껏 사단은
사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망을 당하러
가셨지만 사망이 아무리 쏘아보아도 끄떡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꼼짝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단이 하고 있는 일이란 양동이에 물을 채워
교무실 문 옆에서 들고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실제 모습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 사단은 가장 중요한 힘을 잃었습니다. 사망이라는
권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 가장 놀랄 만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향하여 죽는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살전 4:13,15) 믿다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은 지금 잠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가장
바보 같은 짓이 있습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먹을 것을 움켜 쥐려고 우리 주위를
빙빙 돕니다(벧전 5:8). 그러나 그것은 그저 으르렁거릴 뿐입니다. 어디다 손을 댈 수
있습니까? 지금『꼼짝마!』속에 들어가 있는 사단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굴복합니다. 사단이 눈을 부릅뜨기만 해도 우리는 오금이 저리는
것입니다.『아이고 대장 각하, 웬일로 부르셨습니까?』『이 양동이를 대신 들고 있어라!』
그러면 우리는 대신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잘했다 하시겠습니까?
너는 왜 이렇게 바보냐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들이 바로 여기서 무너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U지금 우리가 어느 통치권 속에 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u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들과 그 능력들을 맛본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맛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침투했고 그렇게 살 길이 열렸고, 현실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러한 지위를 우리에게 확보해 놓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조건과 환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고 그 길을 걸어야 할 사람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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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현재성(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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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두 가지로 표현하곤 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들어왔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권이
들어온 만큼 사단의 권세가 밀려나고 있다는 증거로 귀신이 쫓겨가고 병이 낫는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23,24절)
여기에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분명히 약한 것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겨남이 병행되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통치권이 쫓겨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침투했다는
하나의 메시지이며 그것을 부정적 차원에서 설명할 때는 사단의 권세가 밀려나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3-27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만 골라 보십시오.「권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자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이것만큼 복음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들어오자 누가 쫓겨납니까? 사단이 쫓겨갑니다. 그는 이 세대에 권세 잡은 자가
아닙니까? 그가 쫓겨나는 정도의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이 어찌된 권세입니까? 지금
이 세대의 최고의 왕인 사단이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하더란 말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단이 쫓겨나는 형태로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 병 고침을 받는다는 얘기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통이 없다는 얘기를 설명하고 싶어서 귀신이 쫓겨나고 병 고침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는 우리는 지금 어떤 차원에 와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9-18에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렇습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어디에서 떨어졌다고
합니까? 사단은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사단이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사단은 사람의 능력과는 비교되지 않는 굉장한 존재입니다. 그는 영입니다. 위치가
따로 필요없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합니까?
이 말은 바로 그가 권좌에서 밀려 떨어지는 것을 봤다는 얘기입니다. 70명의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밀려 들어오는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말미암아
그가 원래 안주하고 있던 자리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재미있는 예가 있습니다. 백작 드라큐라입니다.
드라큐라와 싸워서 어떻게 이깁니까? 밤새도록 격투를 하다가 해가 떠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커튼으로 가려놓고 있으니 햇빛이 안 들어 옵니다. 그래서 쫓겨다니면서
커튼을 찢어 버립니다. 빛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그가 나중에 녹아 없어지지 않습니까?
사단이 지금 그런 꼴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권세가 밀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에 관한 대답이었습니까?「귀신들도 물러가더이다」입니다.
「그렇다 내가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즉 그가 권세있는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지금 이 시점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입니다. 사단이 그 전에도 도망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친히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을『꼼짝마!』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그가 엉엉 울면서 양동이를 들고 교무실 앞에 무릎꿇고 있는데
무엇이 겁납니까?
이와같이 귀신이 쫓겨나고 병 고침을 얻는 사건을 하나님 나라가 임한 표적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만을 중요한 신앙의 목표로 추구하려는 잘못된 경향이 한국 교회내에
있습니다. 이들은 귀신이 들려 병에 걸렸으니 귀신을 쫓아내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근거를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두고 있으나 사실은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오해한 것입니다. 그 구절들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U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u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통치권을 행사하시자 약한 곳이
고침을 받고 약한 것이 물러난다는 그런 얘기들임을 분명히 해서 현재 임한 천국을
확인하는 데에 도움을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
┌────요 점────────────────────────────────┐
│ │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메시야적 활동으로 이 땅에 이미 임했음을 가르치│
│ │
│심과 동시에 종말에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극치도 아울러 강조하셨습니다.│
│ │
│즉 우리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절정에는 이르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 │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입니다. 이 두 사이│
│ │
│의 긴장을 잘 이해할 때 우리는 참다운 재림 소망을 가짐과 동시에 더 더욱 이 땅에│
│ │
│서 우리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생생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
│ │
└───────────────────────────────────────┘
이제까지 배운 바에 의하면 천국의 개념은 통치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통치권의 확장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권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 곧 그 나라가 완성적인
모습으로 임하는 시기도 있을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극치에 이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찾아보겠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1,13절)
누구에 관한 설명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 이후의 구절을 계속 보시면 어떻게 심판하는가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1,2절).
이때에 가서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계속해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3,4절)
그때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의 상태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때가 되면 완전한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완성된 구원의 상태에 이를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일이 없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백성들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상태를 완전히 회복할 뿐만 아니라 아담이
원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완성시켰어야 할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 곳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한 것과 같은 수준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만 10%, 20%정도라도
순종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울진대 100% 순종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거기에는
이 세상에서 벌어졌던 인간 사회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를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전까지의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은 사단에 의해서 자행된 것입니다. 이때는
사단이 완벽하게 그의 통치권들을 뺏기고 완전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것들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미래에 주께서 베푸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대치 않고 그저 믿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이 땅에다 완성된 천국의 모습을 이루어 보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즉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도래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신앙의 큰 소망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임한 천국의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의
전활동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영역에 확장되기를 애씀과 동시에 주의 재림으로
가져오실 완성과 극치에 이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참다운 재림 신앙을 기쁨으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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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중요성┃
┕━━━━━━━━━━┛
천국이 성경에서 어느 만큼의 메시지를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이 공부를 하는 데 중요한 시발점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데 있어서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많은 답이 있겠지만 예전에는
「천당 가려고요」하는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왜 예수를 믿습니까?」
하면「천당 가려고 믿는다」고 하지 않고 다르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무엇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대답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시는 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천당 가려고 믿는다』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속이 들여다 보이니까 하나 감추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 있을 수 있느냐』하며
고상한 인격처럼 멋있게 말을 만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결국은 천국가는 것이 성경
메시지의 최고의 목표이고 주제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오늘 첫째
시간은 우선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느 만큼 집요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2:4을 봅시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쟁기)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약속된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갔을 때 그 나라의 형편이 어떨 것이냐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일단 전쟁이 없고 폐함이 없다고 묘사합니다. 성경이 천국을 묘사하는
방법 중에는 적극적인 묘사보다는 부정적인 묘사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거기는 전쟁이 없다, 피 흘리는 것이 없다, 죽음이 없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합니다. 구약성경 자체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로서 이런 유토피아를 대상들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데에
가장 큰 동기를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나라에로의 초대입니다
이사야 11장에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여기에도 부정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독사가 물어서 죽는다든가 독이 올라도 상처를 받지
않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또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살육이 없는
곳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시각에서만 이해를 하면 하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사자가 풀을 먹으면 무슨 맛에 사자를 봅니까? 사자가 좀 으르렁거리고
얼룩말 잡는 맛에 구경을 가는 것이지 사자가 풀을 먹는다면 소를 보지 무엇 때문에
사자를 보러 가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지금 묘사하고 싶은 초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살육이 있고 상함이 있고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메시지는
얼마나 큰 복음이었겠느냐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는 누가 누구를 해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위협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골탕 먹이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묘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마태복음 4:17을 보십시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첫 발언입니다. 즉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는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천국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요,
전파하는 일의 주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마 4:23,24).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9:35). 예수님의 사역을
대표적으로 설명할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주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결론 부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장과 같은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하셨느냐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 하늘나라―이렇게 표현된 같은 주제, 같은 내용―에 관한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의 주제였고 목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구절을 왜 들쳐보고 찾아보았느냐 하면 성경의 최대 관심사, 이것은
천국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에서 최고의 메시지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고 싶지 않습니까? 혹시 구원이 더 중심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요?라고, 즉「구속,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더
중심된 메시지가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이나 구원이나 실상은 똑같은
얘기입니다. 구원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천국 백성이라는 말은
이미 구원 받았음을 전제로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선포적으로『예수를 믿으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얘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에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개인의 경험을 기준으로 보면 천국론보다는 구원론이 실감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구원은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의 시각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런 의미에 있어 천국은 그 나라 백성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천국을 전파하시고 실제로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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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미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이 이 땅에서 실행되고 있으되 그 통치권이 영광과 존│
│ │
│귀를 다 드러내지 않고 발휘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
│ │
│했음에도 아직 극치를 기다리는 형태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
│ │
│히려 사단의 권세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
│ │
│의 백성들은 이 신비를 볼 수 있으며 그 나라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 30배,│
│ │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
│ │
└───────────────────────────────────────┘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미래성과 현재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으로 기다려야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게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속에 불만이 아직도 남아 있게 되는 것은
좀 재미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들어와 있다라고 배웠기 때문에 말로는
하겠는데 우리 가정과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마태복음 13장을 보겠습니다. 10절에
보시면 이 비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0-12절)
여기 성경에 쓰여 있는 비밀이라는 단어는 비밀(secret)이 아니라 "신비"(mystery)라는
것입니다. 신비와 비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비밀이란 단어는
감추고 보여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에반해 눈으로 보면서도 모르는 것이
신비입니다.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것입니다. 보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낫 놓고
기억(ㄱ)자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이 본문을 천국의 비밀이라고
하지말고 천국의 신비라고 해야 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군 방송(AFKN)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솰라솰라, 웃는구나, 솰라솰라, 화를 내는구나 합니다. 어차피 까막눈일 때는 A나 F나
R나 차이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인간은 까막눈입니다.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것은 뒤에서 설명합니다.(마 13:14-17)
지금 우리가 구약시대의 형제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보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미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얘기는
천국이 임했는데도 보아도 못 보고 들어도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음에 천국
비유로 들어갑니다. 3절부터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3-9)
이 비유의 이름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이런 형태의 설교를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딴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착한 밭을 가지는 마음씨 좋은 어린이가 됩시다』누구나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한 것입니다.「돌짝밭이 되지말자, 마음이
완악해지지 말자」그것을 비교하기 위해서 이 비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밭의 비유를 들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관련하여 보아야 할 이 비유의 중요한 대목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19-23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뿌려지는 씨는
천국 복음, 즉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으며, 악한 자라는 것은
천국이 임했음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을 말합니다. 또한
그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죄에 오염된 세상의 여러 요소들입니다. 이로
인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는 세례 요한의 기대와 같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힘으로
나타나야 될 것 같은데 지금 들어온 모습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사단이 빼앗아갈 수 있을 만큼 그 힘을 감추고 있고 영광을 감추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감히 사단이 그 말씀을 빼앗아 가도록 놔두시는 입장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힘과 영광과 존귀를 감추고 던져 놓으셨다는데 천국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약올랐습니까? 『뭐! 하나님을 믿어! 야!
내 주먹을 믿어라!』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생물 선생님들이 늘 하던 얘기였습니다.
그때 진화론이 한창 판을 칠 때였습니다.『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 임마, 내가
만들었다!』 이렇듯 몰상식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생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따위 몰상식한 사람을 봐 주시는가?」 그들이 「뭐 하나님을 믿어? 내 주먹을....하는
순간 문둥병에 걸려 손가락이 썩어들어가지 않다니, 신약시대라서 그런가?」그런 생각
안해 보셨습니까? 누가 우리에게『하나님이 어디 있냐? 보여 봐! 하나님? 웃기고 있네!
하나님이 내 동생이다! 임마!』라고 말할 때 그만 그 자리에서 이빨이 팍 삐뚤어진다든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심 씻어버리지 못하는 불만의 요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저
개인에게는 축복하시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나 저 원수를 어떻게 좀 해 주세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능력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세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심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나라는 능력과 영광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와 있는지
알지 못하며 더욱이 들어와 있으리라고 꿈도 안 꾸는 것입니다. 사단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는 데 힘을 발휘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재물을 좇아가도 될
만큼 가치 없도록 팽개쳐지는 걸 하나님이 가만히 놔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우리에게 오해될 소지가 있는 부분인가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준비된 마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음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얼마나 무서운 신비로 채색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가 얼마나
회개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무지몽매했는가? 하나님의 복음이
나에게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힘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믿으면서도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할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을 모셔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나 망령되어 대접하곤 했는가를 생각하신다면 등골이 서늘합니다. 등골이 서늘하지
않은 분은 문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Ⅰ)―죄 사함 ┃
┕━━━━━━━━━━━━━━━━┛
┌────요 점────────────────────────────────┐
│ │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고 있는 축복들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 나라가│
│ │
│시작되었기에 이 땅에서 맛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축복 중에서│
│ │
│"죄 사함"의 축복을 살펴봄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 │
│자유로움과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이 기쁨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을│
│ │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
└───────────────────────────────────────┘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미 실현되었고 그 완성의
극치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있을 것임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통하여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에 당연히 우리는 현재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진심으로 그 나라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축복들을 맛보고 있지
않다면 나중에 완성될 그 나라에는 더 더욱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꿀통의
꿀을 조금 맛본 자가 그 꿀통을 다 먹기를 소원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인간이 처해있는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소극적인 축복과
적극적인 축복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축복으로는 사람이 죄로
인하여 지금 처해있는 징벌과 심판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축복은
단순히 징벌을 그치는 정도에 머무르는 정도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셨던 완성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전자를 우리는 죄 사함이라 부르고
후자를 영생(생명)을 얻었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메시야 시대의 축복 중의 하나로 죄
사함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또한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순서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한
후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아 가르쳤고
바로 이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생이라면 누구나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 앞에 서서 자기가 행한대로 하나라도
남김 없이 죄를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정하신 재판장인 하나님은 당연히 죄 있는
자로 죄 있다고 선언하시며 거기에 알맞은 형벌을 집행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우리를 변호하는 독특한 변호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죄인을 대신하여
자기가 모든 형벌을 받았으니 이것을 의지하는 죄인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변호하실
것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일을 재판하시는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지만 신자들에게는
이 일을 이미 이 땅에서 맛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바로 죄로 말미암는 심판에서
벗어나 죄 사함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날의 천국의
기쁨 중 죄 사함의 기쁨을 지금 이 땅에서부터 맛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 중 자주 죄 사함에 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7:48). 이 선언은 그분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존재, 즉 하나님이신 메시야(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기에)임을 보이심과 동시에 천국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지금 여기서 죄 사함 받은 것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사함의 축복을 맛본 자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갖는 참다운
삶의 특징인 용서를 받아본 자만이 진정으로 용서해 주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용서함과 그의 자비가 필요치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이 필요한 자이며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모습을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요구하시며(마18:21-35)
팔복의 말씀으로도 가르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인 죄 사함과 용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용서의 축복, 즉 하나님의
복을 끼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임한 천국의 축복인 죄
사함을 누리고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지금 맛보고 있는 것들로 인하여 앞으로 온전히 맛볼 그 나라의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예수님의 재림을 기쁨으로 고대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Ⅱ)―영생┃
┕━━━━━━━━━━━━━━┛
┌────요 점────────────────────────────────┐
│ │
│ 하나님 나라의 적극적인 축복은 우리가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의 생명(영생)│
│ │
│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이미 내 안에 있어 나의 삶의 성격을│
│ │
│나타내는 것을 볼 때 지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생명이│
│ │
│충만히 만개될 주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는 축복을 누리기로 합시다. │
│ │
└───────────────────────────────────────┘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가? 요한복음 3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니고데모와의 변론에서 예수님의
답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중생과 무엇을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또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는 모든 일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고 합니까?
중생으로만입니다. 이같이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을 얻었다는 것과
언제나 같은 뜻으로 씁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합니다.
이「안다」는 말은 우리가 아는 것 같은 단순한 지식에 관한 단어가 아닙니다. 안다는
뜻은 훨씬 깊은 뜻입니다. 나는 저 여자를 안다. 이런 때 쓰는 말입니다. 깊은 교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박찬숙을 아십니까? 190㎝에 태평양화학 선수. 이렇게
그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도
여러가지로 쓰입니다만「그는 내가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야」이럴 때 쓰는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깊은 속마음을, 그의 됨됨이를, 속성과 성격과 인격을
안다는 뜻입니다. 인격적인 깊은 교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U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u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며 이것이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얼마나 깊은 교제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영생의 정도가 어떤 것이냐가 구별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영생을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서 추적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분명히
압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모릅니까? 알죠!
그러나 어떤 식으로 압니까? "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신, 고무신" 이러면서
약을 올린다구요.
「예수는 처녀가 낳았다며」이것이 그들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이미 저들과 다릅니다. 그 구별이
생활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런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거기엔 급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둑으로 치면 지금 18급 아니면 12급도 아직 못 올라 오셨습니다.
새까맣게 놓고 두어도 지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지금의 우리 됨입니다. 도대체 9점을
놓고도 지니까 "에이! 그럴바엔 맞두자" 이겁니다. 우리의 생활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보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낫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단지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점검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우리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곤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자꾸
흔들립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 우리가 못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처럼 노는
것과 개가 사람처럼 노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개처럼
놀아도 그건 사람이고 개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어도 그것은 개입니다. 말은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개를 보았습니까? 사람은 어쨌든 사람입니다. 개집에
들어가서 자도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오해하느냐 하면 사람이라면서 왜 개보고 더럽고 개만도 못 하냐
이겁니다. 여기서 늘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압니다. 안다고 말하기가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 감정은 이럴 때가 많죠?
"어디가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 봤자 하나님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제가
안 믿는다고 그랬습니다." 이 부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또 하나의 기준선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생을 얻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적극적인 축복은 한마디로
영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영원한 생명이라 표현할 수 있고 그 생명은 당연히 생활을 가지기에 영생의 삶이라는
표현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생을 우리가 앞으로 얻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에 우리도 지금 여기서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생명은 원래 아담을 처음 지으신 후 약속하신 것이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생명이 오히려 영생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성격은 하나님 자녀의 생명을 나타내지 못하고 단지 사람의 생명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알기쉽게 생각해 보면 동식물의 생명이 각각 차이가 있듯이 사람과 동물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으며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에도 뚜렷하고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부자지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양자 됨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앞 과에서 살펴
보았던 죄 사함의 축복을 훨씬 뛰어넘는 궁극적인 축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의 보호하심 아래서 그의 자녀들이 평안히 거하는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 제시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사65:17-25;시100:3;계21:2-4)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생명의 특징을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자의 번영과 행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얻는 축복, 즉 하나님 자녀의 생명(영생)은 즐거움의 가장 으뜸되는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지배(다스리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이 영생은 물론 현재에도 있지만 내세에 가서야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히 이루어져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로 보는 것 같이 분명하리라고 바울은 말하기도 합니다.(고전13:12)
하나님과 사귐으로 특정지워지는 이 생명을 소유한 자는 당연히 그 사람의 바로
이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들이 얻은 생명의 질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로서의 중대한 역할을
하나님 자녀들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축복으로 알 때 하나님 자녀이기에
당하는 이 땅에서의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를 더욱 잘 드러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이는데 쓰임 받는 인생임을 알아 단지 고통을 없애달라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환난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마5:10-12;요15:18,19)
그러나 또 하나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 영적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여기서 주 하나님과 교제를 지금
나누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이
있습니까? 왜 모른다고 감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거울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뒤통수도 못 보는데 무슨 거울로 봅니까? 이것이
성경의 요구이며 지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Ⅰ)┃
┕━━━━━━━━━━┛
┌────요 점────────────────────────────────┐
│ │
│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는 필히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실행됩니다. 따라서│
│ │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의 수준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으로까지 올라가│
│ │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의는 우리에게 짐으로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 │
│그런 수준으로까지의 삶으로 살아갈 것임을 보여 주시는 축복임과 동시에 오늘 이미│
│ │
│그 나라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기에 지금 여기서도 그 모습을 내 삶을 통하여 실현하│
│ │
│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
│ │
└───────────────────────────────────────┘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 즉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의」란 어느 수준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들, 특별히 21절 이하를 보시면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21~48절까지의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얘기들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그의 수준이 어느 만큼 높아져야 되고 완벽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지적들입니다. 산상설교에 묘사된 수준들을 보실 때마다 이 요구에 사실상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합격되지 못했다는 것도 알아야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한번도 칭찬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잘못됐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는
얘기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쪽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왜 비교를
하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쪽이 틀렸다 하면 반대쪽으로
가라 해야 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쪽으로 가지 말고 이쪽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보다 더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틀린 쪽을 ×표 하시면 당연히 반대 쪽으로 가라고 해야 맞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들보다 더 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깊이와 내용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어느 수준까지 요구하는가 하는 그 첫번째 법칙으로
「분노의 법칙」을 기억해 보겠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怒)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분노의 법칙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인치 말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미워하고 노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참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왜 재미있냐 하면 우선 여기있는 말
때문입니다.「라가」라는 말에 각주가 "히브리인의 욕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가란 빈머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비었다」라고 하지 않고 꽉 찼다고 하여
돌머리라고 말합니다만 그 사람들은 빈머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공명(共鳴)의 법칙을 제시하는 이유는 "누구 잘못이냐! 그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었던 분노의 법칙에 대한 개념이요,
심판의 방법이었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화를 내고 노하는 자부터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 선에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않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의 기준이라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그것이
결과되는 원인이 없어져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로 설명을 하면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기침이 납니까? 사레가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무엇일 수 있습니까? 폐결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기침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구멍을 막아버리면 됩니다.
다시는 기침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기침이 난 것은 어떤
현상일 뿐입니다. 무엇의 현상이냐를 진단해 내는 사람을 우리는 의사라 합니다.
「기침이 나니 기침 멈추는 약을 드십시오」그것은 바른 처방이 못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진단이 바로 똑같은 얘기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 일이
있다면 증상을 감추는 것뿐이었지 원인 치료를 하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마음에 있는 미움이 열매를
맺는 것이 살인이지 살인 따로 있고 미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의「미워하지 말고 화를 내지말라」는 이 얘기만큼 하나님 나라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가 분노에
대하여 어느 만큼 자제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느
수준만큼이냐 하면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어 놓는 자리까지입니다. 분노를
그치는 정도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더 가서 사랑의 자리까지 가야
됩니다. 우리의 수준은 기껏해야 사랑할 만한 대상을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을 돌보는
사랑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내 자식,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보모는 누구나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만은 천재 같고 자기 자식만은 원죄를 안 진 것 같지 않습니까? 모두가 이 못된
친구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23,24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사람으로서 예물을
드리러 가는 그 시간까지도 화해하지 못할 사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는 그 사람에
대해서 보통 증오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십니다. 예물을 드리는데 거기서
네가 누구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놔 두고 화해하러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주님께서 하신다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은 무엇입니까? 「주여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제가 제사를 곱배기로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이 대목이 갖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인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결단코 화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우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용서받았다는 그 깊이를 음미하신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Ⅱ)┃
┕━━━━━━━━━━┛
┌────요 점────────────────────────────────┐
│ │
│ 우리가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
│ │
│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삶의 전영역에서 나타나│
│ │
│기를 소원하는 기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 │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의'의 구체적인 수준들을 몇 가지 법칙(분│
│ │
│노의 법칙, 성결의 법칙, 정직의 법칙)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 │
└───────────────────────────────────────┘
예수를 믿고 그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발견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 가장
크게 찾아오는 자세는 끊임없는 자기 반성입니다. 그 반성이란 단순히 내가 이것을
잘못했다가 아닙니다. 늘 솟구쳐 나오는 죄의 기계가 내 마음에 있다는 그 두려움입니다.
"저희의 입은 열린 무덤이요!" "회칠한 무덤같으니"(롬3:13;마2:27).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썩은 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열린 무덤인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이 그것을 고쳐내기 위한 싸움에 전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지 않고 누가 더 많은 열매를 쌓아 놓았느냐로
시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참으로 무서운 함정입니다
이와 관련된 두번째 법칙은 '성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준, 수준으로 성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7절 이하에 나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나로 범죄케 하면 눈을 뽑아버리고 팔이
나로 범죄케 하면 팔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U그리스도를 좇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있거든 절대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 일차적인 요구입니다.@u 네 부모나 처자나
운명이나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 부모나 처자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를 좇을 수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도
미움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대조입니다. 저쪽이 너무 커서 비교를 하자면
그런식으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몸의 일부로서 잘라버릴 수 없는 것들을 자르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눈을 뽑는다고 범죄가 그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팔을 자른다고
범죄를 그만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힌트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견물생심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다시 보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얘기를 이상하게 성결의 법칙으로 제시를 합니다. 네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눈을
빼라!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그 죄를 짓는 원인이 내 마음에 있으므로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죄와 더불어 노는 자리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라는 얘기입니다. 절대
죄와 장난하지 마십시오.
지금 성결의 법칙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결하기 위하여
우리 쪽에서 나를 어디로부터 한 걸음씩 빼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내 팔로 하여금 더 이상 장난질을 못하게 하고 내 눈으로 하여금 더 이상
악을 보지않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를 금욕주의로 만들고 세상에서
격리되는 삶이 최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제시하느냐 하면 네
손이 나가서 만지고 네 눈이 보아서 촉발되는 자리가 사실은 어디냐는 것 때문입니다.
듣고 보고 맛보고 하는 모두가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닙니까? 감각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개성이요, 기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지적들을
요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법칙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결의 법칙에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우리가
성결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요구하는 데 비하여 우리가 어느
수준에 있는가를 제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모든 얘기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소리 못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지적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 대한 지적입니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오십보, 백보가 아닙니까?
세 번째 법칙으로 '정직의 법칙'이 나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47)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맹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 맹세라는 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23:16 말씀부터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16-19절)
이 말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세를 해 놓고도 지켜야 할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왜 나왔습니까? 맹세를 안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 지키는
맹세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필요한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장으로 찍으면 약속을 지켜야 하고 저 도장을 찍으면 안 지켜도 된다는 뜻입니다.
안 지켜도 되는 도장은 상대방을 속이는 데 쓰는 것입니다. 도장을 찍었으니
상대방이 됐다고 믿을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납득시키기 위한 맹세로 쓰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으니까 이것은 지킬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안목에서 보시면 마태복음 5장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에
하나님이 들러리가 되는 일은 할 엄두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 내가
들러리가 되는 일은 있어도 하나님이 왜 들러리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맹세가 그렇게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네 발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옳다", "내 생각에는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뿐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 상대방을
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의의 기준입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이 수준에서도 우리는 무릎을 꿇어 꼬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여러 측면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여러분이 항복하시고 또 생각을 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인간이 뭐냐 하는 데
대하여 뼈저린 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 큰 축복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나는 그래도...」라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각이 있으냐! 그것을 성경에서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실은 성경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한 목표 제시입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면 끔찍한 요구들입니다. 그런데 됩니다.
정말 됩니다. 되고야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고집이 더 세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할 때 들으면 칭찬받고 그 자리까지 가고,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터지고 그 수준까지
간다고 그랬습니다. 가긴 갑니다. 열차를 타라 그럴 때 타면 의자에 앉아서 가고 타라는
데도 안 타면 새끼줄에 목을 매인 채 기차 뒤에 묶여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길을 끌려가 보십시오. 덜커덩 덜커덩 신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아무리
짧았을지라도 돌아보십시오. 사람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결국은 바꿔
놓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