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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토리 민기가 안쓰럽다
40년 된 낡은 집의 대수리(re-modelling) 공사로 인해 한 달
넘게 어수선한 생활이다.
아직도 지난 날들 만큼 더 참아야 한단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며 공사에 어떤
도움이 될 것도 아니지만 마냥 외면할 수도 없어 장거리 산행이
평소처럼 편하지 않은 요즈음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山할아버지를 많이 기다리는 초등학교
5학년 홍민기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다.
2005년 10월 6일 저수령 아래 민기네 집의 밤은 제천의 중학생
가은이 빠졌을 뿐 3년 반 전으로 돌아갔다.(백두대간 18회 참조)
젊은 부모의 걱정처럼 사람이 몹시 그리운 민기다.(메뉴 우리의
이야기들 200번 글 참조)
교사와 학년별 학생비(比)가 대부분 1대 1이란다.
지구상의 가장 훌륭한 학교라 해야 하나.
그나마도 미구에 폐교의 운명이란다.
호기심이 워낙 많아 많이 묻던 아이가 고학년이 되어 말수는
적어졌지만 질문의 질이 달라졌다.
도시 아이들처럼 영악스럽지 않으며 순수함이 자연 그대로다.
부모와 적은 수의 가족 외에는 더불어 사는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결함이 전혀 없으면서도 외토리가 되어 있는 그가 안쓰럽다.
나랑 보내는 밤이 깊어가는 것이 아쉬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따금 묻곤 했다.
자연과 친숙하게 지내기 때문인지 관찰력이 놀랍다.
전엔 곤충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나 자라면서 다양해 가나 보다.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서 멋진 사회의 일원이 되기 바라는"
젊은 엄마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축원하는 밤이 갔다.
이 산 속에서 어찌하란 말인가
북상 때와 달리 홍성길 부부는 내 입산 준비에 새벽부터 바빴다.
우리의 인연이 막 시작된 그 때로 부터 적잖은 세월에 차곡차곡
쌓인 정의 시킴이리라.
그러나 저수령에 도착하기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진 빗줄기가 옥녀봉에 오르기도 전에 퍼붓듯 쏟아졌다.
문복대에서 벌재에 내려설 때까지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다.


위 / 문복대
아래 / 벌재
그 새 벌재가 또 딴 모습으로 변했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문경시 동로면을 잇는 한산한 지방
도로에 불과했는데 59번 멋장이 국도로 승격하였다.
북상 당시는 식중독으로 기진 맥진한 상태에서 악전고투했던
차갓재 ~ 벌재 구간이었으나 이 번에는 황장산 일대 암릉구간을
폭우와 싸우며 통과하게 되었다.
식중독 때문이 아니라 비로 인해 민기 엄마의 정성이 담긴 점심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맹물로 가야만 하니까.
이래 저래 악연구간인가 보다.
그런데 이 산속에서 어찌하란 말인가.
다시 굵어진 빗줄기를 안고 벌재에서 가파른 비탈 위 헬기장에
올라 섰을 때였다.
마음을 짓누르고 옥죄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는 청천벽력에
다름 아닌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수학중인 딸 현아가 죽을 지경에 있어 당장에 미국으로
날아가야 하는데 비자 어찌되었느냐는 것.
아내는 거두절미한채 볼멘 소리를 내뱉고 끊어버렸다.
우리의 미국 비자기간 만료로 다시 인터뷰를 신청했으나 집 수리
하는 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어 무기 연기 상태였다.
딸이 죽게 되었다니?
큰 사고를 당했거나 미처 모르던 중병이라도?
전혀 대책이 없는 산 속 아닌가.
낙남정맥 종주중 집에 도둑이 들어 온 집안을 들쑤셔 놓았다는
전화가 왔을 때였다.
속수무책인 산 속의 내게 꼭 알려야 하겠느냐고 대꾸했었다.
그냥 빨리 귀가하도록 말할 수는 없었을까.
식중독이나 비는 단지 몸의 움직임에 불편을 줄 뿐이다.
천만근 무겁고 아프며 초조한 마음이게 해야만 했는가.
고백컨대 사려깊지 못한 행동의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희한한 거래
폐맥이재 이후 황장재, 감투봉, 황장산의 위험한 암릉 구간을
허둥 지동 넘어 차갓재에서 생달리로 탈출했다.
901번 지방도로 까지 내려왔으나 교통편이 문제였다.
빨리 귀가하는 것 외엔 현아의 상황을 확인하려는 노력같은 건
당장엔 의미 없다.
산 속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묘책이 없기 때문이다.

황장산
백두대간과 9정맥을 종주하고 다시 반복하는 동안의 숱한 hitch-
hike중 이 보다 더 초조하게 매달린 적이 있었던가.
봉고 6밴 한 대가 섰다.
문경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운전자는 한 제의를 했다.
그는 18년간 몸 담았던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준비중이라 했다.
자기의 이런 모험적인 행동을 운명적 필연이라고 믿는단다.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요구했다.
나의 대답으로 차비를 갈음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농이 아닌 진지함을 강조했다.
참으로 희한한 거래다.
그러나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건성으로 한 대꾸가 기억날 리 없지 않은가.
온통 현아의 일이 절박하게 나를 압박하고 있는데 그가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그 분위기에 동조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차분한
마음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료수를 주고 자기의 방향에서 벗어나면서 까지 내게 편의를
제공한 그에게 무성의했던 일이 지금도 많이 미안하다.
3일간의 종주 여정을 단 하루로 마감하고 어렵잖게 동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전적으로 기상천외의 제의를 한 92 서 1497 운전자, 미구의
사업가 덕이지만 나는 이 땅에서 가장 더디 가는 버스를 탄
느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