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상남도 통영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아름다운 한려수도에 예술의 꽃 활짝 피운 항구도시
통영의 시작은 바다였다. ‘통영’이란 단어엔 비릿한 바닷내음이 풍긴다. 육지로 불어오는 해풍엔 그리움으로 애타게 연인을 부르던 시심(詩心)이 있고, 잔잔한 파도처럼 때로는 태풍 같이 몰아치는 교향악도 묻어있다. 역사를 더듬어 오르면 해일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이 땅을 지켜낸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인물도 있다.
초겨울, 아니 11월 늦가을에 통영을 간다니 사람들은, 거긴 동백꽃 피는 이른봄이라야 좋다고 귀띔했다. 조선 수군의 상징인 세병관이나 제승당 오름길에 뚝뚝 떨어진 붉은 핏방울이 분위기를 돋우고, 청마의 애절한 연애시는 역시 파돗소리 들리는 동백나무 꽃그늘에서 읊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이다.
남국의 햇살 뜨거운 여름날의 통영은 바닷가 고을답게 그야말로 성수기다. 비진도 욕지도 사량도, 그리고 매물도 같은 한려해상의 때깔 고운 섬들의 해벽과 그 절벽으로 달려드는 파도를 찾아가는 인파는 바다의 물비늘처럼 많다.
그러나, 통영사람들은 가을에 초청장을 쓰는 걸 즐긴다. 가슴 시리도록 파란 하늘, 그 창공 아래 같은 빛깔로 뒤척이는 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점점이 흩뿌려진 아름다운 섬들…. 이런 소식들을 써서 보낸다. 물론 추신으로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재료로 손맛을 낸 요리 목록을 덧붙인다. 이른봄부터 통영 한번 내려오라는 전자메일을 받았고, 가을 들어서도 여러 차례 재촉 받았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가을도 한참 깊은 11월 초순에야 통영행 짐을 꾸렸다.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 통영에서 처음 반긴 건 북국(北國)에서 내려오는 기러기떼였다. 그들은 점차 어두워지는 한려해상의 노을을 등지고 어디론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에 녀석들의 대열이 자꾸 흐트러지지만 이내 추슬러 대장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V자를 이룬다. 아니다. 저건 이순신 장군이 남해의 거센 물살을 누비며 왜군을 섬멸하던 그 대열, 바로 학익진(鶴翼陣)을 닮았다. 그렇다. 통영에서라면 저 기러기 대열을 학익진으로 봐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통영에서 어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빼놓을 수 있을까. 공의 등장은 남해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통영이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한산도에 처음 들어섰던 삼도수군사령부 통제영은, 비록 전란중이라고는 하나 새로운 군사도시였으니, 통영은 신군사도시인 셈이다.
늦가을날 통영 나들이는 한산도(閑山島)부터 시작한다. 금새 비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궂은 날씨. 제승당(制勝堂) 가는 바다는 잿빛이다. 먼 섬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가까운 섬들은 희뿌연 장막에 오락가락한다.
그간 통영은 여러 번 들렀지만 한산도는 두번째다. 80년대 중반 무렵에 처음 섬에 들어갔으니 15년만인 셈이다. 당시엔 한산중학교가 있는 섬 남쪽의 하소리 마을에서 북쪽 두억리의 제승당까지 걸었다. 해안길과 산길로 이어진 그곳은 십 리가 넘었으니 한산도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산도는 우리 민족의 명운을 지탱해준 아주 ‘큰 섬’이었다.
1592년 4월13일(이후 모두 음력) 부산포로 내습한 왜군은 이튿날 상륙작전을 개시했고, 그 날 부산이 함락되었다. 조선군은 연전연패하였고, 28일엔 믿었던 신립 장군조차 남한강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5월2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5월4일 여수에서 발진해 한산도 인근 해역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했다. 7일, 이순신 장군은 옥포만에서 왜선 26척을, 이튿날 적진포에서 11척을 격침시켰고, 9일 여수로 귀항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었고,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하는 장계를 임금이 받아본 곳은 평양이다.
그리고, 29일 2차 출전에선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왜선 70여 척을 부수었다. 나고야 지휘소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해군의 연패 소식에 크게 노했다. 서해 돌파 없이는 수륙 양면 공격은 실패하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해상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해 대단위 함대를 편성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전선을 이끌고 합세한 후 건곤일척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양국 주력 함대의 총력전이었던 한산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미 적의 움직임을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7월6일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의 수군을 합친 전함 49척으로 좌수영을 출발했다.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의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황금정보에 접하고 적을 이곳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먼저 전선 대여섯 척으로 왜의 척후선을 추격하였다. 그러자 견내량의 주력부대가 일시에 돛을 올리고 쫓아왔다. 조선 추격선과 함대가 모두 후퇴하자 왜군은 조선 수군을 쫓아 넓은 바다로 나왔다. 그때 한산도 앞바다의 방화도와 화도에 매복해 있던 조선 주력함대가 갑자기 나타나 쫓기던 전선을 엄호했고, 함대는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며 학익진으로 반격했다. 적선 47척이 격침되었고, 10여 척을 나포했으며 14척이 도망갔다.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김해로 달아났고, 대부분의 휘하 장수들은 전사했다. 이순신함대는 며칠 뒤 새벽, 적선이 머물고 있는 안골포로 출동했다. 종렬진으로 여러 번의 파상 공격 끝에 적선 42척을 격침시켰다. 한산해전은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세계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이루는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국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왜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해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겼고, 수륙 양면 공격전략도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은 전라·충청·황해도를 지켜냈으며 반격의 계기도 잡았다.
제승당 오름길에서 문득 스치는 생각.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면 우리나라는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충격적인 첫 장면처럼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의 자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20세기 초에 결국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고 말았으니 섬나라의 집요한 침략 의지가 참으로 무섭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 한산도로 온 건 한산대첩 후 거의 1년만인 1593년 7월14일. 본영이 전라도에 치우쳐 있어 부산포에서 서진하려는 적을 사전에 막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여수에 본영을 두고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할 때마다 이 한산수로를 지나면서 늘 요긴하게 여기고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수로 상에 있었던 한산도는 북서부에 깊숙한 만이 발달해 있는데, 그 만 안에 다시 몇 개의 작은 만을 이루고 있어 수군기지로선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 거기에 배를 감출 수 있었고 밖에서는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왜군들이 전라도로 가자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을 통합, 주관하는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선 함대는 비로소 삼도수군의 통합명령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한산도 본영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는 통영이 역사 전면에 나서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한산대첩으로 적은 큰 상처를 입었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은 이순신 장군이 전력을 재정비하는 기간이었다. 제승당을 비롯하여 수영의 각종 시설을 짓고 군비 증강에 힘쓰는 한편 절대 부족하던 전선의 증강에 힘을 쏟아 진을 옮길 당시 143척(충청수군 40척 포함)이었던 전선이 250척으로 늘어났으며, 왜군이 사용하는 조총과 성능이 같은 총통을 시험제작하여 각 진포에 보급하였다.
또 백성을 불러모아 둔전을 짓게 하여 군량 확보에 힘쓰는 한편 고기도 잡고 질그릇도 구워 그것을 판 돈으로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한산도 동쪽의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의 대치는 4년간 지속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물 때 지은 시 한 편을 제승당 수루(戍樓)에서 떠올려본다.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찬 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警寒雁陳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憂心轉輾夜)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이순신의 ‘한산도 야음(閑山島夜吟)’
‘고(高)’ 자와 ‘도(刀)’ 자로 운자를 붙인 이 5언절구엔 고뇌에 찬 이순신 장군이 밤새 뒤척이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기러기 높이 떴다 했으니 요즘 같은 늦가을이었을 것이다. 영웅에게 고난은 필수 조건인가. 이순신 장군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누명을 쓰고 1597년 2월26일 이곳 통제영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권율 장군 아래서 백의종군하게 되었고, 얼마 뒤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7월16일, 원균이 앞장선 조선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다. 조선 함선 300척 이상이 깨졌고, 삼도수군은 거의 전멸했다. 이곳 한산도 본영도 당시에 폐허가 되었다.
7월23일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 받았다. 그러나 임금은 다시 이순신 장군에게 유명무실한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세계 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이순신 장군의 명문은 여기서 탄생한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옵니다.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백의종군서부터 마지막 바다 노량까지 이순신 장군의 눈물겨운 고뇌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군사도시는 문화적으로 척박할 것이라는 게 일반의 인식이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군사도시는 온갖 유무형의 전통문화가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내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전라의 강진군 병영이 그러했고, 충청의 서산시 해미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 고을은 대부분 근대화 과정에서 고유의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통영은 아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던 삼도수군 통제영은 제6대 통제사 이경준 장군 때인 1604년 한산도와 가까운 두룡포(현 통영항)에 새로 터를 잡았다. 이후 1895년 통제영이 혁파될 때까지 300년 가까이 통제영 시대가 열렸다. 통영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의 통영은 당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버티고 있던 ‘통제영 12공방(工房)’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나온 제품은 모두 ‘통영’이라는 지명이 붙어 각각 통영갓 통영자개 통영소목 통영장석 통영부채 통영꽃신 통영놋그릇 통영대발 등으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 받았다.
그래서 후인들은 세병관 앞의 향토역사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무리 여유 있게 잡아도 한없이 짧고, 여객선터미널 앞의 통영전통공예관은 눈요기만으로는 아쉽다. 또 나전칠기 송방웅 장인의 작업실을 잠깐 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한 고을이 지닌 고유의 때깔은 하늘이 내려준 자연환경과 인간이 쌓은 역사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통영을 지배하는 향토색의 근원은 바다다.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사람들이 지리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통영 사람들은 남해의 잔잔한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반에게 한려수도(閑麗水道) 뱃길로만 인식되는 통영 앞바다는 그들의 어머니면서 친구면서 애인이고, 마침내는 그들이 가슴에 소중히 보듬은 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한다. ‘한국의 시드니’라고 하는 이도 있다. 겉으로 드러난 항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표현일 테지만, 각 방면의 예술가를 유독 많이 배출한 통영은 속으로도 꽉 찬 고을이다.
시인으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 ‘다보탑’ 등의 시조를 쓴 초정(草汀) 김상옥(金相沃·1920-), 우리가 ‘꽃을 위한 서시’ 등으로 기억하고 있는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1922-)가 있고, 청마의 친형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1905-1974),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7-), 그리고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1917-1995)이 통영 태생이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통영 출신의 젊은 문화예술인은 한려수도의 섬들처럼 셀 수 없이 많다.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누비던 그 바다에서 이들은 예술을 건져 올렸다. 아름다운 바다와 섬들이 전시엔 은폐와 엄폐의 요지요, 평시엔 예술적 기질을 자극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거장들이 동시대에 같은 공간을 누비면서 같은 파돗소리를 들으며 같은 골목길을 걸었다는 데 상상이 미치면 부러움에 피가 뜨거워진다.
칠팔 년 전, ‘통영의 힘은 바다의 힘’이라 단정하는 통영 토박이 친구들과 늦은 밤 항구에서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마침 폭풍 전야라 집채만한 파도가 갯바위와 방파제를 치며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할 수 있는 한 바다쪽으로 나가 자리를 폈다. 중앙시장에서 떠온 횟감과 규칙적으로 몰아치는 파도를 안주 삼아 소줏병을 몇 개 쓰러뜨렸을 때 타향에서 생활하는 친구의 입에서 시가 흘러나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 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의 시 ‘그리움’-. 아마 단 5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로 가슴 터질 듯한 안타까움을 이토록 애절하게 표현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그 친구가 통영 학창시절에 애타게 그리워했던 누군가가 떠올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청마가 읊조리던 통영 토박이말로, 그것도 바로 곁에서 파도가 달려드는 바닷가에서 듣는 청마의 시는 표준말 잘 쓰는 성우의 어떤 시낭송보다도 아름다웠다.
파도가 잠시 물러난 사이 친구의 입에선 시 한 편이 또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통영 사람답게 그는 비교적 긴 ‘행복’을 비롯해 제법 많은 청마의 시를 암송하고 있었고, 나그네는 그 밤이 깊도록 친구가 읊어주는 시를 경청했다.
연인들은 통영 여행을, 청마 유치환이 8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1916-1976)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내던 청마거리 통영우체국에서 시작한다. 통영항 중앙시장 뒷길의 통영우체국에서 세병관 사거리까지 청마거리는 통영에서 청마의 체취가 가장 진하게 배어나는 곳이다.
청마가 사랑하던 정운은 문재와 미모를 고루 갖춘 여인이었다.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청마가 근무하는 통영여중 가정교사로 부임했다. 한가락 한다는 통영의 사내들은 자못 긴장했다. 일제 말기 만주에서 방황하다 돌아온 서른여덟 살 청마의 가슴 속에도 정운은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학교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얼굴이지만 안타까운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유교 가풍이 엄한 집안에서 자란 정운은 바위처럼 뭍처럼 끄덕도 않았다.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까지 20년 동안 정운에게 띄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에 이른다. 이 편지들은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만큼 청마와 정운의 사랑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펜으로 쓴 편지보다 버튼만 누르면 대화할 수 있는 핸드폰이나 대화하듯 사연을 주고받는 문자메시지에 더 익숙하다. 통영우체국은 청마가 정운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던 사연 깊은 우체국이기 전에 바닷사람들이 기쁘거나 슬픈 사연을 주고받던 곳이다.
멀리 떠나온 여행길. 핸드폰을 잠시 접어두고 통영항의 빛나는 야경이 들어앉은 엽서에 자신의 마음을 적어보자. 익숙지 않다면 청마의 시 한 편만이라도 적어보낸들 어떠랴.
통영의 앞바다와 파도와 섬과 동백을 사랑했던 시인의 생가는 망일봉 기슭의 청마문학관으로 옮겨갔다. 골목 안 생가터엔 대리석 표석만이 쓸쓸한 사연을 들려준다. 이 자리가 번잡한 시내인 데다가 새로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서라 하는데,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청마 생가에 대해선 말이 많다. 그 동안 통영시와 이웃의 거제시는 서로 청마가 자기 행정구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해 왔다. 청마 유족은 얼마 전 ‘청마가 통영에서 태어났다’는 통영의 청마문학관 안내판이 잘못됐다며 소송까지 냈다. 청마는 1908년 거제시 둔덕면에서 태어나 1910년 통영으로 이사했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다.
법원은 최근 ‘확실한 공적인 기록이 없어 청마 출생지가 거제라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이 공방이 어찌 끝날지 길손은 잘 모른다. 다만 청마를 키운 건 오늘도 파란 물결 일렁이는 통영의 앞바다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서로 고향임을 주장해주는 고을이 있는 청마는 어쩌면 행복한 시인인지도 모른다. 청마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공간을 살면서 같은 바다를 사랑하며 같이 술잔 들이키던 10여 년 터울의 한 작곡가는 먼 이국에서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만 하다 끝내 그 파돗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바로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서유럽 현대음악사 최고의 반열에 오른 세계적인 천재 작곡가다. 1945년 9월 유치환, 김춘수 시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해 활동한 그는 통영여중, 통영고등학교, 그리고 두룡·통영·충렬·진남초등학교 등 당시 통영에 있는 학교의 교가를 지어주기도 했다. 통영의 웬만한 학교 교가는 윤이상이 작곡했고, 유치환이 작사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는 통영 출신들의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통영을 떠난 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3년 뒤 독일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해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안기부에 의해 서울로 강제 소환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세계 음악계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풀려났다.
1994년 서울에서 윤이상음악제가 열렸을 때 윤이상은 귀국하려했지만 입국금지 당했고, 결국 그 이듬해 유명을 달리했다.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조국에서만은 버림받았던 윤이상. 흔히 ‘상처받은 용’이라 불리는 그의 음악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이 화인처럼 남아있다.
윤이상은 베를린 하늘 아래서 숨을 거두면서 호수 같이 잔잔한 통영 앞바다를 그토록 보고 싶어했다 한다. 또 죽기 전에 남북통일도 애타게 기원했지만 그 꿈은 둘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봄 통영에서 열린 ‘2003 통영국제음악제’는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혼을 기리기 위한 행사였다. 그리고 오는 2006년, 윤이상을 낳고도 포용할 수 없었던 통영엔 클래식음악 전용공간인 국립통영음악당이 들어선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한 곳뿐인 1,500석 이상의 클래식음악 전용 홀이 통영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는 고향을 그리워하던 윤이상의 꿈이 변주되어 피운 꽃이다. 통영 사람들은 이 음악당이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믿고 있다. 아직 베를린 유공자 묘역에 누워있는 그가 통영의 잔잔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청마거리 끄트머리 사거리에 서면 험상궂으면서도 친근한 얼굴의 벅수가 길손을 세병관(洗兵館)으로 안내한다. 노란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도 재잘대며 세병관 문을 들어선다. 순진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저들 중엔 미래에 이 땅을 빛낼 문화예술인도, 뱃노래를 부르며 멸치를 잡아오는 어부도 섞여있으리라. 이들은 나중에 어떤 색조로 통영을 기억할까.
세병관은 경복궁의 경회루, 전라좌수영의 여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이름이 높다. 현판의 ‘洗兵’이란 글자는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이라는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에서 따온 구절로, ‘어떻게 하면 은하의 물을 끌어들일 장사를 얻어 무기들을 깨끗이 씻어 두어 영원히 사용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는 뜻이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직접 겪으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피를 토하듯이 이 시를 썼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세상에서 전쟁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현판의 글귀대로, 전쟁은 영원히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인류의 악덕이다. 하지만 봐라.
우리는 세병관 출입문의 현판에 ‘전쟁을 멈춘다’는 뜻의 지과문(止戈門)이라 써서 달았지만, 결국 20세기 벽두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느냔 말이다. 끝없이 반복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사실을 늘 일깨워준다.
해 지면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처럼, 어두운 저녁에 다시 항구로 내려왔다. 중앙시장 분식집에선 교복 입은 여학생 둘이서 커다란 족발을 시켜놓고 거리낌없이 뜯고 있었다. 여기선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잔잔한 물결 일렁이는 항구 앞 선술집은 늘 그렇듯 투박하지만 정겨운 사투리가 넘쳤다. 소매물도 같은 먼 섬들을 다녀온 날이면 육지는 언제나 흔들렸고, 길손은 육지멀미를 술로 달랬다. 그러면서 어부들의 웃음소리와 한숨을 만났고, 한때 밀항을 꿈꾸던 노인의 사연도 엿들었다.
‘진주까지 천릿길’에서도 남쪽 바닷가로 한참을 더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통영은 너무 먼 곳이라 관리들이 울면서 왔다는 고을이다. 여느 오지마을 같으면 주민들의 순박한 정 때문에 떠날 때도 울었다고 할 테지만 통영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통영을 떠나지 않고 기꺼이 통영 주민이 되었다고 한다. 통영 토박이들이 아니라, 십수 년 전 타지에서 흘러 들어와 통영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한려수도 삼백리의 동쪽 항구인 통영항. 밤바다엔 어화(漁火)가 불 밝히고 통영운하를 오가는 선박들의 불빛도 길게 이어진다. 밤이 깊을수록 항구는 더욱더 찬란한 빛깔로 피어난다. ‘내일은 어느 섬으로 갈까.’ 잔잔한 파도는 말이 없다. 그래. 어제는 한산도요, 그제는 소매물도였으니 내일은 사량도로 가야겠다. 통영 앞바다에 어디 이 한 몸 받아줄 섬 하나 없으랴. 항구의 밤이 조금씩 깊어만 간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