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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Charlemagne)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를로 마그노(Carlos Magnus), 카롤루스(Carolus) 등으로 불린다. 그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 세계를 처음으로 통합한 왕으로 기억된다. 샤를마뉴는 742년 당시 프랑크의 궁재였던 피핀(715?~768)과 레온의 백작 카리베르의 딸 베르타(720~783)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리베르는 프랑크 왕 티리3세의 딸 베르타와 레온백작 마르틴의 아들이었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이미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샤를마뉴가 태어나기 10년전인 732년에는 사라센의 침입으로부터 유럽 국가들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가 죽자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프랑크 왕국의 권력의 핵심이었던 궁정 행정관 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선왕조의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하는데 집중했고, 751년 피핀은, 이름없는 자보다는 힘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아리스로부터 허락을 받고, 실권은 없고 이름만 있던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실데릭3세를 폐위시킨 후, 실데릭과 그 아들 티리와 수도원에 유폐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으로 뽑혀 축성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판2세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러, 753년말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로 방문했다. 그후 피핀은 이탈리아에 가서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 롬바르드로부터 빼앗은 많은 땅을 교황령에 기증하였다.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 한다. 이때 교황은 피핀의 두 아들 샤를마뉴와 동생 카를로만에게 축성해 주었고, 이때 샤를마뉴와 동생 카를로만은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왕의 후계자로 공식 임명받았다. 760년부터 피핀은 해마다 원정을 하여 프랑스남쪽 아키텐까지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히었다. 이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는데, 훗날 샤를마뉴가 유럽정복사업에 암암리에 지도가 되었다. 768년 피핀은 변방의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하고 오던 중 사망하자, 프랑크 족의 관습에 따라 동생 카를로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을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768년부터 아키텐 지역에서 분리시도가 있었으나 샤를마뉴는 이 반발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802년까지 여러 곳을 원정하여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드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의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였다. 774년 샤를마뉴는 자신이 아닌 카를로만을 지원하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이때 차지한 롬바르드의 많은 영토를 교황령에 기증하였다. 771년경에 작센족이 프랑크 동부를 기습공격한데 대한 보복으로, 첫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기 전인 772년에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에 이르러 복수보다는 이교도였던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킨 뒤,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병합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작센원정 끝에 실현되어,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작센족을 모두 기독교 신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775년부터 2년에 걸쳐에 작센족에 대한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는 작센족의 항복을 승인했다. 이 의회에는 전 프랑크와 게르만 귀족들과 성직자들 외에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지원군을 얻으러 찾아온 아랍인 사절단들도 참관하였다. 778년에는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스파니아)로도 진격하였다. 일단 히스파니아로 쳐들어가 사라고사를 포위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도시를 수중에 넣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라센 군대를 격퇴하였는에, 이때의 내용을 노래한 것이 유명한 롤랑의 노래이다. 롤랑 등은 사라센 군대를 쓰러뜨릴 것을 권하였으나, 샤를마뉴의 여동생의 남편이자 롤랑의 의붓아버지였던 가느롱은 사라센과 내통하여 롤랑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가느롱은 사라센 왕과 짜고, 피레네 산맥에 매복군대를 숨겨두게 하였다. 사라센을 정복하자는 롤랑의 주장에 비해 가느롱은 퇴각을 주장하였고, 가느롱은 곧 롤랑을 부추겨 그해 8월 사라센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낸 다음 기습공격을 당하게 하여 죽게 한다. 롤랑의 부대가 보내는 위급신호를 보고 이 사실을 안 샤를마뉴는 노하여 배신자 가느롱을 처형하고, 히스파니아의 사라센 군대를 전멸시킨다. 이후 이베리아 이남의 사라센족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에스파니아 국경지대에 변경영을 설치하고 백작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에 작센족이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한 작센족의 이러한 반란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신의없는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이 따라야 된다고 보았다. 그중 일부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하고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자신의 제국에 완전히 흡수하겠다는 목표도 완전히 달성했다. 기독교신앙만이 프랑크 및 구 서로마제국 전체를 정신적인 면까지 정복할수 있는 점을 다시 생각한 샤를마뉴는, 이때에 이르러 그들을 완전히 기독교로 개종시키게 되었다. 781년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자신의 두 아들 피핀과 루트비히를 축성케 하고, 피핀은 자신의 후계자인 동시에 이탈리아의 왕으로, 루트비히는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788년 샤를마뉴는 프랑크 동부의 바이에른족 토벌하여 바이에른 공작이자 할머니쪽 친척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555년 이후 자치권이 인정되던 바이에른을 직할령으로 편입시켜, 직접 백작과 공작을 파견하였다. 이후 구 로마제국 영역밖이었던 라인강 건너편에 살던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후 알레만니아족과 튀링겐족 등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을 쳐부수고, 그들을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는 케른텐을 차지하고, 아바르족과 벤드족을 정복하고, 고트족과 프랑크 남부에 존재하던 유대인 또한 포섭하였다. 게다가 아바르족이 헝가리에 세운 아바르 왕국과 그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 도나우강 유역에 건설된 슬라브족의 국가들도 스스로 프랑크 왕국의 복속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왕국과 공국들을 병합하여 영토가 넓어진 프랑크왕국과 샤를마뉴에게는 이제 뭔가 다른 질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샤를마뉴는 790년경 아직 왕관을 받지못한 자신의 둘째 아들 인겔하임 공작 샤를르를 느스트리와 프랑코니아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804년경에 이르면 샤를마뉴는 유럽지역의 대다수 땅을 정복하여, 고대 서로마제국이 차지했던 영역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직접 본인이 관할하기에는 땅이 광활하였기에,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여러 게르만 부족이 시행하던 기존의 부족관습을 문서화(성문법화)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기는 하되, 동시에 중앙에서 그라프(총독과 같은), 순찰사,공작(Duck)과 백작(Count) 등의 관리들을 각각 파견하여 효율적으로 관리, 통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지방자치제도 비슷한 지방봉건제도는 훗날 공작, 백작, 후작, 자작, 남작 등의 5등작이 지배하는 봉건영주국가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흔히 역사가들은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보고 있으나, 고대 로마나 그리스나 게르만인들은 동로마제국이 오랫동안 존재하였으므로, 로마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동로마제국을 통해서 연속적으로 이어져간다고 생각하였고, 오히려 동로마제국에 의해 로마가 통일되었다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샤를마뉴는 고대 로마의 시 등의 문학과 역사와 출판 등을 적극 장려하여, 안길베르트, 아인하르트 등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몰려왔다. 그런가 하면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교를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교들은 주로 수도원학교 ·교회학교들로써,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당과는 달리 현대와 같이 초등, 중등, 고등학교급의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교리, 신앙태도, 신학 및 신학자와 학교교수 양성, 문법, 수사(修辭), 논리의 3학과, 산술,기하,음악,천문의양, 역사 등도 가르쳤다. 또한 샤를마뉴는 상업과 무역에도 어느정도 지원하였다. 또한 샤를마뉴는 기독교 선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은 기존의 신앙을 버리고 모두다 기독교를 믿게 하여,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동시에 기독교적인 문화전통을 장려하기도 하여 아르킨,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의 성직자 문인들도 활약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역대 프랑크 왕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게르만 족의 전통과 관습은 존중해 주었다. 따라서 샤를마뉴의 치세에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 기독교 문화, 게르만 문화가 융합된 문화부흥의 기틀을 다시 마련하여 훗날 유럽의 전반적인 사회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를 카롤링거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로마의 교황은 항상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 움직여졌는데, 9세기경의 교황 레오3세는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였다. 레오는 비잔틴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던 중, 자신을 지지해줄 적임자로 프랑크 왕 샤를마뉴를 생각하고 있었고, 프랑크, 부르군드,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비잔틴이 차지하던 그리스, 터키, 헝가리 및 바이킹족이 차지한 발트지역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차지한 샤를마뉴 또한 로마교황과의 확실한 제휴가 자신에게 상당한 이로움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았다. 프랑크왕국이 단순한 영토적인 통일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기독교로 통일되었다는 점 또한 협정의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800년 크리스마스날 교황 레오3세는 샤를마뉴를 이탈리아로 초청하여, 서로마제국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이 왕관은 샤를마뉴가 단순히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거의다 차지하였으므로 받는 것과 단순한 기독교와의 동맹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완전한 '로마 제국의 부활' 즉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던 주역인 게르만족이 결국 로마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공인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810년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장남 이탈리아왕 피핀이 죽고, 811년에는 프랑코니아와 느스트리를 지배하던 둘째아들 샤를도 사망하였다. 813년 샤를마뉴는 살아남은 아들 루트비히를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임명하였고, 아헨으로 궁정을 옮겨서 새로이 궁정과 교회를 짓고, 그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812년경에 이르러 비잔틴(동로마)으로부터 서로마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찍이 샤를마뉴의 딸 로트루드가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4세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다. 샤를마뉴는 814년 아헨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샤를마뉴의 전기는 대개 측근작가인 아인하르트가 기술한 샤를마뉴전기를 참고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어디에서도 샤를마뉴의 어린시절이나 그의 성격형성에 대한 내용은 잘 나타나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샤를마뉴를 소재로 한 이러한 작품은 후대에 전설로 발전하여, 12세기 경에는 롤랑의 노래, 샤를마뉴의 순례, 고르몽과 이장바르, 돈 드 마이안스의 무훈 등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클로비스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넓혔던 왕이요,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비잔틴이 정복하는 터키, 그리스, 헝가리 및 바이킹이 차지한 북유럽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처음으로 통일한 점 또한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인들에게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드넓은 영토를 지켜내거나 그와 같은 정복사업을 벌인 왕이 나폴레옹이 나타나기 전까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도,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에 매료되고, 그를 그리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는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고, 학교를 많이 건립했던 점 또한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부각된다. 비록 11세기경이면 샤를마뉴의 직계자손들은 후사가 끊기지만, 점점 그는 우상화, 신성화 되어 신성로마의 프리드리히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룩한 지방봉건적 통치체제나 문예부흥이나 끊임없는 영토정복전쟁 등은 많은 왕과 황제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아, 스스로 샤를마뉴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고 그 중 일부는 샤를마뉴의 후손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더욱 확고히 하기도 하였다. 이멜트루드와의 사이에서 아들 피핀을 두었으나 그는 곱사등이였고, 데시다리우스의 딸 데시다리아, 셋째 부인인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740경~783)에게서 이탈리아 왕 피핀, 느스트리 및 프랑코니아의 왕 샤를, 경건왕 루트비히 딸 베르타, 로트루드 등을 두었고, 파스트라다(794년 사망), 리드가르트(800년 사망) 등의 아내를 두었다. 기타 서자로 드로고, 후고, 티리 등을 두었다. 후에 일어나는 메르센, 베르덩, 리베몽 등의 조약으로 프랑크왕국이 분열되는 것과 연계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인 루트비히1세 경건왕(루이1세)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루트비히1세(Ludwig Ⅰ) 774~840 아키텐의 왕(781~818). 프랑크의 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814~840). 루이1세(Louis Ⅰ), 경건왕 루트비히(Ludwig the Pious)로도 불린다. 샤를마뉴와 힐데가르트의 셋째 아들로, 부왕보다는 다소 정치적인 수완은 부족했던 것 같다. 781년 아키텐의 왕이 되고, 두 형이 일찍 죽자 813년 부왕의 유일한 후계자 겸 공동황제가 되었으며, 814년 부왕이 아헨에서 죽자 프랑크 왕 겸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하였다. 루트비히는 아키텐의 왕으로 있을 때, 에르망가르트와 결혼하였는데, 에르망가르트에게서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의 세 아들과 딸 아델라이드를 두었다. 아델라이드는 후에 느스트리와 앙주의 백작이었던 로베르 르 포르에게 시집갔다. 루트비히는 즉위 직후, 자신의 누이들 및 배다른 형제자매들을 모두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일찍부터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화를 불러왔다. 818년 장남 로타르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왕으로 있던 조카 베르나르트(피핀의 아들)가 반발하자, 그를 쓰러뜨렸다. 이때 상속령을 개정하여, 로타르는 이탈리아 왕 겸 공동황제, 둘째 피핀은 아키텐의 왕, 셋째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에르망가르트가 죽고, 바바리안 공작 구엘프의 딸 쥬디트와 재혼하여, 딸 기셀라와 아들 카를을 얻자, 상속령을 다시 수정하여 카를에게 알레만니아를 떼어주었다. 세 아들은 이에 반발하여 부왕에게 반기를 들어, 부왕을 쫓아내고 계모를 수녀원에 보냈으나 루트비히는 기적적으로 힘을 얻어 아내를 데리고 왕좌로 복귀하였다. 그후 루트비히는 832년 맏아들 로타르의 공동황제직을 박탈하려 하다가,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독일인 등 세 아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루트비히는 쫓겨나고, 왕비 유디트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때에도 루트비히는 기적적으로 군사를 장악하여, 다시 프랑크 왕 겸 신성로마황제로 복귀하였다. 838년 둘째아들 피핀이 죽자, 상속령을 다시 개정하여 아키텐도 카를에게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아키텐의 주민들은 죽은 피핀의 아들이자 루트비히의 손자였던 피핀2세를 왕으로 떠받들었다. 루트비히는 최종적으로 카를은 프랑크 서부, 루트비히 독일인은 프랑크 동부의 왕으로 확정하고 840년에 사망하였다. 루트비히의 뒤를 이어받은 장남 로타르는 부왕의 상속령을 거부하고 두 동생을 압박하여, 홀로 프랑크 전체를 통치하려 하였으나, 843년 루트비히 독일인과 카를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귀족제후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로타르의 군대를 쓰러뜨렸다. 결국 로타르는 하는수 없이 두 동생과 함께, 베르덩에서 프랑크왕국을 셋으로 분할하였다. 이로써 샤를마뉴가 이록한 대 제국은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에르망가르트에게서 이탈리아 왕 겸 신성로마황제 로타르(818~855), 아키텐의 왕 피핀(818~838), 동프랑크의 왕 루트비히2세 독일인(843~876)의 세 아들과 딸 아델라이드를 두었다. 로타르는 스폴레토의 에르망가르트에게서 이탈리아의 루트비히2세(855~875), 프로방스 및 부르군드의 왕 샤를(855~863), 로트링겐의 왕 로타르2세(855~869)를 두었다. 루트비히는 바바리안 공 구엘프의 딸이자, 루트비히 경건왕의 후처가 되는 쥬디트의 자매 엠므와 결혼하여 카를로만, 루트비히3세, 카를3세를 둔다. 쥬디트에게서는 딸 기셀라와 아들 카를을 두었다. 딸 기셀라는 프리울리 후작 에버하르트에게 시집가서 이탈리아왕 베렌가르 1세(888~891, 911?~924)를 두었다. 카를2세(843~877)는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브리타니커 백과사전, 파스칼 대백과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첫댓글 샤를르마뉴의 어떠한 역사적 업적을 집중적으로 보면 좋겠습니까 ? 너무 너무 내용이 많고 혼란스러워요.
유럽 대부분을 정복 한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왕으로 남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