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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밑에 둘도.셋도 있어요.
꽃피는 3월 해남과 강진일대를 걷다.
신묘년 3월 둘째 주 금요일 밤 해남으로 갑니다. 해남의 달마산과 미황사 그리고 달마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걷습니다.
땅끝에서 삼남대로의 기착지인 이진항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그리고 강진 일대를 걷게 될 것입니다.
“잠결에 연둣빛 나뭇잎들이 서걱거리며 속삭이는 소리 들린다. 안개 속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우리나라의 지도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전주에서 송정리로 송정리에서 해남으로 내가 꿈인 듯 생시인 듯 지나는 모든 길마다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내어 걸리고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새벽 미황사(美黃寺)의 돌계단을 꿈인 듯 생시인 듯 오르고 절은 적막하다. 이른 세시 반 아직 미황사의 새벽예불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불 켜진 대웅보전에 옆문을 열고 들어가 엎드려 절한다.“
“내가 내속에서 거듭나게 하소서. 나를 좀 더 자유롭게 하소서” (...)신정일의 <사찰 가는 길>에서
“마음속에 부처 있으면 실천 속에 사랑도 자유도 있다. 스님은 목탁을 치며 염불을 시작하고 나는 바다로 가는 시낭에 몸을 맡긴다.
땅 끝, 김지하 시인의「애린」이 새벽안개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 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우리들은 뱃고동 울리며 출항을 기다리는 배가 아니고 시동조차 꺼버린 하얀색의 무쏘 안에서 눈부시게 밝아올 아침을 기다리는 한낱 애잔한 사람들인데…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짙은 안개를 헤집고 바다물결의 출렁 거리는 소리 들린다. 안개 걷히지 않고 비 멎지 않은 채 아침이 열리는 소리 들린다.
○달마산 산행은 송촌마을에서
달마산 산행은 현산면 월송리 송촌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 이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지만 소나무는 찾을 길이 없고 포도넝쿨 대신 양다래 나무 넝쿨이 마당 안에 그득하다. 아직도 달마산은 안개에 젖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가 산으로 들어갈 때 산도 역시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사뿐히 내려 앉으리라. 마을 안 삼거리에서 애망골로 접어든다. 찔레꽃들이 하나 둘씩 피어나고 산자락 아래엔 오동나무 꽃들이 눈부시다. 저수지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어 김해 김씨 묘비를 지나 희미한 길 속으로 들어서자 샘 하나 보인다. 물이 떨어질 때 총창하고 떨어진다고 해서 총창샘이라고 이름이 붙은 샘에서는 산 개구리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고 그 옆에는 굿당이 차려져 있다.
길은 무성하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쌍무덤을 지나 무명봉에 이르면 완도의 바닷가에 파도소리 들리고 저만치 해남의 두륜산이 지척이다. 완도쯤일까 고금도 쯤 일까, 머얼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미황사에서는 범종소리 들린다. 지상에 평화, 이 땅에 안식을, 그래 오늘은 사월초파일이면서 일요일이지 머나먼 서쪽나라 인도에서 석가가 태어난 날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수도의 뜻에 따라 쉬게 된 안식일이지. 늦게 핀 앉은뱅이 철쭉꽃들이 영롱한 이슬방울을 머금은 채 가는 바람에 흔들린다.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황금 억새 밭이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지금은 철쭉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철쭉밭과 너덜지대가 뒤범벅된 바위 길을 따라 한참을 다시 오르니 불썬봉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불 써있는 봉우리’라는 달마산의 정상 봉화대는 조선시대에 축조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알맞게 허물어지고 흐트러져 옛 정취를 일깨워줄 따름인데 이 불썬봉에서 피운 봉화불이 갈두산으로 완도의 상황봉과 좌일의 좌곡산으로 화산의 관두산으로 함성처럼 퍼져나가고 들불처럼 번져 갔으리라. 달마산은 예로부터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불려졌다. 그래서 태풍을 만나 표류해 온 송나라의 벼슬아치는 “해동고려국에 달마영산이 있어 그 경치가 금강산보다 낫다하여 구경하기를 원하였더니 이 산이 바로 달마산이로구나”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 산을 일컬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대봉이 날개를 파닥이는 형상이고 또는 사자가 웅크리고 포효하는 형상이며 용과 호랑이가 어금니를 드러낸 듯하다고 말하는 데...
안개는 어느덧 걷히고 산 아래쪽에 미황사가 나타난다. 독경소리 들려온다. 다시 길은 홀애비 바위로 뻗어 있다. 기기묘묘한 바위 숲들이 나타나고 금세 사라진다. 문바위다 “조금이라도 뚱뚱한 사람은 돌아가시오.”라고 쓰여 져 있는 것처럼 겨우 한 사람이 통과 할 수 있지만 통과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달마산에는 몇 개의 이름난 샘물이 있다. 작은 금샘(金泉)과 큰 금샘이 그것이다. 김현준 기자의 말에 의하면 금샘이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고 금샘의 물은 이름 그대로 금빛을 띠고 있다고 한다. 아침햇살을 받을 때 물의 빛깔이 금빛으로 빛난다는데 금빛으로 빛나는 물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김현준 기자는 목욕재계하고 백일기도를 드리면 가능할 것이라며 “달마산을 형성하고 있는 규암규석으로 인하여 물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미황사 스님들이 즐겨 마셨을 금샘에 도달했을 때 작은 안내문이 써있었다.「금샘(하늘샘)이 막히면 하늘길이 막힙니다. 마음속에 등불을 밝히십시요.」작은 바위구멍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금샘 물을 마시고 미황사로 하산한다. 불경소리 들으며 걷는 길은 걸을만하다. 2십여 분 내려왔을까? 미황사에 닿는다.
미황사 대웅보전 앞마당을 가득 메운 여러 형태의 연등 숲과 사람들의 숲을 지나 요사 채에 들어가 늦은 점심공양을 받았다.
○150여년전에 쇠락한 미황사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절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위치한 이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인 두륜산 대흥사의 말사로서 통일 신라 경덕왕 때에 의조스님이 창건하였지만 확실한 창건연대나 사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쓰여 져 있다.「749년 8월에 한 척의 돌배가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땅 끝에 있는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 배는 며칠 동안을 두고 사람들이 다가서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는 하였다. 이때 의조화상이 두 사미승과 제자들 백여 명을 데리고 목욕재계한 후 기도를 하며 해변에 나아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의조화상이 오르니 배안에는 금인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속에서는「화엄경」「법화경」같은 불교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종 53선지식 16나한과 탱화 등이 들어있었다. 옆에 있던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방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는 우전국(인도)의 국왕인데「금강산이 일만 불을 모실만 하다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제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인도로 되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다. 경전과 불상을 이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하고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 날 의조화상은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면서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를 창건하였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지은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美자를 넣었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黃자를 따왔다고 한다.
이 창건 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관련이 있으면서, 앞부분은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때 죽도 앞바다에서 돌배를 받아들이는 장면과 흡사하다. 이 창건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불교의 남방전래설은 우리나라 불교가 4세기 말 중국을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통설과는 다르게 그 이전 1세기경 낙동강유역에 건국한 가야와 전라도 남해안 지방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구체적인 고증 자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지만 가야라는 나라 이름이 인도의 지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허 황후와 수로왕의 전설 그리고 지리산의 칠불암 설화를 두고 볼 때 그리 허황된 것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하략)“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달마산,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고 걷는 산행은 그리 힘들지 않으면서도 한 폭의 그림 같은 남해바다를 볼 수 있는 산행이 될 것입니다. 땅 끝 일대에 조성된 아름다운 길,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삼남대로 길>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길, 김영랑 생가 일대를 걷게 될 이번 행사에 참여바랍니다.
1.일시: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8시애서 13일(일요일)까지
2,어디로 모이나요: 서울 양재역 8번 출구 출발 전주는 10시 반 월드컵 경기장 출발
4,참가비 “100,000원.
5, 장소: 달마산. 미황사. 땅끝, 삼남대로 길, 이진항, 다산초당, 백련사의 동백꽃, 김영랑 생가.
6,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전라도>. <신정일의 <사찰기행>의 저자. )
7,참가비는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8,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010. 0000. 0000. 문자) 우리 땅 걷기 전화(010. 9144. 2564)로 알려 주십시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사항:
1. 우리 땅 걷기에서는 단체 여행자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2. 하지만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보시고 꼭 필요할 때에만 연락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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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울.
거가대교를 지나 통영을 답사하다.
신묘년 2월의 두 번째 주 정기기행이 거제와 통영으로 갑니다. 부산의 자갈치 시장과 태종대 일대를 걷고 바다를 잇는 거대한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도의 장목항에 이릅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와 유치환 시인 생가를 지나 통영의 미륵섬에 이를 것입니다. 미륵산의 용화사에서 관음암을 지나면 한국전쟁당시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근대의 고승인 효봉대선사의 제자인 법정과 일초스님이 머리를 깎은 절입니다.
그곳에서 미륵산 정상이 지척입니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들이 꿈길처럼 보입니다. 정상에서 내려가면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이 구도를 했던 미래사에 이릅니다.
삼덕리의 장군봉에서 나라 안의 가장 장엄한 일몰을 보고 그 일대를 걸으면서 하루가 마감될 것입니다. 그 다음 날은 달아공원에서 일출을 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산길을 걷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서정한 통영의 문화 생태탐방로의 도보답사가 시작 됩니다.
박경리. 이중섭. 유치환, 유치진, 윤이상 등 우리시대의 문화 예술인들의 삶터였던 통영의 동파랑길 남망산 공원등 통영의 골목길 도보답사는 말 그대로 골목길의 진수를 보여줄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현 ‘풍속’조에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규보가 이사관(李史館)이 부임하는 길에 전송하면서 쓴 시에 “내 들으니, 거제는 남방의 극격(極檄)으로 물 가운데에 집들이 있고 사방은 모두 호호망망한 큰 바다이다. 독한 안개가 찌는 듯 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여름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몰려들어서 사람을 깨우는데 참으로 무섭다” 하였고, 이보흠(李甫欽)이 「신성기(新城記)」에서 “거제현은 푸른 바다 복판에 있으며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인다”라고 노래한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본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문무왕이 상군(裳郡)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거제군은, 1965년 6월에 착공하여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옥포대우조선소가 자리 잡은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한국전쟁의 상혼이 짙게 배인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다. 이 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밝혀 놓았듯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하게 되어 있어 수용소를 그때의 신현면, 오늘날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평리․문동리․양정리와 동부면의 저구리․다포리의 농토와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세웠다. 때문에 그 지역 안에서 살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부지 밖으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큰 이동이 있고 난 뒤에 그 자리에 수없이 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가 된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명쯤이 들어왔는데, 시인 김수영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만여 명쯤이었는데, 미 해군함정이 흥남부두에서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면서 거제도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되었다.
그 당시 이 수용소의 참담한 분위기는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강용준씨의 장편소설 ????멀고도 긴 날의 시작????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고,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 에서 이명준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북한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은 전쟁포로를 교환하게 되는데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었을 때 ‘중립국’을 선택한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제3의 선택으로 중립국을 택했고,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남지나해에서 그 푸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가 신산했던 세월을 겪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미륵산 자락에 있는 용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미륵산은 예로부터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상주처로 믿어져왔던 곳이다. 이절은 광해군 9년에 성화선사가 통제사 윤천(尹天)의 주선으로 군 막사의 성격을 띈 사찰을 창건하고 정수사(淨水寺)라고 하였다. 5년이 지난 후 폭풍으로 정수사가 파괴되어 1622년에 미륵산 제3봉인 삼장골에 중창하고 천택사라고 하였다가 1628년(인조6년) 다시 화재로 절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바람과 물과 불의 삼재(三災)를 당하자 성화는 미륵산 제1봉에서 7주야를 기도를 올렸다. 그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어 미륵불을 모시도록 계시하였다. 벽담당 행선이 화주가 되어 천택사의 남은 건물을 이전하여 용화사라고 이름 지었는데 지금의 보광전 기둥은 그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내세울 만한 문화재는 별로 없지만 용화전, 명부전, 석진당, 적묵당, 해월루 등의 건물들이 있고 문화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석존여래상과 80여년전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온 고려중기의 작품인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있다. 그리고 적묵당 주봉 쪽으로 올라가면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으며, 그 뒤편에 효봉스님의 5층 사리탑이 있다. 종루의 글씨는 범어사 종루의 현판을 모각한 것으로 하성파의 글씨이다.
용화사의 정전인 보광전에 들어가 배례한 후 명부전을 거쳐 미륵도량의 중심전각인 용화전 앞에 서면 통영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보이는 벽발산은 석가세존의 의발(衣鉢)을 장차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때 그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받은 가섭존자가 그 산에 머물면서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용화사에서 관음전에 이르는 길섶에는 축 늘어진 소나무들과 잡목 숲이 어우러져 한가로운 산책로를 연출하고 있지만 그 중간 쯤 한부분이 지난 태풍 때에 난 산사태로 인하여 길도 무너지고 오래 묵은 나무들도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형태가 온전치 못하나 오래된 듯 한 지암대사의 부도가 있다. 조금 오르자 며칠간 내린 비로 넘쳐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20여 미터 쯤 오르면 관음암이다. 광해군 8년에 청안선사가 창건하였다는 관음암의 입구에는 마치 석성의 문루와 같은 누문을 세웠고 ‘당래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을 들어서자 가정집 분위기를 풍기는 관음전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절 주위를 대나무 숲이 에워싸고 그 아래 자락에 상사화 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동관전, 산신각 요사채가 들어선 경내에 잔디와 꽃나무들이 곱게 가꾸어져 한가로운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길은 도솔암 쪽으로 이어진다. 300미터 쯤 올라갔을까 천지봉 아래에 도솔암이 자리 잡고 있다. 미륵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알려져 있는 도솔암은 고려 태조 21년(943년) 도솔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유명하다. 17세에 출가하여 25세까지 지리산 칠불암에서 수도하였던 도솔스님은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암굴에 머물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호랑이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그 호랑이가 한 처녀를 업어다 바쳤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에 사는 배이방의 딸이었는데 혼례 날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붙들려 온 것이었다. 도솔스님이 그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자 배이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엽전 300이라는 거금을 희사하였고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영주 희방사의 창건설화와 비슷한데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동굴이 있고 창건 이후 초음과 자암등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한때는 ‘남방제일선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현존하는 건물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2호인 대웅전과 칠성전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
이 도솔암에 한국전쟁 때 가야총림의 대중들이 피난을 오게 된다. 그때 해인사 방장인 효봉대선사와 금오대선사 등 불교계의 거물들이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 구산대선사가 고성 이(李)부자집 사랑채가 헐리는 것을 사서 동국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방을 지었고 1954년에는 미륵산 남쪽 영운리 일대의 적산 산림을 불하받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된다. 금강산에서 피난을 왔던 효봉 스님의 스승인 석두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하고 이곳에서 효봉스님의 큰 제자들인 법정(法頂), 일초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 큰 문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 노래를 모르면 한산도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널리 불렸던 <한산가>라는 노래마저도 사라져 가고 있다. “미륵산 상상봉에 일지맥(一支脈)이 떨어져서 아주 차츰 내려오다. 한산도가 생길 적에 … 동서남북 다 둘러서 위수강을 돌아드니 해돋을 손 동좌리(東左里)라”라는 그 노래는 한산도 각 마을의 지명 유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가사체의 노래이다.
서쪽으로 멀리 남해의 금산이 그림처럼 보이고 비진도․매물도․학림도․오곡도․연대도 등의 섬들과 뒤질세라 저도․연화도․욕지도․추도․사량도․곤지도 등의 섬들이 꿈결에서처럼 달려오는 남망산 공원에는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통형항구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내려다보이는 남망산 공원으로 오르는 길 옆에 세워진 시비가 유치환의 <깃발>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리고 그곳에서 정상에 오르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큰칼 옆에 찬 채 한려수도를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풍경화처럼 펼쳐진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태어난 인물로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김상옥(金相沃)․김춘수(金春洙)․유치환 등의 시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들 수 있다. 또한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일에서 숨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씨와 화가 김형근․전혁림씨도 이곳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그들의 꿈을 키웠으며, 화가 이중섭(李仲燮)도 이곳에 있으면서 남망산 자락 아래 펼쳐진 통영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통영 바다 건너 쪽이 거제도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1.일시: 2011년 2월 11(금요일) 밤 9시 양재역 8번 출구. 전주 오후 6시 전주 종합 경기장 출발. 2월 13일까지
2,어디로 모이나요: 서초구청 앞 외교 안보 연구원
4,참가비 “100,000원.
5, 장소: 부산 자갈치 시장. 태종대. 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치환 생가. 통영 도착 후 점심 . 미륵산 산행 용화사 관음암. 도솔암 . 미륵산 정상. 미래사. 삼덕리 일몰. 그 다음날 달아공원 일출 미륵산 일대 걷고. 통영 시내 도보답사. 동파랑길, 남망산 공원 해저터널 등 (일정은 시간에 따라 바뀔 수도 있습니다.)
6,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신택리지의 저자. )
7,참가비는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8,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018. 610. 2563. 문자)로 알려 주셔야 합니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사항:
1. 우리 땅 걷기에서는 단체 여행자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2. 하지만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보시고 꼭 필요할 때에만 연락 주십시오
셋.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그 첫 번째 도보답사_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연중 도보답사 <동해 해파랑 길>이 시작됩니다. 부산 오륙도공원에서 시작되어 통일전망대를 지나 두만강의 녹둔도에 이르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여정이 2월 25일 밤에 부산 해운대에 모여 26일부터 3월 1일까지 4박 5 일간의 일정으로 실시됩니다.
(아무래도 먼 예정이라 28일이 휴일이 아니지만 직장인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연가를 내시기 바랍니다.)
첫날은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달맞이 고개에서 청사포 해수욕장을 지나 기장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일광 임랑, 처용암이 있는 울산을 지나 경북과 경계에 있는 지경리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은 26일부터 나흘간 약 100km를 걷게 될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80km를 걸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잘 놀고 재미있게 걷고, 잘 먹으며 걸으며 세상을 만나고 나를 만나자”입니다. 신라의 화랑花郞들이 동해안을 따라 통천의 총석정까지 걸어가며 국토를 답사하며 심신을 수양했듯이 풍류를 즐기고 가끔은 해찰을 하면서 걸어갈 예정입니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는데,”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오륙도 공원이 명실공이 동해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번 ‘해파랑 길’이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번 ‘해파랑 길’의 출발은 3년 전 <동해 트레일>처럼 개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부산 한화콘도에서 저녁에 만나 금요일 아침부터 걷고 3월 1일에는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혹시 힘드신 분들을 위하여 차량을 하나 준비할 예정입니다.)
오륙도는 용호동 남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동쪽에서 보면 봉우리가 여섯 개이고, 서쪽에서 보면 봉우리가 다섯으로 보이는 섬입니다. 이 섬에는 당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의 비가 있습니다.
세상 유행과 무관하게 일찍이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 조선시대 옛길을 걸어왔던 사단법인〈우리 땅 걷기〉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세웠다.
이름하여 동해트레일, 2008년 2월에 선보인 대한민국의 새로운 관광프로젝트이다.
부산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부터 두만강 변 녹둔도까지, 1400km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걸어 보자는 것이다. 해변을 따라 걷게 될 그 길은 관동팔경과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설악. 금강. 두타산의 명산과 장사, 화진 용화, 원산의 명사십리를 비롯한 천혜의 해수욕장이 즐비하고,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태평양이 함께하는 천하제일의 도보답사처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발길 닿기를 허용하지 않는 구간이 있어 답사를 완수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답사에 고무된 많은 사람들이 그 길 걷기를 염원하게 된다면, 어느 날 남북한이 서로 손잡고 그 길도 공동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지 않을까. 결코 헛되지 않을 꿈을 안고 ‘동해 트레일(해파랑 길)’에 오른다.
부산시 해운대구 동백섬 해운대海雲臺, 그곳은 신라 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단을 만들어 ‘해운대’라 칭하고, 유상遊賞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위 위에 음각된 해운대라는 각자刻字는 후세 사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곳 해운대 끝자락을 따라 달맞이 고개를 넘었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와우산에 올라 해월정海月亭에 서니 시야가 탁 트여 바다를 조망하기가 좋았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바다가 아득해 하늘이 끝나는 듯 하고, 산이 멀찍하여 눈이 더 밝은 것 같구나” 홍자원의 노래 한 가락에 “어촌 주막엔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마을의 동산에는 죽순이 돋아나는구나.”라는 이인전李仁全의 시구를 읊으며 접어든 기장읍, 그 길목 오리나무는 연두색 여린 잎을 틔워 봄을 알린다.
본래 기장군 남면 지역으로 신당이 있어 당사 또는 당사동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에는 당산 소나무가 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는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낸단다.
“야! 저 싱싱한 것 들 좀 봐” “저 활기찬 사람들 좀 봐” “ 저 싱싱한 멸치와 학 꽁치를 좀 봐” “어떻게 저것들을 한 점도 맛보지 않고 이곳을 지나칠 수 있겠어”
온갖 소리로 꼬드겨도 아직 이른 오전이라서 그런지 일행 중 어느 한 사람도 구미가 당지기 않나보다.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 항구를 기약하며 갈 수 밖에…… 입 안에 맴도는 군침만 삼키며 발걸음을 옮긴다. 파라장波羅場을 지나 죽성만이 펼쳐진 죽성항에서 군침만 삼켜 달래던 식욕을 채웠다. 멍게, 해삼, 소라 개불에 소주 한 잔.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중략)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인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하략)
황동규 시인의 <기항지>를 읊으며 바닷가를 걷는다. 수군만호를 두어 지키던 두무포영이 있었던 마을 남쪽으로 죽성竹城이다. 본래 흙으로 쌓았던 것에 중종 5년인 1510년에 다시 축성된 이 성은 둘레가 936미터에 이르고, 높이는 3미터라고 한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장생포는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일본 사람들이 고래 등 동해 고기잡이 전진기지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가 시작된 것은 1899년. 구한말 조정에서 러시아 사람이 포경 특허권을 얻어 시작하여, 고래 고기를 즐기는 일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해방 뒤에는 지역 사람들에게 넘어가 지역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칠십 년대 말만 해도 3월부터 11월말까지 한 해에 밍크고래 천 마리와 참 고래 40마리를 잡았다는데, 지금은 포경조약으로 고래잡이를 금하고 있다.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서로 다른 맛이 난다는 고래 고기. 그 맛을 제대로 즐기려는 사람들은 육회를 즐겨 먹는데, 그 빛깔이 소고기 육회와 비슷하여 먹는 방법까지 같다고 한다. 다만 육질이 너무 부드러워 ‘입에서 슬슬 녹을 정도“라고 한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학 꽁치. 고래 고기 등 맛있는 회와 동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포구, 아침마다 세상의 처음처럼 바라보게 될 그 찬란한 태양, 우리가 걸어 가야하는 우리나라 최장거리 도보답사코스인 <동해 해파랑길>에서 만나게 될 풍경들입니다.
신묘년의 장거리 도보답사에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은 미리 접수하십시오.
1.일시: 2011년 2월 25월 (금요일) 오후 6시부터 부산 해운대 한화 콘도(장소는 추후 공지하겠음)
26일 오전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 8시 출발.
2,어디로 모이나요: 부산 해운대 한화 콘도
4,참가비 “200,000원. 선착순 45명
여러 가지 여건 상 45명으로 정정합니다.
5, 장소: 오륙도 공원. 광안리 해수욕장. 해운대. 달맞이 고개. 청사포 대변항. 일광. 고리. 간절곶. 울산. 처용암. 울산. 주전동 등
6,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신정일의 신 택리지>.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의 저자. )
7,참가비는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8,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010. 0000. 0000. 문자) 우리 땅 걷기 전화(010. 9144. 2564)로 알려 주십시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사항:
1. 우리 땅 걷기에서는 단체 여행자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2. 하지만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보시고 꼭 필요할 때에만 연락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