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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입장에서 21세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연호 자체의 수용 문제에 부딪힌다. 사실 세계적으로 불교권에서 사용하는 연호는 1956년 네팔의 붓다자얀띠(Buddhajayanti)에서 의결한 불기(佛紀)이며 금년(서기 1988년)은 불기 2522년이다.
국내적으로는 5·16 이후 정부의 의지에 의하여 과거 단기(檀紀) 중심만의 연호 사용에서 단기를 극히 일부 병용하는 서기(西紀) 중심의 연호 사용으로 넘어간 것이 약 40년전의 일이며, 이후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기의 사용이 익숙해 졌으나 그렇다고 서기의 사용여부가 종교적 우열의 기준이 된 적은 없었다.
한국의 불교계 역시 이런 사회 분위기를 쫓아, 각 종단에서는 회계연도의 단위나 예산 수립 그 밖의 각종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불기와 서기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1998년 즉 21세기를 불과 1년여 앞둔 현 싯점에서 ‘21세기의 포교사의 모형’이라는 제목이 불교적 인식에 거슬리지 않음을 전제로 이 글을 쓴다.
포교사의·정의·역할·위상 등을 논하기 앞서 ‘포교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중에서도 포교에 관한 경전적 의미는 후에 취급하기로 하고 우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전적 의미로 포교(upal panam 布敎 propagagandism)란 ‘종교를 널리 펼치는 것’으로 이와 유사한 말로는 선교(宣敎) 또는 전도(傳道)가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포교법(이하 포교법) 제2조 포교의 목적에 의하면 ‘포교는 불타의 교법을 널리 홍포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지혜와 자비의 불타정신을 사회에 구현하여 불국정토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할 때 포교는 ‘부처님의 정법을 사회에 널리펴서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말씀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정법을 따르고 지켜 불국정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포교에 관한 경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함축하고 있는 뜻은 어느 것이나 중생에 대한 연민(憐愍 karuna)이지만 포교에 관한 경전의 말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게 되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승단에게 전도를 명하시는 부분이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 스스로가 알게된 포교의 당위성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출가후 여러 가지의 수행을 거친 후, 고타마 싯달타는 수자타의 헌공, 항마 등의 절차를 거쳐 드디어 깨달음을 증득하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어 다시는 윤회를 하지 않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즉,《생은 다했다. 청정한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할 일은 이루어 졌다.
이제 다시는 이 같은 생존의 상태에 이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자각하였던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아자파라니그로다나무 아래에서 머물때의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깨달은 이 진리 즉 연기의 도리는 보기 어려우며 열반 또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애 착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에게 설사 이 법을 설한다한들 그들이 이해하겠는가? 이 때문에 설하는 것은 무익(無益)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부처님의 마음에《간신히 내가 증득한 것도 지금 설해야할 필요가 없도다.
탐욕과 성냄에 패배한 자들은 이 법을 깨닫지 못하리니,
흐름에 거스르고 미묘하고 깊고 깊은 것이며, 보기 어렵고 미세한 것이 도다.
탐욕에 물들고 암흑에 덮여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도다.》
라는 설법을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시게가 떠올랐다. 이것을 안 사바주 범천(Sahampati)은 ‘세상은 곧 멸할 것이다. 법을 설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자는 타락하지만, 설하면 깨닫는 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시게를 읊었다.
《마가다국에서 이전에 밝혀진 법은 더럽혀진 자들에 의해 생각된 깨끗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오.
사람들은 더러움이 없는 사람이 깨달은 법을 들으시오.
마치 산정의 바위에 서서 두루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이같이 훌륭한 지혜를 갖추고 널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마치 법으로 이루어진 높은 누각에 오르는 것처럼
근심을 초월한 자이니,
근심에 빠져 있고, 생과 노에
정복된 사람들을 보시오.
일어나시오. 용감한 자여, 승리자여,
대상주(隊商主)여, 아무런 부채도 없는 자여,
세간을 거느리시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방법으로도 부처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범천은 두 세번 반복하여 법을 설할 것을 권청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통찰하고 세상에는 온갖 소질을 가진 이들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범천에게 시게를 읊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그리고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사람들 중에서
미묘하고 우수한 법을 손상하지는 않을까 생각하여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고 범천은 모습을 감추었다. (율장 대품)
이는 자각의 환희속에 묻혀있던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그리고 믿음을 버려라’라는 말씀으로 ‘설법을 하셔야할 이유’ 즉 바꾸어 말한다면 ‘포교를 해야할 이유’ 또는 ‘전법(傳法)을 해야할 이유’ ‘전도(傳道)를 해야할 이유’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도 명시해 놓았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는 말씀을 통하여 죽음에 이르는 모든 생명체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죽음에 이르는 길로부터 벗어 날수 있음’을 설했다. 여기서 ‘깨달음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통한 포교의 당위성과 포교의 목적이 성립되는 것이다. 즉, 깨달음이 없다면 포교의 당위성도 있을 수 없으며 깨닫거나 체험하지 못한 이가 포교의 일선에 나갔을 때 그 결과가 미미한 것도 깨달음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포교의 당위성을 알지 못하고 포교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교의 결과는 포교의 대상으로 하여금 크게는 ‘불사의 문’을 열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을 버려라.’는 가르침을 통해 정법만을 따르고 브라만교나 외도(外道)에 대한 믿음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다음 내용 역시 율장에 소개되어 있는 말씀이다.
《승려들이여 세상을 향한 연민을 가지고 살아 있는 (모든)것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전도의)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 법을 가르쳐라. 승려들이여 그리고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살아갈 것을 공표하여라.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못하고 있는 중생들이 있다. 》
이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자각하여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을 통하여 배운 말씀 즉, 진리를 펴기 위해 중생들 속으로 갈 것을 명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부처님은 ‘승려들이여’라 하며 포교의 주체자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승려’는 다른 말로는 승가(僧家 Sa gha)이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에서만 특별히 사용되고 있는 승가라고 불리우는 종교 집단은 의례에 의해 상징이 되는 종교적 가치(불교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결합이다. 이 승가는 불타의 입멸 이후 불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불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 시켜왔다.
어의로 볼 때 불교 용어로서 승가는 인종이나 국적 또는 계층과 나이의 구별이 없이 부처님께 귀의한 수행자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로 구성되는 삼무티상가(Sammuti Sa gha)와 고귀한 분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아리야상가(Ariya Sa gha)로 구별된다. 아리야 상가는 비구와 비구니는 물론 우바새 우바이 등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을 포함한다. 이 구절의 ‘승려들이여’의 ‘승려’는 삼무티 상가에 속하는 승려 즉 비구와 비구니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적 상황에서 이 ‘승려’를 ‘승가의 구성원’이라고 해석한다면 ‘승려들이여’의 ‘승려’를 ‘아리야상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볼 때 포교의 주체자는 소위 ‘승(僧)’ ‘속(俗)’을 막론하여 ‘진리에 대한 체험과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교육을 받고 포교에 대해 뜻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포교의 대상에 대한 규정이다. 여기서 포교의 대상은 신들과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 즉 ‘모든 중생 (衆生)’이다. 이는 포교에 대한 정의를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이익과 복지와 행복만을 위하여 포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이익과 복지와 행복을 위한 포교가 가장 우선 되어야 한다. 포교를 통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가 되어 여법하게 수행하며 사회생활을 하였을 때, 실제 생활에서 본인이 원하는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따른다면 풍요로운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포교의 대상을 신으로 확장하고 또한 모든 산 생명체로 확장한다면 소위 ‘의식의 집전’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神)’을 육도의 ‘천상의 신’으로 국한한다면 나머지 지옥·아귀·축생·아수라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포함될 것이며, 이는 육도에서 윤회의 고통속에 있는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
우선 우리의 감관으로 가장 잘 인식되는 인간에 대한 포교를 살펴보자. 모든 대상들 중에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포교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가장 쉬울 수도 있다. 성별(性別), 연령별(年齡別), 직업별, 직능별, 지역별 기타 등으로 나누어 그들의 이익과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포교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포교사가 필요해 진다.
예를 들어 농촌 포교를 하기 위해서라면 포교사는 농촌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농촌도 무조건 농촌이 아니라 농촌에서 생활하는 대상들을 연령별, 직업별 또는 처해 있는 상황별로 나누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법을 가르쳐라’는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상황에 맞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르친다는 표현보다는 같이 수행한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지만) 것이다. 과연 포교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야 할 ‘법’은 무엇인가? 농촌에서라면, 농촌에서 요구하는 각종 정보에서부터 농번기의 인력 원조 문제, 농촌의 수익 증대를 위한 아이디어의 제공, 경조사의 집전을 포함한 농촌의 노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어린이나 학생들을 포함한 농촌의 젊은이를 위한 프로그램, 농촌의 환경 문제등 제반 사회적 요구에 대한 준비등을 갖추고 농촌 포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말씀 즉,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준비한 프로그램과 ‘법’은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 만일 준비한 프로그램만 앞세우고 ‘법’에 대해 소홀히 한다면 결국, 남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이고 ‘법’만 앞세우고 준비한 프로그램이 없다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미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앞으로 농촌을 어떻게 이끌고 나가겠다는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포교가 이룩된다.
다음으로 인간이 아닌 이들을 위해 포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법문을 포함한 각종 의식을 통한 포교이다. 즉, 행려 사망한 이를 위한 시타림(尸陀林)이나 무주고혼을 위한 염불 또는 각종 재를 포함한 의식의 문제 등이다. 그런 의식을 현재의 재가 포교사들도 실제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의식의 집전’의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의식의 집전’의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은 승단과 재가자 모두에게 요구된다. 현재와 같이 포교에 원력을 세운 승려가 적은 상황에서 승단은 모든 의식이 승단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여법(如法)하게 해야한다’는 이름 아래 재가 포교사가 의식을 집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일 이런 생각이 하루빨리 없어지지 않고 의식 집전은 승단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고집한다면 성공적인 포교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인도에서 불교가 떠날 때 처럼 불교의 위상까지 염려해야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재가자 역시 의식을 집전함에 있어 의식을 원하는 포교대상자를 충족 시켜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으며 수행을 해야 한다.
다음은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라는 구절이다. 이는 기독교의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세간에서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알리기 위해 짝을 지어 다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본인이 어느 목회자를 통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이 둘씩 짝을 지어 다니는 것은 다음처럼 대략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 이방인을 만나 교리의 내용에 관한 논쟁을 할 때 한 사람만 간다면 이방인의 다양한 논리에 대해 수세적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 이를 보완하여 공격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한사람이 설명할 때 남은 한사람은 딴말을 생각하여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전도의 길에서 외롭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사람 보다는 두 사람이 덜 외롭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혼자서 가정이나 집단 또는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발생할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성경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갖는 설득력을 찾아볼 수 있다. 에베소서나 고린도 전서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전도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바울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방문하는데 그는 모든 교회를 혼자 방문한다. 바울 이외에 혼자 전도를 나가거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가는 경우는 모세가 받는 특혜 이외에는 없다. 그러면서 기독교 성경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본인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목회자의 말을 신뢰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불교에서 전도사 즉 포교사를 파견할 때에는 어떤가?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가 취하는 방법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어떤 승리의 개념으로 포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더 많은 중생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에서 행하고 있는 방법을 도입한다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부처님께서는 혼자서 가라고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감 즉 확신이 없으면 포교의 일선에 나서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이와 유사한 말씀은 초기 불전인 슛타니파타 사품(蛇品)의 제3‘무소의 뿔경(經)’에 강조되어 있다. 모두 40수의 시에서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통해 수행자가 가져야할 ‘자신감’에 대해 부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 ‘자신감 즉 확신’을 갖는 것에 대해 이어서 설명하였다. ‘승려들이여 그리고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살아갈 것을 공표하여라.’ 이는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살아가’지 못할이가 포교를 빙자하여 정법을 호도하고 훼불 행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슛타니파타 사품(蛇品)의 제2 다니야경은 매 구절이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라는 후렴귀로 끝난다. 소치는 다니야가 스스로 해야할 일에 대한 준비를 완전히 마친후에 ‘어떠한 외부적 공격이나 방해에도 스스로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로 전도의 길, 전법의 길, 포교의 길을 떠나는 이는 이런 자신감과 더불어 스스로 도덕율에 걸리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포교’라는 말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선가귀감에 참선을 하고자하는 이들이 갖추어야할 것에 관한 말씀이 있다.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 함이요,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드는 것이다’ 이 구절의 참선이라는 말을 ‘포교’라고 바꾸어 그대로만 실천으로 옮긴다면 적어도 도덕율과 관련하여 당당한 포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포교란 무엇인가에 관해 사전적 의미와 경적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제 포교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자. 이번 워크샵에서는 전문포교사 혹은 포교의 전문화에 관해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專門)이란 것이 무엇인가? 전문은 글자 그대로 전문이다. 인지가 발달하면서 사회는 분화되고 분화된 사회속에서 개인의 특수성이 빛을 발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전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말씀을 폄에 있어서 전문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보다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모든 포교와 포교를 위한 준비활동은 보편 타당함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전문 전문하고 우리가 외우고 말을 한다해도 보통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보편통달(普遍通達)을 줄인 말이다. 즉 보통에서 통달이 나오고 통달은 전문의 깊은 뜻이다. 병원에 가서 환자를 만나기 때문에 그를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착실하게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젊은이나, 군부대에서 만나는 젊은이나, 길에서 만나는 젊은이나, 그리고 대학로에서 만나는 술취한 젊은이나 모두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자식과 비슷한 나이라면 자식처럼 대해주면 될 것이고 더 어리다면 더 어린이들로, 더 많으면 더 많은 이로 대해주면 그만이다. 그것이 포교이다.
평소에 포교가 잘 안되었던 이유는 오히려 그들을 구별하고, 구별하는 과정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이나 나환자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이라 해서 이방인처럼 보면 안된다. 만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포교에 임한다면 그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포교라고 할 수 있다. 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이나 나환자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이 나라는 생각을 갖고, 단지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나와 다를 뿐이라는 생각으로 포교를 해야 한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진정 나에게 삶의 가치를 일러주는 보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포교를 해야 한다. 이것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며 진정한 포교의 첫걸음이다. ‘누구는 아프니까 더 어여삐 여겨야 하고 누구는 아직 건강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만에 하나라도 갖고 출발한다면 그것은 이미 반쪽 포교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다 똑같이 보셨기 때문에 근기(根機)에 맞는 법문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인지가 발달하면서 사회는 분화되었고 그래서 분화된 대상에 따라 좀더 다양하고 전문화된 포교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포교사로서의 확고한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린이 포교를 한다고 하자.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어린이 놀이 전문가는, 아이들과 즐겁게 보내면서 금방 친해지고 시간도 잘 보낼 수 있다. 그것을 염려하고 부러워하는 어린이 법회 지도 법사를 볼 수 있다. 분명 시중의 어린이 놀이 전문가와 같은 기교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올곧게 전해주겠다고 하는 의식이다. 병원의 의사가 환자들에 대해 잘 알고 의학 지식에 전문적이라고 하여 그들 모두가 포교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병원 의사만큼의 전문 지식이 없이도 병원 포교는 가능하다. 포교사로서의 철저한 의식만 있다면 기술부족은 본인의 노력과 시간의 흐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문제는 전문이란 말의 노예가 되어서 해당 분야로만 스스로를 특화시키고 그 분야 이외의 분야에는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하게 되는 경우이다. 전문이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분야에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며 포교과정에서 쌓은 경험은 정보로서 항상 나누어 가질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포교를 하는 이의 내재적인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제 포교를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리 내재적 가치가 고귀해도 외형화, 사회화, 현실화 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사장(死藏)되고 만다. 고귀한 가치를 외형화, 사회화, 현실화시키는 것이 포교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포교사는 외형화·사회화·현실화를 위해 정진해야 할것이며 그 정진이 최선의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서 전문화(專門化)가 되어야 한다.
실제 생명체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나 그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형은 자주 바뀐다. 우리는 바뀌는 외형에 따라 포교를 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매사에 접근하고 경험을 쌓아 나간다면, 어느 순간 많은 포교사들은 자신들이 깊게 관심을 갖고 있는 한 두 분야 또는 더 많은 분야에서 특화되어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전문화이다.
또한 포교사 스스로가 포교에 관한 경험을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험을 기록 하고 다른 포교사와 공유하며 토론을 통해 또 다른 대안을 도출해내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효율적으로 포교할 수 있는 포교사가 될 것이다. 전체 속에서 자신을 한 두 분야로 특화시켜 효율적으로 포교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러한 포교사는 당연히 전문화된 포교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아래의 몇몇 문제를 통하여 스스로 해결하고 만들어 내면서 전문화된 포교사의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① 요즘 경제적으로 우리는 너무 어렵다. 경제가 도탄에 빠지니 사회는 물론,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무너지고 결국에는 개인까지 무너지는 험한 상황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탑골공원이나 또는 다른 곳에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이럴 때 포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② 마을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평소에나 방학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신행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또 무엇을 해야 하나?
③ 소아출산(小兒出産)한 아이와 그의 부모가 자문을 구해왔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④ 성폭행을 당한 이와 대화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⑤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쁜 간호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⑥ 노동자 집회에 참여하려고 하는 한총련 학생들은 포교의 대상인가, 아닌가?
⑦ 노량진 학원가에서 재수하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무엇이 있을까?
⑧ 권력의 핵심에 있다가 정권의 바뀜으로 해서 핍박(?)받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무엇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⑨ 군에서 개인의 문제로 인해 탈영한 군인이 있다. 자수를 하거나 체포되었다면 그는 포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⑩ 018 PCS의 광고에 계속 십자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포교적 차원과 국민 정서적 차원에서 포교사들이 준비할 사항은 무엇인가?
⑪ 스님도 고기 먹고 성행위하고 속인들처럼 모든 일을 다 한다고 강변하는 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⑫ 불교신자 이면서,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운영위원을 맡아 봉사하는 이를 위해 해줄 법문 내용은?
⑬ 남편의 외도를 겪은 여인이나 그 반대의 경우를 당한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한 법문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⑭ 정태수·김선홍·이신행 등등 경제를 파탄 낸 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법문은 무엇인가?
⑮ 독실한(?) 이교도인인 김0삼씨에게 할 말씀은 무엇인가?
다음은 포교사들의 포교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포교에 있어서는 공격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격적인 자세란, 잠자는 이를 깨워서 포교를 한다거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떠들며 불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포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집을 가면서 그 집안을 모두 자신이 믿는 종교로만 개종을 시키겠다는 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피곤한 이에게 휴식을 줄 수 있고, 마음이 아픈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공허함을 지혜로 채워주며, 그리움에는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포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전도의 길을 떠나야 한다.
암같은 불치병에 걸린 이에게 찾아가서 지금 열심히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만 하면 나을 것이라는 말로 그를 달래서는 않된다. 그것은 공격을 빙자한 방어적인 자세이다. 이교도들은 그 방법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는 전도에 성공했지만 실제로 그 생명체들을 병으로부터 구해내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그 방법 자체가 극성스럽기는 하지만 소극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얼마나 스스로가 합리적인 것처럼 말하는가? 그리고 순발력 있게, 병을 앓다가 죽은이들의 집을 찾아 마치 그들이 믿는 창조 신(神)이 불러 갔다는 식으로 말하며 그들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가? 만일 그들이 주장하는 신을 믿지 않은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면, 왜 그들이 믿는 신은 삶을 만들어 죽음으로 이르도록 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신있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전 사망한 모 유명한 목사께서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지 않았던가? 결코 그런 방법으로는 중생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없다.
진정한 포교는 그런 대중요법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병든이에게 병든 원인 즉 인과(因果)를 당당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결코 포교사가 아닌) 불교도로서의 자신감이 필요하다. 물론 처음부터 무조건 당신은 술을 많이 먹어서 간염에 걸렸다는등 상대방을 질책하는 것 같은 말을 해서는 않된다. 하지만 그 환자가 ‘환자 스스로의 생명은 짧은 것’을 알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진정으로 포교에 성공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이 아니라 어느 신이 와도 자신의 병은 못 고치지만 결국에는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교도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누구누구를 믿으면 병을 고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포교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당신은 죽을 것이니 포기하시오’라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 밖의 어디에 의지할 곳이 있는가?
자기가 잘 조어될 바로 그때
아주 희귀한 의지처가 생긴다.(법구경 160)》
우리는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가득차 있던 여인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떻게 교화하였는지 결코 잊어서는 않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 여인으로 하여금 죽음이란 자신의 아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한 것이다. 스스로 체득하고 느끼게 하는 포교. 이 얼마나 멋진가?
이제 포교를 직접 수행하는 이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이들에 관해 살펴보자. 사실 모두가 동일체이므로 포교에서 직접 수행하는 이·후원하는 이라는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후원하는 이는 별도로 필요하다. 그들은 포교를 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대신 해주는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종단이나 포교원이나 각 교구 본사의 포교국이나 각종 불교 연구소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들은 포교사들이 갖지 못하는 생각이나 포교사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여 포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일 역시 포교사들이 갖는 사명감 못지 않은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한다. 중앙기구라든가 아니면 포교사들의 상급 단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져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중앙기구는 포교사들의 손과 발이 될 자세를 가져야 한다. 추호도 그들 위에 군림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중앙기구는 지속적으로 청서(靑書)와 백서(白書)를 만들어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하여야 한다.
끝으로 사족을 단다면 포교의 목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궁극적인 삶 즉 부처를 이룸(成佛)의 길을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체득한 진리, 그 진리를 알고 느끼는 기쁨을 혼자만 누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느낌을 뭇 중생들과 나눈다는 자세로 스스로 포교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