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 제 몸 오도마니 내어놓고 삭풍에 떨고 있는 겨울나무 몇그루…. 한낮임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매운 추위. "사랑만이/겨울을 이기고/봄을 기다릴 줄 안다…"던 김남주 시인의 시 '사랑' 한 대목이 문득 떠오르는 혹한. 겨울 성당 유리화엔 그러나 얇은 햇살 한자락 기도하는 이들을 어루만지 듯 따스하게 머물다 간다.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부산 방향으로 10여분 남짓 지났을까. 옥천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옥천 IC에서 우회전하자마자 2004년 새해로 본당 설정 98돌을 맞는 청주교구 옥천성당(주임 경덕수 신부) 팻말이 눈에 띈다. 몇년전만 해도 옥천 지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옥천성모병원은 노인요양원으로 변해있고, 요양원을 왼쪽에 두고 비탈길을 오르자 작은 언덕 위에 '그림같은' 성당이 나타났다. 바로 '향수'의 시인으로 한국전쟁 때 납북 실종된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 선생의 고향 성당인 옥천성당이다.
성당 정문엔 마침 예수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본당 청년들이 한창 '성탄수'를 장식하느라 한창 분주했다. 바람이 스밀까 목도리로 목을 둘러싼 채 성전을 꾸며가는 손길이 정겹기만 하고, 하나둘씩 등에 불이 들어오자 거센 바람마저 훈풍이 되어버리는 듯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마침 회의차 성당에 들른 김환옥(사도요한, 63) 본당 평협회장을 만났다. "2006년으로 본당 설정 100돌을 맞게 되는 우리 성당은 짜임새있는 전례공간입니다. 여느 시골성당과 마찬가지로 시끄럽지 않고 아주 조용한 성당이죠. 지난 2000년 KBS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꼽힐만치 그윽하고 아름다운 종소리에 '향수의 고장'이란 옥천의 별칭답게 우리 성당은 고향같은 푸근한 느낌을 줍니다. 현 성당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가 자리잡고 있던 공간에 세워졌는데, 적산을 불하받아 5978평의 너른 공간에 자리하게 됐지요. '기도하는 성당'으로는 그만입니다."
'문화재청 지정 등록문화재 7호'로 지정돼 있긴 하지만, 옥천성당이 건축적으로 그리 빼어나게 아름다운 성당은 아니다. 지난해 2월28일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도 우리 근대건축역사상 40~50년대 부실하게 지어진 콘크리트 건축물 중 드물게 남아있는 건축물이기 때문이었다. 규모도 연건평 210평에 불과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1956년 신축된 이 성당은 인근 대학 건축학과 학생들이 답사를 오고 가는 단골 성당 건축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지만 성당의 진면목은 외관보다는 오히려 알찬 성당 내부에 있다. 성전에 들어서는 이들은 외관과 달리 예상외로 넓은 전례공간에 놀라고 그 포근한 아름다움에 반하게 된다고 한다. 91년 110평을 늘려 라틴십자형 형태로 증축된 성전은 아직도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만 하는 마루바닥 성전으로, 장방형 천장에 아름다운 유리화로 둘러싸인 제대, 왼쪽 간이 유물전시공간 등이 한데 어우러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98년 본당사를 함축하는 소규모 유물 전시공간이 특기할 만하다. 1906년 초대 주임 홍병철(루가) 신부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이문동에 본당을 설립한 이후 22평 규모 죽향리 성당 시기를 거쳐 현 삼양리에 성당이 자리하기까지 신앙 유산 70여점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전 주보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유해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제대 성석(聖石), 죽향리 성당시절 감실·십자고상·종, 3대주임 윤예원(토마) 신부가 썼던 가죽털모자, 지금은 없어진 잣고개(현 백향리)공소 제대, 메리놀회 선교사들리 설치한 십자가의 길 14처, 현 주보 소화 데레사 성녀의 유해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대 성석, 각종 교리문답집 등은 옛 신앙의 향기를 그대로 담고 있어 발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옥천성당은 특히 보은·옥천·영동군 등 충북 남부3군 신앙공동체의 모태(母胎)가 된 유서깊은 신앙의 현장이다. 병인박해(1866년) 이후 소백산맥 산줄기에 숨어살던 신자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전교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집단으로 이주, 정착하게 되면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장호원본당(현 청주교구 감곡본당) 주임 임 가밀로 신부의 전교로 공동체가 활성화됐으며 한국인으로는 열번째 사제인 홍병철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본당이 설정돼 공동체 초석이 만들어졌다. 이어 보은·영동본당에 이어 청산·이원본당 등을 분가, 남부3군 모본당이 된 것. 대전본당(현 대전교구 대흥동주교좌본당·목동본당 전신) 뿌리 또한 옥천본당에서 비롯될 정도였다.
그러나 옥천본당 또한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중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사제가 사목한 탓에 그 흔한 외국교회 지원 한번 받지 못했고 일제의 압력으로 본당 사목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체가 분열되고 전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1914년, 1943년 두차례나 공소로 격하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48년 7월 김영근(베드로) 신부가 7대 주임에 부임, 다시 본당이 되면서 옥천본당은 활성화 계기를 맞게 된다.
글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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