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저는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목표로 한 신학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 서부에 있는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였습니다. 당시 신학교 입학 허가서로는 비자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일반 전공으로 비자를 받고 미국에 들어간 후에 신학교로 옮길 계획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동부 코네티컷에 있는 브리지포트 대학의 화학과에 입학허가서를 받고 출국했습니다.
그리고 LA에 도착해서 부모님 집에 머물면서 풀러 신학교에 지원서를 내고 입학 허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한 분이 미국에서 대학을 옮기는 것은 자유지만 유학생들의 경우 처음 비자를 신청했던 대학에 먼저 등록하고 학교를 옮겨야 불이익이 없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1월 3일, 5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미국 동부의 브리지포트 대학에 등록을 하고 풀러 신학교에서 입학 허가서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일이 지나고, 20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입학 허가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뉴욕 근처에 좋은 복음주의 신학교가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현재 미국 한인세계선교협의회 총무로 계시는 고석희 목사님이 얼라이언스 신학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입학 관련 서류를 들고 얼라이언스 신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입학 담당관은 저의 서류를 죽 보고 입학이 가능하니까 곧 수속을 밟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지만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은 “왜 풀러 신학교에서는 소식이 없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풀러 신학교의 입학 담당관에게 전화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추천서 하나가 부족해서 심사를 미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당시 추천서 부탁을 드렸던 부모님이 다니던 교회의 C 목사님이 추천서를 써서 보내겠다고 했다가 계속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때서야 C 목사님이 부랴부랴 추천서를 보냈고, 그해 2월 말에 풀러 신학교의 입학허가서가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저는 두 장의 입학 허가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처음 목표로 했던 신학교는 풀러 신학교였지만 얼라이언스 신학교 입학 담당관의 따뜻한 미소와 뉴욕에서 잠깐 사귀었던 신앙 동료들과 교회가 좋아서 뉴욕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얼라이언스 신학교에 들어가서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선교의 비전에 동참하게 된 계기입니다.
< CMA 선교 비전을 품고 한국으로 귀국 >
1991년 말,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CMA의 선교비전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미국 CMA에서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국은 이미 상당히 복음화 되었기 때문에 선교지(Mission Field)가 아니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은 선교지 국가는 아니지만 선교자원국가(Mission Resource Field)로서 한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큰 비전과는 달리 동역자도 없었고 후원자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비전을 구체화시켜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선교자원을 발굴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선교사 양성 신학교를 세워야 하는데 후원할 사람도 없었고, 재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학교를 다니면서 강의를 했고, 인천에서 교회도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단도 없고, 배경도 없고, 재정도 없고, 뿌리도 없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선거 때 보면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후보로 나오면 무조건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무소속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도 쉬지 않았습니다.
가끔 오해도 받았습니다. CMA가 어떤 단체인지, CMA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님이 누구인지 목회자들도 잘 몰랐습니다. 찬송가에는 심슨 목사님이 지은 찬송가가 5곡이 있습니다. “어제께나 오늘이나(133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408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56),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98장), 내 병든 손 내밀라고(530)”가 바로 심슨 목사님이 지은 찬송가들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가들은 알았지만 정작 심슨 목사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슨 목사님은 1843년 캐나다의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66년 캐나다의 낙스(knox) 대학을 졸업하고 23세의 나이에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낙스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탁월한 설교로 교회에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8년 후에 건강 및 보다 큰 비전을 위해 미국으로 들어와 루이빌의 체스트너트(Chestnut) 장로교회와 뉴욕의 ‘13번가 교회(Thirteenth Street Church)’의 담임목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13번가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떠나면서 복음주의 전도운동과 성결한 삶과 선교를 강조하면서 1884년 기독교 선교 연맹[CMA,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기독교인과 선교사 연맹)]을 창설합니다. 기독교 선교 연맹이란 이름의 원래 뜻은 ‘기독교인과 선교사 연맹’입니다. 즉 후방의 기독교인과 전방의 선교사가 연합해서 효과적으로 세계선교를 하자는 뜻입니다.
< 어리석은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
우리 한국 교회와 관련해서 1894년은 아주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해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세계 선교대회가 열렸는데 그 선교대회의 주 강사가 심슨 목사님이었고, 그때 심슨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리교 출신의 카우만 부부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1901년에 카우만 부부는 일본으로 선교를 떠나 일본에서 동양선교회(OMS)를 세웁니다.
동양선교회는 심슨 목사님이 주창한 4중 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내세워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동양선교회를 통해서 한국에 성결교회가 태동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CMA는 한국 성결교회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심슨 목사님이 주장한 4중 복음에서 순복음 교단이 성결 대신에 외적인 은사 표현을 통한 성령세례를 대신 강조하고, 축복 신앙을 더해서 5중 복음(중생, 성령 세례, 신유, 재림, 축복)을 주장한 것을 볼 때, CMA는 순복음 교단의 신학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학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는 CMA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재정도 없고, 아무 배경도 없고,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CMA의 선교 비전 하나만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CMA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얼마 전에 한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도라면 장로교회에 들어오면 금방 천 명 이상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갈 수 있을 텐데 왜 미국 CMA 목회자로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참 어리석인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얼마 전에는 몇 군데에서 담임목사 청빙 제의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은 제가 받는 사례비의 3배가 넘는 곳도 있었습니다. 1억에 가까운 사례비 얘기도 처음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빙에 저도 흔들리지 않았고, 아내도 이런 말로 저를 붙잡아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도 아닌데 교회를 옮긴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거예요.”
사실 사역지를 옮기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조건이 좋아 옮긴다면 그때는 저의 비전이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었음이 정체를 드러내는 때일 것입니다. 물론 야망(野望)과 야성(野性)을 가지는 것이 큰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의 원리이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원리는 아닐 것입니다. 비전은 자기를 포기하면서 가지는 찬란한 꿈입니다.
총회에 가면 가끔 ‘보다 큰 교회’에 부임하기를 원하는 목사님들의 부산한 발걸음이 느껴집니다. 그런 모습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다 나은 것을 향한 추구는 보편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CMA 선교 비전’을 붙들고 있으니 다른 목사님들 보기에 얼마나 어리석은 일로 보이겠습니까? 그래도 원래 선교란 것이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달리 생각하는 사람(Andersdenkender)’ >
1990년, 미국 CMA 교단의 한국인 3호 선교사인 임준호 선교사님이 필리핀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필리핀에서 미국인 CMA 선교사들이 40년 동안 이룬 일 이상의 일을 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은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필리핀 선교캠프가 안정이 되니까 당시 문이 열리기 시작한 몽고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1996년 황량한 그곳에 홀로 도착해서 7년 만에 6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몽고인 제자를 길러냈고, 작년에 성경훈련센터 건물도 완공했습니다. 그렇게 몽고 선교캠프가 안정되자 이번에는 중국에 속한 내몽고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6개 교회의 감독 자리와 성경학교 학장 자리를 임병철 선교사님에게 물려주고 내몽고로 들어가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시에 있는 1000명 교회의 담임목사가 농촌 목회를 위해 떠난다면 제 정신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이고, 둘째는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안식년입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지내는 선교사님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은 “선교지에 있을 때가 행복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 안식년도 끝나기 전에 선교지로 돌아가는 선교사님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당연히 누려야 할 자기 몫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야 선교는 가능합니다.
요즘 제가 한 가지 고민 때문에 가끔 기도합니다. 바로 판교 아파트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 판교 아파트 당첨 0순위는 ‘35세 이상으로 5년간 무주택인 성남 거주자’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책이 바뀌어 ‘40세 이상으로 10년간 무주택인 성남 거주자’가 0순위가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그 대상자인데 “과연 목회자로서 투기성 아파트 청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고 참 고민이 많습니다.
주변에서는 자꾸 부추깁니다. “목사님은 6번의 청약 기회가 있기 때문에 거의 당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더 마음이 멀어집니다.
만약 아파트 청약하는 날, 청약하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서 “목사님도 이거 하세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줄을 서야 하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보면 ‘분당의 고개 숙인 목사’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청약에 떨어지면 다시 ‘분당의 고개 꺾인 목사’라고 칼럼을 쓸 것입니다. 그러니까 판교 아파트 생각만 하면 요새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면 사람들은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핀잔을 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현실을 무시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 현실만 보면 진실은 그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누군가 ‘달리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달리 생각하는 사람(Andersdenkender)’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다 좋은 것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나눔과 섬김과 드림과 바침과 선교를 실천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비전의 동역자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 선교 비전이 약간의 싹을 드러냄 >
현실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CMA의 선교비전을 계속 붙들고 있으니까 그 비전이 조금씩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CMA의 한국 내 선교 기지 역할을 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세운 요삼일육선교회(John316 Mission)를 통해서 작은 싹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싹이 언젠가 수많은 새들이 깃드는 큰 겨자나무가 될 줄 믿습니다.
교회는 많이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보다는 성장했고, 정자동 상가에서 임대해서 예배를 드릴 때보다는 성장을 했습니다.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한 인터넷 말씀 사역에도 많은 열매가 있게 하셨고, 저의 비전을 위해 기도해주는 여러 동역자도 얻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훈련 센터를 위한 건축 비전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도 생겼고, 미션퍼블릭 사역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사랑매거진 사역도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보면 저희 교회보다는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한 교회 외의 사역이 더욱 확장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시작될 2기 6년 동안의 사역에서는 교회의 꿈과 비전도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신기루 같은 비전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분당에는 크고 화려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교회의 겉모습은 초라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산삼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오늘날 석유가 나오는 곳을 보면 대개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입니다. 그러나 그 땅 밑에는 석유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숨겨진 산삼이 되고, 땅 밑에 숨겨진 보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실체입니다.
그런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축복 받아야 합니다. 작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고, 작은 시작을 무서워하지 말고, 작은 시작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벌지 못하고 50만원을 버는 일터라도 일단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땀을 흘리면 점차 백만 원, 2백만 원, 3백만 원을 벌 수 있는 새로운 일터를 주시든지, 아니면 현재의 일터에서 그렇게 벌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날개로는 비전을 가지고 다른 한 날개로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날면 비전은 서서히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가지라고 양보했습니다. 그때 롯은 좋은 땅이라는 현실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양보하고 비전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가자 황량한 벌판에 남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해 보라.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우리는 롯의 편에 서지 말고 아브라함의 편에 서야 합니다. 현실보다는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자손만대까지 축복 받는 길입니다. 우리는 초라한 모습이어도 우리 안에 보화를 품고 있어야 하고, 그 보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으면 믿음의 눈이 생기고, 그 눈이 있으면 땅 속에 감추어진 보화가 반드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과 횡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얻을 땅을 답사하고, 미리 알라는 의미가 있고, 구체적으로 땀을 흘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리 비전이 커도 실천이 없으면 공상이 되어버릴 뿐입니다. 하루에 첫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땅을 밟고, 일터에서 열심히 육신적으로 땅을 밟을 때 우리의 비전은 언젠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 거룩한 비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
거룩한 비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반드시 거룩한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비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비전이 있으면 반전의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인 조앤 롤링(Joanne Kathleen Rowling)은 원래 불쌍한 이혼녀였습니다. 그녀가 25세이던 1990년,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 후 그녀는 영어 강사를 하려고 포르투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기자를 만나 1992년 결혼을 하지만 곧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생후 4개월 된 딸만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와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정부의 생활 보조비로 간신히 연명합니다. 때로는 아이 먹일 우유도 없어서 맹물을 먹이며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걷다가 갑자기 스토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해리 포터 시리즈입니다. 처음 찾아간 출판사에서는 출판 거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리즈가 전 세계 55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그녀의 별명은 몽상가였다고 합니다. 몽상가도 성공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환상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 대이든지, 우리 다음 대이든지 반드시 열매 맺는 날이 올 것입니다.
< 새로운 출발을 위한 2주간의 안식 >
1999년 1월 10일 설립예배를 드릴 때, 저는 교회 비전 계획서를 세우면서 2005년부터 1년 간 안식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사실 CMA 비전을 가진 저에게 한국은 선교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 목사님들이 미국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생각에 선교사들처럼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방전’만 있고 ‘충전’이 없으면 ‘비전’은 무기력해지고 ‘발전’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덧 6년이 지나, 드디어 고대하던 2005년 안식년이 왔습니다. 저는 ‘1년 365일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삶’을 목회의 가장 기본 방침으로 정했기 때문에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설교준비 없이 새벽 강단에 서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절 때 가족들을 만나도 항상 먼저 일어섭니다. 다른 가족들이 아쉽게 생각하지만 새벽기도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휴가 기간은 저에게 설교 준비에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꿀맛 같은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안식년에 대한 기대가 컸겠습니까? 사실 안식년 기간에 미국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하며 재충전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저의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안식년을 포기하고 이번에 2주간만 안식 기간을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6년 동안 다시 열심히 사역하고 제가 만 50세가 되는 2011년에는 꼭 안식년을 가질 것입니다.
얼마 전에 LA에 사는 노인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저희 가족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물었던 것을 또 묻고, 확인했던 것을 또 확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년 반 동안 혼자 사시면서 기억력이 많이 감퇴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역시 자식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 최고로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안식 주간을 LA에 계신 어머님과 함께 보내려고 합니다. 저희들 형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얼마 전에 한분의 후원자를 통해서 개인적인 사랑의 후원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씨앗 삼아 어렵게라도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머님 모시고 형편이 되는 대로 LA 인근에 여행도 다녀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참으로 뜻 깊은 안식 주간이 될 것 같습니다.
< 에벤에셀의 하나님 >
지난 6년간의 분당에서의 사역을 생각하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에벤에셀!(여기까지 도우셨다!)”의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념비를 세우면서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런 감사한 마음의 준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의 역사를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 받는 존재가 되려면 감사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자는 삶의 두 원리 안에서 삽니다. 하나는 믿음의 원리이고 또 하나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했을 때뿐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에는 누구든지 감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을 때, 어렵고 힘들 때 그 빈 자리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예비할 때 하나님의 복된 손길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거룩한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지난 세월에 대해 감사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향해 달림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 분당 샛별교회와 요삼일육선교회의 2기 사역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열심히 동참함으로 기필코 멋진 비전을 이루는 하늘나라의 영적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비젼이라는 단어자체도 좋던걸요~~~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