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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 유감
제주섬에서 한 해에 두 번 회동하기는 뒤풀이 유사 이래 세 번째다.
1996년 자전거 일주때와 김상욱 시인의 영애 혼인때에 이어.
한나절치도 못되는 거리가 남았을 뿐이므로 모두 호기롭게 마셨다.
아침에도 여느 날과 달리 마냥 늑장 부리다가 시내버스편으로 어제
마감한 조부교로 갔다.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하귀리의 경계이며 애월읍의 관문이라는
조부천에 놓인 다리다.
외도2동(外都)에는 제주 38연대(煙臺)중 하나인 조부연대가 있었다.
서편의 남두연대(南頭煙臺: 애월읍 신엄리), 동쪽의 수근연대(修根:
제주시 용담동)와 교신했던 연대다.
조부연대는 일명 듬북개연대라는 이름도 갖고 있는데, '듬북'이라는
해초가 쌓여서 썩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란다.
'연대마을'은 연대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일텐데 마을에 정작 연대는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제주시가 복원하려 한다는데 역시 관광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하나.
1132번일주로(연도로)를 이탈하여 도근내길(都近川)을 따라 무수천
(無愁)하류의 월대교를 건넜다.
이름대로 근심을 없애준다는 무수천은 한라산 어승생악(御乘生岳),
천아악(天娥岳) 일대에서 발원한다.
애월읍 광령리와 제주시 해안동 사이를 통과한 후 어시천과 합류한
도근천을 만나서 함께 외도선착장 바다로 뛰어든다.
(지도상에는 무수천이 엄연한데 지역민들은 왜 외도천이라 할까)
이 지역민들은 모두 풍류를 아는 시인이고 묵객이었던가.
무수천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며 흘러가는가.
수백살 노송들 가지 가지를 뚫고 잔잔한 수면에 수놓는 달빛이 그리
도 아름다웠던가.
주민들이 달빛에 도취되고 달을 감상하던 곳이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맑은 수면 위에 장관을 펼치는 달과 더불어 노니는 누대(樓
臺)였건 물가에 월대(月臺)가 들어섰다.
월대(상)와 월대천(하)
월대 또한 주변 환경이 다를 뿐 명월대(한림읍)와 판박이다.
우다풍다((雨多風多) 양다(兩多)의 제주땅 시인 묵객들은 정녕 이런
지붕 없는 누대를 선호했단 말인가.
비석 '月臺'(월대)의 서쪽 천변에는 수백 살의 소나무와 팽나무들이
수면 위로 휘늘어져 뛰어난 경치를 연출한다.
제주민속5일시장
도근천(내도교)을 건너 다시 일주도로에 합류했다.
얼마쯤 지나서(이호2동탐라민속관앞) 다시 일주로를 떠나 제주민속
5일시장길로 들어섰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북적대는 장마당을 보기 위해서 였다.
아침에 탄 버스가 도두동 민속시장을 경유해 갔는데 만원이었다.
운전기사는 오늘이 장날이기 때문이라 했다.
제주시의 5일장은 2일과 7일이며 오늘은 12일 장날이다.
다른 대로들에서는 5일장마당과 인연이 많았다.
한 번 매치(match)가 되면 연쇄적이었다.
날을 바꿔 장이 설만한 거리를 하루치로 해서 가고 있다는 뜻이겠다.
제주에서는 날이 맞지 않아 아직 맞닥뜨리지 못했는데 마지막 날에
기회가 온 것이다.
비록 외곽이긴 해도 제주특별자치도의 메인(main) 도시인데 아직도
5일장이 선다는 것이 신기롭게 느껴졌다.
꽤 넓는 장 안팎의 주고객은 대부분의 장이 그러하듯 장.노년층.
아마, 젊은 고객은 환경과 품질에서 월등한 대형마트와 상설시장에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시 민속5일장
그래도, 재래시장들의 시설과 환경, 상품 등이 전국적으로 하나같이
크게 업그레이드 되어 예전과 달리 드나들만 한데.
팔려가기를 고대하는 상품의 특징은 역시 섬 시장답게 각종 해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라 할까.
재래시장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5일만에 열리는 민속시장이야 말로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온갖 소식의 교류와 애환을 나누고 어루만지며 주름살을 헤아리는
농어산촌 서민들에게 최고로 절실한 공간이다.
상거가 얼마 되지 않는 월대와 민속시장.
월대에서 시인, 묵객이 되어 선경에서 노닐다가 냉혹한 현실세계로
환원된 느낌이었다.
제주향교와 제주목관아
이 늙은 길손이 사줄 물건은 즉석구이 호떡 밖에 없어 유감이었다.
호떡 먹으며 걷는 배낭 멘, 하얀 수염을 날리며 걸어가는 늙은이가
아무래도 비정상으로 보였던가.
달리는 차안의 사람들 중에는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제주공항에서 내일(3월13일)의 부산행 티켓 예약을 확인한 후 공항
입구육거리, 월성사거리, 용담사거리, 용담1동 제주향교까지 갔다.
제주향교는 정의, 대정과 함께 제주의 세 향교중 하나로 제주도유형
문화재제2호다.
제주향교
공자를 비롯하여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강학하는 명륜당 등은
전국의 모든 향교가 하나같다.
그러나, 제주향교측은 다른 향교와 다른 점을 강조한다.
계성사(啓聖祠)가 있다는 것.
계성사는 오성(五聖: 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등)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란다.
곧 6일간의 제주로 여정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다.
옛 제주 통치의 중앙무대였던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다.
이조때까지 정치,행정, 문화의 중심지역할을 해온 중요 유적지다.
그래서, 입구(남서쪽)에 있는 관덕정(觀德亭:보물제322호)을 포함한
일대가 사적지(국가사적제380호)로 지정되었단다.
관덕정(觀德亭)은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세종(4대) 30년에
창건되어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 하나란다.
관덕정 이름은 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성덕을 보는 방법:
禮記 射義第四十六)라는 예기에서 따왔단다.
무슨 공사가 진행중인지 유감스럽게도 온 몸이 가려지고 접근 금지
(2009년 3월 12일 현재)중이다.
관덕정(1), 외대문(鎭海樓:2.3), 연희각(4), 우련당(5), 망경루(6)
관아의 관문이던 외대문(外大門)에서 연회장소였던 우련당(友蓮堂),
절제사가 사무보던 홍화각(弘化閣), 군관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瀛
州協堂), 목사가 집무하던 연희각(延曦閣), 목사의 휴게공간 귤림당
(橘林堂), 임금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예를 올리던 망경루(望京樓) 외
에도 회랑, 연못, 중대문 등이 복원되었다.
제주로 에필로그(epilogue)
6일간의 420리길 제주로 걷기를 마치고 관아를 나선 시각은 2009년
3월12일 오후 4시 5분.
축하해 주겠다는 뜻인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많이 내리기로 이름난 제주에서 고맙게도 잘 참아준 엿새였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날씨의 부조가 지대했다.
그래서 제주로 걷기를 예정보다 빨리 마쳤는데도, 여느 대로와 달리
왜 이리 공허한 느낌이었을까.
내가 옛 길을 걸으려 했고, 그래서 걷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들길, 산길, 뱃길.... 등 옛 길에 차곡차곡 서려있는 선인들의 애환을
음미하며 시대를 뛰어넘어 재해석해 보려 하는 것 아닌가.
차량들이 뿌려대는 매연과 소음의 공해와 살상의 공포가 없는 길을
걸으며 여유작작했던 선인들의 체취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고.
내 의도가 이러함에도 제주로는 이런 바람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지가 없다.
제주로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는 중에 읽은 한 글이 떠올랐다.
"삼별초의 영웅적인 항쟁도 제주인에게는 재앙이고, 고려도 몽골도
모두 똑같은 외세에 불과했다"
"제주 백성들은 서울의 관리보다 바다에서 자주 만나는 일본사람과
친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늘 북쪽만 바라보고 왕이 다시 불러주기만 바라며 수탈만
일삼는 관리보다 바다에서 만나는 일본 어민들(그들이 왜구라도)과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민족과 국가는 근대역사가 만들어낸 굴레일 뿐이며 그들(제
주인들)에게 민족은 없다"는 것인가.
누구의 주장이건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
동의하는 쪽이 대부분이건 극소수건 개의치도 않겠다.
다만, 만약 이 글이 옛 제주민의 현실과 의식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면 제주민들이야말로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4.3사태라는 비극의 도화선이 된 경찰관 살해사건도 이같은
의식의 한 표출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는가.
반역성이 농후한 백성을 어여삐 보고 다독거릴 군왕이 어디 있으며
이런 민(民)을 위해 헌신적일 관(官)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진도와 제주도는 유배자의 땅이었다.
오죽했으면 진도에서는 죄인 그만 내려보래라고 상소를 올렸을까.
그러나 진도에서 삼별초군은 재앙이 아니고 진도의 자부심이다.
유배자들 덕에 진도가 문예부흥을 하는 동안 제주는 무엇을 했는가.
"육지에서는 늘 섬을 관리 혹은 개발의 눈으로 보고 있다."고?
그러니까"육지의 눈으로 바다와 섬을 보지 말고 바다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불만인가?
그래서, 바다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예전에는 반역이었고 오늘에는
천혜의 자연을 마구 절단내는 것인가.
"중앙의 기록으로 제주사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고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제주인의 시각으로 제주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더구나, 지금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다.
빗발이 굵고 세차갔다.
관아의 출입문인 외대문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 여러 생각이
이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생산적이지 못한 상념에 마냥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올레길을 걷는 중인 요세피나(소정)님네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
려면 중문관광단지(한국콘도) 길을 서둘러야 했으니까.<제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