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해 주신 말씀 중 핵심은 개인과 개인이 어떻게 평등하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통일로 가자는 두 가지의 큰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그 전제가 아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 실천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문명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큰 모자람은 아는 것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실 분단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고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또 지금 사회주의 체제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자유주의 물결이 우리에게 어떤 위기로 닥쳐올 것인지를 어떤 언론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이태리의 북부 르아노라고 하는 곳에서 비밀스럽게 토의하기를 이대로 가다가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역으로 고민해 왔던 것이 사실인데, 우리는 이제는 사회주의는 없고 자유주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도 벤처도 뭐다 하는 그런 방향으로만 가고 있어서 균형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지식이 골고루 섭취되지 못하는 기형이 남한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의 어떤 학자들은 노동 1호 같은 경우는 20회 이상 실험을 해야만 무기로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데 한두 번의 실험은 무기도 아니라는 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의 무기 등에 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남한 사람들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제대로 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환 것은 보다 면밀한 지식 또 안정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개인의 정진이라든지 영적인 부분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과연 새로운 세계의 문명사적인 전환의 이 시기에서 정말 제대로 된 아름다운 미래로 만들기 위한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최소한 어떤 것만큼은 제대로 알고 토론해야 되는 건지에 대해서 박노해 시인이 말씀을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답 변 1
- 질문하신 것 자체가 하도 좋은 답을 품고 있어서 사실 내가 답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름다움이 힘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탐진치 중에서도 어리석음, 즉 치(痴)가 제일 무섭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알아야 될 것이 너무나 많을 것이다. 북한의 참사와 실상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잘 모릅니다.
또 비록 정보로서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행(行)이나 자기 사고나 생활 구조를 바꿔 내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 암묵지(暗默知)가 되고 맙니다. 드러나는 지혜와 행(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자본주의 세계의 체제, 요즘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여러 문제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변화에 있어 그 격변의 근원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식이라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그 변화의 갱신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아직까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사회주의가 왜 무너졌을까, 또 자본주의가 과연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거의 눈이 멀도록 온갖 책들과 이론들을 섭렵하면서 장좌불와하다시피 하면서 사무치게 참구 정진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것들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은하계, 천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도 정작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은 밖에서 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신자유주의가 어떻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인간 욕망의 발현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들이 여러 가지 이해 관계의 시스템으로 엮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고 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한 몸은 낱개인 내 몸이라는 이기성을 갖는가 하면, 또 한몸은 온몸으로서 전체 우주와 이어져 있는 우주적인 존재, 영성적 존재로서의 몸이기도 합니다.
이 몸이 그렇게 양극단의 요소를 가지고 있듯이 모든 요소가 그런 것을 갖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양면성 가운데 한 면인 영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때 물질적인 실천 측면으로 사회주의라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또 한 요소인 이기성과 개인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 욕망이 억제되어 청의성이 쇠퇴되게 된다. 그것이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붕괴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반대로 인간의 또 다른 요소인 이기성과 개인성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면서 밀고 나가는 체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양극을 품는 새로운 것들이 끝없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제3의 길이라든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민족적인 자기 전통의 문화 생태계와 세계성이라는 것 등 다양한 양극의 요소가 대립, 조화, 충돌하면서 긴장된 떨림의 걸음을 하나하나 걸어 나가는 그 길이 바로 해답인데, 나는 그것을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진리의 힘과 자기 자신의 힘인데, 결국은 그 근원을 보면 아는 것의 핵심은 깨달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민족의 위기나 세상의 물질계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런 여러 가지 모순과 정보화 혁명이라든가 하는 것이 실은 내 몸의 바깥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깨달음은 나는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의 모든 복잡계의 어떤 진전 상황을 우리의 깨달음의 화두로 잡아가면서 정진해야 하는데, 그 정진은 토굴 속에 박혀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평생 학습해 가면서 자기를 탐구하려는 지적인 노력도 필요하고, 감성적인 자기 확장도 필요하고, 영적인 쇄신, 그리고 여러 가지 인연 관계의 쇄신 등이 필요합니다. 낯선 것들 속에서 어울려 가는 정신 자체가 아주 복잡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전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책을 읽거나 경전 등을 읽으면서 감동이 올 때 속으로는 퉁명스런 소리로
"당신들은 그래도 참 행복한 시대에 살았어. 그 때는 신문도 한 가지 밖에 없었잖아.'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고, 복잡하고 속도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 답변 아닌 답변입니다.
질의 2 - 정토회 기획실장 남연우
나는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굉장히 마음에 남습니다.
"사무치면 꽃이 핀다!"
사실은 우리가 통일을 염원하지만 얼마나 사무치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통일은 성큼 다가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무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움과 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이것저것 잘 짚어 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통일의 문제나 민족의 문제를 푸는 데 무엇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일까, 그리고 문명의 전환기에서 우리들이 방향을 잡아 나갈 키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주의 깊게 들어봤는데, 내가 듣기에는 20세기까지가 단절의 문화였다면 어떻게 이것을 소통의 문화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리고 20세기까지가 전체와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은 개인의 삶이었다면 전체와의 연괸을 회복한 주체로서의 개인을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그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대강 이해했습니다.
그런다고 했을 때, 아까 말씀 중에 주인 의식을 갖자고 하는 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자리에 앉혀 주인이 되도록 하면 사람은 저절로 주인이 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우리를 주인으로 세우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들이 먼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변화, 즉 자기가 직접 그렇게 실천하고 삶을 살아 보이는 것, 그리고 박노해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삶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박노해시인이 바라보는 여러 가지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실천하고 살아보고자 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있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통일의 마음을 사무치게 내 가슴속에 피워 내기 위해 일상에서 실천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답 변 2
- 이 질문의 요지는 결국 실천의 키가 무엇인가, 일상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으로 살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인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려고 하는 노력인가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나는 그 키는 우리가 시대 정신을 잘 잡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시대 정신을 크게 잡아본다면 그것은 '잘 살아보세'라는 경제 성장과 평등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평등이 민주주의로 나타나고, 경제적인 평등은 노동 운동이나 사회 복지 등으로 강조되었으며, 사회적인 평등은 인권이나 여성의 권리, 생명 권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과연 그 중심적인 가치가 무엇이 될까. 계속 '잘 살아보세'인가? 경제 성장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삶의 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평등은 무엇일까. 평등은 여전히 중요한데, 그 평등을 평등으로 밀고 나가면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성이나 자유가 억압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마치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의 삶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등을 강조하다 보면 적대적인 대립 분쟁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평등 과제를 품으면서 이것을 어떻게 하여 시대 정신으로 세울까. 그것이 존재의 근본 원리와도 일치하고, 내 개인 삶의 윤리와 실천행이 되기도 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운동이 되기도 하면서 남북 통일 문제나 우리 사회와 존재의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 그 키워드로 나는 '나눔'을 잡고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 존재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사람도 처음에는 엄연히 처음에 정자와 난자라는 세포로 나뉜 상태에서 생명체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땅에 심어 둔 씨앗도 두 개의 떡잎으로 나뉘어지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분 좋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뜻도 따지고 보면 기운이 잘 나뉘어졌다는 뜻입니다. 기운이 상초, 중초, 하초로 잘 나뉘어지고 음양도 좌우로 고르게 잘 나뉘어져 순환이 잘 되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상태가 됩니다.
또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자녀들과 부부 간에도 삶의 목표를 잘 공유하고, 가사도 잘 나누고, 하루 있었던 일들의 정보도 서로 잘 나눌 때 그 집안이 화목하게 됩니다. 나누지 않고 가장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머지 않아 황혼 이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도 권한과 정보, 이익을 나눠야 성장합니다.
그것은 남북간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아깝다고, 나도 어렵다고 나누지 않으면 반드시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것이 남북한의 현재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인터넷의 특징, 지식 정보의 특징은 나눔입니다. 인터넷은 정보가 서로 나눠지고 공유되어야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나눔이야말로 21세기에 우리가 실천행으로 가져가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과 돈, 심지어는 내가 가진 가난함이나 슬픔이나 고통까지도 나누면 그것은 신묘한 힘이 되고 약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우리 존재의 기본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눌 것이 없을 때가 가장 불행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실은 새로운 이야기를 내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안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간 바빠서 내가 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법륜 스님같이 묘하게 자동 충전(?)이 되는 분도 있지만 나는 그런 천재과(?)가 못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게 됩니다. 단 하루일지라도 몸을 청정하게 갖도록 노력합니다. 요즘 계속 새벽에 잠이 드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늘 깨어 있고 나를 맑게 갖고 몸 생활을 치열하게 하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나눌 게 없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눌 때 거기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더 정진하는 원동력이 나온다고 생각한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눔으로 하나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3세계의 어려운 사람들보다는 기득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데, 그 나눔은 바로 지금, NOW이다. 지금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있을 때 줘야 합니다. 없으면 없는 것을 줘야 됩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하지만 한 달에 한두 시간이라도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라도 바칠 수도 있으니 우리는 바칠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내 어머님은 이제 80세가 되시는데 꼬부랑 글씨로 '장기 기증 긴급 연락'이라는 쪽지를 방에 붙여 놓으셨다. 그래서 어머님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가 나눌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산을 안 물려주고 사회에 나누는 것도 중요하고, 작지만 우리의 정성과 기도를 나눌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나눔문화운동을 하는데 남북 나눔은 '좋은 벗'들이 가장 잘하니까 '좋은벗'들을 통해서 하고 싶고, 또 정치 권리나 이런 것은 참여연대 같은 곳이 열심히 잘하면 그쪽을 돕고 싶습니다. 또 지식 정보 나눔을 잘하는 것도 도우면서 서로가 소통하면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인으로 바로 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나는 참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서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는 진정한 진보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사회적인 약자들과 늘 함께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60억 인류 가운데 약 18억 명이 세 끼를 못 먹고 살고있고, 3분의 2 정도가 아직 생존 단계의 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많이 가지고 여유를 부리는 사람들은 소수이지만 가난하고 무권리하고 작은 상태로 살고 있는 분들은 너무나 많다. 그분들의 편에 굳건히 서는 것, 그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신한테 어떤 영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늘 정치적으로 보수 기득권 세력의 편에서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약자들 편에서 우리가 함께 행동하고 함께 옹호하고 서는 것이 참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왕들과 늘 같이 어울리고 네트워크를 하면서 많은 물질들을 나눠주도록 작용을 하시면서 항상 가난하고 힘든 중생들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두 번째는 여성과 생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절반이고 우리가 항상 더불어 사는 여성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보다 능력 있는 여성을 상사로 모시고 같이 일할 마인드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퇴출되어야 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아드님이자 배우인 문성근 씨, 또 임수경 씨, 그리고 성고문 사건의 권인숙씨 들이 다 이혼을 했습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유명해지게 되면 다 이혼하게 되나?"
하기에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주변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만나면
"첫 번째 결혼 졸업한 것을 축하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그 이혼이 그 여성에게는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여성의 경우 비록 재능이 있고 똑똑하다고 해도 결혼을 하는 순간 가사 노동과 허드렛일에 시달리면서 자기 가능성을 파괴당한다. 뭐든지 안 쓰면 퇴화합니다. 그런데 한 번 자의식을 갖고 나름의 생각과 꽃을 피워 본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개구리보고 올챙이로 돌아가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진화 법칙입니다. 내가 만약에 주례를 선다면 신랑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당신보다 아내가 훨씬 더 재능 있고 사회적으로 가능성이 있다면 집에서 살림하면서 뒷바라지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시댁 식구들은 모두 그런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결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을 존중하고, 모성성을 존중하고, 생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보다 하위의 생태계, 사실은 우리를 살려 주고 있는 생태적 진리성이 삶과 생활 속에 스며들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계의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아까 김형주 씨가 질문하실 때 말씀하셨듯이 아는 것이 힘이 되는데, 새로운 지식, 새로운 변화, 신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참신한 감각이나 감성들을 받아들이고, 정보화와 이것으로부터 야기되는 변화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돌아서면 그것은 퇴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극적인 착함에 불과하고 이 빠른 세계 변화 속에서 내가 진짜 보살행을 할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합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성장의 핵심은 말 그대로의 자비고 사랑의 실천 아니겠는가. 그건 모든 아파하는 중생들과 더불어 살고 나누면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네 가지의 축을 자기 생활 문화와 삶의 행동으로 삼고 구성하는 삶을 나는 살아 보이고 싶고 그런 운동의 집단을 만들어 가고 싶다. 나는 그 점에서 정토법당이 참으로 새로운 미래의 인간형과 원형질들을 잘 키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될까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쉽게 작은 마음을 내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것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토요일, 일요일에 갈 곳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생각이 있는 분들은 대학로나 인사동을 헤매다가 피곤해 가지고 옵니다. 야외에 나가려고 하면 교통 지옥에다 돈도 많이 든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시간 정도만 가면 파주의 통일 전망대와 분단 휴계선이 나옵니다 거기가 자연도 좋고 아주 공기도 좋고 교통도 좋습니다. 그러니 그 부근에 우리가 통일부로부터 땅을 좀 빌려서 거기서 매주 통일 문화 행동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늘 토요일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 곳에 와서 공연도 하고, 촛불기도도 하고, 통일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유기 농사하시는 분 등 여러 사람들이 와서 장도 열어서 먹을거리도 만드는 장터가 되기도 하고, 온갖 사람들이 통일과 연관된 다양한 문화 행동들을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계속하자는 것입니다.
동독에 가 보니까 통일이 그냥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독의 한 교향악단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일될 때까지 10년 동안을 베를린 장벽 앞에서 연주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청중이 많을 때는 몇만 명이 모였지만, 탄압이 심할 때는 고작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비를 맞아 가면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작지만 꾸준한 운동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고 한다. 그런 것으로 인해 조금씩 민심이 축적되어 통일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들은 갑자기 독일 통일이 됐네, 콜이 어떻게 했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들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보면 이런 좋은 기획들이 몇십 가지 나오고, 통일과 관련된 관광 상품 등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나 '좋은 벗' 같은 데서 일주일에 한 끼 굶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변의 직장인들에게 물어보면 한 끼 굶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합니다. 무한경쟁으로 뛰는데 한 끼 굶기가 사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8.15콜라를 만드는 식품회사 이사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이런 제안을 했다. '아침햇살'에다 야채 효소도 넣고 해서 더 좋게 만들어서 사랑 나누기 음료라든가 하는 이름을 붙여서 팔아라. 그리고는 그 이익금을 다 보내줘라. 바빠서 한 끼 식사할 시간도 없는 직장인들이 그것을 마시면 이익금이 자동적으로 모여서 큰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직장인들이 힘들다고 포기하는 일없이 한 끼쯤 동참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기업과 정부가 협력해 가면서 구체적인 생활 속의 실천들을 큰 물줄기로 모아 가는 기획들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들이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