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참정권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살아온 여성들이 의식이 깨이면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쟁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되어왔다. 그에 따라 소설, 드라마, 영화 등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대부분은 여성해방주의를 부르짖는 급진적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 혹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머무른다. 이렇듯 대부분의 텍스트가 '여성문제'라는 화두를 던질 때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의식 자각' 측면에서 심각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기존의 여성관련 텍스트가 문제의 제기에서 결말을 낸 것에서 한 단계 나아가 대안을 제시해 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동안 여성을 억압해왔던 제반 문제들 (가부장제 내에서의 수동적인 여성, 동성애자, 미혼모, 강간 피해자, 동거 등)을 직접적으로 담론화 하지 않는다. 현시대에서는 사회적 편견으로 문제화하는 일들이 영화 속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영화는 주목할 만하다.
다시 쓰는 여성의 역사-안토니아스 라인
특정 지역, 시기를 알 수 없는 한 마을에 안토니아와 그의 딸 다니엘이 등장한다. 특정한 역
사적 사건과 관련하지 않은 영화공간은 신화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동안
남성이 중심이 되어서 쓴 신화와는 달리 여성이 중심이 된 신화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의 산물인 전쟁의 야만성으로 염세주의에 빠진 철학자 크룩 핑거의 자살, 가부장제
내의 전형적인 폭력성을 상징하는 피터의 죽음 (피터는 쥬피터ㅡ제우스 신을 상징하며 이는
남성적 신화의 해체를 암시한다.), 이교도와의 금지된 사랑으로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늑대
울음을 질러대는 '미친 마돈나'와 이교도의 죽음, 안토니아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하지만 아가
씨를 강간하고, 결국 종교가 주는 행복에서 벗어나 인생이 주는 쾌락을 찾아가는 신부의 선
택 등 '죽음'과 '종교라는 인습 탈피'라는 설정을 통해 남성이 중심이 되어 쓴 그 동안의 역사가 얼마나 불합리한 요소를 많이 내포하는가를 안토니아가 쓰는 역사와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러한 남성적인 역사가 해체되고 여성의 역사가 새로 쓰여져야 함을 암시한다. 여성학의 여러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도 안토니아의 상황 설정은 다시 쓰는 신화에 바탕이 되도록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힘을 부여한다. 여러 여성학의 갈래 중 급진적 여성학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학, 자유주의 여성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건대, 급진적 여성학의 입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억압의 원인을 남성집단이 여성집단에게 힘을 행사하는 지배체계, 즉 가부장제로 본다. 안토니아가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으며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도 전혀 없었다는 점은 그녀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여성학은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여성억압의 근본원인이 된다고 파악하
여 자본이 노동을 통제하고 자본주의 사회전반에 힘을 행사하는 결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
한다고 본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위풍당당하게 씨를
뿌리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노동의 주체가 되어 경제력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자유주의 여성학에서는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여성학과는 달리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같은 제도에 혐의를 두지 않고, 대신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을 문제삼는다. 이미 언급했듯 이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음으로 편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일이 거의 없을뿐
더러, 신부에게서 종교적 편견으로 인한 모욕을 받았을 때 무시하고 대항하는 통쾌함을 보
여준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안토니아 가계의 여성들의 모습
안토니아는 홀아비 바즈가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을 때 아들과 남편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씩 와서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을 도와 달라고 한다. 또한 남편과 사별하고 정절
을 지켜왔으나 욕구를 발산하고 싶다며 성 관계를 당당히 요구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다. 이는 남성 중심의 가족 질서가 해체되어 가족제도가 재편성 될 수 있음을 암시하나 그
렇다고 해서 여성을 가부장제 안의 가부장의 모습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
이 할 수 없는 힘든 일은 도와 달라고 요청하고, 성 관계를 요구하는 등 성(性)-(물리적)의
차이를 인정하여 완전한 고립에서 탈피한다. 이러한 점은 딸 다니엘이 아이를 갖기 위해 남
자를 잠시 만나고, 손녀 테레사가 결혼을 하고 크룩 핑거와 철학을 논하는 친구가 되는 점
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한 분파인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녀간의 평등을 지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남성간의 동화뿐이라고 생각한 것에 반하여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은 동화가 아닌
차이를 추구했다. 안토니아 가계의 여성들은 '저마다 고유한 특성에 따라 따로 또 같이'의
기준을 가진 포스트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행동한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가부장적 제도권
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고 평등과 동화를 추구했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입장과는 달
리 정체성, 즉 동일성이 아닌 타자(여기에서는 남성)와의 독자성에 따라 행동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그녀들의 행동방식은 주체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 역시 가부장제 사회질서 내의 여성의 모습과 다르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는 갖고 싶다며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안토니아와 마
찬가지로 결혼과 독신 중에 독신을 선택했고, 아이는 낳느냐 마느냐 중 낳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남자를 아이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 시켰다는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제공될 수
있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일반적 가족 제도의 통념을 선택 가능 항으로 보여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는 남성 중심적인 가족제도의 해체를 의미한다. 라라와 다니엘
의 동성애 역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아갈 수 있는
각 개인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안토니아의 천재 손녀 테레사 역시 학문활동과 성생활에서 고정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
고, 자기 뜻을 자유롭게 펼쳐나간다. 그녀에게도 결혼과 모성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녀를 사
랑하는 시몬도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지 않으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네 엄마는 비정상
이란다" 이라고 하며 그녀 모습 그대로를 인정한다.
이처럼 안토니아 가계의 여성들은 이제껏 여성에게 강요되던 정조관념과 같은 고루한 의식
들을 무시하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방법을 찾는다. 사회 통념은 그
녀들의 삶의 방식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주위의 의견 역시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기에 영향
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녀들은 철저하게 여성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의지대로 통쾌
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즉, 여성이 주체가 되는 작은 모계사회의 모습을 차차 만들어 나
간다.
가족과 성의 해체
영화는 가부장제 가족형태에 고정된 관념을 남녀간의 동거, 혈연이 아님에도 함께 살아가
는 관계(디디, 신부, 미친 입술 등), 미혼모, 동성애 등의 방식으로 해체하여 보여준다. 기존
의 페미니즘 영화가 여성의 해방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는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을 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확대하여 보아서, 삶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
고 있다. 결국 주시해야 할 것은 인간이 사는 방식에 대한 기준은 모호해졌으므로 결국 어
떻게 살아 갈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정해져 있다
고 여겨져 온 삶의 방식은 권위를 잃었으며 개인이 가장 행복을 느끼고 살 수 있는 방식으
로 살아갈 때 그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토니아의 마당-평등과 자유의 공간
현실과 대안..
그 마을에서 '안토니아'의 마당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그러기에 파계
한 신부나 정박아 디디, 미친 입술, 미혼모 레타, 동성애자 모두가 그 자체로 인정받고 어울
려 산다. 여성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들이 그 자체로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그곳은 그렇
게 달리 갈 곳이 없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치유되고 머무는 곳이다. 마지
막에는 죽은 자들마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삶과 죽음의 경계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그곳이 바로 '안토니아'의 마당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 사
람들과 조금 다를 뿐인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소외 받고 핍박받는다. 이들의 권리 신장에
대한 논의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제도권 안에서는 그다지 큰 힘을 얻지 못한다. 그러
나 주류 문화를 비판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식 있는 사회 단체들의 움직임은 언젠가 '안
토니아'의 마당 같은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이 영화는 남성과 맞서 대항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당히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어 남성과 함께 살아가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더불어 그러한 여성들
이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안아 살아가는 휴머니즘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므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벗어나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모두가
그 자체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해 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