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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 선생님과의 공부 인연
여운 김광하
나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는 신선도(神仙道)를 닦았다. 고등학교 때 가까운 친구의 아버지께서 신선도에 아주 밝은 분이었는데, 그 친구 집에 자주 출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 아버지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첫 스승이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음양오행, 태극 등 동양철학의 이치를 배웠다. 선생님은 모든 것이 음양이며 한 기운(一氣)인지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불피차(不彼此)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예부터 내려오는 도술(道術)의 세계와 도인들의 여러 신통력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정신통일을 귀중하게 여기셨다. 정신을 통일하여 도를 통하면 위로는 천문(天文)과 아래로는 지리(地理)에 통달하고 사람의 일에 밝게 된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100일 동안 매일 밤 11시에 산에 올라가 노자도덕경을 주문처럼 외웠다. 경신일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기도 했고, 평소에는 늘 도덕경을 외우기도 했다. 수련하는 중에 게으름이나 마장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단전호흡을 하기도 하고 정신을 기르기 위해 새벽에 뜨는 첫 해를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구 동화사 양진암에서 수도할 때는 우연히 경봉스님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듣게 되었다. 선생님이 말씀하는 불피차와 같은 이치가 불교에도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틈틈이 암자에 있는 불경을 읽으며 처음으로 불교의 가르침에 접하게 되었다.
1973년 여름 방학 때,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내가 속해 있던 연세자유교양회 회원들과 독서와 토론으로 보름간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에 당시 주지스님이던 일휴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서는 혜능대사와 신수대사의 이야기와 게송을 들려주셨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라는 혜능대사의 게송이 인상적으로 들렸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절 주위를 걷고 있는데 어둠 저 편에 머리를 산발한 송장 같은 귀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함을 지르며 그 귀신을 쫓았다. 그러나 그 귀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여러 번 기합을 질렀으나 귀신은 없어지지 않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 동안 나름대로 닦은 정신력이 더 이상 효과가 없는지라 나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그 때 옆에 일휴스님이 보였다. 나는 다급한 나머지 스님에게 이 귀신을 없애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휴스님은 “한 물건도 없는데 누구를 없애며 무엇을 쫓아내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며 꿈에서 깨어났다. 모두 자고 있는 새벽이라 사방이 고요한데 바람에 떠는 문풍지 소리가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새벽 예불이 끝나는 대로 일휴스님을 찾아뵙고 간밤의 꿈을 말씀드렸다. 스님은 숙세의 인연이라고 격려해주시며 여기에 머물지 말고 앞으로 불법에 더욱 정진할 것을 권하셨다. 나 또한 육조대사의 한 마디가 그동안 닦은 선도의 수련보다 높은 그 무엇이 있음을 승복하게 되어 스님의 당부를 명심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신선도 수행을 그만두고 불교공부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3학년 때 1년 동안 휴학을 했다. 주지스님의 후의로 불영사에서 몇 달을 묶으며 육조단경 등 경전을 읽었다. 우연히 절을 방문한 어느 노스님의 권유로 시심마 화두를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한 학기 동안은 모교에서는 구본명 교수의 노장철학을 듣고, 동국대학교에서는 불교학과의 강의를 들었다. 상대생이 타 대학의 강의를 들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도강인 셈이다.
그 때 동국대학에서 원시불교를 강의하시던 고 홍정식 교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그리고 불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한보광 스님(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장)의 도움이 컸었다. 보광스님은 백용성 조사의 금강경역해나 각해일륜(覺海日輪), 대승기신론 등 여러 좋은 대승경전이나 조사어록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특히 홍정식 교수님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중학교 때 한 반이었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친구가 있었다. 우연히 그 친구가 자기 아버지가 동국대 홍 교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1 학년 여름방학 때 만리포에 캠핑을 갔다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교지에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처음에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나는 슬프다기보다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저 죽음이 건널 수 없는 어떤 장벽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어린 마음에 죽은 자와 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몰래 고행을 하기도 하고, 최면술 같은 책을 뒤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홍정식 교수님이 강의하는 원시불교론 수업시간 첫 날,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수님을 보자마자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죽은 친구와 얼굴이 똑 같았던 것이다. 그 친구가 말하던 아버지 홍 교수가 바로 이 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을 찾아뵙고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가 없었다. 강의실을 내려오면서, 홍 교수님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혼자 말로 중얼거리셨다.
“우리 만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지금은 그 해답을 알 수 없지만,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홍 교수님 덕에 잡아함, 중아함, 장아함 등 초기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그러나 항상 어떤 답답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동안 공부한 것과 현실의 접점이 없었고, 불교적인 삶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밤에 누우면 나 자신이 마치 바다위에 정처없이 떠밀려 다니는 나무토막 같이 느껴졌다. 정치적 혼란이 심했고 많은 사람이 고통 받던 시대였다. 바깥 회사 일이나 나 개인 일 모두에 혼란과 갈등이 심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1년 반 동안 직장생활을 했을 1977년 가을 무렵, 어느 날 써클 선배가 내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불교에 관해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서로 주장하는 것이 달랐다. 헤어질 때, 그 선배가 대뜸 “너는 그렇게 불교를 잘 알고 있으니 번뇌가 없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나는 참담함을 느꼈다. 곧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 선배가 공부하는 곳을 따라 갔다.
선배가 공부하고 있는 곳은 부산 남천동에 있는 보림선원이었다. 보림선원은 백봉 김기추 선생님께서 계신 곳이었는데, 일반 재가불자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금강경, 유마경, 선문염송 등을 배우고 있었다.
백봉 선생님은 대학에 다닐 때 서울 칠보사에서 이미 법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직접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쨌든 부산에 연고가 없는 나로서는 선원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1년 반 가까이 백봉 선생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아침저녁으로 법문을 하셨다. 배우는 사람들 중에는 나이 많은 보살님들도 꽤 있었다.
지금도 가족에게 저녁상을 차려주고는 선원에 와서 고요히 참선에 잠기던 대혜승 보살님과 대인화 보살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밤이면 선원에 와서 장좌불와를 실천하던 자운 선생님이나 송암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나이 든 보살님들 중에는 한글을 겨우 아는 분도 여럿 있었는데, 언제나 자비롭고 겸손하셨다. 나는 그 때 수행이 지식을 쌓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긍하게 되었다. 내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것은 이 분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들이 대부분 가정과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라 낮에는 단출하게 서운 선생님, 변백은 선생님, 추 거사, 최인영 거사 등 선원 식구 몇 명이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는 선생님께서 갑자기 “김 군, 이 밥 맛이 어디서 나노?” 또는 “허공에 어떻게 방석을 까는가?”라고 물으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읽은 책에는 이런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선생님을 모시고 선원 근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치과에 가는 길이었다. 문득 선생님께서는 하늘을 가리키시며 해와 달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만유인력이 그 답은 아니니 만유인력의 앞 소식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백봉 선생님은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불쑥 화두를 던지시곤 하였다. 그리고 학인들이 답을 할 때 옛 조사들의 말을 흉내 내거나 뜻풀이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다. 틀려도 좋으니 자신의 살림살이를 가지라고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아침저녁 매일 하루 두 차례씩 불타는 듯한 법문을 토해 내셨다. 법문을 하시는데 어쩌면 저렇게 거침없이 자신있게 말씀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나의 선배는 선원에서 ‘대구 박거사’로 불려지고 있었다. 박 선배는 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내가 늘 따르던 써클 선배였다. 지금은 성공회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당시 선배는 대학원에서 소비자심리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로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번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살하려다가, 경봉스님을 친견하고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선배는 경봉 스님을 찾았는데 거기서 백봉 선생님에게 가보라는 말을 듣고 보림선원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몇 달을 머문 후, 박 선배가 보림선원을 떠나게 되었다. 선배가 선생님께 삼배를 올리면서 하직인사를 했다.
“박 군, 이제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가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라는 도리를 알겠제?”
“모르겠습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의 굴림새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설법했는데도 모르겠나?”
“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깨달을 때 까지 오래 사셔야 합니다.”
“자네 때문에서라도 내가 오래 살아야겠다.”
경전에 대한 이해도 있었고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설법을 들은 지 여러 달인데도 선생님께 끝까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선배의 태도가 놀라웠다. 선배는 실제 삶에서 경험하고 납득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대인화 보살님 댁에 간 적이 있었다. 보살님 댁에는 한문으로 적혀있는 순치황제 출가시 족자가 있었다. 한문을 잘 모르시는 대인화 보살님이 그 뜻을 알고 싶어 해서 내가 번역해서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아마 그 소문이 백봉 선생님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며 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방에 들어 가보니, 과연 선생님께서 큰 몽둥이를 들고 앉아 계셨다. 등골이 서늘했다.
"네가 아직 소견도 안 난 사람인데, 어찌 함부로 문자에 분별을 내느냐?"
"선생님, 저는 그저 한문 번역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번역도 소견이 나야 제대로 하는 법이다."
"네가 막위아손 작마우(莫爲兒孫 作馬牛)를 "자식과 손자를 위하여 소 말 노릇 하지 마오"라고 번역했다며?"
"예, 그랬습니다. 한문 문법상 그렇게 번역합니다."
"김 군, 그것은 자식과 손자를 위해 일하다가 다음 생에 소나 말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선생님, 그러나 문법상으로 따지면 제가 한 번역이 맞습니다."
말하다 슬쩍 쳐다보니, 선생님께서 그 몽둥이를 슬슬 쓰다듬고 계시는 게 보였다. 순간 선생님과 눈이 마주 쳤다. 속으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김 군, 네가 소견이 나야 이 뜻을 알게 된다. 나가 보아라."
나는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면 몽둥이도 불사한다는 말씀을 들은 터라, 안 맞고 나오게 된 것이 신통하게 여겨졌다. 꼭 호랑이 굴에서 살아나온 느낌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도반들은 모두 내가 몽둥이로 맞고 나온 걸로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서 나의 문자에 대한 집착을 깨 주시려고 방편으로 그러신 것이리라 짐작한다.
선문염송을 쓰시기 시작한 것도 내가 선원에 있을 때였다. 한 번은 야청 형님이 선문염송이 실려 있는 한글대장경을 선생님께 보여 드렸다. 이 책을 보신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그 때부터 선생님께서는 하시던 능엄경 설법을 그치시고 선문염송에 대해 법문을 하시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선문염송요론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처음 1권이 출판되었을 때, 나는 이 책을 서울에 가지고와 교보문고와 이대 뒷문에 있던 여민서점 등에 소개하러 다녔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무위당 이원세 선생님이 보림선원에 처음 오시던 때의 일이다. 1978년 봄 어느 날로 기억이 난다. 첫 눈에 학문이 깊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선원을 찾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위당 선생님은 1903년 생으로 백봉 선생님 보다 5살이 많으셨다. 선생님은 퇴계 선생의 후손이시며, 당시 영남 유림(儒林)에서 이름이 있던 한학자이자 대구에서는 명의로 알려진 한의사였다.
백봉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뒤, 무위당 선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만물은 모두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행은 음양에서 나왔으며, 음양은 태극(太極)에서 나왔고, 태극은 다시 무극(無極)에서 나왔습니다. 만물은 다 이 무극에서 나왔으니 이 지극한 무극이야말로 만물의 처음(物之初)입니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이 무극이 곧 우주의 근본이며, 불교의 자성(自性)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무위당 선생은 백봉 선생님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백봉 선생님이 대답했다.
“무극(無極)의 앞 소식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말뿐입니다.”
이 한마디 말에 당시 75세의 무위당 선생은 백봉 선생님의 말씀에 승복하고 보림선원에 입주했다.
그 때 무위당 선생은 당신의 방에다 이런 글을 붙이고 집에서 나오셨다고 한다.
“내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겠다.(不見自性 不入此房)
후에 무위당 선생님 댁을 갔을 때 이 글귀가 방문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글을 붙이고 나왔을 때, 무위당 선생의 친구들은 선생의 자제들에게 이제 너희 아버지는 살아서는 못 돌아온다고 농담을 하셨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무위당 선생님과 동창(?)이 되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특히 무위당 선생님은 공맹과 노장을 좋아하셔서 나는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젊어서부터 명의로 알려져 환자들이 많이 찾았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환자수를 줄이면서 여러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젊어서는 금강경 3가해와 육조단경 등을 필사하며 공부하셨다. 자리에 단경과 선문촬요를 가까이 두시며 늘 읽곤 하셨다.
선생님은 나와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아끼느라 담배를 한자리서 피도록 허락하셨다. 손자뻘 되는 나를 아껴주신 그 어른의 도량과 은혜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무위당 선생은 2001년 8월18일 부산에서 98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열반에 임박하여 야청 형과 함께 갔으나 이미 말씀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음은 무위당 선생께서 보림선원에서 공부하신지 몇 해가 지난 후 나에게 편지로 전한 게송이다.
攝心成靜念雖定
實非眞性本淸靜
况見眞性本來定
始覺性非攝定靜
마음 거두어 고요함을 이루매 생각이 비록 가라앉아도
진실로 참 성품의 본래 맑고 고요함은 아니로다.
참 성품이 본래부터 가라앉았음을 멍하니 보고는
비로소 성품이 거두고 가라앉고 고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네.
(필자 역)
무위당 선생이 선원에 입주하신지 서너 달 쯤 지났을 때, 어느 날 무위당 선생님은 나에게 환한 표정으로 이제는 의심이 풀렸다고 말씀하며 백봉 선생님의 방으로 뛰어들어 가셨다. 그리고는 백봉 선생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으셨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 그르려니 했다.
그 후 나는 무위당 선생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하였다. 한참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무위당 선생님이 정색을 하며 “아니 자네도 이 도리를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무위당 선생님은 백봉 선생님 방으로 들어가셨다. 후에 들으니 무위당 선생은 백봉 선생님에게 왜 나에게 인가를 주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인연 탓인지 하루는 백봉 선생님께서 선원에 있던 대중을 모아 놓고 내가 이제는 혼자 공부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허공이 곧 마음이며 삼세제불과 조사가 전하는 마음이 바로 이 허공이라고 하시며 나에게 여운(如雲)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셨다. 이런 계기가 나에게는 흔들림 없는 용기와 믿음을 주었다.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 허공으로 다가 왔다. 경전이나 조사어록이 그렇게 분명하게 읽혀질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일송 선생님께서 반야심경을 친히 써서 나에게 주셨다. 여담이지만, 지금도 그 때 백봉 선생님께서 혼자 중얼거리듯 “내가 조금 있다가 줄려고 했는데,,,,” 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한다. 당시 나로서는 이 모든 것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법명을 받은지 4, 5일이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혼자서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불쑥 들어오셨다. 옆에 앉으시더니 대뜸 보림삼관(寶林三關)이 적혀있는 족자를 가리키며 보림삼관에 나오는 화두를 하나하나 물으셨다.
보림삼관은 백봉 선생님이 제창하신 세 가지 관문이다.
제1관 “가고 옴이 없는 곳에 산자는 무엇이며 죽은 자는 무엇인가”에 대해 선생님께서 스스로 붙이신 게송은 “태산이 눈을 부릅뜨고 오니, 녹수는 귀를 막고 가누나”이다. 선생님은 왜 태산(泰山)이 눈을 부릅뜬다고 하였으며, 왜 하필 녹수(綠水)가 귀를 막고 간다고 하였는지 물으셨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어 보이셨다. 이런 식으로 제2관의 “옛 길에 풀이 스스로 푸른데 왜 바름과 삿됨을 아울러 쓰지 않는가?” 제3관 “왜 오늘 일을 말하면 하필 옛 때 사람을 잊는가?”라고 차례로 물으셨다.
나는 이미 선생님의 법문에 익숙하였기에 배운 대로 답을 하였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공부한 힘을 다해 다시 서너 차례 답을 올렸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모두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셨다. 몇 일전 만해도 해도 대중들 앞에서 혼자 공부할 만 하다고 말씀하고서는 지금 와서 모두 틀렸다고 하니 나는 아찔해지며 어두운 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내가 올린 답은 경전에 나오기도 하거니와 선생님께서 늘 하시던 법문 그대로가 아닌가?
순간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말씀하신 허공이나 성품은 다 뭡니까?”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거 다 말마디다”
나는 선생님의 대답에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 순간 뜻풀이나 이미지로 깨달음을 구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는 나를 보고 선생님께서는 껄껄 웃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전하는 소식은 말 밖에 있으며, 보림삼관과 보림오규가 잘못 전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뜻풀이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모두 그르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외에 선생님과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는 세월에 접는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뜻풀이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상하게 선생님이 무슨 법문을 하실지 미리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법문을 가지고 따지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4, 5년 동안 선생님 근처에 맴돌면서 나는 선생님 곁에 더 오래 있으면 오히려 선생님의 법문이 나에게 분별과 뜻풀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곁을 한 동안 떨어져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서울 정릉 어느 한의사 집에 계실 때 선생님께서 사람을 보내 나를 찾으셨지만 찾아가 뵙지 않았다. 속으로 좀 더 있다가 뵈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때 나로서는 선생님께서 천년만년 사실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괴할 뿐이다.
그로부터 2년 쯤 지났을까, 우연히 최명돈 거사와 통화하면서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믿지 못할 소식과 49재가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종화 거사와 함께 선생님의 49재에 참석하면서 이제는 정말 혼자 서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49재에 있었던 혼란을 보면서 선원의 앞날에 대해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선원에 계시던 분들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사람은 백은(白隱) 변동조 선생님이다. 변 선생님은 1903(1901?)년 생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울산 사람이다. 젊었을 때 당시에는 새로운 공산주의를 접하셨고, 그 영향으로 형평사 운동에 참여하신 분이셨다. 형평사 운동은 1920년대 초에 진주에서 일어났는데, 당시 천대받던 백정의 신분을 해방하고자 하는 계급평등운동이었다. 선생님의 집안에는 첩의 자식이 있었는데, 나이는 제일 많아도 서자라고 하여 늘 똥지게를 지며 험한 일을 했고 제사에 참례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법도가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데 형평운동의 영향을 받은 변 선생님이 이 법도를 깬 것이다. 집안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든 형님을 제사의 맨 앞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위패에 절을 하면서 그 배다른 형님이 변 선생님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변 선생님은 여전히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선생님은 그런 인연으로 크로포트킨이나 포이에르바하와 같은 유물론 책을 읽으며 좌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년회 활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강연을 하러 다니다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고, 공산당(엠엘당이라고 들었다)에 입당하여 활동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는 고난의 세월 속을 살았지만 자부심은 대단하셨다. 1920과 30년대에 걸쳐 경남지역 특히 울산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울산 청년연맹에 관한 기록을 보면 대표적인 인물로 변동조란 이름이 나온다.
변 선생님은 그 당시 수주 변영로나 위당 정인보, 김범부 선생 등과도 친분이 있어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시기도 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제시대의 혼란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던 젊은이들의 초상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해방을 맞았지만, 남한에 반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분들은 결국 초야에 묻힌 삶을 살아야 했다. 선생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상대적 진리이며 오직 백봉 선생님이 말하는 절대성만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이승만 이야기가 나오면 아주 쌍욕을 하셨다. 그 때 이미 80이 가까운 나이였는데 그 숨은 회한과 분노가 대단하였다.
변 선생님은 특히 시창(詩唱)을 잘 하셨다. 백봉 선생님께서 법문을 끝내실 때, 가끔 변 선생님으로 하여금 선시(禪詩)를 읊게 하셨다. 때로 백봉 선생님도 흥이 나면 변 선생님과 함께 선시를 노래하셨다. 백봉 선생님이 지으신 여시송 “여시여시 시여시,,,” 하며 두 분이 함께 읊으시던 그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다.
변 선생님은 서울에 오시면 으례 나를 찾으셨다. 종로 옛 신세계 백화점 옆의 서울설렁탕 집을 좋아 하셨다. 선생님은 후에 교통사고로 한 많은 삶을 마치셨다. 장례식에서 야청 형이 변 선생님과 친했던 나에게 추도사를 읽으라고 하였으나 나는 선생님의 일생을 생각하다 회한의 감정이 일어나 눈물범벅이 되었다. 결국 야청 형에게 부탁을 드렸다. 백봉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변동조의 일생은 이것으로 끝이며 인생은 모두 이름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백봉 선생님께서 별세하신 후, 대원경 보살님은 서울 삼양동 집에 계셨다. 보살님은 바람을 피던 남편과 젊어서 이혼을 하셨고 그 후 방한암 스님 곁에서 불교 공부를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탄허 스님과는 형제 뻘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자식이 없이 사시다가 늦은 나이에 백봉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청담 스님의 소개였다고 말씀한 것을 기억한다.
대원경 보살님은 경봉 스님이나 혜암 스님, 탄허 스님, 청담 스님 등 당대 고승들과 친분이 있었다. 불교정화 당시에 스님들이 서울에서 비밀리에 모일 때, 보살님의 삼양동 집에 모여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별세하신 후, 보살님은 늘 자신을 "갓 떨어진 망건 신세"로 표현하시곤 하였다. 윤종진 거사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삼양동을 방문하면서 적적함을 풀어드리려 노력했다. 보살님은 백봉 선생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시던 연애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제사를 꼭 챙기시곤 하셨다.
1990년 봄이던가 한 번은 아카데미 하우스에 모시고 갔었는데, 그렇게 즐거워하실 수가 없었다. 그 당시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 있다던 추 거사에게 가고 싶어 하셨는데 모시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보살님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 내가 선원에 있을 때 심한 몸살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거의 한 달을 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점점 심해졌다. 그 때 한의원을 하시는 무위당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찾아가 뵈니 이미 약을 지러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흰 종이에 약을 싸주면서 나에게는 신문지에 약을 싸 주셨다. 내가 약값을 내는 손님이 아님을 둘러서 표현하신 것이다. 나는 무위당 선생님의 말없는 배려에 큰 가르침을 얻었다. 그리고 평소에 쌀쌀맞게 보이던 대원경 보살님께서 그 약을 열흘 넘게 다려 주셨다. 변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방에 있으라고 해서 한동안 변 선생님 방에서 약을 먹으며 조리했다. 내가 선원 생활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어른들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살님은 1991년 11월 5일 별세하셨다. 병으로 별세하실 즈음, 보살님은 그동안 살아왔던 세월의 고단함에 때때로 외로움과 슬픔에 잠기시곤 했다. 이따금 보살님을 찾았을 때, 좁은 방에서 홀로 앓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마다 보살님은 언잖은 표정을 지으시며 눈물을 그치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보살님의 생활이 어려워 보림선원 도반들이 함께 수술비와 간병인에 쓸 돈을 모았는데 그 돈이 결국 장례비로 쓰이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몇 일 전, 부산에서 올라온 야청 형님에게 보살님은 할을 하시며 아직 성성하다고 말씀하셨다. 보살님을 보면서 나는 마음공부에 대해 그리고 슬픔과 외로움을 넘어서는 깨달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원경 보살님은 돌아가시면서 삼양동 집을 선학원에 기증했고 지금은 원경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백봉 선생님께서 별세하신 후 오래 동안, 선생님의 존재는 나에게 넘어야 할 산(山)이며 화두였다. 선생님 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던 허공마저 나에게는 뼛속 깊이 알음알이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마음속에서 소소령령한 허공의 이치가 밝아지기도 하다가 때로는 다시 어두워지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이 알음알이가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였으니 직접 뵙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 한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은 내 나이 50이 넘었지만, 의문이 있을 때 마다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들춰보던 버릇이 조금이나마 쉬어진 것은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허공이라는 분별이 망념인 것을 보면서 나는 불교의 자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나와 남이라는 망념이 있으면 인색함과 무관심이 일어난다. 수행이나 깨달음에 높고 낮음, 처음과 끝이라는 분별이 있으면 권위와 오만이 따른다. 이런 상이 있으면 꿈을 꾸거나 술 취한 사람과 같이 현실에 돌아오지 못한다. 자신에게 쌓아나갈 것이 있으면 세상과 현실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불교는 태권도나 일반 학문과 달리 무엇을 쌓아나가는 공부가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불교가 다른 마음공부나 전통적인 도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믿는다. 세상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빈부의 갈등, 좌우이념의 대결, 타인에 대한 인색함과 무관심, 집단사이의 증오, 수행의 교만은 곧 이런 망념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망념을 쉬는 것이 곧 세상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자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유마거사도 번뇌의 바다에 들어야 위없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4/500 여년이 지나면서 기존 승단이 사물을 분석하거나 여러 선정을 성취하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정의 여러 단계를 닦아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세상을 멀리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다. 수행에 대한 권위와 차별이 있는 곳에는 자비가 나오지 않는다. 자기를 위해 닦아 얻어야 할 것이 있을 때에는 남이 어떤 고통 속에 사는지 관심이 일어날 수 없다. 이러한 당대 현실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회복하려는 대승 보살도가 나왔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해진지 500여년 경 불교가 훈고학이나 뜻풀이로 흐를 때 선불교나 나왔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이 의미하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을 가지고 경전을 연구하고 뜻을 풀이하는 학문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은 지식을 쌓는 학문과는 다른 것임을 옛 조사들이 한결 같이 말씀했다.
심리학의 대가인 프로이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분석하고 치료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제자 융이 자신의 학문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정작 자신은 미움의 세월을 보냈다.
파동이나 입자를 통해 물질의 실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에서 불교의 공(空)과 비슷한 말을 하지만 그러나 물리학적 지식에서 자비가 나오지는 않는다. 반대로 불교를 공부하며 공(空)을 물리학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마음이 쉬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공 도리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보시와 자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도가 내세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대승불교가 주장하는 공의 뜻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족이나 사회의 현실과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적지 않게 보아 왔다. 유마거사는 분노와 폭력이 넘치는 이 세상(此多怒害處 -유마경 견아촉불품)에서 중생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현실을 떠난 수행이 어찌 인간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며 사람을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겠는가? 얻을 바가 없는 도리를 뜻으로는 새기면서도 수행의 위 아래를 따지느라 교만과 분노를 안고 있지는 않는가? 이 모든 미망은 나 스스로도 겪었던 일이기에 더욱 부끄러울 뿐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산 조주선사는 불상에 절을 하는 스님에게 “일 있는 것이 일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씀했다. 옛 사람은 부처라는 글자를 말하기만 해도 사흘 동안 양치질을 했다고 한다. 천황도오 선사께서도 "단지 스스로 분별을 쉴 뿐, 달리 성스러운 알음이 없다(但自息念 別無聖解)"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나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현실과 인간관계 속에서 욕망과 분별의 본질을 보아야 공(空) 도리가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소유를 구하거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분별의 본질과 그 현실을 이해할 때 마음이 쉬고 해탈과 자비가 나타난다고 믿는다.
유마거사를 본받아 거사풍을 주창하신 백봉 선생님의 은혜를 갚는 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2005년 7월 5일
첫댓글 대표님이 작은 손길 활동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엿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이 길어 포기할 사람 누군지 알아맞추면 상품있슴다
아니, 쑥스럽게 왜 이런 글을,,,. 이 글은 원래 백봉선생님 추도문집에 올린 글이었는데,,,
진짜길다.................................... 그래두...................포기안하고 읽었다.................. ^^* 여운님..................................._()_
아니 언제 전염병이 돌았나 서른날 하여튼 불양학생은 금세 친구를 물들이는 재능이 있다닌깐 ㅉㅉㅉ
그럼 순서가 바뀐 건가 님이 서른날을 하여튼 끼리끼리 모인다는 것을 아시죠 금세 통하는 것만 봐도,두 사람 모두 불량학생입니당 땅땅땅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신선도라 .... 저하고 생각이 다른 것이 많기도 하네요.
다른 것이 많은 것이 정상이지요? 대표님하고 현덕님하고 외모부터 다르잖아용~
주위에 그런 훌륭한 선생님과 도반들이 있어 부럽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