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온 나라가 들끓는다. 국정이냐 검정이냐 편 가르기와 색깔 논쟁까지 더해져 나라 곳곳에 역사 교과서 이야기가 가득하다. 지난달 14일 연세대 사학과 교수들은 대학 중 처음으로 “한국사 국정교과서 제작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집필 거부 성명을 발표했고, 지난 4일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안을 확정 고시했다. 국정화가 확정된 지금 앞으로 역사 교육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연세대학교 사학과 하일식 교수에게 물었다.
편집부가 독자에게 ...
‘올바른 역사’, 과연 무엇일까요? 폭두 불가지란 말을 보았습니다. 달군 팬에 콩을 볶을 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는 뜻이랍니다. 이번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을 지켜보며 이 또한 ‘폭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국정교과서 집필 반대 성명을 처음 발표한 연세대 사학과의 하일식 교수를 만났습니다.?역사의 해석은 학생과 국민의 것”이라며 아무도 그것을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 뇌리에남습니다. 테마 인터뷰와 함께 ‘올바른 역사’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시지요. 자녀와함께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_김지민 리포터
|
하일식 교수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며 한국역사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신라 역사에 대한 논문 외에 <한국 고대사 산책>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공저),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한국 금석문집성>, 어린이를 위한 <경주 역사 기행> <우리 문화재는 어디 있나요>를 쓰는 등 자라나는 청소년이 올바르고 열린 역사관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국정교과서와 검인정교과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교과서 발행 제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국정제는 정부에서 만든 하나의 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이고, 검정 심의를 통과한 교과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검정제입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 실행되는 방법이지요. 자유롭게 출판해 정부가 교과서로 인정하는 인정제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실행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해방 이후 줄곧 검정제였다가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면서부터 국정화됐고, 사회가 변함에 따라 2003년부터 고교 선택과목 <한국 근현대사>를 시작으로 몇 년 전부터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가 검정제로 발행됐습니다.
학생들이 국정과 검정의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까요? 같은 품목이라도 공장에서 양산하는 공산품과 수제품의 차이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출판사마다 교과서의 질을 의식하며 만드는 검정교과서와 정부에서 만드는 국정교과서는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은 물론, 편향성을 따지면 다양한 검정보다 정부 입김에 맞춘 국정이 훨씬 심하겠지요.
역사 교과서는 국민의 집단 기억을 상징하는데, 여기에 담길 내용을 정부가 선별하고 엮어내서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민주주의 방법이 아닙니다.
한 가지 사건이나 사실을 놓고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야 하고, 이 가운데 자유로운 사고가 싹트고 창의성이 발휘되죠. 그리고 역사 공부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요.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을 강요하듯 주입하는 것은 역사 교육이 아니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학생과 국민 각자가 판단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사회의 역사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에서는 국정화를 하면 수능이 쉬워진다고 합니다. 시험에서 별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 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배우는 검정제 아래서도 수능 시험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습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고 설득력이 없는 얘기지요. 현재 중·고등 단계에서는 역사를 깊고 넓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역사 배우기’와 ‘역사 시험 치르기’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시험에 민감한 학부모와 학생의 감성을 자극하는 말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정해지면서 국정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두드러진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되기 전에도 ‘교과서 공격’은 있었어요. 2003년 검정으로 나온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가 좌편향이라고 집중 공격을 받아 일부 내용이 강제 수정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 교과서 성향이 논란이 되어 결국 ‘한국 근현대사’ 과목을 폐지했어요. 교과서의 성향을 논하며 공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배운 근현대사가 전부이며 진리라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모르던 과거 사실의 나머지 측면이 서술된 교과서를 보고 당황스러워하죠. 그 내용을 부정하면서 편파적이라고 공격하는 겁니다. 이런 움직임이 최근 정부가 들어선 뒤 극심해진 상태입니다. 편파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머지가 모두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는 셈이지요. 학계나 교육계 다수 견해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익만 따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1980년대 이후 근현대사는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된 만큼 내용이 크게 보완됐어요.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만 해도 1970년대 국정교과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짧게 서술했습니다. 민주화가 진행된 199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일부 서술하기 시작했어요. 독재 정권의 어두운 면도 함께 기술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된 결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서술이지요.
국정교과서를 ‘정권 미화용’ 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많은 학자와 교사,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국정화 조치가 강행되니까 어린 학생들도 한 사람의 강한 의지가 개입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청소년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사와 가정사를 구분하라”든가 “효심으로 역사를 바꾸려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청소년 사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리에 나온 청소년이 “우리는 좌편향 교과서를 배우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더군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정부 여당이 국정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과거 박정희 시대의 경제 발전을 부풀려 서술하고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숨기려 하기때문이라는 학생들의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고 봐요.
한데 박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을 구국의 결단으로 여겨놓고 이제 와서 독재라고 비난하는데, 그땐 왜 얘기하지 않았냐는 등 국민의 역사의식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거론하기도 하고요. 그 시절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2013년에는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숱한 오류를 안고 있던 교학사 책을 교육부가 노골적으로 감싸고돌면서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지요.
상고사와 고대사 분량이 늘고 근현대사가 축소되었습니다.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현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하는지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최근에는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한 추세죠. 현재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려면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청소년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근현대사 분량이 는 것도 사실이고요.
근현대사를 축소한다는 것은 청소년이 역사를 배울 권리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결국 국민을 우민화하는 방향이죠. 물론 상고사와 고대사도 중요하지만, 상고사와 고대사 분량이 늘어난다면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이나 국수주의적 이야기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많은 사람이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후유증을 염려합니다. 역사 공부를 통해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학계나 교육계, 양식 있는 시민이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국정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종전의 교과서가 대한민국을 부끄러운 나라로 가르친다든가, 애국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검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학생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거치면서도 이만한 나라가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 의미를 인식한 학생들에게 과거의 역사를 미화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지요.
독일은 20세기 역사 교과서에 자국사를 있는 그대로 알리고 반성을 서술하며 가르치고 있어요. 독일 청년들은 오히려 역사적 책임을 느끼고 미래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고 해요. 나라 사랑이란 자신의 나라가 애착과 자부심을 가질 만큼 ‘합리적이고 살 만한 세상’이 되면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강요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희망이라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유신을 겪었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담임선생님과 함께 간 가정방문에서 선생님이 친구 부모님에게 “투표 날짜가 ○○일이니 꼭 찬성에 찍으세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릅니다. 역사 교과서 집필 거부 성명문에서도 밝혔듯이 일선의 많은 역사 교사들은 비뚤어진 역사 해석을 바로잡아 가르칠 것이며 온·오프라인에서 얼마든지 양질의 대체제가 보급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선 교사 절대다수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어요. 사교육 강사들의 강의를 들어봐도 건강한 역사의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러시아 아동문학가 미하일 일린의 <인간의 역사>를 읽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며, 역사는 인간학이고 사회학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그 마음 그대로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학자와 교육자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자들도 교과서에 버금가는 책을 만들어 청소년이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죠. 화내고 걱정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학생들도 열린 마음으로 독서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객관적이고 건강한 역사관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