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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첫 도읍이 아사달이었고 고조선의 위치가 중국 요하강 서북쪽인 고비 사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중국 문헌에도 남아있다
역사를 왜곡시키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포괄적으로 쓰이는 것은 한자(漢字)의 자형과 뜻을 고쳐 놓는 것이다. 고대의 중국 정사(正史)에서 우리나라와 연관된 인명이나 지명을 제대로 쓴 것은 없다. 유일한 예외는 ‘비류(沸流)’ 정도일 뿐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신라성(新羅城)’이 나오지만 반도에는 ‘신라성’은 없다. 따라서 반도에서 신라성을 찾는 것은 헛수고다. 지금의 복건성 천주(泉州)에는 아직도 신라성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즉, 숙신 肅愼 의 막신라성(莫新羅城)· 고조선 뿌리는 숙신 http://cafe.naver.com/dongramiparkyoung/1374 숙신肅愼 초기의위치
http://blog.naver.com/infobat/140037086577 물( )이 없는(莫) '사막 막(漠)'
몽골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신생국가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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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고분(6세기 추정) 유골의 DNA가 훈족(흉노족)의 것이라는데.
KBS 역사스페셜, 역사추적 프로그램에서 여러차례
신라 김씨의 기원에 대해 다소 충격적인 방송을 내보낸바 있습니다.
4세기 후반 내물마립간 이후 신라의 왕위를 독점하게된 '金'氏의 유래가
바로 흉노의 왕자 김일제에서 비롯됬다는 주장이죠.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사실 흉노 아니 훈족의 고향인 알타이산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일뿐 실상은 산동성에서 흉노족의 제후국을
거느리던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의 공격으로 신라땅으로 도피해와
김세한 or 김성한이라는 성한왕이 진정한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것입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왕족의 묘비에도 자신들의 시조는 성한왕이라
기록되어 있죠.
아무튼, 경주의 김씨 왕릉에서 발굴된 전형적인 흉노(스키타이계열)의
적석목곽분부터, 금을 숭상했던 화려한 금제유물들( 중앙아시아의 그것과
흡사한 양식의 나뭇가지와 사슴뿔과 잎사귀들을 형상화한 화려한 금관),
동복, 천마도(천마도의 재질이 몽골리아지방의 자작나무인것도 밝혀졌죠)
등등 수많은 유물에서 신라 김씨세력이 흉노의 후예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김씨 흉노설의 쐐기를 박는 증거가 바로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에서
발굴된 유골의 DNA가 고구려 백제 마한 등과는 상이한 예맥계가 아닌
엉뚱하게도 서몽골의 흉노족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라 이제는 거의
정설화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신라의 김씨세력이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멀리 북방의 흉노족들이 어떤 루트로 어느정도의 규모로 경상도지방에
유입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물마립간이 김씨왕계를 공고히하는 4세기 후반은 아무리 흉노족이
전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는 시대였다고 하지만
이미 아시아에서는 남쪽의 중국왕조와 선비족 등에 의해 그 세력이 와해되어
서쪽으로 집단이주하거나 그 주변 민족들에 흡수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럼, 흉노족의 세력이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지는 와중에 그 일파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얘기인데 기록상으로 보면, 흉노족이 신라땅에 들어온것은
1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더구나 추암동 고분이 6세기의 것이기에, 이미 1세기를 전후하여 신라땅에
흉노족이 유입된지 500년가량이 지난 시점에서 유골의 유전자가 서몽골지방의
흉노족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수준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유는, 아무리 신라김씨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해도, 진골 성골 제도가 확립된 것은 추암동 고분이 세워지고나서 몇십년 이후인
선덕,진덕여왕 시대이고,
내물마립간이전 김씨가 신라사회에서 왕권을 독점하기 이전에는
박씨 석씨 뿐만 아니라 여러 귀족세력과의 혼인이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흉노족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는 추암동고분의 피장자가 1세기에 신라땅에
이주한 성한왕의 후예로 보기에는 상당히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증왕의 부인 중에 박씨부인이 있었죠.)
더구나, 근친혼의 절정을 보여준 김씨왕족의 무덤은 대부분 경주에 집중되있는데 반해,
추암동고분은 강원도 동해라는 점에서 더더욱 의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1세기 흉노세력의 유입말고 그 이후 2차,3차에 걸쳐 또다른 흉노족의 유입이
경상도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신라처럼 흉노족의 무덤양식과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가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현 김해시, 부산을 중심으로한 금관가야)
수로왕릉에서 발굴된 유적 유물 또한 북방유목민족의 것들이 즐비한것을 볼때
신라김씨와 가야김씨가 경상도에 유입된 시기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신기한것은 3세기 후반~4세기 중반을 무렵으로 이전 가야시대의 문화와는 전혀 이질적인
북방유목민족의 문화가 대량으로 경남지방에 발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인촌 역사스페셜 가야흥망의 블랙박스 철갑옷 편을 보시면 영상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재밌습니다 ㅋㅋ)
결론적으로 저는 경상도지역에 유입된 흉노족의 유입이 김알지, 성한왕, 김수로의 탄생시기
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몇몇 비상한 시기에 2차 내지 3차에 걸쳐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최소 신라 김씨의 경우에는 4세기말부터 6세기초까지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으면서 고구려를 통해 흉노, 선비족 등 적지 않은 수의 북방유목민족이 신라땅에
유입되어 신라 김씨의 왕권을 공고히하고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한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역사적 소견에 의한 것이지만
저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머나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인 신라땅에 북방유목민족이
유입되는 그 통로가 되어준것이 바로 고구려였다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그림과 내용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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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보고서에는 벽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고비(高鼻)'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고비(高鼻)',
'코가 높고 크다'는 것이다.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40명,
그 중 코가 큰 사람은 모두 9명이다.
뭔가에 놀라 넘어진 이는 코가 크다.
도망가는 남자도 맨발에 코가 높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다.
수레를 끄는 여자들도 코가 높다.
마부로 보이는 두 남자들은 한눈에도 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도 코가 높고 큰 편이다.
벽화속에 등장하는 고구려 남자는 눈썹이 가늘고 코가 작은 편이다.
따라서 고비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여인도 코가 큰 여인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코가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역계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머리모양은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늘어트린 상태에서 자기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은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교류 과정에서
북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흘러들었거나
아니면 내륙아시아의 유목 계통 사이에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5세기 중엽 고구려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북연이 멸망하자 주민들이 대거 고구려로 망명하는데
그 행렬이 무려 80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이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436년)
그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전,
갈족이 중국 동북구에 후조를 세웠다.
후조는 이내 전연에게 멸망당하고,
갈족은 북연에 의해 통합된다.
이때 살아남은 갈족은 훗날 북연이 망하자
고구려로 향하는 망명대열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용성에 살았던 민족구성을 보면
고구려인들도 있고, 중국 한족도 있고,
북연을 세운 선비족의 모용씨도 있는데,
그외 잡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잡족에는
후조를 세우는데 활약한 갈족이라든가 여러 계통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연 멸망 이후 흘러든 많은 종족 가운데
서역 계통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그러나 학자들은 서역인이 들어온 가장 큰 이유로 문물교류에 두고 있다.
"불교 전래와 관계해서 얼굴이 거무튀튀한 서역 계통의 승려들이 고구려까지 오는거죠.
먼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벽화가 보여주는 것이죠.
모델이 중국쪽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죠."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은 또 있다.
씨름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메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하다.
맨손으로 힘을 겨루고 있는 이 남자도 서역인이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에 많은 서역인들이 살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속에서 만날 수 있는 외국인들입니다.
한눈에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벽화속에 이 외국인들이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역이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중국 서쪽에 있는 타림분지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일컬어 서역이라고 했는데요,
그후로는 점차 범위가 넓어져서 멀리 인도까지 서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멀리 고구려까지 들어가 살고 있었던 것이죠.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들은 불교와 관련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몰이꾼처럼 허드레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고구려사회에 오래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가 그만큼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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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읽어보시면, 그당시 고구려에 상당한 수의 고비인들이 들어와 상시거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문물교류차원에서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서역인들도 있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고비인들은 고구려사회에서 최하층계급
즉, 한마디로 노비신세로 말먹이꾼을 하거나 몸종신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고구려사회의 최하층민으로 살아가는 고비인들 중에는
과거 북연이 멸망하여 수만명의 북연백성들이 고구려로 망명해올때
갈족이라 불리는 스키타이계통의 민족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이들이 나중에
고구려사회에서 최하층민으로 살아가게 된것이라는 추정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갈족처럼 고구려의 망명객으로 집단이주했다가 최하층민이 되거나
투르크를 지배하고 있던 유연과 고구려가 북위를 상대로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던만큼 유연에서 투르크계 내지 스키타이계 노비들이 고구려에 상당수 팔려왔을 가능성도
있고, 북위가 유연을 여러차례 토벌하면서 붙잡힌 투르크계 내지 스키타이계 노비들이
고구려에 팔려왔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고구려인이나 고구려의 부용세력이던 거란족 등에 의해
잡혀온 고막해와 같은 부족민들일 가능성도 있는등 여러 루트를 통해 적지않은 수의 고비인들이
고구려에 끌려오거나 팔려오거나 자기발로 들어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검증되지 않은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습니다.
검증되지는 않았다고는하나,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개연성 0%의 억측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5,6세기 고구려에 끌려와 노비신세로 전락한 고비인들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상 어느누구보다도 자유를 갈구하며 초원을 힘차게 말달리는 유목민의 피가 끓는 흉노인이라면
자연히 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곳에서 탈출하여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라는 본능어린 욕망을
품게 되지 않을까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처량한 몸종신세를 하는 대부분의 고비인들이 주로 말먹이꾼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그들이 말부리는 재주가 남다르기에 고구려인 상전들도 이를 인정하여 그들에게 주로 말먹이일을 맡긴게 아닌가
합니다.그러나 고대시대에 말먹이꾼은 말그대로 가장 비참하고 천대받는 신세였죠.)
다시 강원도 동해시의 추암동 고분에 피장된 흉노인의 얘기로 돌아와서, 추암동 고분은 6세기 초반의 것입니다.
이시기는 고구려로서는 문자명태왕 시대로 광개토,장수태왕대의 전성기가 그대로 이어져 고구려가 여전히
동아시아 강대국의 위상을 누리고 있었고,
신라에서는 450년대부터 고구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기 시작하여 이제 막 백제와의 결혼동맹,
공수동맹으로 고구려와 군사적인 대결을 펼치던 지증왕 대입니다.
더구나 지증왕 시기는 신라가 과거 부족중심, 샤머니즘적 구습을 탈피하고 고대국가로서 웅비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이기도 하죠.
그당시 신라인의 입장에서는 두렵기 그지없는 북방의 초강대국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나라다운 나라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아마도 외부로부터 새로운 인재에 목이 말라있었을 것이라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427년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전격적인 천도를 결정하면서 평양에는 새로운 궁궐과 귀족들의 주택을
짓고 성곽을 쌓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수십년간 이어지는데 이때 고비인들이 이 사업에 상당수 투입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양으로의 천도로 국내성과 요동성 등지에 흩어져있던 고비인들, 북방유목계통의 하층민들이
자기 주인들을 따라 한반도로 이주해들어오면서 자연히 신라라는 나라의 얘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고..
신라가 자신들과 같은 흉노족 아니 훈족이 임금을 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들중에는 고구려에서의 속박을 벗어나 신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만일, 이들중에 신라로 탈출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실제로 생겨났다면,
고구려의 압박에 대항하여 고대국가로서의 웅비를 서두르고 있던 신라 입장으로서도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같은 계통의 망명자들이다보니 김씨 왕권을 공고히하고,
그들의 우수한 전투력 등의 재능으로 신라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여러방면에서
신라의 국력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구요.
그래서 이와중에 만들어진것이 추암동 고분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ㅎㅎ;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저의 얘기는 검증되지 않은 상상을 기반으로 한
것일 뿐이지만,
공자왈 맹자왈 정적인 사회였던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들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지금으로부터 천오백년전 이땅에는 우리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펼쳐졌다는 사실은 이시대를 더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