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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2013.11.14
구미정. 『두 글자로 신학하기』. 파주: 포이에마, 2013.
박정인 목사.
모임 시작된지 4년 가까이 되었다. 잘해보려고 했던, 목회자들이 공부하고 세상과 소통하려 했는데, 우여곡절 많고 잘 안되더라. 독서모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서울 독서모임은 김기석 목사를 좌장으로, 햇수로는 3년째 되었다. 원래 한 학기만 하기로 했는데, 발목 잡히셔서 꾸준히 잘 지도해주신다. 도서선정 및 강사 선정 등등 말이다. 모이는 사람들은 주로 감리교 젊은 목사들이 주를 이룬다.
김기석 목사.
오는 사람들은 공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열린 사고를 하고, 독서 폭도 넓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구 박사의 책이 새로 나와서 즐겁게 읽었다. 오늘은 학부와 대학원에 수업이 있는 분주한 날인데, 땡땡이치고 일찍 와주셨다.
좋은 여성신학자들이 몇몇 있다. 좋은 글을 쓰는 분들도 있고. 남자 교수들도 더러 있지만, 기독교 대중과 소통하는 데는 어색하다. 자기들의 삶의 현장, 현장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닌가 싶다. 구미정 박사는 삶의 배경도 부잣집 귀염둥이로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산스런 삶을 겪었다. 본인이 경험한 삶이 신학적으로 녹아들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듯하다. 그런 신학자이다. 목회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공부한 신학을 삶의 물음과 버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 여기까지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다. 그러나 수려한 문장과 언어 속에 담아 소통할 수 있는 건 남다른 일이다. 구미정은 그런 측면에서 소중한 자원이다. 깊이 있는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자기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신학자들은 직무유기다. 실력이 부족한 거다. 신학과 삶의 물음을 버무릴 수 있는, 언어적인 구조로 만들어내는 조형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면에서 구미정 박사는 좋은 학자인 동시에 작가다. 구미정 박사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한 글자로 신학하기』 등 비슷한 글의 제목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특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웃음)
구미정 박사가 쓴 책은 좋은 책들이다. 『호모 심비우스』(북코리아, 2009)는 여성 생태주의 측면에서 쓴 책이다. 『성경 속 세상을 바꾼 여인들』(옥당, 2012)은 성서 속 여성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었다. 그는 재미 없으면 못 견디는 것 같다.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꿈꾸는터, 2008)은 숭실대 제자들의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첫 책이더라. 상당히 재미있다. 한 학생에게 그 책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는 메모를 받은 적이 있다. 최근에 『낯선 덕』〔strange virtues〕(버나드 오드니 저. 아카넷, 2012)은 번역상 받은 좋은 책이라더라. 남다른 열정으로 번역, 저술을 해왔다.
목회자 모임에 와달라 하니 한 번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렇게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고 싶어서가 아닌가 싶다.
도대체 왜 이런 책을 썼는지 얘기를 부탁한다.
구미정 박사.
‘언니 아카데미’라는 사조직이 있다. 2001년부터 모였다. 언니들이 당시 50대였다. 지금은 70대 넘으신 권사님도 계시다. 모임 계기는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20살 차이 나는 석사과정 권사님과 함께 대화를 하게 되었다. 자기가 공부할 걸 내가 석사학위로 써서 그랬다더라. 에코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었더라. 자기를 지도해달라 부탁하더라. 그러다가 여태까지 왔다. 영화, 소설 등등 함께 읽고 나누는 모임이었다. 어제 모였는데, 김기석 목사 모임에 나간다니까, 한 분이 어떻게 감리교에 그렇게 좋은 목사님이 있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가장 썩은 데서 가장 아름다운 게 나온다고 했다.(웃음)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무조건 가는 거다. 의리 빼면 시체니까. 성경에도 의리 있는 여자들이 많지 않은가.
다양한 지역에서 와주셔서 감사하다.
『두 글자로 신학하기』(포이에마, 2013)를 쓰게 된 것은 『한 글자로 신학하기』(대한기독교서회, 2007) 때문이다. 2006년에 「기독교사상」에서 생태여성주의에 대해 연재를 부탁받았다. 여성성과 자연이라는 화두로 21세기가 갈텐데, ‘물’의 여성성. 유영모의 “태양을 꺼라”, ‘달’이라는 문명, 그 여성성. 이렇게 한 글자가 막 꿈으로 나타났다. 물, 달, 몸. 등등 말이다. 그러다 ‘한’이 떠오르더라. 글로벌 세대에 ‘한’을 설명하는 건 어려운데, ‘정’을 얘기하는 건 쉽다. ‘정’이라는 글자부터 가보자고 생각했다. 패러독스다. 미운 게 정이다.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밉지만 퍼줘야 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한글자로 신학하기』가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한’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살’을 썼다. 살풀이. 한풀이는 보복정치로 가는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살풀이로 여겼다. 한 다리 씩 나아갔다. 12번째 갔을 때는, ‘신’의 신학, 신발. 우리 말은 상황에 따라 글자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 이런 언어가 어디 있는가. 왜 하필 신발을 벗으라고 했을까. 관련된 신화를 보면서, 신데렐라도 신발 동화 아닌가. 신화가 얘기하는 ‘신’도 있는 거다. 재미있게 그때그때 해나가다가, 마지막에 ‘공’을 찾았다. 일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2001년 숭실대에서 4과목 맡았다. 대전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강의도 많이 하면서 썼다. 애정이 많이 가는 책이다.
난 『두 글자로 신학하기』는 안 쓴다고 하면서 글을 끝냈다. 피를 부르는 소리라서 두 글자로는 쓰기 싫었다. 조용히 있으면 ‘평화’로워 보인다. 돈 많으면 ‘자유’로워 보인다. 돈, 똥을 쓰고 싶지만, 마감을 했다.
두 글자를 안 쓰다가.
『핑크 리더십』(생각의나무, 2010) 연재를 끝내고, 「주간기독교」에서 연재를 또 부탁하더라. 그 때, 희망이라는 화두가 떠올라 그것 먼저 썼다. 3-4월에 김진숙 씨 때부터 희망버스라는 표현이 쓰이더라. 2001년에 성서학당 녹화와 연재, 강의를 동시에 하게 되었다. ‘복수’로 『두 글자로 신학하기』를 시작하려 했다.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단어들 12개를 모아서 나온 책이다.
김기석 목사.
재미있다. 책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 듣는 게 중요하다. 그 절박함 같은 걸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느긋하면 자기가 지어낸다. 시간이 없으면 계시를 받아야 한다. 역시 데드라인은 굉장한 능력자이다. 나는 요즘 집에서 살림을 한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꼼짝을 하지 못해, 3주차 주부이다. 전적으로 다해주어야 한다. 아침 저녁에는 4시간 –4시간30분씩 일을 해야 한다. 새벽에 2시간 일찍 일어난다. 아내를 위해 밥을 준비하기 전 2시간 글을 쓴다. 15매로 양을 정해놓고 말이다. 빨리 쓰는 편이다. 긴장되어 있을 때 뭔가 오는 걸 느낀다. 글을 쓴다는 경험은, 내가 뭘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보면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게 나타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절박함 속에서 나온 거다.
우리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다고 느낄 거다. 같은 사고인데도 경험 속에 녹여낸 게 깊은 감명으로 다가왔을 거다.
놀이, 희망, 가족 등등. 이런 단어들이 저자로서는 부담되는 단어들이다. 내면의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아마 박정인 목사가 쓴다면 다른 글자를 택했을 거다. 이런 책을 읽는 까닭은 자기 글을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읽어오신 분들이 소감을 이야기 해주면 저자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소박하게라도 들려달라.
목사.
잘된 한편의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느낌, 이야기를 이렇게 가벼운 듯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풀어나가고 필력, 문장의 힘에 매료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생각의 가지를 뼏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글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으로 다가와서, 읽으면서 묵직한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김기석.
개인의 고백이 녹아져 있지만, 개인의 아픔을 아픔으로 그대로 표현하면 감상적인 것이 된다. 글을 처음 쓰는 사람들은 대개 감상적이다. 혼자 감동하고 슬퍼한다. 독자는 그러지 못한다. 초보자들의 문제다. 결국 내밀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인데, 공명하게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한 거다. 우리로 하여금 사고하고 나름대로의 신학을 생각하도록 이끌어준다는 거다.
목사.
읽으면서 교만했었다. 이거 신학공부를 하고 현장목회를 하는 나에게 신학서적으로 읽으라는 건가 자문했다. 너무 가볍다, 신학이 이렇게 가벼워도 좋은가, 스스로 교만했다. 늘 고상한 인문학,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편협함에 머물러있었다. 회중과 상관없이 묵직한 말만 늘어놓았었다.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었다. 잘못된 삶의 중심, 무게 축, 이런 게 얼마나 교만했던 건지 반성했다.
목사.
여성만 이렇게 쓸 수 있겠다. 에세이집 같이 말이다. 자기 얘기. 정현경 교수의 이슬람 순례기를 읽다가 덮은 바 있다. 재미가 없었다. 저번에 읽었던 김용규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휴머니스트, 2013)과는 책과는 많이 대조된 듯했다. 저번 것은 논리적이었다. 따라가기 쉬웠다. 이 책은 수필을 읽는 듯한, 일자무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 그런 대화가 좋지 않을까. 여성의 부드러움이 잘 녹아져 있는 듯하다. 가볍게 여성적인 감성으로 쉽게 썼다고 느꼈다.
김기석.
‘가볍게’라는 것은, 무게감이 없다는 가벼움보다는, 뭐랄까, 경쾌하다라고 할까, 보행이 경쾌하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미우-미우라는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에게 반했다. 걸음걸이 때문에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입장에서 얘기해보자면, 이현주 목사가 젊은이를 위한 신학강의를 냈는데, 굳이 나한테 서평을 부탁했었다. 쉬운 얘기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모두가 다 만만히 여길 수 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너도 써보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풀어내기 쉽지 않다. 그렇게 풀어내기 쉽지 않다.
구미정.
내가 학부 철학을 했다. 철학과 다닐 때, 이대. 1980년대 완전 운동파다. 빼앗긴 일터, 스터디를 하자더라. 당시 민중 신학을 모를 때였는데, 의식화라는 이유로 하는 게 실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다른 과는 미팅 얘기를 하더라. 적응이 잘 안되더라. 대통령 장학금 인문대 수석으로 받은 적이 있다. 거기서 학술부장을 했었다. 화장도 안하는 청바지 여자가 전두환 대통령 장학금 받아도 되겠어 라며 초를 쳤었다. 가벼운 건 죄악이라고 여겼었다. 시대, 역사, 철학, 운동 이런 무게들을 선호했다. 운동은 대놓고 못하겠고, 대통령 장학금을 짤리면 대학을 다닐 수가 없고.
당시 예수, 맑스, 노자에게 세 번 세례 받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부드러우면 꿀리는 것 같았다. 노자는 부드러워지기를 요구하더라. 애니어그램을 하다가 확 깨졌다. 천사들은 가볍기 때문에 난다는 거다. 글 쓰면서 많이 깨진 것 같다. 학위 받은 후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글을 쓸 때도 말이다.
논문을 쓰면 반응이 극과 극이다. 기존의 논문의 장르를 깼다고 높은 점수를 주는가 한편, 논문의 어법에 맞지 않다고 낮은 점수를 주더라.
지금도 노력한다. 한 줄 쓰고 읽어본다. 일히는 게 부드러운지. 2시간에 15매, 부럽다. 고도의 집중력이다. 나는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스스로 반성한다. 여전도회 같은 데 특강을 하면, 언어를 쉽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 쉽게 해보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잘 안 된다. 무거워지고 진지해지고 그러더라.
목사.
계속 이렇게 써 달라. 참 좋은 것 같다. 남성들의 필체만 익숙해졌다. 여자가 쓴 글, 여성성이 녹아져 있다. 풀어내서 쉬운 글자로 부드럽게 아름답게 수필처럼 읽혔다. 그렇지만 박사님 신학을 경히 여기는 건 아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부탁드린다.
목사.
재미있게 읽었다. 모상으로 잠시 공황상태를 겪은 후로 조정래 소설책을 하나 읽고, 신학책으로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불편한 단어들 몇 개가 눈에 뜨이더라. 내면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 건 이 책의 장점인 듯하다. 책이 잘 읽힐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경계감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장점이다.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점에서 말이다. 놀이에서 시작해서 바보로 끝나는데, 놀이하듯이 살고 계산적이고 관계가 끊어진 세상에서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 듯하다. 두 글자라는 게 뭔가 해야 살아나는 것 아닌가.
무거운 가치보다는 도마복음 비유가 인상적이었는데, 눈덩이를 지고 가는 여인 말이다. 목회자들 신학자든 신앙으로 살아가는데, 노자와 연관시켜서 말한지 모르겠는데,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손해를 보든지 어쩌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최근에 <디스커넥터>라는 영화를 봤는데, 비슷한 얘기가 있더라. 분주한 틀 속에 살다가 문제가 일어나더라. 숨고르기를 하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기성찰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오늘날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봤다.
전도사.
대중적이고 윤리적인 신앙서적이라 좋았다.
김기석.
장르를 나눈다면, 어느 책에 속해야 할까? 미셀러니miscellany가 가벼운 책이라면, 에세이essay는 무거운 책이다. 『두 글자로 신학하기』는 그 중간 즈음에 있는 글이다. 신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자로서의 글쓰기라기보다는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가깝다.
내용에 대해 예민하게 나눠보고 싶다. 왜 사랑과 위로를 안썼는가.
구미정.
너무 ‘힐링’을 강조해서 싫었다. 한완상 님이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2013)이란 책을 썼다더라. 그가 힐링이 너무 개인화되어 있지 묻더라. 그렇다. 힐링, 구원이 개인화되어 있고, 상품화되어 있다. 사랑 하면 너무 기독교적인 느낌이 올까 했다.
나한테 절실했던 건 이런 거였다. 사회 현실들과 균형을 맞추다가, 인간은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을 하지도 못하는 존재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도 사랑은 아니다. 투자 개념이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라고 하지 않는가. 남녀 간에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데, 외형을 보고 사람에게 올인하지 않는가.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을 구원하는 성서적 의미의 참 사랑, 이 시대의 왜곡된 사랑의 표현들,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논문들에서 사랑 얘기를 조금 썼다. 사랑, 정의, 평화 등등의 단어는 한 책 안의 한 장(chapter)로 다룰 수 없다고 변명해본다.
목사.
여담이지만, 안 쓰길 잘했다. 글은 경쾌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더라.
김기석.
한달 씩 부교역자에게 수요설교를 맡겼었다. 예컨대, 목사는 이사야에 대해 3시간 얘기해달라고 하면 3시간, 10분이면 10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힐링에 대해 에피소드 어디서 얘기한 적 있는데. 어느 CEO 모임에서 기독교인이 품고 살아야 하는 궁극적 질문을 뽑고 거기에 대한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20꼭지를 썼는데, 5꼭지를 더했다. 원고지로 600매 썼다. 3시간 동안 하는데, 재계의 대단한 CEO들이 모였었다. 거기에 힐링을 만든 사람이 있었다. sbs사장이더라. 그동안 만난 재계 사람들 중에서 정말 똑똑하고 멋있었다. 사고도 유연하고 말이다.
힐링의 상업화 개인화, 문제다. 도법 스님이 한 얘기가 있다. 요즘은 자모가 아니라 엄부가 필요한 시대라더라. 내 새끼 다독이는 자애로운 어머니 말고, 아버지처럼 엄격하게 너 이놈, 그렇게 물러가지고, 그렇게 야단치는 사람이 필요하다더라. 여기에 공감한다. 모든 당대는 고통스러운 거다. 고통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 안고 가야 하는데, 이걸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위로와 사랑이라는 거 왜 안썼냐는 질문은, 구 박사의 실존적 상황에서 위로가 필요없어서 아닌가 싶다.
박정인
‘용서’ 장에서 과도하게 <오두막> 많이 인용했다. 혹시 이유가 있는지?
구미정.
김영봉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IVP, 2011)라는 『오두막』(윌리엄 폴 영 저. 세계사, 2009) 리뷰 나오기 전에, 읽으면서 신학화할 필요를 느꼈었다. 영화가 되면 판타지가 되겠다 싶었다. 건강하게 신학화를 하면 재밌겠다 싶은 찰나에 김영봉 목사가 썼더라.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하나님을 뚱뚱한 흑인 아주머니로 나온 거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실리 맥패이그가 정리를 끝냈지만, 여성, 흑인으로 그릴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 굉장히 신선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심판 개념. 그런 것들을 깊이 있게 다루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개인의 고통은 4페이지에서 끝나고, 트라우마를 어떻게 하나님과 씨름하는가가 주목되어 있었다. 『오두막』이 고통을 다루는 방식. 영혼의 오두막, 이런 것들을 깊이 있게 문학과 대화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과하게 다루었다. 김영봉 목사가 쓰지 않았으면 내가 썼었을 거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도 썼지만, 인간의 중력의 법칙. 인간으로 내비 두면 이렇게 밖에 안 되겠구나. 이런 복수. 여전히 종속되어 있는 복수,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이든, 참으로 용서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용서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까지 다루고 싶었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일본군인들 용서해주라고 말 못한다. 역사적 사건까지 다루고 싶었다. 문제는 기독교가 용서를 남발한다는 거다.
향린교회 여전도회 설교를 갔었는데, 조헌정 목사가 축도하는데,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용서하겠습니다. 할수 있을 만큼 하겠습니다. 한계까지 인정해보겠습니다. 그 한계가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런 느낌의 말이었다. 한계까지 우리는 못 밀어붙인다. 자신의 실존의 문제에 함몰된 나머지 말이다. 영화 <밀양>,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5.18이야기, 역사적 맥락의 용서를 기독교가 생략하거나 용서를 남발하는 듯했다. 중력의 법칙은 정의로운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까지 용서에 내포되어야겠다고 전달하고 싶었다.
김기석.
용서의 문제, 참고할 책으로 시몬 비젠탈의 『해바라기』(뜨인돌출판사, 2005)를 권한다. 사실 변선환 박사가 그 책을 나한테 줬었다. 절반쯤 번역을 했었다. 그러다 덮었는데, 책이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절반이 해바라기 이야기이다. 병원 건물에서 유대인들이 머물러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데, 화상 깊은 독일군 한명이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죄책감을 느껴 유대인 한 명을 붙잡는다. 유대인인 당신이 나를 용서해줄 수 있냐고 묻더라. 유대인을 대표해서 용서해준다고 차마 답을 못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조차 용서를 못하는 자신도 괴로웠을 거다. 나머지 반은 심포지움이다. 여러 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글을 썼다.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우리나라 사람 글을 실렸었더라.
목사.
인간이라는 게 다양하다고 느꼈다. 인간다움이라는 게 뭘까 의문이 들었다.
구미정.
“살, 금욕과 사랑 사이”라는 글을 썼었다. 교감이라는 게 없는 거다. 무감각, 무감동, 무절제, 3무 세대다. 한 학생이 독서논술교사를 하는데, 초6학생이 ‘아련’이라는 단어도 모른다더라. 우리말이 수난을 당하겠다 싶다. 우리말에는 어마어마한 결들이 있지 않은가. 이분법적 논리가 너무 심하다.
인간다움? 또래 애들이 아프다는 걸 모른다, 사물에다고 못할 짓을 하는 거다. ‘이야기’가 있어서 옛날에는 물건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요즘 아이들의 불행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에 너무 노출되어 있는 거다. 이거하고 말하면 책임 안 져도 되지 않은가. 교감할 줄 모르고 동감할 줄 모르고. 눈도 안마주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지 않는다.
미국. 초등학생들 데리고 지역 어린이집 가서 둥그렇게 앉아 아가와 교감하는 훈련을 시키더라.(공감학교/roots of empathy) 동물들도 교감하는데, 교감은 생명있는 모든 것들의 능력이어야 하는데, 제인 구달이 <희망의 이유>에 대해 인간성에 대해 절망한 이유가 여기 있겠다 싶었다. 피 흘리고 아파하면, 내가 이겼다는 동물은 생각한다. 인간은 머리를 써서 무자비하게 잔인하게 한다. 인간이 이 시대에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그거다, 교감의 필요성 없는 문명으로 와버렸구나.
스티브 잡스, 인간 관계를 통해 구원받는 것보다 아이디어idea, 이데아가 참인 것이다. 온갖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허위. 요즘 인간에게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 원시문화에서 시작되었던 것, 작은 것에 탄복하는 능력, 호기심 갖고 하는 것. 과도한 소비문명, 과학기술 문명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기본적으로 했던 작은 것에 감동하고 호기심 느끼는 것 말이다.
김기석.
숫자로 추상화해버리는 거다, 매스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비극인데,
목사.
평면화 시킨다.
폭탄은 터지지만, 폭탄의 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목사.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있는가?
김기석.
목사님께 달렸다.
구미정.
콜링 캠프, 미자립교회 연합 캠프에서 나를 부른 적이 있다. 중고생들 앞에서 암담한 시간이었다.
21세기 금식은 스마트폰 텔레비전 잠시 안 보는 것. 디지털화 된 경험들을 끊는 거다. 호주에서 태어난 한국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런닝맨이더라. 어느 나라나 못 노는 애들이 노는 것 보고 대리만족 느끼는 것 아닌가. 간접체험하지 말고 니들끼리 놀아보라, 놀이산업의 소비자로 놀지 말고. 잘 논다는 것은, 게임하듯 성적과 상관없이 공부 열심히 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자 어떤 애들은 알아듣더라. 콜링 캠프에 참석한 한 학생이 찾아오기도 했더라. 한 두 명은 듣는 거다.
이 시대의 아이들이 회복하고 교감하려면 캔들데이 같은 거 필요하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tv프로그램이 좋더라. 세상 엔터테인먼트도 그렇게 하는데, 교회가 너무 기독교인 만드는 것을 쉽게 만들더라. <기독인간의 조건>이 뭘까. 뻔하다. 폭력 장난감 가져오면 평화 장난감을 바꿔주어야 한다. 달란트 시장 말고, 손 많이 사용하고 시간 더디지만 패스트푸드 주지 말고, 조금씩 생명문화로 바꿔나가는 방법이 없을까. 못한다고 손 놓지 말자. 가정과 공교육은 붕괴되지 않았는가. 아이들의 영적인 부분을 살펴야 한다. 얼을 뽑아가는 세상에서 얼을 챙겨줘야 한다. 교회가 그러려니 힘들다. 그래서 초토화되었다. 대안이 없어서. 교회가 힘들더라도 생명문화, 제철음식 고민하고, 아이들 손 많이 사용하게 하고. 금식으로 영성훈련 시켜주면 어떨까 싶다. 마음 공부 말이다.
김기석.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2009)의 저자 조너던 색스(Jonathan Sacks), 영연방 최고 랍비의 번역 안 된 책들 가운데, 창세기에 대한 책을 읽는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아담이 쓸쓸한 걸 보고 왜 동물들 데려왔냐고 묻으면, 이름 붙이려 했다고 답한다더라. 하나님은 그런 적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고 함께 데려왔다고 기뻐하자고 했다. 경탄하고 기뻐할 줄 아는데 있다고 말이다. 이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교회 앞 작은 텃밭이 있는데. 순우리말로 살피꽃밭이다. 때가 되면 꽃들이 피어나고 그러는데, 마당에 있다가 유치부 아이 하나를 불러서 이 꽃 이름을 몰라서 가르쳐줬다. 가만히 보니까 그 애가 전파를 하더라. 전도자다. 세 주 쯤 지나니까 아이들이 다 알더라. 아이들 다 모아서 교육하면 쓸모없다. 그런 거라 생각한다. 꽃 앞에 멈추어 설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사물 앞에 멈추어 설 수 있는 능력.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 번역되었다. 이반 일리치와 함께 새로운 문명 운동을 일으켰다. 완전히 생태적 삶을 지향했던 사람이다.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크게 와닿은 게 있다. 세 가지 소외를 말하더라 첫 번째는 몸으로부터 소외, 둘째는 장소로부터의 소외. 셋째, 시로부터의 소외.
첫째, 몸으로부터 소외. 몸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요즘 버튼 누르면 다 된다. 인위적 행위로 다 해결되기에 몸의 능력은 완전히 없다. 내비게이션으로 길치가 많아지지 않았는가. 의도적으로 문명으로부터 해독되어야 한다.
둘째, 장소부터의 소외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골목이 있었던 가난한 동네에서는 이웃 간에 먹을 것도 나누고 장소를 아름답게 만들고픈 생각이 공존했다. 눈이 와도 안쓸고, 꽃밭정리 물주는 것,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장소부터 소외되기에 안식이 없다. 장소 관련성을 갖기 시작해야 한다. 중요한 일이다.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데, 요즘 마을운동으로 나타난다.
셋째, 시로부터의 소외. 이것 뜻밖의 얘기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적 상황b 속에서 살지 않는다. 산문적이다. 시라고 하는 것은 운문이다. 많이 생략된다. 그 속에 깊은 울림을 만든다. 일상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바꾼다. 시라고 하는 건, 일상적 언어를 재배치해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창조해낸다. 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건, 일상을 재배치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거다. 자기 삶에 재배치하는 노력, 산문체세상을 운문체 세상으로 바꾸는 것, 목사님께 달렸어요, 이 말은 누군가가 세상을 바꾸는 거라 생각할 수 없다.
7-90년대 치열하게 운동하며 살았다. 진보진영들 계속 비판한다. 비판에 대한 피곤함이 있다. 세상이 바뀌면 덜 피곤하겠는데, 안 바뀐다. 비판은 해야 하지만, 스스로가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작지만. 위대한 정신사적 사건은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나온다. 위대한 작가들, 그 인간들이 딴 짓하는 것 같지만, 그들 때문에 사는 거다. 일본 교토학파. 철학자들의 공해철학을 얘기하는데, 패전의 상처 속에 의미없는 말인듯한데, 젊은이들이 회복된다. 바보 짓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남 안 하는 짓도 좀 하고 말이다. 우리가 너무 무거워졌다. “노는 바보”가 필요하다.
구미정.
내가 잘 못 논다.
김기석.
이전에 모셨지만, 안인희 님. 쉴러의 『미학편지』(휴먼아트, 2012), 미적 교육. 거기서 두 가지다. 인간을 아름답다는 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놀 줄 아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못하는 게 이 두 가지다. 인간적 매력이 없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비판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독하기 위해 놀 줄도 알아야 한다.
구미정.
『아웅 산 수 지 희망을 살다』(북코리아, 2011)를 번역한 그 때, WCC로 곤혹을 치른 적 있다. 싸울 대상이 없더라.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겸임교수 임기 끝나는데, 더 이상 주지 말자고 하더라. 그분이 은퇴하기 전까지 제자들 보이콧을 시키니 힘들었다. 미움, 용서 그 때 얘기다. 어른과 싸울 수 있겠는가. 수 지 여사 글 중에, 집안에만 수년을 갇히더라. 남편 죽는데 가지도 못한다. 영양실조도 걸린다. 그를 지탱한 것은 놀이정신이다. 가택연금이 풀린 날, 삼촌이 우리집 놀려오는데 15년 걸리냐 물었다. 실존적 고통을 객관화, 외화시키는 능력, 용서와 자비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었다.
경탄하는 목회. 그렇게 하면 기형도 시인의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우리 동네 목사님’처럼 회복해야 하는 아름다움, 총체적임, 인간, 교회가 잘 되었으면 한다. 도로테 죌레의 『사랑과 노동』(한국신학연구소, 1987)에서 “철학은 호기심에서 신학은 경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런 게 너무 없는 것 같다.
교회가 질문도 못하게 한다. 영성과 지성, 철학과 인문학이 함께 가도록 사고훈련이 교회에서 되었으면 하는데, 원천봉쇄당해서, 지나친 폭력. 어른들이 만들 문명의 피해자를 만들었다. 아이들를 구원할 길도 교회교육이 되어야 할 거다. 교회교육 교재들은 이런 성찰이 없다. 아이들에게 마음공부 정말 필요한 것 같다.
언제 원불교가 소년원 출신 아이들을 마음공부 시키더라. 교장 선생님이 자기 일기장을 읽어주는 게 그거더라. 지식교육, 그런 게 뭐 중요한가 생각하게 되더라.
목사.
내 자식이 곧 그 무서운 중2가 되는데, 징계도 받았는데, 유렵을 데려가기도 했다. 가보니, 유산이 잘 이어져 와서 한국과 대조되더라. 감탄했다. 그러나 아이는 감동받지 못하고 감탄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감동과 감탄이, “이야”가 없더라. 급조, 화려함 속에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김기석.
신학적 사유의 방식에 힌트를 주고, 삶과 신학을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주고, 귀한 강의 해준 구미정 박사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