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처럼(통일문학작품)
정 하영
어제밤에는 작년 12월에 돌아가셨던 장인어른이 꿈에 보였다.
여전히 아이처럼 빙그레 웃고 계셨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그저 웃기만 하실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정중하게 말씀 드렸지만, 여기가 더 편안하다는 듯 끝내 방문을 넘지 않으셨다.
하늘의 법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으셨는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지키려고 애쓰셨나보다.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보시다가 손을 흔드시고는 뒤돌아 사라지셨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다음날 아침에 장모님과 아내에게 어제밤 꿈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장모님이 그러신다.
"평소 사위가 잘 해드린게 고마워서 그런가보네. 어디 가자고 하면 잘 따라 나섰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은 아닐지..."
내가 말을 흐리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당신이 평소 북한땅에 살고 있는 친척을 보러 같이 가보자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랬다. 장인어른은 고향은 함경북도였다.
고향에 친척을 두고 따로 피난 온 이후로 늘 가슴속에 한이 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적십자사를 통해 몇 번이나 북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수소문해 알아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83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사진 한 장 없는 친척들의 얼굴과 이름을 부르시곤 했었다.
장인어른은 평소 기골이 장대하시고 성격도 호탕하셨다.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 받고 자란 소년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으셨고 황폐해진 집과 이웃을 떠나 남으로 피난 올 수 밖에 없으셨다.
그런데 그 혼란의 와중에 무슨 생각이셨는지, 조상님들이 묻힌 묘를 파서 뼈와 시신을 수습해 지게에 지고 피난을 떠나온 것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자기 몸 하나 지키기 힘든 상황임에도 말이다.
장인어른은 평소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내 피와 살을 준 분들인데 나 혼자만 살자고 다 두고 갈 수가 없었어, 죽었어도 내 가족이셨잖아 그 분들이..."
그 뼈와 시신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지게에 지고, 총과 대포를 피해 야밤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결국 청주에 도착하셨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시집온 고모뻘이 되는 친척들에게 알리고 청주시 미온면 종중산에 시신을 이장하셨다고 한다.
나 역시 장인어른 살아 생전에 자주 그곳에 같이 가서 벌초도 하고 묘지에 술도 부어드렸던 기억이 난다.
매년 6월이 되면 북한과 가까운 고성을 자주 갔었다.
망향의 동산에서 북한의 어딘가에 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친척들을 그리다가 그렇게 돌아가곤 했었다.
돌아오다가 항상 들리는 곳이 있었는데, 속초 청호동 아바이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북한식 냉면과 오징어 순대에 소주를 드시면서 향수와 아픔과 시름을 달래곤 하셨었다.
그 생각이 떠올라 오랫만에 장모님과 처가 식구들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로 갔었다.
속초 청호동 아바이 마을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청초호 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분단 이후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현재는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로 바다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음식점과 상점들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탐욕스런 갈매기들은 호시탐탐 관광객들이 주는 과자를 먹기위해 분주하게 날아다닐 뿐이었다.
이곳 아마이 마을에는 갯배라는 명물이 있다.
갯배는 이곳 청호동을 속초시내와 연결하는 유일한 해상교통수단이다.
양쪽의 줄을 당겨 건너도록 되어 있는 갯배는 현재 단돈 150원에 재미와 추억을 사고 있었다.
6.25를 겪지 못한 우리 세대와 그 다음 세대들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기에 찾아가는 관광지가 되었고,
평양식 냉면과 아바이 순대, 가자미 식혜같은 별미를 먹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변한다고 한다.
강산도 10년에 한번씩 변하지만 요즘은 1년에 한번씩, 아니 한달에 한번씩 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59년이 지난 지금도,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시는 분들이 점점 많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남과 북은 원래 하나였었다는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자 살 부비며 살아왔었던 한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념싸움과 정치적 대립속에 서로가 서로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었다.
때론 피를 보고 슬퍼할 때도 많았었고, 주변 강대국의 힘에 억지로 끌려다닐 때도 많았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갈 시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
정말로 6.25세대가 다 죽고 나면, 증오와 복수의 이념과 정치적 논리가 계속 이어지다 보면 통일은 요원할 지 모른다.
죽어서도 잊지못할 내 가족, 내 민족을 하늘에 가서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지 않기를 빌 뿐이다.
나는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본받아 그대로 하자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맞는 방법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논리와 이념의 논리를 부수고 이렇게 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주변 상황에 맞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의 메마른 가슴에 물꼬가 트여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뿐이다.
그런 개인들의 바램들이 커져서 견고했던 둑을 트고 제 길을 찾듯, 더 넓은 곳을 향해 같이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장인어른이 언젠가 내게 들려주었던 말씀이 있다.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덮어버려도 언젠가는 그 막힌 곳을 뚫고 제 갈 길로 흐르는 물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부딪히고 깨지며 헛돌면서도 다 같은 곳을 향해 합쳐서 흘러가는 겨. 그렇게 살아가는 거여”
약력
강원문인협회 회원
첫댓글 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