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민족혼을 칼끝에 담고·3
1996년 8월 29일 목요일 오전
아침 6시 기상.
이제는 가을인가 싶을 정도로 새벽바람이 서늘했다.
새벽 구보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SBS-TV 취재팀이 떠나고, 박철묵 이사와 금영걸 이사도 서울로 올라갔다. 유격장에 다시 남은 민간인은 대표선수 10명과 취재자인 나였다.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중대장실에 들어가 대표선수들의 하루 훈련계획표를 살펴보았다.
08:00―10:00 구보 및 PT체조
10:00―12:00 외줄, 두줄, 세줄타기
12:00―13:00 중식
13:00―17:00 PT 체조 및 산악행군
17:00―18:00 석식
21:00―06:00 취침
내용은 간단했으나, 그 간단함 속에 담겨져 있는 훈련내용은 보통이 아니리라.
여기 찾아올 때의 '나도 함께 훈련을 받아야지.' 하는 결심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그냥 취재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첫번째 훈련으로 구보가 실시되었다. 구보 길이는 10Km. 이미 체력 단련이 되어 있는 대표선수들로서는 몸을 푸는 정도이다.
그러나 유격장의 구보는 단순히 뛰는 것이 아니다. 중간중간에 오리걸음을 시키는가 하면, 거의 쉬임없이 군가를 부르게 한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가서는 연병장까지 선착순을 시키는 것이다. 정신력을 배양시키려는 의도이다.
구보에 앞서 김정국 선수는 발목 통증으로, 김경남 선수는 무릎 통증으로 출발에서 제외되고, 나머지 8명의 대표선수가 교관 박상우 중사 및 조교들과 함께 연병장을 한바퀴 돌아 유격장 밖으로 구보훈련을 떠났다. 그 사이 김경남 선수, 김정국 선수와 그간의 훈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이틀간은 왜 그리도 지루하고 힘든지……마치 두달여를 보낸 것 같았습니다.
―이따가 보시면 알겠지만 PT 체조라는 것이 검도로 단련된 근육과는 전혀 달라서 무척 고통스러웠지요. 아마 몸 성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걸요.
―양진석이 같은 경우는 유격훈련을 받으라면 두 번 다시 국가대표선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래도 강호훈 형은 대단합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범을 보이며 솔선수범하고 있지요. 아마 호훈이 형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모두들 훈련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연병장 저편 정문에 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구보훈련 중 마지막을 선착순 시킨 모양이었다.
나타난 그림자는 훈련기간 내내 솔선수범하고 후배들을 이끌었다는, 철모에 1번 번호를 단 강호훈 선수였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김경남 선수와 김정국 선수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두번째 들어온 선수는 6번을 단 박상섭 선수,이어 홍성수, 김황선, 허웅, 양진석, 박용천 선수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배살이 두둑한 정관묵 선수가 골인함으로써 일단 구보훈련을 끝났다.
냉수 한모금으로 목을 축인 선수들은 엉덩이를 땅에 붙일 틈도 없이 박상우 교관의 "집합!"소리에 몸을 곧추세워야 했다.
―하여튼 저 사람의 몸속에는 분명히 차가운 피가 돌거야.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PT 체조를 실시하겠습니다. 기합은 우렁차게, 동작은 크게 실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된 PT 체조는 무려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선수들이 행하는 PT 체조의 종류는 모두 15가지. 팔벌려 뛰기서부터 누워 온몸 뒤틀기 등 갖가지 동작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두번째 종목을 할 때부터 선수들의 얼굴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상으로 고통을 받는 박용천 선수와 김경남 선수는 이를 악다물었고, 모범교육생으로 교관과 조교들 사이에까지 칭찬이 자자한 강호훈 선수 역시 다섯 번째 종목을 시행할 때는 틈틈이 발목을 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양진석 선수는 입소 전부터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PT 체조때마다 애를 먹었으며, 역시 고질적인 허리병으로 괴로움을 받아온 허웅 선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에 쓰러져 한참동안 몸을 뒤틀기도 하였다. 몸이 뚱뚱한 편인 정관묵 선수는 다리에 쥐가 나 역시 한참을 땅바닥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PT 체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관을 다소 긴장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홍성수 선수가 혈압이 오르는 듯 머리를 감싸쥔 것이다. 다행히 별 이상없이 가라앉아 모두 안심하긴 하였으나 홍성수 선수는 무척이나 괴로운 듯했다.
PT 체조를 끝내고 약 2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대표선수들은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이번에는 줄타기 교육장인 계곡 위편으로 이동하였다. 줄로 이어진 골짜기의 길이는 대략 60m, 높이는 50여m. 아래서 올려다보았을 때는 별로 높은 줄을 몰랐는데,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벼랑이었다.
눈앞이 아찔한 것이 절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 계곡 벼랑을 줄 하나에 의지한 채 건너야 하는 것이 대표선수들이 받아야 할 훈련 내용.
첫번째 종목은 세줄다리타기. 세줄다리를 건너면서 붙여야 할 구령은 "담력배양"이다. 언뜻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다리 입구에 서기만 해도 온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아찔하다.
1번 교육생 강호훈 선수를 선두로 대표선수들은 한명한명 세줄다리를 타고 계곡 저편으로 건너갔다.
이 훈련 중 가장 애를 먹은 선수는 고공공포증이 있는 듯한 정관묵 선수. 다리 한가운데 서서 꼼짝도 않고 "살려달라"고만 외친다. 이미 계곡을 건너간 선수들은 방금전의 공포를 잊어버린 듯 모처럼만에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두번째로는 두줄다리타기. 건너편에서 이쪽편으로 두 줄로 된 다리를 타고 건너오는 것이다. 세줄다리타기보다 더 어려운 듯 모두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적해병"이라는 구령을 외쳐가며 건너온 대표선수들의 얼굴은 땅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4번 교육생 정관묵 선수가 무사히 건너오자 훈련장에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일었다. 교관도 조교들도 함께 박수를 친다.
세번째로 외줄다리타기. 줄타기 중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역시 1번 교육생 강호훈 선수를 필두로 외줄다리타기가 시작되었다. 두번째로 9번 교육생 양진석 선수가 출발했고, 이어 7번 교육생 홍성수 선수, 10번 교육생 김황선 선수가 차례로 외줄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중 강호훈 선수만이 제대로 된 자세로 도하에 성공했고, 나머지 3명의 선수는 중간에 뒤집어져 개구리처럼 줄 한가운데 매달려 크게 고생을 하였다.
그 사이 아직 출발하지 않은 선수들이 잘 됐다는 듯 어디론가 뿔뿔이 달아나 교관과 조교들의 애를 먹이기도 하였다. 달아난 선수들을 찾아내 기합을 주려 할 때쯤 교육시간이 끝나는 바람에 호랑이로 소문난 박상우 교관도 어쩔 수 없다는 너털웃음으로 오전 훈련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