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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선의 공적이 많은 문(文)씨 가문
원리강론에 의하면, 섭리의 중심인물은 선민 중에서도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한국에는 대표적 성씨가 274개나 된다. 이 274개의 성씨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
재림주를 문(文)씨 가문 가운데 보내셨을까?
아버님께서는 문(文)씨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며,35) 문(文)씨 가문의 공적과
혈통을 자랑하시기도 한다. 아버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일반 사람들하고는 조상이 좀
다르며 종자가 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36) 그것은 하늘이 준비한 혈통 가운데서 아버님께서
태어나셨다고 믿고 계시기 때문이다.37)
그러면 문(文)씨의 선조들은 어떠한 선의 공적이 있으며, 무엇이 다르기 때문에 아버님은
그렇게 문(文)씨를 자랑하시는가? 어떠한 공적 때문에 하나님은 문(文)씨 가운데 재림
메시아를 부르셨는가?
문(文)씨의 선조38) 중에서 시조(始祖), 대표적인 중시조(中始祖),
그리고 최근의 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A. 시조(始祖)인 문다성공(文多省公)
1. 남평문씨 시조(始祖)의 탄생설화
남평 문씨의 사적기에 의하면 시조(始祖)는 서기 472년 신라 자비왕 15년에 백제 땅이었던
남평현,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봉림리의 장자지 호반에 있는 10미터 높이의 암석
위에 있는 석함(石函)에서 탄생했다. 시조(始祖)의 이름은 ‘다성(多省)’이며, 자는 명원(明遠)이고
호는 삼광(三光)선생이라 불리웠으며, 익호는 무성공(武星公)이시다.39)
공의 탄생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설화40)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공은 사생아와 같은 입장으로 태어났다. 부모가 누구인지 전해져 오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탄생의 기원은 하늘과 관련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빙혼>
아예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더욱 더 약발이 먹히지 않을까? 아니면 알로 태어났거나...
둘째로, 문(文)씨라고 하는 성(性)은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왕에 의해서 양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양아로서 왕의 성(性)을 따지 아니하고
문(文)씨라는 성(性)을 받았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셋째로, 모세처럼 공은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궁중에서 양육을 받은 아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5세때에 이미 국가의 정치나 경제에 관하여 왕과 문답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많이 생각한다’고 하여 ‘다성(多省)이라고 하고 ’매우 명민하고 먼 데
것까지 밝히 안다‘고 하여 자를 ’명원(明遠 )이라고 왕이 정해 주셨다. 그 후 학문을 배운지
3년 만에 명사, 예학, 기타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였다.
왕은 이를 매우 기뻐하여 그의 여동생의 딸을 택하여 결혼까지 시켜 주었다.41)
<빙혼>
예수는 12살이 되어서야 랍비들과 토론을 하였다고 하는데 문씨 조상은 예수보다 더 총밍.
넷째로, 그의 이름과 호와 자를 통해서 볼 때, 시조(始祖)가 원인이라면 아버님은 그 열매라고
말할 수도 있다.42) 공(公)의 자가 ‘명원(明遠)’인데 아버님은 재림주로서 먼 일을 내다보시고
역사하신다. 그리고 시조(始祖)의 호가 ‘삼광(三光)’으로서 그분의 인격이 ‘해와 달과 별과 같이
빛난다’는 의미를 갖는데, 아버님의 존함은 ‘선명(鮮明)’으로서 역시 바다와 육지, 그리고 해와
달을 의미한다.
2. 남평 설화의 의미
남평 설화의 의미는 시조(始祖)의 탄생 지역과 그 분의 업적을 통하여 이해 할 수 있다.
먼저, 그 분의 탄생지인 장자지(長者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조선 후기에 유명한 풍수학자인 이서구(1754-1825)는 장자지(長者池)가 물이 맑아지는 날에는
문(文)씨들이 황하독류(黃河獨流)하듯 할 것이라고 했다.43) 그런데 최근에 와서 흐렸던
장자지(長者池)의 물이 맑아 졌으며 지석강으로 흘러넘치고 있다고 한다.44)
이 예언이 사실이라면 문(文)씨들의 운세가 활짝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시조(始祖)의 업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시조(始祖) 무성공은 그의 인생에서 병사(兵事), 정치(政治), 예학(禮學), 도의(道義), 육영(育英)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45) 이 중에서 중요한 두 가지만을 생각해 보자.
하나는 화랑도를 만드셨다는 것이다.46)
69세때 대국사(大國事)로 임명된 무성공은 화랑도를 창건하여 젊은 남자들 중에서 용모 단정한
자들을 선발하여 인격도야와 애국정신의 함양에 주력하였다. 이 화랑도가 기반이 되어 신라는
문무왕 시대에 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AD. 661-680)
<빙혼 : 한국 일반적인 역사 개요>
* 화랑의 성립과 활동
(1) 화랑도는 청소년들을 모아 집단적으로 훈련하는 원시 사회의 풍습이 발전한 것으로,
한명의 화랑을 우두머리로 하고 수백 명의 낭도가 함께 모여 자연을 배경으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고 도를 닦던 신라 시대 청소년 수련 단체이다.
(2) 화랑도의 기원 : 처음에는 원화 제도에서 시작되었는데, 남모와 준정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원화로 삼아 그녀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러나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술을 마시게 한 후 강물에 밀어 죽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준정도 처형당해 곧 모임은 흩어지게 되었다. 원화 제도가 실패하자 귀족
출신으로 잘생긴 남자를 뽑아 화랑으로 삼아 받들게 하니 많은 무리가 모였다.
(3) 화랑도의 조직 : 진흥왕 37년 화랑도가 국가 조직으로 양성되기 시작하면서 조직의
지도자를 국선, 화랑, 화주, 풍월주라고 불렀으나, 화랑이 일반적인 이름이었다.
화랑 밑에 는 문호가 있었고 그들은 낭도를 거느렸다.
왜 무성공의 이름은 안 나오는 것일까?
중화사상에 물이 들은 김부식 선비가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통일교를 몰랐었나보다.
아니면 일연 스님이 일부러 장래에 통일교의 시조가 될 분이라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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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공생 공영 공의주의를 몸소 실천하신 선구자라는 사실이다. 공(公)은 그의 많은
업적으로 인해 91세 때 좋은 옥토와 3천명의 전쟁 포로를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그런데
공(公)은 그 많은 좋은 옥토를 후손에게 상속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것을
다 분배해 주었다. 또한, 하사받은 적병포로 약 3천명을 아무런 조건없이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47)
<빙혼>
국가적 역사인가? 족보의 역사인가?
신라사에 그런 이야기 하나도 없는데...김씨도 아닌 문씨는 안 나오던데,,,
참말로 희한하네...역사연구소 연구원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혹시 역사책이 찢어져 사료가 없어졌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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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시조(始祖) 무성공은 사리사욕을 채우지 아니하고 공생 공영 공의주의에 입각한
인도정의를 선도하셨다. 그것은 포로나 종들이 하나의 재산이나 물건으로 간주되었던 당시의
관례에 비하면 혁명적 처사였다. 이러한 공(公)의 공적에 감화되어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호를
삼광(三光)선생이라고 칭했다.48)
<빙혼>
오광선생은 알아도 삼광선생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고
그 당시에는 <선생>이라는 호칭도 없엇을 터인데...참말로 뻥이 좀 쎈데.
* 오광선생 : 일광, 삼광, 팔광, 똥광, 비광
* 선생 : 위키백과
스승 ; 불교 용어로서의 스승에 대해서는 스승(불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선생(先生)이란 학문적으로나 덕망이 높은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치의 사람,
학예가 뛰어난 사람, 각 관청과 관아(官衙)의 전임자를 가리키던 일종의 존칭 또는 경칭으로
고대사회부터 근대사회의 호칭이었다.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 등에서 활용되었다.
선생이라는 단어는 보통 연장자에게 쓰였으나 중국은 당나라 이후, 한국은 성리학이 전파된
고려시대 이후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더라도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하여 호(號)와 시호를 사용하였다.
교육자에 대해서도 선생이라는 호칭이 있었으나 그밖에 강사, 훈장 등으로도 불렀으며 근대
이후로는 교사로 부른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인에게도 쓰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사, 대학교의 교수, 학원의 강사 등에게도 폭넓게 쓰인다. 근현대에 와서는 전임자에게는
선생이라 하지 않고 선임 또는 전임자라 부른다.
정치인 중에도 존경할 만한 정치인 중 학위나 장군 등의 지위가 없는 일반 정치인에게
선생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이 경우 이름이나 호 뒤에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사용하였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먼저 관직을 역임한 사람에게도 선생이라 이름 붙였다.
선생안(先生案)이라 하여 관청이나 관아의 직책을 역임한 역대 부서장과 부서의 두 번째,
세 번째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임기를 적은 책도 있었다.
그에 따라 전임자에게도 선생이라는 존칭을 붙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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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충숙공(忠肅公) 문극겸 선생과 중시조(中始祖)이신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선생
1. 유구설화와 그 의미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에는 남평문씨의 17세손(世孫)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1022-1189)의
묘소와 고간원이 있다. 그는 고려의 현명하신 제상으로서 간충신(諫忠臣)이었다.
한번은 왕 측근에 있는 환관(宦官) 백선연과 술객(術客) 영의(榮儀)의 비리에 대해 상소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는 왕에게 목숨을 걸고 마루를 두드리며 이 잘못에 대하여 간(諫)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公)을 지방 판관으로 좌천시켰다. 그 후 정중부의 난49)
이 일어나자 의종(毅宗)은 남방으로 피신하면서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탄식하였다
고 한다.50)
정중부의 난으로 많은 문신(文臣)들이 피살되었음에도 공(公)의 명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난병(亂兵)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의종에 이어서 등극한 명종은 공(公)을 문무(文武) 겸직의
최고의 벼슬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는 벼슬에 오를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겸양을 보였고, 생활에 있어서는 소식을 했으며, 의복도 비단은 입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51)
충숙공의 산소를 중심한 설화는 문(文)씨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公)의 산소가 있는 유구에는 닭과 관련된 지명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산소가 있는 마을이 추계리(秋鷄里)이고 산소가 있는 산이 금계산(金鷄山)이요, 산소가 자리
잡은 그 위치는 금계포란형(금鷄包卵形)으로서 모두 닭과 관련되어 있다. 문창수는 이 닭이
곧 문(文)씨의 문중을 상징하는 가축이며, 문(文)씨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52)
그러면, 이 닭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다. 닭은 고집이
세며, 가축 중에 유일하게 벼슬이 있다. 따라서 닭으로 상징되는 문(文)씨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인도자적 사명을 감당할 소명받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뿐만
아니라 충숙공처럼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고집의 소산도 여기에서
비롯된다.53) 또한 가축 중에 유일하게 벼슬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문(文)씨 문중은 특별히
어떠한 사명을 위하여 선택받은 문중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54)
<빙혼>
재림주도 음양오행과 풍수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보다.
나사렛 예수도 음양오행과 풍수지리로 보자면 참으로 좋은 자리(?)에서 태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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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청설화와 그 의미
산청은 제27세손(世孫)인 문익점 선생이 태어나신 마을이다. 그는 1331년 2월 8일에 태어
났으며 같은 날인 1400년 2월 8일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즉, 탄생일과 세상을 떠난 날짜가
같다. 그의 자는 ‘일신(日新)’이고, 그의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특별히 삼우당의 업적은 문씨 문중 뿐만이 아니라 이 민족의 역사 위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문익점 선생에 대해서는 한국의 중학교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1991년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문익점 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목화씨의 재배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고려 시대 때 의복의 재료로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문익점이 공민왕의 사신으로서 원나라를 방문했을 때, 고려로 목화씨를
가져왔다. 그 때부터 목화는 의복을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익점 선생은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부의 관리가 되었다. 선생이 사신의 한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갔을 때 붓대롱 속에 몰래 목화씨 10여개를 숨겨가지고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 때는
목화씨의 반출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그의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정성껏 가꾼 결과 10여 개의 씨앗중 한 개가 성공하여 100여개의 씨앗을 얻게 되었다. 선생의
손자인 내문은 학자로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무명 옷감을 만들어 내는 문래를 만들었다.55)
목화씨가 전국에 확산됨으로 민족 의류 문화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의류사에도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 하게 되었다.56)
당시의 대다수 서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대마와 칡 그리고 약간의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다.
오직 높은 관직에 있는 관리들만이 원나라에서 수입한 옷감으로 좋은 옷을 해 입을 수 있었다.
이 목화씨가 전파됨으로 전 백성들이 흰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흰 옷을 입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57)
선생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충신이었다. 그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의
순제는 간신인 최서의 말을 듣고 공민왕을 폐하려고 하고 있었다. 순제는 문익점에게 공민왕을
폐하는 일에 동참토록 권유했으나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충절을 내세우다 문익점은 운남성으로
유배되기도 했다.58)
1392년 이성계에 의해서 고려 왕조가 붕괴되고 조선 왕조가 창건되었다. 그 때에 이태조가
친히 불렀음에도 그는 두 왕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이군불사를 주장했으며 임종시에는
자녀들을 불러 놓고 조선 왕조를 섬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 왕조
500년동안 문씨 종족은 정부의 관리로서 일한 자가 극히 적었다.
이조 500년동안 문씨 문중은 참으로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이군불사를 지켜왔다. 뿐만 아니라,
이 500년동안 거의가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문씨 문중이 다른 문중에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생의 효성은 지극했었다. 공(公)이 39세때 부친상을 당했는데, 그는 3년간 시묘의
예절을 다했다. 당시 왜구가 그 지방을 침입했을 때에도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산소를
지켰다. 이에 왜구도 공(公)의 효행에 탐복하여 그 지역은 난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의 보고에 의해 우왕은 그 지역의 효자문(孝子門)을 설립하도록 하고
그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 칭하게 되었다.59)
선생이 조선 왕조에 협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목화를 전한 공로가 높이 평가되어 조선의
3번째 왕인 태종은 그를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충선(忠宣)이란 시호를 내렸다. 4번째 왕인
세종은 그에게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의 공적을 영원히 칭송하기 위해 전 백성들에게
동정을 달아 입으라고 했다.60)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 정부 차원에서 선생의 고향인 경남
산청을 성역화 하고 있다. 이 성역화 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아산에 있는 현충사에 이은
두 번째의 의미있는 사업이기도 하다.61)
선생은 그의 생전에 그의 고향인 산청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식수했다. 그리고 이 은행나무와
더불어 자신의 후손이 번영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이 은행나무가 부락민의 천대로
약 150여년간 고사했다가 1920년을 전후하여 분지가 다시금 갱생하여 무성하게 성장하고
있다. 문창수는 이를 통해 조선 왕조 500여 년동안 비운의 문씨 종족이 1920년을 전후하여
문씨 문중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62)
은행나무는 문씨의 문중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무중에서 은행나무만이
암수의 구별이 있으며, 한국의 은행나무에 약효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산청
설화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한글이 자음과 모음이 합해질 때만이 하나의
글자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은행나무를 이해할 때,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어떠한
관련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C. 근세 가계와 가족 관계63)
1. 증조부 문선옥 선생
아버님의 4대조인 증조 할아버지, 문선옥선생 때 지금의 정주 상사리로 이사를 왔다.
부부가 고향을 떠나 이사 와 가지고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을 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그 당대에 성공하여 기반을 닦았다.64) 처음에는 극단적인 극빈 상태에서 출발하였으나
근면과 성실과 저축 정신으로 일관하여 수천 석하는 큰 부자가 되었다. 특히 문선옥 선생은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한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면 끝없이 계속했다고 한다.
부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후손들을 위해서 많은 적선(積善)을 했다. 그 한 가지 예로, 부자가
된 후에도 평생에 걸쳐 짚신을 만들어 장에다 팔아서 얻은 돈으로 독수리나 집오리를 사서
전부 놓아 주었다 한다. 그리고 거지가 찾아오면 언제나 불러 들여다가 정식으로 상을 차려서
후하게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후하게 대접했을 뿐만이 아니라 옷을 입혀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어려운 청년들에게 한문 선생을 자기 비용으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혼사가 있을 때에는
서로 인연을 맺으려고 멀리서까지 중매가 왔다고 한다.65)
이러한 그의 후덕한 인품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그 집을 택함받은 집이요, 복받을 집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본명이 ‘정흘(禎紇)’인데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선옥자당(善玉慈堂)’이라고 불리셨다. 선생의 도움으로 한문 공부를 한 사람 중에
김홍복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후손 가운데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66) 문용기 장로는 아버님의 성격은 증조부이신
선옥 선생을 닮은 면이 많다고 한다.
2. 조부 문치국선생
증조부 선옥 선생께서 자수 성가하시어 부자이었던 관계로 그 다음 대인 조부 치국 선생
대(代)에도 상당히 부유하였다. 선생은 무학이셨으나 삼국지 같은 책을 누가 이야기 해 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되풀이 할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 났다.67) 선생은 정감록을 신봉하면
서 장차 강원도나 충청도의 계룡산에 가야 산다는 예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사람됨을
헤아려 보는 통찰력이 있어서 소년시절의 아버님을 가르키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저가 원하는 대로 돕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기도 했다.68)
특히 치국 선생은 그의 동생인 문윤국 목사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물질적으로 많은 뒷받침을
하였다. 그의 동생인 문윤국 목사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목사가
되었다. 집안 중에서 가장 부자였던 치국 선생은 그의 동생의 요구대로 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의 대부분을 독립 자금으로 선뜻 내주었다. 나라가 망하면 가정이 평안할 수 없다는
애국자적인 생각의 발로 때문이었다.69)
3. 종조부 문윤국 목사
문윤국 목사는 조국광복을 위해서 헌신적인 생을 살았다. 특히 1919년 선천남 교회에서
개최된 평북 노회에 참석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13도의 대표 1인으로
서명하였다.70) 최남선과 함께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안한 5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었으며71) 이승만 박사하고도 가까운 친구였다. 또한 이승훈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다.72) 3.1운동 당시에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정식
서명 때에는 자신이 시무하던 덕흥교회의 장로인 이명룡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양보를 했다.
33인 중에 기독교에 할당된 대표는 16명이었다. 그런데, 단일 교회인 덕흥교회에서 3명이나
그 대표를 뽑을 수 없다는 이승훈의 설득에 의하여 덕흥교회에서 시무하던 이명룡과 김병조
2사람을 확정케 하시고 자신은 자진 사퇴하였다. 이때 이승훈 장로는 문윤국 목사의 두 손을
꽉 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73) 3월 8일, 오산학교의 직원과 생도 및 교회신도,
오산 주민 수천 명을 이끌고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셨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기도 했다.
이때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됨으로써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년 정도 복역하다가
특사로 풀려 나셨다.74)
문윤국 목사는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통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형님이신 문치국 선생에게 찾아와 광산을 한다고 하여 논밭을 동양 척식주식회사
에 저당 잡히고, 또 목사의 신용을 이용하여 친척과 이명룡 장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설득
하여 약 7만원의 돈을 만들어 1921년 만주에 거주하는 김숙제 목사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케 했다.75) 그 후, 문윤국 목사는 광산을 하다가 망했고, 또 외도하다가 집안을 망쳤다고
소문을 내고 야간 도주했다.76) 이로인해 문윤국 목사는 집안이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는 목사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77) 이처럼 말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신 애국지사이셨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계속 교회의 일을 돌볼 수 있었지만,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서 계속 시무치 못하고 충청도 익산과 강원도 강릉지방에서 오랫동안 은거 생활을 하셨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공산화 된 이북에 가시지 못하고 강원도 정선에 거하시며 후학을 양성
하셨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세 번이나 헬기를 보내면서까지 행했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계에 진출하기를 거절했다. 그것은 나이가 많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선생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의 업적이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의 유언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업적이 정부에 의해서 인정이 되었을 때, 한국 정부는 그에게 2번이나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4. 부친 문경유 선생
문경유 선생은 몸이 건강하고 힘이 참 좋으셨으며, 성격이 어질고 착하셨다. 약속을 잘 이행
했기 때문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인정이 많음으로 그 분의 덕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달라는 이에게는 주고 빼앗는 자에게는 빼앗겨 가며 사는
그런 어른이었다.78)
특히 그는 400페이지 가량의 찬송가를 다 암기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을 가지셨으며, 손금을
잘 보셨다 한다. 조카들의 손금을 봐주면서 “너희들에게는 없는데 내 손에는 세계적으로
큰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손금을 보여주고는 했다고 한다.79) 선생은 해외에 나가서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번번히 좌절되었다. 그 때는 아버님이 태어나시기 이전
이었다. 만약에 선생이 유학을 떠나셨다면 아버님께서는 탄생하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80)
5. 충모 김경계여사
충모님의 친정은 충신의 집안이었다. 한 번은 임금께 드릴려고 밤새 약을 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임금이 금토시를 벗어 주었다고 하는 전통이 있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충모님이 시집을 올 때에는 몸종을 데려 올 정도로 이름있는 가문이었다.81)
특히 충모님은 시집 오기 전부터 부모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딸이었다.82)
충모님은 13명의 자녀를 낳을 정도로 체격이 대단했다. 별명이 중국 장정님일 정도로 몸이
장대했으며 집안 살림을 혼자서 다 꾸려 나가셨다. 아버님이 소명받으시기 전까지 증조부를
도와 배가 고프거나 잠자리가 없어서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봉사했으며 이로 인해 아버님께서는 “저렇게 시중하면 뭐가 좋을까?” 할 정도로 남을 위하여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83)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발하셨던 충모님은 회초리로 쳐서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칠
정도로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셨다. 살림이 한창 흥성할 때에 친정에다 땅을 사 두었다가
시삼촌 (문윤국 목사)이 독립 자금의 인출을 위해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갔을 때 1천 평
정도의 논밭을 사서 자식 교육과 생활을 꾸려가신 선경지명도 있었던 분이었다.84)
특히 충모님은 둘째 아들이신 아버님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아버님께서는 그 당시에 충모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을 정도로 아버님을 사랑했다고 한다. 문(文)씨 문중에서 아버님
한 분밖에 없는 줄 알고 아버님이 말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도와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충모님은 섭리적으로 모자협조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둘째 아느님이신 아버님을 극진히
사랑하심으로써 모자협조를 통한 탕감복귀를 완수하신 분이기도 하다.85)
이처럼 자신의 둘째 아들인 아버님께 대하여 절대 신앙과 절대 사랑과 절대 복종의 정신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감화도 있었겠지만 아버님을 가졌을 때의 태몽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충모님께서 제석산을 향하여 걸어가실 때 큰 흰 용 두 마리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태몽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실재로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님께서는 이것을 태몽으로 이해하시지만 충모님은 태몽이 아니라 실재로 인식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86) 문용기 장로에 의하면 하늘로 올라가는 이 용 두 마리를 치마로 받는
태몽을 꾸고서 아버님을 잉태했다고 한다.87) 이러한 경험에 의해 충모님이 아버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아들이지만 아들 이상으로 대하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충모님의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생전에 충모님께 양말 한 켤레 사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991년 12월, 고향에 있는 충모님의 산소에 같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한다. 그것은 가인권에 있는 인류를 더 사랑해야 되기 때문이었다.88)
아버님께서는 충모라는 칭호를 주셨으며 1995년 8월 25일, 36만쌍 축복 때 부군인 문경유선생
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해 주셨다.
그리고 1996년 11월 16일, 우루과이에서 “충모님은 참아버님을 낳아서 기르시고 완성하시도록
성장시켜 주셨기에 중심 어머님으로서 대모님은 충모님을 받들어야 한다”고 하셨다.89)
6. 대형 문용수 선생
문용수선생은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어려운 문제를 영계의 지시를 통해 해결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90) 그는 한국의 독립과 동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동생인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또 그가 무슨 책임이 있는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영계의 가르침에 의해 아버님과 절대적으로 하나 되었다. “천하에 동생을 가진 형이
많지만 자기가 형으로 자랑할 것은 오직 한가지, 세계에 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가졌다”는 인식 속에 동생인 아버님이 부탁하는 일은 어떠한 질문도 없이 모두 다 들어
주었다.91) 이러한 문용수 선생의 아버님께 대한 자연 굴복으로 인하여 가인 아벨이
완전히 하나됨으로써 가정적 기반에서의 장자권 복귀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형님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한다. 그것은
예수가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 한을 해원성사해야 되었기 때문이었
다고 하신다.92) 아버님께서는 그에게 대형이라는 칭호를 주셨고 충모님의 축복이 있었던
1995년 8월 25일에 영적인 축복을 해 주셨다.
D. 문(文)씨 종족과 참아버님
1. 문(文)씨 종족의 전통과 정신
한국에는 274개의 대표적 성씨(性氏)가 있다. 모든 성씨(性氏)마다 나름대로의 공적들이
있겠지만 문(文)씨에게는 몇 가지 독특한 공적들이 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문(文)씨의 전통과 정신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먼저 문(文)씨 종족은 대대로
애국자 집안이었다. 시조(始祖)인 문다성 공을 비롯하여 충숙공 문극겸 선생, 삼우당 문익점
선생 그리고 문윤국 목사의 생애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들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문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애국자들이었다.
둘째로 문(文)씨 가문은 절대적인 충효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이군불사의 정신은 가훈으로 전해져 있다고 한다. 이 정신은 특히 삼우당 문익점 선생에게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가문에 엄청난 은둔기가 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은둔
기간은 오히려 문(文)씨 종족이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원수로 여겨지는 가문을
만들지 않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행의 전통은 가정 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를 전란의 화로부터 구했던 문익점 선생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셋째로 문(文)씨 종족은 통일 원리에서 천국 건설의 이념으로 인식되는 공생 공영 공의에
입각한 ‘위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시조(始祖)인 문다성공의 경우에서 시작되어 아버님
대(代)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과 정신이 계승되어져 왔다. 특히 아버님을 중심한 근세 가계를
통해서 보면 가풍과 가훈이 “팔도강산에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밥 먹이는 잡안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보여 주듯이 집안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거지들을 대접하는 것을,
자기 집안의 어른을 모시는 것보다 더 우선시 했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하나님처럼 대했던 가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 문(文)씨 종족에게는 남다른 선족사상(選族思想)이 있다. 남평설화와 공주의 유구설화
그리고 산청설화가 보여 주듯이 문(文)씨 종족들은 이조 500년의 수난기를 기치면서도 좌절
하지 않고 언젠가는 문중에 큰 인물이 출현하리라는 고대 속에 살아왔다. 이는 한 때를
위하여 932번의 외침에도 단일 민족의 맥을 이어 왔던 한민족의 역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족사상은 아버님의 근세 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진다고
볼 수 있다. 증조부이신 문선옥 선생의 독수리와 집오리의 방생의 경우에서, 조부이신 문치국
선생의 유언에서, 그리고 부친이신 문경유 선생의 손금 보는 철학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충모님의 태몽을 통해서 구체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빙혼>
문세광 : 대한민국 국모를 저격한 문세광은 문씨 종족이 아닌가?
문창극 : 국무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문창극씨는?
문재인 : 새정치연합 대통령 후보이자 야당 대표인 이 분은?
문성근 :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배우는? 등등
문씨 문중에 정말 인물은 많이 있다.
참아버님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통일 세계를 지배하는 분이므로 가장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2. 문(文)씨 종족과 참아버님
위에서 언급한 문(文)씨 종족의 선의 공적들은 아버님이 탄생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고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아버님께서는 문씨 가문을 하늘이 준비한 가문으로 인식하신
다. 그리고 문(文)씨라고 하는 문(文)자가 ‘아버지 부(父)’자와 사촌쯤 된다고 하시면서 이 성씨
(姓氏)는 계시적으로 주어진 성씨(性氏)로 인식하신다.93) 그러기에 아버님께서는 문(文)씨
씨족을 먼저 해방하시고 전 세계의 종족들을 해방하시기를 원하신다.94)
<빙혼>
미국 청문회를 뒤흔들었던 통일교 2인자(?) 박보선씨가 좀 서운하겠다.
박씨는 문씨 성을 가진 참아버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집안 머슴?
문(文)씨 씨족의 역사는 참아버님 한 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준비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500여 년 동안 준비된 문씨의 역사는 아버님에게서 열매가 맺혔기 때문에 비록 아버님께서
남평 문씨의 49세손으로 태어나셨다 할지라도 섭리적으로 볼 때, 아버님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아버님은 문(文)씨의 조상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95)
따라서 1986년 4월 12일에는 남평 문씨의 대표들에 의하여 아버님께서는 40만 남평 문씨의
종장으로 추대되셨다. 아버님께서 남평 문씨의 결과이며 열매라는 사실은 그 함자 속에서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3. 아버님의 고귀한 탄생
아버님께서는 1920년 음력 1월 6일 (양. 1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에서 부친인 문경유 선생과 모친인 김경계 여사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아버님의
원래 이름은 문용명(文龍明)이었다. 이름 속에 ‘용(龍)’자가 들어가는 것과 충모님의 태몽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름은 해방 이후 이북에 가셔서 ‘여호와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박월례 여사를 1946년 6월초에 만나신 이후 지금의 이름인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꾸셨다.96)
국내의 274개의 성씨(姓氏) 중에 글월, 혹은 말씀이라는 뜻을 가진 성씨(姓氏)는 문(文)씨밖에
없다. ‘문(文)’이라는 한자는 ‘아비 부(父)’와 ‘하늘 천(天)’과 같은 의미이고 획도 같다.97)
그런데 이 글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천(天), 지(地), 인(人)을 의미한다.98) 또한 ‘문(文)’은
진리의 뜻을 가지고 있다.99) 이름 속에 있는 ‘선(鮮)’자는 바다를 상징하는 ‘어(魚)’자와 육지를
상징하는 ‘양(羊)’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명(明)’자는 해를 상징하는 ‘일(日)’자와 달을
상징하는 ‘월(月)’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선명(鮮明)’이라는 이름은 바다와 육지, 해와 달과 같이 상대적으로 되어있고,
우주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이름이 합해진 ‘선명(鮮明)’은 모든 것이
깨끗이 그리고 확실히 드러나도록 비춰주는 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 위에 진리를 나타내는 ‘문(文)’자가 꼭대기에 있음으로 해서 진리로 해와 달과
바다와 육지를 하나로 묶어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100)
따라서 우리는 존함의 의미를 통해서 보더라도 문(文)씨 종족의 모든 공적을 한 몸에 가지고
태어난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빙혼>
문씨가 아니면 개털이라는 말인가?
북조선에서는 김씨가 대세인데.
그래서 살아생전 문선명과 김일성은 친구처럼 지냈나보다.
가장 희한한 것은 통일교는 개신교에서 갈라진 교파일 터인데 왜 이리 음양오행과 풍수지리.
성명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집중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사렛 예수는 이름이 좋은 것인가?
IV.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천품
원리강론에 의하면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천품을 타고나야만 한다.101) 천품이라고 하는 것은 탄생
이후에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품이 아니라, 사람이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오는 기품을 말한다.
여기서 기품이란 기질과 품성을 말한다. 기질은 기력과 체질, 즉, 외적인 요소를 말하며,
품성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을 말한다. 따라서 이 천품 속에는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중심적 인물이 되기 위해서 어떠한 천품을 타고 태어나셨을까?
A. 참아버님의 외모
아버님께서는 건강한 체격과 탁월한 체력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디에
가나 항상 우뚝히 솟아왔다. “팔의 크기에 비해 손이 곱고 작은 편이나 무섭게 날래고 센
힘을 지니고 있으며, 또 다리의 크기에 비해 발이 짜임새 있게 작은 편이나 역시 드물게
날래고 힘세다.”102)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아주 강하고 유별난 체력을 소유하셨다.
특별히 아버님은 씨름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셨다. 문용선 장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동네에서 유명한 씨름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아버님을 이겨보지 못했다. 물론 자라
면서 여러 번 싸웠지만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한다.103) 그러한 강인한 체력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일생동안 3시간이상 주무시지 아니하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타고난 강인한 체력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16시간 쉬지 않고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104)
아버님의 모습은 또한 “비교적 큰 편이면서 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으며, 환하게 퍼진 이마와
작은 눈, 그 위에 높직히 뻗어 내린 콧마루가 특징적이나 전체 모상(貌相)이 한가지로 확실한
윤곽을 그리면서 대조화를 나타내고 있다.”105) 관상학적으로 보더라도 아버님은 세계적인
인물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낙심될 때에는 거울을 통해서
관상을 보시면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면서 언제나 힘을 얻는다고 하신다.106)
아버님의 작은 어머니인 김경기 여사는 관상을 통해서 사람의 성품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네가 다 살리겠구나”라고 아버님께 말씀하시면서
아버님을 자기의 아들들보다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자기의 아들들에게는 용돈을
주시지 않았음에도, 아버님께는 늘 용돈을 주실 정도로107)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문용기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님은 문씨 가문의 희망이었다.
특별히 아버님의 잘 생긴 용모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아버님이 기차를 타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안아보려고 했으며 사람들이 너무나 큰 관심을
보이자 모친은 아이(아버님)을 잃어버릴까봐 몇시간이나 마음 조이다가 내리곤 했다고
한다.108) 아버님의 젊은 시절에는 많은 젊은 여자들이 반해서 마음을 조였다고 한다.
<빙혼>
카사노바 자질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인가?
참아버님도 결국 통일교 무협소설의 주인공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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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선천적으로 말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은 말은 잘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버님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어도 입이 저절로 말할 정도로 말하는 것을 기뻐하신
다.109) 때로는 말씀을 했다하면 감기에 들려 기침을 심하게 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 말씀에 완전히 취하셔서 힘드신지도 모른다.110) 이것은 아버님은 재미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111) 말하는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가 한정이 없으시다. 말씀을 주실 때마다 원고가 없이
주시는데 그것은 어떠한 지식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천성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님께서는 말씀을 기술적으로 잘 하신다기 보다는 ‘말씀 그 자체이시
다’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아버님께서는 외적인 모습과 함께 특별한
내적인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B. 참아버님의 특성과 자질
아버님은 독특한 소성과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아버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과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셨으며 어디를 가시든지 중심 존재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아버님께서는 바다에 가시면 바다의 챔피언, 산에 가시면 산의 챔피언, 동네에
가시면 동네의 챔피언, 학교에 가면 학교의 챔피언, 교회에 가면 교회의 챔피언이 되셨으며,
투전판에 가면 늘 거기에서도 챔피언이 되신다.112) 이러한 아버님의 성격을 잘 아는 하나님
은 아버님께 온전히 반하셨다.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아시는 아버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성격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핀셋으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신다.113)
<빙혼>
일진에 투전판까지....도대체 통일교 교리는 비빔밥인가?
마치 김일성 전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빙혼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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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적인 면, 지적인 면, 의지적인 면, 영적인 감성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재림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타고난 성품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정적인 면에서
하늘의 심정을 담을 수 있는 바탕이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는
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통곡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 아버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눈물
단지를 가지고 계신다. 울기 시작했다 하면 그칠 줄을 몰랐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어려운 환경 가운데 취해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함께 울어주는
아버님이시다. 그리고 그가 어떠한 내용을 얼마나 길게 말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사정을
모두 들어주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사정을 듣고 나서
그들을 위로해 주신다.
아버님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잠 못 이룬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버님이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하루에 세끼씩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명절이 되어도 떡조차 해먹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많았다. 아기를 낳고도
쌀밥과 미역국을 끓여 먹을 수 없는 산모도 많았다. 동네에 그러한 불쌍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아버님은 집에 있는 쌀이나 미역 등을 가져다가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일을 하기 전에 아버님은 집안에 있는 어른들에게 “중요한 게 없어지거든 내가 갖다 없앤
줄 아소” 하고 통보하였다. 그 이후에는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어려운
사정에 있는 자들을 도와 주셨다.114)
아버님은 서당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에게 ‘조청’을 먹여주기 위하여 투전판에 가신 적도 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부친이 소를 판 돈을 전부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 오늘
내가 죽으면 그 돈(소를 판 돈), 어떻게 할 거에요? 아들한테 쓸 돈 있으면 나 죽기 전에
좀 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얼마나 쓸 거냐?” 하는 질문에 “주시면 얼마를 쓰든지
제가 알아서 적당히 쓰겠습니다.” 하고는 타내신 적이 있다.115) 그리고 이 돈을 가지고
투전판에 가셔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돈을 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딱 한 판에 많은 돈을 따셨다. 그 돈으로 조청을 사서 불쌍한 동네
아이들에게 엿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시며 몇 개월간 실컷 조청을 먹게 하셨다 한다.116)
그 때 아버님의 나이가 12살이었다.
<빙혼>
헐...12살에 투전판에서 많은 돈을 딴 것은 기적인가? 능력인가?
나사렛 예수와 참아버님 그리고 김일성 이 3명은 정말 도찐개찐이다.
아버님은 깊은 인간애와 동정심을 가지셨다. 어떠한 사람이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싸움을 하고 나서 상대의 옷이
찢어지고 더렵혀진 것을 보고는 자신의 옷을 벗어서 그 친구에게 줄 정도로 깊은 동정심과
인간애가 있는 분이었다.117) 시집간 누나가 폐결핵으로 친정에 왔을 때, 별채에서 혼자
4,000여 방의 쑥뜸을 통하여 완쾌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누나가 시집에 돌아 간 이후에도
매일처럼 언덕에 올라 누나가 오기를 기다렸던 인간적인 정이 풍부했던 분이셨다.118)
아버님은 특별한 문학성과 예술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아버님은 미술이나 글짓기나
붓글씨 쓰기나 동화구연이나 노래하기 분야 등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셨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원맨쇼 챔피언이었을 정도로 풍부한 유모어 감각도 가지셨다. 서당에 다니실 때에는
훈장으로부터 본을 받아 배울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교의 구실을 할 정도로
붓글씨를 쓰는 방면에서도 독특한 재능을 발휘하였다.119)
이러한 정적인 면을 타고나셨기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쉽게 동화되고 덕화력과 화동력을 발휘하시어 중심 존재가 되었다.
둘째로 지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아버님은 명석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가지고
계시다. 아버님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나 동네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 대한 분명한 사리판단을 하신다.
여기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관계가 되지 않는다. 아버님이 12살이셨을 때, 이유없이
부모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아버님께서는 분명한 사리에 근거하여
부모들을 오히려 가르쳤으며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신 적도 있다.120)
아버님의 명확한 사리 판단은 조부모조차도 어린 시절의 아버님을 두려워 했다. 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즐겨하셨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할아버지가 손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다고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이 질문에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그 때부터 담배를 끊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의 권위로 당신의 잘못을 덮으려
할 때에도 아버님은 그것을 사리에 맞게 훈시하고 오히려 심부름까지 시키기도 했다.121)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아버님은 12살 이전에 이미 가정에서 중심존재가 되어 있었다.
<빙혼>
그 시절에 조부님에게 담배피우는 것을 항의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 담배가 해롭다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던 시절인데 이 부분은 좀 오버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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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 해답을 찾아야 만이 직성이 풀리는 놀라운 탐구력을
가지셨다. 동네에서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사유를 알아야만 되었다. 모친이 어떠한 과일을
사오면 그 출처를 알고서야 먹었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어떠한 음식이나 과일의 출처가
분명치 않고는 잡수지 않았다. 6명이나 되는 누나들의 방에 가서도 보따리는 하나하나
뒤지면서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왜 누나들이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아버님은 당신의 원인을 추구하는 탐구심이 원리에 대한 해답을 찾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씀하신다.122)
<빙혼>
참말로..누나 보따리 뒤져 생리대 나오면 왜 누나들이 생리대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한다고?
참말로 누나에게 따귀를 맞을 짓이 아니면 혹시 근친상간의 기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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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아버님은 탁월한 기억력을 갖고 계신다. 한번 보고나 듣거나 경험하신 것은 쉽게 잊어
버리지 아니하신다. 서당에 다니실 때에는 하루에 공부할 한자를 30분만에 암기하시고 나머지
시간을 신(神)이 나게 노셨다.123) 일본어를 배우실 때에는 하루 저녁에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완전히 암기하셨다. 또, 국민학교(초등학교)에 편입하셔서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의 교과서에
나오는 일본어를 15일 만에 완전히 암기하셨다.124) 또한, 국민학교 다니실 때, 하룻밤사이에
180페이지의 책을 암기하신 적이 있다. 이러한 기억력은 지금도 탁월하시다.125)
아버님은 뛰어난 창조력과 적응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를 아시면 그것과 연관시키어 열가지
이상을 깨달으신다. 깨달은 한 가지를 다른 것에 연관시키고 적용시키는 데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계시다. 말씀을 하실 때에도 어떠한 내용과 관련된 동의어나 반의어를 선택하시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신다.
덧붙여 아버님은 10세 안팎의 나이로 아직 어렸을 때, 남달리 높은 꿈을 가슴 속에 가지고
자라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자라서 위대한 박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것도 어떤 한 가지 분야에서가 아니라, 네댓(4-5) 가지의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혼자 취득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권위있고 유명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126)
셋째로 의지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에서 생각해보자. 아버님께서는 뛰어난 상상력과 추구력을
포함한 초인간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님은 무엇이든지 한번 한다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는 성격이시다. 한번 시작한 일에 대하여는 지칠 줄 모르고, 싫어할 줄도 모르고, 쉴
줄도 모르고, 두려워 할 줄도 모르고, 포기 할 줄도 모르는 지독한 성격을 가지고 계시다.127)
아버님은 ‘하루 울보’라는 별명을 가지실 정도로 지독하고 끈기 있는 성격을 갖고 계신다.
한번 울기 시작했다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와서 항복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버님은 하루 종일 우신 적이 두번 있다고 한다. 한번은 그 자신을 위해서 울었고, 다른
한번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울었다. 자신을 위해서 울었을 때는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128)
그의 고집 때문에 6살 되었을 때 아버님께서는 부모로부터 회초리를 맞고 기절하신 적도 있다.
아버님의 생각에 정당하지 않은 일로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을 때는, 사과하기는커녕 더
때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모친의 불같은 성격이 그 소리를 듣고 더 때렸다고 한다.
잘못했다는 말을 한 마디만 했으면 매를 그칠 수 있었을 텐데 아버님은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모친은 약 1시간 가량 매를 들었고, 아버님은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가족들은 아버님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지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129)
아버님은 특별히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싸움을 시작했다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무엇을 하시던 간에 반드시 첫째가 되셔야 직성이 풀리신다. 한번은 아버님께서
12살때에, 15세의 소년과 씨름을 해서 지신 적이 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아카시아 나무를
이용하여 연습을 하셨다. 그리고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씨름을
하여 이기신 적도 있다.130) 아버님께서 그 씨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강인한 체력
때문이 아니라 강한 승부욕 때문이었다.131) 이러한 승부욕은 아버님께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원동력이 되었다.132)
아버님은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아버님보다도 나이가 많은
자로부터 불의하게 매를 맞거나 야단을 맞으면 그 집에 찾아가서 3대가 나와서 잘못을 빌
때까지 그 분통함을 풀지 못 했다.133) 한 대라도 억울하게 맞으면 10대이상 때리고야
물러섰다. 한번은 그 가족들이 사과를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도끼를 가지고 가서 집의 기둥을
잘라 버리겠다고, 석유를 묻힌 솜방망이로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또, 소를 죽이겠다고 까지
협박한 적도 있었다.134) 아버님이 9살 됐을 때 어떤 큰 아이로부터 불의하게 매를 맞아 코피
가 터졌을 때, 그 집에 찾아가 30일 만에 그의 부모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일화도 있다.135)
약한 자를 돕기 위하여 아버님께서는 강한 자와 대신 싸워주신 적도 있다. 상대가 아버님보다
강한 자라 할지라도 약한 자를 돕기 위하여 아버님은 그를 찾아가서 1년이 걸리더라도 사과를
받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또한, 아버님은 싸움을 말리는 데에도 챔피언이었다. 싸움을 말릴 때에는 강한 자를 먼저
설득했다.136) 이처럼 늘 언제나 아버님은 의로운 입장에 계셨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아버님은 10살을 전후에서 이미 반경 20 리 안에 있는 모든 소년들의
대장이 되었다.
아버님은 또한, 예민한 영적인 직관력과 투시력을 보여 주셨다. 아버님은 예리한 감성을 갖고
태어나셨다. 15살 이전에 이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나, 형제나, 친척들을 그의 손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아버님은 참으로 특별한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감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아버님은 누구를 보든지 간에 그 사람의 행동
이나 그 사람의 냄새를 맡고 그 사람의 성품을 다 아실 수 있었다.137) 아버님은 또한,
일기를 예측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재난이나 나라의 운명까지도 예측할 수도 있었다.138)
8살 때부터 아버님께서는 이미 사진을 통하여 중매를 하실 정도의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계셨다.139) 그 때의 예견은 모두가 정확한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통일교에서 행하는
합동결혼식의 사진을 통한 중매는 이때부터 예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님께서는 중매를
하실 때 7대 조상과 3대 후손을 보시고 결정을 하신다고 한다. 이처럼 아버님은 어릴 때부터
이미 이러한 영적인 직관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한 능력은 아버님께서 탄생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천품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버님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력과 함께 지, 정, 의,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인간으로서
는 더 할 수 없을 만큼의 초인적인 능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이러한 타고난 천품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아버님은 문씨 가문이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인물로서 인식되어
졌다.140) 그리하여 아버님은 장래에 왕이 아니면 역적이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편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아버님의 성격은 선민인 한국민족과, 그 다음에 선의 공적이 많은 문씨 가문의 모든
좋은 성품들이 농축되어 상속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품은 어떠한 교육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나오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버님의
성품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아버님을
선택하시게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천품을 타고 낳다 할지라도, 이러한 천품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중심인물이 선민의 하나로 태어나야 된다거나 선의 공적이 많은 후손
가운데에서 오는 것이 95%의 하나님의 책임이라면 또 하나의 조건인 후천적인 조건은 5%의
개인 책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후천적 조건은 소명받기 이전에 어린 시절에
나타나야 된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그러한 천품을 개발하기 위하여 어린 시절에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 즉, 이 천품이 어린 시절에 그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후천적 조건과 관련시켜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빙혼>
상기 글을 읽고 나니 문선명은 정말로 재림주 참아버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이야기를 써 놓았다고 비웃는다면 그 사람은 벌을 받는다.
왜?
정상적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비웃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미쳤다고 할까봐!
V.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후천적 조건
원리강론에 의하면 같은 중심인물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141)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소명을 받을 수 있었던 어떠한
후천적인 조건을 가지고 계셨을까? 아버님은 어떠한 일을 결정하실 때에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어떠한 보고나 어떠한 분석에 근거하여 최선을 다하신다. 좋은 천품을 탄
아버님이시지만, 그 천품 이상으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단히 애쓰고 노력하신다.
2,000년 전의 예수는 그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지 못 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의
십자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아버님은 예수를 모셔야 할 사람들이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매우 애석해 하셨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도, 예수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십자가에 달리는 일을 피했어야만 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가 못 다한 사명을 완성해
야만 하는 재림주는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독특한 성격을 가져야만 되며,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만 되었었다.
아버님께서는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르는 상태에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 완벽하게 알게 된 상태에서는 믿음은 필요없다고 말씀하셨다.142)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오직 레버런 문만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사탄세계의 비밀을 완전히
안다고 말씀하셨다.”143) 이처럼 아버님께서는 하나님과 사탄세계의 비밀을 완전히 아셨지만,
2,000년 전의 예수는 하나님과 사탄세계의 비밀을 완전히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었다고 하셨다.144) 대모님은, 예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를 알았지만,
아버님께서는 스스로의 노력과 탐구정신에 의하여 진리를 발견했다고 한다.145)
아버님께서는 레버런 문의 하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말을 하며,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을래야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그러면,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스스로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안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안다’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행동이 반드시 수반된다.146)
마태복음 1장 25절에는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때까지는 남자를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있으며,
창세기 2장 9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이며, 히브리어로는 ‘야다’인데, 이 단어들은 영어나 한국말로는 ‘동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하여 어떠한 다른 대상과 완전히 일체가 될 정도로
완벽하게 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버님께서 스스로 진리를 알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
해와는 자연을 통한 스스로의 경험에 의하여 진리를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롬 1:20).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 능력을
사탄이 취해가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통일원리에서는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147)
그러면 이 사탄이 취해간 진리는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취해 올 수 있을까?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진리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으며, 인간 스스로의 책임분담
에 의하여 그 진리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탄
으로부터 찾아 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내어 주는 날에는 사탄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탄으로부터 진리를 찾아
오는 것은 망망한 대해에서 잃어버린 바늘 찾기보다도 더 힘들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죽음
의 고비를 뛰어 넘어야 된다.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서 이겨야만 된다.
통일원리에서는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을 문선명 선생으로 소개한다.148)
이 진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칠 때 메시아는 하나님께 질문할 수 없다. 스스로 그 진리를 찾아
야 된다. 우주의 근본원리에 근거해서 그 진리를 찾아야 된다. 찾아진 그 진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받아야 되며 영계의 수많은 성현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된다. 뿐만 아니라,
사탄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된다. 아버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이유를 찾는 데 14년간이나 걸리셨다고 한다.149)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이도
이러한 비밀을 스스로 밝힐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소년시절의 아버님의 삶을 통하여,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이 소년시절의 아버님의 삶 속에 보였기 때문에 하늘은 아버님을
소명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면, 소명을 받기 이전에 아버님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 어떠한 후천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님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을까?
A. 자연의 세계를 통한 탐구
아버님의 고향은 상사리를 중심한 반경 10km에 있는 자연은 유소년 시절에 아버님께 영향을
미쳤던 최고의 교재요 박물관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자연을 통하여 우주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의 많은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말씀하신다. 식물세계나 동물세계나 모든 살아 숨쉬는
자연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아버님께서는 창조원리나 인생문제, 복귀문제, 참사랑,
절대 성(Absolute Sex) 등, 모든 중요한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고 하신다.
아버님께서는 식물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을 가지셨다. 아버님은 자연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지으셨을까 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셨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집에
안 들어가고 해가 지도록 자연과 어울려 돌아다니다가 그 자연 속에서 잠자다가 밤 12시가
넘어 부모가 찾으러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150) 아버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나무에 다 올라가
보셨다. 남들이 올라가지 못하는 큰 나무에 오르기를 좋아하셨다. 식물세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에 대한 많은 지식을 터득하셨다.151)
아버님께서는 새에 대해서도 남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계셨다. 새들의 생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함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새들의 삶을 통하여 사랑은 자연히 이루어져야
되며, 최고의 자유 환경에서 주고 받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배우셨다.152)
까치 둥지의 관찰을 통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실 수 있었다. 어미새가 새끼들을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를 배우셨다.153)
새들의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새들의 노래가 다양하다는 것을 배우셨다. 새들은 먹을 구하기
위해서 울고, 사랑을 찾기 위해서 울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울음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하여 발견하셨다.154) 때가 되면 암컷이 먼저
발동한다는 사실도 아셨다. 암놈이 발동을 하게 되면 눈이 뒤집어 지고 입술이 붓고, 모든
부분이 붓는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아셨다.155)
꿀벌의 생리를 통하여 사랑의 힘을 배우셨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는 꿀벌이 아카시아의 꿀을
빠는데, 핀셋으로 꽁무니를 잡아 빼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아셨다.
이때 아버님께서는 “야, 나도 이렇게 되어야 되겠다.” 고 생각하셨다.
아울러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벌이 꿀맛 볼 때의 땔 수 없는 그 이상의 힘이 없겠는가
하시면서 하나님의 참사랑의 깊이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셨다.156)
아버님은 또한 동물세계에 대한 관심도 많으셨다. 독출한 성격과 건강 때문에 아버님의 활동
반경은 보통 사람의 3배나 되었다. 눈만 오면 잠도 안 자고 족제비 사냥을 가셨다. 문용선
장로의 증언에 따르면 눈 위에 있는 족제비 발자국을 따라 밤새워 40km까지 쫓아가서
다음 날 족제비를 잡아오신 적도 있다.157) 동네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산들을 다 돌아
다니면서 토끼나 사슴이나 개구리나 뱀이나 심지어 모든 밤벌레나 곤충들까지 다 잡아보고
관찰함으로써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를 속속히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은 또한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도 대단하셨다. 아버님께서 뱀장어를 잡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여름방학만 되면 하루에 40여마리의 뱀장어를 매일 같이 잡았다. 특별히 물에
잠수해서 뱀장어 꼬리를 입에 물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 잡아온 뱀장어를 동네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줌으로써 동네가 뱀장어 냄새로 진동한 적도 있었다.158) 뱀장어의 생태를 완벽히
아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서너 마리 잡을 동안 아버님은 수십 마리를 잡기도 하셨다.
이 자연세계의 관찰을 통하여 아버님께서는 특별히 음악세계의 근원이 바로 자연세계라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이 자연세계에서 새들의 오케스트라, 동물의 오케스트라, 물고기들의
오케스트라의 신비로움을 체득하셨다.159) 이 체험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기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할 자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과 지금의 인간은 그러한 자격을 상실한 존재라는 사실도 깨달으시며,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도 깨닫게 되셨다.160)
아버님은 어떠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반드시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것만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그 말씀에는 남다른 힘이 있다. 그러한 습관은 아버님의 어린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다.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이야말로 인간을 완성시키는 교재요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으셨다. 자연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다. 즉, 위하는 사랑을
가지는 아들 딸이 태어날 때, 그 인간을 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 자연이다.
새소리 하나도,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딸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으셨다.
이 밖에도 아버님께서는 소명 이전에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체득하셨다. 집에서
기르던 가축을 통하여서 인간관계의 기본을 배우셨으며, 모내기를 할 때에도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체득하셨다. 식사를 할 때, 어떠한 음식이라도 소화시킬 수 있는 정신력을 배양했으며,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로 여겨지던 옷 짓는 데에서도 남다른 솜씨를 발휘하셨다. 이는 모든
사물을 자신의 친구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161)
<빙혼>
정말로 대단, 위대한 아버님이시다. 이런 분이 국회에 나가고 대한민국을 이끌어야 했는데
왜 통일교라는 조직의 교주로만 활동을 하셨을까?
아울러 대한민국 수장이 되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계를 통일할 수 있었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 재림주가 되셨을 터인데...참으로 안타깝도다.
* 빙혼은 현재 그분이 영면하고 계는 무덤을 만드는 시공 현장을 간 적이 있었다.
산중턱에 거대한 문선명 기념관을 짓고 있었는데 한강물이 흐르고 있어 소위 명당이었다.
성경을 보면 천국이 명당인줄 알았는데 경기도 00가 명당인줄 그때 알았다.
그때 자연환경을 파괴하도록 허락해 준 해당 관청 환경과 공무원들을 신고하고 싶었는데..쩝.
B. 서당과 학교생활을 통한 탐구
아버님께서는 7살 되던 해에 한문 서당에서 공부하셨다. (1926-1932년, 7-13세) 서당에서는
주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사략(史略),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등 한문
분야에 있어서의 일련의 기초학습을 섭렵하시었다.162) 그 때, 붓글씨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
하셨는데, 손으로 뿐만이 아니라, 아버님께서는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쓰시던가, 입으로
붓을 물고 쓰기도 하셨다. 다른 사람이 손으로 쓰는 것보다도 더 글씨를 잘 쓰셨다.
그것은 끝없는 연습을 통해서 극복한 어려움의 결과였다.163)
<빙혼>똥구멍/돗구멍에 붓을 끼워 붓글씨를 썼다고 하여도 이제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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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다니실 때, 아버님은 점심식사를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서 안 먹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신에 산에 가서 모든 배고픔을 해결하였다. 자연을 좋아하다 보니 어디에 가면
뭐가 있고, 어디에 가면 어떠한 먹을 것이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자연에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다.164) 아버님 당대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기가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왜냐하면,
집안에서 외지에 나가 공부했던 사람들이 모두 객사했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학교 공부를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이 서당에 다니시면서 큰 뚯을
품고 일대 개혁을 단행하셨다. 그리하여 학원에165) 들어가서 공부를 하시게 되었다.
원봉학원을 거쳐서 아버님께서는 1934년 4월 1일에 정주 사립 오산 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셨다. 이때 비로소 신 학문을 이수하기 시작하셨다. 약 12km의 통학 거리를 하루도
빠지거나 지각하지 아니하고 다녔다. 16세 되던 봄, 선생는 1935년 4월에 정주 공립 보통학교
4학년에 전학하였다. 원래 아버님의 가정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으나, 아버님의 나이가
15세 때, 둘째 누님과 형님의 중화치유가 동기가 되어 장로교계 신자가 되었다. 아버님은
개종과 더불어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새로운 신앙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이전에 그 누구를
사랑한 것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166)
<빙혼>
누구처럼 휙 청소년 시절에 어디 이어도라도 가셨다가 깨우침을 얻어 32살에 나타나지 않고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학교는 왜 다니셨을까? 무지랭이 선생들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다고?
이미 12살에 웬만한 지식과 지혜는 모두 다 터득했는데...목사 안수 받으려면 졸업증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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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무렵에 집안의 시련과 탕감 역사가 벌어졌다. 소가 급사 하는가 하면, 수일 후에는
말이 죽고, 하룻밤 사이에 돼지가 7마리씩 죽어 넘어졌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불을 때면,
공기가 나가라고 뚫어놓은 조그마한 문으로 불이 뻥하고 빠져나가 처마 끝에 불이 붙기도
했다.”167) 그리고 1년에 13식구 중 5명의 형제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168) 숙부댁의
꼬마의 귀를 개가 잘라 먹기도 했다. 불과 1년 사이에 이러한 재해들이 발생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후에 이것은 아버님 한 분을 하늘이 찾아 세우기
위한 탕감역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기독교에 개종한 이래, 이러한 재해를 목격하고 신학문에 접하면서, 아버님은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를 판별하는 사고의 능력도 급성장해 갔다. 생각하는 방향과 진로도
차원이 다른 데로 급변해 가고 있었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추구하면서 다음 몇 가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누구일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죽음 후에 우리의 생명은 계속 지속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신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가, 혹은 무력한 존재이신가?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하나님은 왜 인류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이 지구상에는 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169)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아버님께서는 담판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책 한 페이지를 가지고 몇 달 동안 연구하고, 한 제목을 가지고도 몇 달 동안 연구하며
들여다 본 적도 있었다.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 실존문제를 놓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만의 결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어 결정적 노정의
길을 가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70)
오랫동안 노심초사하시던 아버님께는 마침내 소명직전에 인생의 목적과 해야 될 일의 윤곽이
서서히 비치기 시작하였다. 인류가 당하는 고통, 불행, 비극, 그리고 이 죄악의 세계를 해방
하는 일이 가장 가치있고 보람이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을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이 이 일을 도맡아야 하겠다고 다짐도 하셨다. 과거의 선인들을 해방하고
조상들을 해방하고 현세인들을 구원하고, 그리고 후손들에게 다시는 불행과 비극과 고통과
죄악이 없는 영원한 이상향을 물려주는 일을 자기가 맡아야 되겠다고 결의를 하셨다.171)
이처럼, 아버님께서는 소명 직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재림주로 아버님을 소명하신다 할지라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내 외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으셨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세계
를 통하여 창조의 신비를 체험했던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까지도 파헤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셨던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新)학문을 통하여, 기독교로의
개종을 계기로 하여, 그리고 집안의 환란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이
나서고 싶은 마음의 준비와 다짐을 이미 하고 있으셨다.
VI. 하늘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장소
원리강론에 의하면 하늘은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중심인물로 택하신다.172) 복귀섭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된 가장 좋은 환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였다. 아버님께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가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삼고 통일되는 것은 하나의 천운이었다고 하신다.
그것은 재림주를 맞아 통일천하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73)
그러면, 이때에 맞게 아버님은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준비되셨을까?
A. 하늘이 필요하는 시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기독교를 중심한 전 세계가 아버님을 받아 들였다면 하나님을
중심한 통일천하가 이룩되는 것은 7년 이내에 가능했음을 여러 번 말씀 하셨다.174)
즉, 하나님은 통일천하를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분위기를 조성하셨는데, 이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일을 감당할 메시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를 맞추어서 미리 준비되어져 있어야 한다.
먼저, 아버님의 잉태의 시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원리강론에 의하면 재림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시작된다.175)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그리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보면, 1917년에서 1930년 사이에 재림주는 이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176)
<빙혼>
빙혼도 어렸을 때 동냥을 온 거지 스님이 빙혼을 보더니 인류를 구원할 관상을 태어났다고
하는 떠드는 바람에 허청에 있는 보리쌀을 한 바가지나 퍼주는 바람에 엄마에게 두들겨 맞아
하마터면 인류 계시는 고사하고 10살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날 뻔한 끔찍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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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재림주는 하늘이 선택한 한민족 가운데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태어나시던 시기는 바로 한국이 일본에 식민지 하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한국 땅에 보내기 위해서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어떠한 조건의 기반이
있어야만 되었다. 그러한 조건이 바로 유관순이 중심이 된 3.1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은 거의 반년 가량 계속되었다.177) 33인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운동에는 종교인, 정치인 등을
포함한 모든 젊은 남녀 노소가 참여하였다. 평화적으로 진행된 이 만세 운동의 가장 큰
정점은 유관순이178) 선두에서 이끈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4월 1일 (음. 3월 1일) 천안 근처
에 있는 아오네 장터에서 있었다. 그리고 그 운동에는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유관순이 이끈 3.1운동은 양력이 아닌 음력 3월 1일이었다. 유관순의 이름은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노래를 통하여서도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때, 희생당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유관순보다도 더 큰 역할을 하다가 고통과 죽임을 당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유관순의 이름이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그것은 그녀가
이끈 3.1운동이 바로 아버님의 잉태와 직접적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음력 3월 1일, 바로
이 날, 아버님께서 잉태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179)
1919년 음력 3월 1일, 유관순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 운동은 비록 하루밖에는 안 했지만,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는 참으로 이 땅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으며, 나라를 찾기 위해 피를 흘리며 몸부림쳤
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가서 “여기에 한국이 있다!”라고 한국말로 외쳤다.180)
더구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할 때, 그녀의 나이는 16세이었다. 아버님께서는, 타락할 때의
해와의 나이가 16세이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관순은 바로 타락 전 해와의 입장을 탕감복귀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이 운동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아 강림을 위한 이러한
내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참소없이 재림 메시아의 씨를 한국 땅에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유관순 열사는 바로
메시아가 지상에 착지할 수 있게 했던 장본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며181) 진정한 의미는 모른다
할지라도 모든 한국사람들이 매 년 3월 1일만 되면, 유관순을 기억하고, 그녀를 ‘유관순 누나’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빙혼>
참말로 이것은 좀 너무하였다. 유관순 할머니가 들으면 정말로 환장하겠다.
유관순은 가브리엘 천사가 조선 땅에서 환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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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의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잉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 1:18). 그 성령 잉태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영웅설화에 근거하여 예수를 영웅 중의 영웅으로 소개하기 위한 설명
방법이었다.182) 아버님의 잉태와 탄생에도 이에 못지않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충모님
이 아버님을 잉태할 당시에 두 마리의 흰 용을 실질적으로 보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실 여부보다는 그 의미가 중요하다. 용이란 무엇인가? 동양 3국에서 용은 천자(天子)나
왕을 상징한다.183) 그래서 한국에서는 왕이 정무를 볼 때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고
하며,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부른다. 다른 사람은 잘 몰랐다 할지라도, 충모님과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아버님에 대해서 깊이 마음에 새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빙혼>
흰 용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얀 도룡뇸도 존재는 한다. 용은 결국 뱀의 좀 더 큰 모습인데.
아마존에 사는 아나콘다가 그 시절에 영화로 나왔을리는 만무하고...
충모님이 보셨다는 흰 용은 과연 무엇일까? 정말 궁금해 죽겠다. 한 마디로 용!용 죽겠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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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신비스런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아버님께서 탄생하기
직전까지 계속 3년간에 걸쳐, 금조(金鳥)가 집 앞에 있는 텃밭 울타리로 심은 노간주나무 위에
날아와 앉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금조의 출현은 특별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금조들이 아버님께서 태어나신 후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184)
아버님의 잉태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철저한 준비와 지상에서의 준비가 일치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잉태로부터 정확히 10개월이 지난 1920년 음력 1월 6일 (양. 2월 25일)에 아버님
은 태어나셨으며, 이로부터 16년이 지나서 소명을 받으셨다.
아버님께서는 타락 당시의 아담의 나이를 16세 정도로 보신다. 16세 때의 소명은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시기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는 17세 때
세례요한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처음으로 마리아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185) 16세 때의 소명은
이러한 예수의 입장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3 아담으로 오신 아버님께서 제1 아담의
타락 이전의 나이에서 소명 받으셨음을 의미하며 제 2아담이신 “예수가 장성할 때까지의
승리적인 기반 위에서 섭리를 출발하셨다” 는 사실과도 깊은 관련성이 있다.186)
16세 때의 소명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된 공생애를 준비
하기 위한 10년간의 기간과도 관련된다.187) 이 준비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하나님과 사탄 세계의 비밀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바로 그러한 앎 때문에 일생동안
어떠한 핍박과 수난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삶을 사실 수 있었다.
이처럼 아버님의 잉태와 소명은 재림주로서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준비된 자들이 받아
들임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에 맞추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조건에 맞추어 준비되신 분이었기에 재림주로 소명을
받게 되신 것이다.
B. 하늘이 필요로 하는 장소
원리강론에서 “예수님은 동방의 나라로 재림하신다.”라고 했으며, 그 가능성 있는 나라를
한국과 일본과 중국으로 보고 있다.188) 이러한 입장은 지리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선민인 한민족 가운데에서 오신다는 전제 조건 하에서 어느 지역으로 오시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지, 결코 일본 민족이나, 중국 민족 가운데에서 오신다는 개념은 아니다.
아버님이 태어날 당시에 한민족은 대부분 한국에서 살고 있었으나, 일본이나 중국에도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빙혼>
빙혼은 자꾸 꿈을 많이 꾸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주 아련한 기억이 꿈에 표출되기 때문이다.
머리에 가시가 박힌 듯 하기도 하고 무거운 막대기를 이고 어디를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심장이 멎어 어느 동굴에 누워 있었는데 3일만에 누가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간 듯한
아리송하고 아리까리한 그런 기억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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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버님은 지역적으로 한국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탄생하셨다. 왜, 한국에서 태어나셨을까? 그것은 탕감복귀의 민족적인 기대가
세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많은 예언자들의 증언과 이 민족이 믿고 있는 각 종교의 도주들이
모두 한국으로 재림할 것이라는 계시가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이 한국에서 결실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189)
아버님은 한국의 많은 지역 가운데에서 특별히 정주에서 태어나셨다. 그것은 이 정주가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충분한 조건을 가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지리적인 특성을 살펴보자. 정주는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있는 백두산을
기원으로 한 강남산맥이 압록강을 앞에 끼고 황해를 향해 서쪽으로 기운차게 줄달음치다가
멈춘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산으로 알려진 묘두산이 있는데
이 산도 역시 많은 전설이 얽힌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있다. 전경선은 영산(靈山)이라는 것은
산의 위엄이 있고,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듯하면서도 도움을 줄 것처럼 무언가 무의식중에
말을 하는 것 같은 산이라고 한다.190) 아버님은 바로 이러한 두 영산(靈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신 분이다.
정주는 또한 국경에 가깝고, 평양과 신의주 간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래(古來)로부터 자주
외침을 받아 격전장(激戰場)이 되어 왔다. 1919년 (고려 현종10)에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진멸시켰던 곳이 바로 이 곳이며, 1231년 (고려 고종18)에 있었던 몽고의 제1차 침입 때,
병마사 박서가 대포차(大砲車) 등 트로이식 지략을 짜내어 몽고의 공격을 강한 정신력과
기지로서 격퇴시켰던 곳도 바로 정주였다.191) 계속되는 몽고의 2-6차의 침략이 있었을 때,
정주에서는 게릴라 활동을 벌리기도 했다. 정주는 1811년 12월에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결전장이 되기도 했으며, 노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초기에 격돌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정주는 3.1운동의 진원지이자 격전지이기도 했었다. 정주는 민족 대표 33인에 속한
이승훈, 이명룡과 김병조의 고향이다. 또한 민족 운동의 요람지, 오산학교의 소재지였고,
3.1운동의 주요 세력인 기독교와 천도교의 교세가 강력하던 고장이었다. 이에 따라, 3.1운동의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더 높았고, 일제의 경계와 그 잔악한 진압, 그리고 천인공노할
보복은 극에 달했다. 3월 1일부터 5월 사이에 정주군 내의 시위상황을 보면 총 집회 18회,
참가인은 5만5천 명, 사망자 120명, 피검자 567명으로 기록되고 있다.192)
이 중에서도 아우네 장터에서의 만세 사건이 있기 하루 전인 31일 정오에는 약 2만5천 명이
집결하여 정주 우체국 앞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가두 시위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맨 앞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부르는 최철일을 흰 칼로
오른손을 내려 쳤다.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자, 왼손을 내려 쳤다. 그래도 만세를 부르자,
이번에는 목을 내려 쳤다.193) 이어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사정없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여, 52명이 희생되었으며, 70여명이 검거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일 아침 6시경 이들은
정주 교회에 불을 질러 전소케 하였으며, 2일 새벽에는 오산 학교와 기숙사에도 불을
질렀다.194)
정주가 3.1운동의 진원지이자, 격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종교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주가 속해 있는 평안도는 기독교의 발상지이자 교세가 가장 왕성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 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도의 조선 기독교인 가운데 약 36%가 평안도 출신이었으
며, 1932에는 30% 정도가 평안도 출신이었다.195) 이 중에서 평안북도의 정주는 선주,
신의주와 함께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교세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196)
3.1운동의 깊은 영향을 끼쳤던 기독교인의 인구 분포는 1920년을 기점으로 볼 때, 전 인구의
1.9%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민 100명당 2명 정도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나라의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 때문이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길선주 목사 (1869-1935)의 계시록에 근거한 부흥회와 전국적으로 전개된
백만구령운동(百萬救靈運動)은 곧 메시아 강림과 함께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확신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었다.197)
정주에는 대대로 3가지의 자랑거리가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이조시대에는 과거 급제자가
전국에서 제일 많았다는 사실이다. 평안북도지에 의하면 이조시대에 평안북도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가 561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277명이 정주 출신이었다.198)
청천강 이북의 평안북도는 이조시대에 중앙 정부에서 소외되었던 지역이었기에
정주에서 급제자가 많이 나왔다는 사실은 대서특필할 만한 일이었다.
정주에서는 개화 이래로 문인과 재자(才子)가 전국에서 제일 많이 나왔다. 교육계에서 고려대
초대 총장이었던 현상윤, 연세대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언론계에서는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서춘, 문인으로서 신문화의 개척자이었던 이광수, 시인 김억,
김소월, 소설가 이석훈 등이 이곳 출신이다. 1979년 동아일보사에서 선정한 한국 근대인물
100인선에 보면 서울 16명, 평양 6명에 이어, 정주가 5명이었다.199) 전국에 200여 개의 군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서울과의 인구차를 생각한다면 정주가 전국 1등일 것이다.
그래서 정주는 예로부터 소경(小京)이라 불려졌다.
정주에는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던 자들이 많이 있다. 평안도 사람은 예로부터 용맹하며,
성급한 기질이 있어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 불리워졌다. 박상희는 이러한 서북인들의
성격에 근거하여 “금후 조선에 민족적 운동이 일어난다 하면, 제 일선에서 깃발을 휘두르는
사람은 서북인임”을 예언했다.200) 박상희의 예언처럼 실제로 서북인은 독립 운동의 선두에서
왔다. 3.1운동 민족 대표 48명중 6명이 정주 출신이며, 선언문을 기초한 5명중 한 사람이
문윤국 목사이다. 1910년 12월,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관련된 105인 중 44명이 정주 출신이었다.
이처럼 정주는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역사를 가진 지역으로 손꼽혔으며, 3.1운동의
격전장이 말해 주듯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던 지역이기도 하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왕성했던 지역으로 메시아 사상이 극도에 달했으며, 이 사상에 근거하여 민족의 갈 길을
열었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배경은 인류의 구세주로 오시는
아버님 한 분을 탄생시키기 위한 배경이 되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도 정주란 하나님이 정한 고을로서 복귀된 고을, 심정의 출원지라고
해석하신다.201)
<빙혼>
순복음 조용기 목사가 이 글을 읽으시면 감탄과 더불어 감동을 하실지도 모르겟다.
울산출신인 조목사님은 풍수지리를 잘 몰랐는데 이 글을 참고하여 사후 조용기 평전을
만들 때 참고하시면 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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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군지’의 ‘묘두산 유격전기’에 의하면, 아버님이 태어나신 상사리(上思里)는 이명룡 장로를
비롯 문윤국 목사 기타 독립 투사들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 또,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202) 1945년 해방 후에도 사상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았으므로 ‘3.8선 이남
부락’이라 불리워지기도 했다. 아버님은 상사리(上思里)란 위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동네로 인식하시고 계신다.203)
이처럼 아버님께서는 하늘이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한 시기에 맞게 잉태되고 탄생하셨다. 이는
하늘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공생애를 출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에 맞추어 준비되었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그 때를 가장 간절히 소망했으며, 그 때를 위하여 가장 선두에 서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준비했던 정주 지방에서 탄생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도록 시기와 장소에 알맞게 준비되어 있었던 분이 바로 아버님이셨다.
VII. 결론
아버님이 재림주가 되신 원리적 근거를 중심 인물이 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조건에 근거하여
살펴 본 결과, 아버님의 소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를 이룰 수 있도록
훈련시켜 오셨으며, 문씨 종족 가운데서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준비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훈련된 한민족의 모든 정기와 준비된 문씨 종족의 모든 공적이 농축된
천품을 가지고 아버님은 태어 나셨다.
<빙혼>
천부교 박태선 장로, 영생교 조희성 목사, 이초석 목사, 대순진리회 강증산 등이 문선명
참아버님을 만나면 뭐라고 할까? “일단 고스톱 한 판 때리면서 이야기 합시다”라고 할까?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빙하기 시대 이전 그린란드에서 환국을 이끌었다가
빙하기 시대 맘모스를 타고 남하를 하면서 여러 갈래로 흩어졌는데 모두가 각 지역에서
거대한 종교의 시조가 되어 현생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천민임을 부정할 수 없다.
21세기 현재에도 나라는 조그만해도 영적인 능력자가 지속적으로 태어나 정신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종교의 광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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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어진 천품이 소명 이전의 아버님의 삶을 통해 더욱
다듬어지고 개발되어졌기 때문에 하늘은 아버님 외에 다른 사람은 메시아로서 선택할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통일 천하를 이루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던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공생애가 출발될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한 시기에 준비되어진 인물이셨으며,
메시아 재림 사상이 가장 열렬했던 지역 중의 하나인 정주, 바로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고을에서
준비된 분이기에 하나님은 아버님을 재림주로 부르신 것이다.
아버님은 단지 하나님께서 소명하셔서 재림주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두고 준비된
분으로서 재림주가 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조건이 소명 이전에 아버님 안에서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버님의 소명이 상대적
소명이 아니라 절대적 소명이요, 유일한 소명이요, 불변의 소명이요, 영원한 소명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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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아버님, 「세계평화 건설의 주역이 되자」(서울: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1992), p. 3.
2). 참아버님, 「구원섭리사의 원리관」(1996년 7월 31일), p. 11.
3).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원리강론」(서울: 성화출판사, 1995), p. 219.
4). Ibid., p. 548. 또한, 롬 2:28-29; 9:6을 참조.
5). Ibid., p. 549. 롬 11:11; 행 13:46; 마 21:33-43 참조.
6). Ibid., p. 549.
7). 임승국 주해, 「한단고기」(서울: 정신세계사, 1997), p. 361.
8). Frederick Sontack, Sun Myung Moon and the Unification Church (Nashille, NY: Abington,
1977), p. 130.
9). Ibid.
10).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서울: 성화사, 1988), p. 148.
참아버님, 1997년 4월 8일 서울 수택동 중앙 수련원에서.
11).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서울: 한길사, 1985), p. 73.
12). 아버님께서는 “과거에 이 민족에게 슬픔이 있었다는 것은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함”
이라고 해석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p. 164를 보라.
13). Ibid., p. 185.
14). Ibid., p. 180, 185.
15). 참아버님, “참사랑을 중심한 조화로운 세계 이룩하는 주역이 되자” 「사보」(1989년 7월호),
p. 2.
16). Ibid.
17).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Ibid., pp. 143-45.
18). Ibid., p. 184.
19). 임승국, Ibid., pp. 362-67.
20).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p. 146-47.
21). Davis Winston, Japanese Religion and Society: Paradigms of Structure and Change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 pp. 33-4.
22).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 152.
23). 여기서 6,000년은 문화사적인 의미로서의 기간이지 실지는 2천5백만년까지 가기도 한다.
참아버님, 1997년 8월 9일, 수택동 중앙 수련원에서; 1997년 9월 1일 벨베디아에서.
24). 참아버님, 「우주의 근본을 찾아서」, 1996년 8월 1일 워싱톤에서; 「참사랑을 중심한 참가정
과 참우주」, 1997년 5월 3일 이스트 가든에서.
25).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p. 162-69.
26).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 163.
27). 「원리강론」, p. 556.
28).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 165.
29). Ibid., p. 166.
30). Ibid., p. 167.
31).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은 부모가 자기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을 잃었을 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1997년 4월 8일 서울 수택동 중앙수련원에서.
32). 참아버님, 「참사랑을 중심한 참가정과 참우주」, 1997년 5월 3일 이스트 가든에서.
이 말씀은 1997년 5월 19일 우루과이에서, 1997년 6월 16일 워싱톤에서도 선포되었다.
33). 함석헌, Ibid., p. 78.
34).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 193; 1997년 7월1일, 브라질 사로보로 호텔에서;
1997년 8월 9일 수택동 중앙수련원에서.
35). 역사편찬 위원회, “참아버님의 탄생과 그 배경” 「사보」147 (1996년 5-6월호), p. 44.
36).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2-79.
37). 「사보」147-56.
38). 남평문씨의 시조로부터 참아버님까지의 계보를 위해서는 「사보」제147호
(1996년 5-6월호), p. 32를 참조하라.
39). 문창수, 「섭리로 본 문씨 종족」(서울: 신광종합 출판, 1994), p. 10.
40). 시조의 탄생 설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창수, Ibid., pp. 10f.를 참조하라.
41) Ibid.
42). 문인성, “하늘이 준비한 남평 문씨” 「사보」147호, p. 83.
43). 문창수, Ibid., p. 148.
44). Ibid., p. 13.
45). 자세한 업적에 대해서는 역사편찬 위원회, “시조 무성공” 「사보」147호, pp. 86-90을
참조하라.
46). Ibid., p. 13.
47). 문창수, Ibid. p. 13; 「사보」147호, p. 89.
48). 「사보」147호, p. 90.
49). 정중부의 난으로 고려왕조에 무신정권이 시작되었다. 무신정권은 의종 24년 (1170년)에
성립되어 고종 45년 (1258년)에 몰락한 특수 정권을 말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8: 고려
무신정권」(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93년), p. 1.
50). 「고려사 절료」제11권, 의종 장효대왕 17년 8월; 최덕교, 이승익, Ibid., p. 650;
「한국인의 족보」, p. 456.
51). 최덕교, 이승익, Ibid., p. 650.
52). 문창수, Ibid., p. 18.
5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 171-251.
54). 문창수, Ibid., p. 18-19.
55). 최덕교, 이승익, Ibid., p. 651.
56). Ibid.; 「한국인의 족보」, p. 458.
57). 문창수, Ibid., pp. 24-5.
58). 최덕교, 이승익, Ibid., p. 651.
59). Ibid.; 문창수, Ibid., p. 24.
60). 문창수, Ibid., p. 25.
61). 문창수, “문선명 선생은 문익점 할아버지의 23세손” 「사보」147호, p. 76.
62). 문창수, Ibid., p. 25.
63). 근세가계를 위해서는 「사보」제147호 (1996년 5-6월호), p. 39를 참조하라.
64). 역사편찬 위원회, 「사보」40호, pp. 2-3.
65). 김홍복, ‘정주에서 소문난 복 받을 집’, 「통일세계」, 제147호 (1983, 2), pp. 34-35.
66).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통일세계」199호, p. 159.
67).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39-52.
68).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역사편찬 위원회, ‘문선명선생의 가계’ 「사보」, 제40호(1985, 3),
p. 2.
69).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91-113.
70). 「기독교 대백과 사전」6, (서울: 기독교문사, 1982), p. 550.
71). 키치로 타케다, 「성지 정주: 문선명 선생의 탄생, 소년시대」(토쿄: 광신사, 1995), p. 43-4.
7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13-151.
73). 전경선, ‘충절의 고장, 참아버지의 고향‘ 「통일세계」제291호 (1995, 5), p. 211
74). Ibid.
75). 당시에 벼 1섬에 7원한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의 7만원은 상당한 액수의 돈임을 알 수
있다.
76). 그것은 문윤국 목사의 형님이신 문치국 선생이 이 내용을 사실대로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조카 며느리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 일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 알려지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선의의 피해자가 많이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77). 문용기장로의 증언, 「통일세계」제199호, p. 161.
78).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통일교회사」(서울:성화사, 1978), p. 5.
79).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문용기 장로의 증언”, 「통일세계」제209호, p. 126.
80). 참아버님, 1996년 7월 26일, 이스트 가든에서.
81).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문용기 장로의 증언” 「통일세계」제221호, p. 161.
82). 조헤영의 증언, 1997년 5월 6일, 이스트 가든에서.
8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 198-149.
84).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문용기 장로의 증언” 「통일세계」제199호, p. 16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46-160.
85).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2-80.
86). 참아버님, 1996년 7월 26일 이스트가든에서.
87). 문용기, “난 따라꾼이였지오” 「사보」제148호 (1996, 7-8호), p. 77.
88). 참아버님, 1997년 1월 2일, 브라질 쌍파울로에서.
89). 역사편찬 위원회,「사보」150호 (1997년 1-2월호), p. 75.
90).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9-209.
91).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9-209.
9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37-98.
9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2-79; 203-211; 137-250.
94). 아버님께서는 제4차 세계순회노정을 승리로 마치시고 (1972, 11, 21-1973, 7, 22) 1973년
음력 칠월칠석 (양. 8월 5일)을 맞이하여 청평에서 문씨 씨족 해방식을 거행하셨다. 그리고
이날을 기하여 영계개문(靈界開門)에 기원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1978년 11월 2일에는
문씨 종족해방과 세계 종족 해방 선포식을 거행하셨다. 「사보」147호 (1996, 5-6호), pp. 58-59
참조).
95). 참아버님, 1997년 4월 19일, 제주 국제 연수원에서 문씨, 한씨 종족대표 수련회의 폐회식
에서. 이 때, 아버님께서는 문씨, 한씨 종족들은 족보를 따지지 말고 축복의 순서에 따라서
형님 동생이 결정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남평 문씨와
청주 한씨의 새로운 조상이라고 선포하셨다.
96). 이러한 내용은 1997년 4월 9일 미국 뉴욕에서 김원필 선생과의 대화에서 확인된 것임.
97). 아버님께서는 1997년 4월 26일 미국 워싱톤에서 있었던 “아시아 문인 회의”의 만찬사를
하신 이후, “천문지문 통일정(天門地門 統一情)”이라는 휘호를 써 주셨다. 이 때, 천(天)과
부(父)와 문(文)은 획수에서 뿐만이 아니라, 의미 상으로도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셨다.
98). 문창수, 「사보」제147호 (1996, 5-6호), p. 74.
99).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30-192.
100).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94-349.
101). 「원리강론」, p. 219.
102). 「통일교회사」, p. 6.
103). 역사편찬 위원회,「사보」149호 (1996년 11-12월호), p. 23.
104). 그러한 체력은 아버님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 할머니 등, 3대의 며느리들이 모두
건강했기 때문이다. 참아버님, 1996년 7월 24일, 이스트 가든에서.
105). 「통일교회사」, p. 6.
106). 고려대학교 원리연구회, 「참부모님의 생애 노정」p. 38.
107). 「사보」148호 (1996년 7-8월호), p. 79;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47-316.
108). 1997년 5월 6일 이스트 가든에서, 조혜영의 증언.
109).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81-51; 참아버님, 1997년 6월 5일, 이스트 가든에서.
110). 참아버님, "무도연합의 갈 길",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통일세계」314호 (1997년
4월호), p. 36.
111). 참아버님, 1996년 11월 13일, 우루과이 빅토리아 프라자 호텔에서.
11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45-160f.
11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63-160; 183-251; 201-295; 202-214.
114). 「사보」148호 (1996년 7-8월), p. 33-35.
115).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46-158.
116).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4-316.
117).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 22-128.
118) 1997년 6월 15일 워싱톤 제퍼슨 하우스에서.
119). 「통일교회사」, p. 9.
120).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44-32; 211-149.
121).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1-308; 225-280.
12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32-283; 164-312.
12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4-249.
124).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71-258.
125). 이러한 탁원한 기억력은 부친이신 문경유선생, 조부이신 문치국선생으로부터 온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력은 훗날 기록된 문서를 남기기 힘들었던 일제치하나
공산치하,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섭리를 행하실 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님은 어떠한 기록적인 문서보다는 이 기억력에 근거하여 섭리를 하시고 계시다.
126). 「통일교회사」9-10.
127). 고려대학교 원리연구회, Ibid.
128). 「사보」148호 (1996년 7-8월), p. 41-42.
129). Ibid., p. 43.
130).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15-33f.
131). 「통일교회사」, p. 9.
132). 참아버님, 1997년 6월 5일, 이스트 가든에서.
133).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97-39.
134). 「사보」148호 (1996년 7-8월), p. 50-51.
135).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46-161.
136).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02-222.
137).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5-161; 182-276.
138).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5-161.
139).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41-158.
140).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21-23.
141). 「원리강론」, p. 219.
142). 참아버님, 1997년 3월 22일, 이스트 가든에서.
143). 참아버님, 「우주의 근본을 찾아서」1996년 8월 1일, 워싱톤에서; 「참사랑을 중심한
참가정과 참우주」 1997년 5월 3일, 이스트 가든에서.
144). 1997년 3월 10일 청평 기도원 기공식에서. 이 말씀은 4,300여 명의 식구들과 함께
예수를 비롯한 사대성현들도 그 자리에 참석해서 들었다.
145). 참아버님, 1996년 초, 벨베디아에서.
146). 참아버님, 1997년 3월 10일,
147). 「원리강론」p. 15.
148). Ibid., p. 20
149). 김원필선생의 증언, 1997년 4월 24일, 뉴요커 호텔에서. 김원필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님께서 이북에 계시는 동안에는 이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원리원본」이
기록될 때, 처음으로 밝히셨다고 한다.
150). 「문선명선생 말씀선집」203-185.
151). 「사보」148호, p. 11.
152). 「문선명선생 말씀 선집」137-223.
153). 「사보」148호, pp. 13-14.
154). 「문선명선생 말씀선집」137-212.
155). 「사보」148호, pp. 15-16.
156). 「문선명선생 말씀선집」186-303; 196-104.
157). 「통일교회사」p. 8; 「문선명선생 말씀선집」136-132.
158). 「통일교회사」, pp. 8-9; 「사보」148호, pp. 21-22.
159). 참아버님, 1997년 6월 5일, 이스트 가든에서 있었던 ‘참만물의 날’ 경배식 직후의 말씀.
160). 참아버님, 「참만물의 날과 화동의 주인」, 1997년 6월 5일, 벨베디아에서 있었던
‘참만물의 날’ 기념사에서.
161). 「사보」148호, pp. 24-32.
162). 「통일교회사」, p. 9.
163). 「사보」41호, p. 11.; 참아버님, 1997년 6월 15일, 원싱톤 제퍼슨 하우스에서.
164). 「사보」148호, p. 10.
165). 「통일교회사」, p. 5; 「사보」148호, pp. 67-68, 81-82.
166). 「문선명선생 말씀선집」144-145.
167). 참아버님, 1997년 2월 14일, 이스트 가든에서; 「사보」150호 (1997년 1-2월), p. 20.
168). 참아버님, 1997년 2월 14일, 이스트 가든에서.
169). 「문선명선생 말씀선집」102-288.
170). 「사보」150-24.
171). 「통일교회사」, pp. 12-13.
172). 「원리강론」, p. 219.
173). 참아버님, 「애승일의 의의」1997년 1월 2일, 브라질 쌍파울로에서.
174). 참아버님, 1997년 1월 1일, 2일, 브라질 쌍파울로에서; 1997년 2월 13일, 뉴요커
호텔에서; 1997년 4월 8일, 서울 수택동 중앙수련원에서 등.
175). 「원리강론」, p. 528.
176). 「원리강론」, p. 430.
177). 신석호, “3.1운동의 전개”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서울: 동아일보사, 1978),
pp. 169-170;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p. 338.
178). 유관순 (1914년 3월 26일 - 1920년 10월 12일)은 그 때, 이화 여고 학생이었다.
179). 김명대, “섭리의 때와 해와국가의 사명”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통일세계」280호
(1945년 5월), pp. 226-7; 수도 켄, 「성약섭리해설 초고」, p. 110.
180). 김명대, Ibid.; 수도 켄, Ibid., p. 111.
181). 김명대, Ibid., p. 227에서 재인용.
182). 오택용, “세계평화가정연합 창설대회의 섭리적 의의” 「사보」151호 (1997년 3-4월),
p. 121.
183). 전경선, “충절의 고향, 참아버지의 고향” 「통일세계」제219호 (1995년 5월), p. 209.
184). 「통일교회사」, pp. 5-6.
185). 1996년 4월 19일, 뉴요커 호텔에서 있었던 지도자 회의에서.
186). 참어머님, ‘구원섭리의 원리관’, 1996년 7월 31일 워싱턴에서
187). 참아버님, 「세계평화 건설의 주역이 되자」1992년 8월 24일, 서울에서 있었던 제1회
세계문화체육대전의 만찬사에서.
188). 「원리강론」, pp. 549-51.
189). 「원리강론」, pp. 551-553; 「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pp. 119-233 참조.
190). 전경선의 증언, 「사보」 149호, (1996년 11-12월) pp. 47-9.
191). 타케다 요시오, 「성지 정주」(동경: 광신사, 1995), p. 64; 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 20」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94), pp. 212-15.
192). 기독교문사, 「기독교대백과사전」13권, p. 1018.
193). 타케다 요시오, Ibid., pp. 28-31.
194). 「기독교대백과사전 13권」, p. 1018.
195). 타케다 요시오, Ibid., p. 36.
196). Ibid., p. 38.
197). Ibid., p. 39-41.
198). Ibid., p. 66. ‘정주군지’에 의하면, 정주 출신은 292명이다.
199). 그들은 이승훈, 김도태, 현상윤, 이광수, 김소월 등이다. Ibid., pp. 68-69.
200). 박상희, 「조선 서북인의 특질」(1927). 타케다 요시오, Ibid., p. 70에서 재인용.
201). 「사보」147호 (1996년 5-6월), pp. 9-11.
202). 타케다 요시오, Ibid.
203). 「사보」Ibid., p.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