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즈음 시간 나는 대로 독서를 한다. 과거에 비해 독서 시간이 늘어난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독서에 더 흥미를 느꼈다기보다 코로나-19로 인한 행동의 제약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독서를 한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는 행위이므로 즐거운 일이라 나름 자위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책은 점점 무게감을 더해가는 것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바람에 책장은 더디게 넘어가고 읽다보면 다시 책장을 뒤로 넘겨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도 독서시간이 전보다 늘어난 것은 그런 지루한 일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거다.
『이동진 독서법』은 내 그런 독서법에 맞장구를 쳐준다. 이 책은 저자의 독서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전반부는 자신의 독서 비법 또는 요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후반부에는 다른 작가와의 대담 형식으로 독서를 주제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도서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도서 목록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므로 그 부분을 주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보통의 경우 학창 시절,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으로부터 누구나 예외 없이 독서를 권장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권장도서 같은 것을 학년별로 정해놓고 독서를 권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런 책들을 왜 권장도서로 선택했는지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저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 지도를 업으로 하는 때문인지 대답 또한 교과서적이다. 그러니 당연히 학생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오히려 그러한 독서 권장이 학생들로 하여금 책을 멀리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세상에 독서보다 흥미로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책읽기만 강요했지 책을 어떻게 읽으라는 말하자면 독서지도는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쉬는 시간이면 도서실로 학생들을 우르르 내모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생들의 독서량에만 주목한다. 다독을 하는 아이도 있고 정독을 하느라 늦게 읽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무시되고 포도 알이나 그래프로 책을 읽은 권수만 기록한다.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건성건성 책을 읽거나 그림이 많고 책이 얇은 것을 주로 찾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독서 확인 방식은 아이들이 오히려 독서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독서는 그저 책을 가까이 하는 일이다. 그저 아무 때나 틈나는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말은 독서를 하는데 너무 어깨에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읽고 싶을 때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 것을 조언한다. 책은 꼭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꼬박꼬박 읽지 않아도 된다. 재미가 가득한 소설이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처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내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책이라면 읽고 싶은 부분만 쏘옥 빼서 읽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나는 저자에 비해 독서량이 턱없이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책을 읽은 방법이 있다. 물론 가벼운 독서는 속독으로 빠르게 읽어가지만 대부분의 독서는 메모를 동시에 한다. 메모는 원문 그대로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용의 축약이다. 축약의 경우 그 자체로 내용을 되새김질이 되는 것이다. 되새김질은 독서한 내용을 내 것으로 소화하게 하며 그것은 다시 정제된 나의 언어로 순치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독서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된다. 그때 느끼는 희열은 크다. 물론 그 나만의 언어로 순치된 내용이 보잘 것이 없더라도 말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당연히 제목이 눈에 띄는 것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다음으로 서문을 읽는다. 서문에는 그 책을 어떤 생각으로 왜 썼는지를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목차를 훑어본다. 목차의 구조를 보면 대강 그 책의 무게가 내게 전해져 온다. 바로 어제까지 읽은 책이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이었는데 제목도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책 서문 내용이 가슴으로 오롯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는 동안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탓에 혼쭐이 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뭔가 물리학의 한 구석을 조금은 들여다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조금씩 독서량을 늘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물리학의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물론 소설의 경우 목차가 주는 무게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그래도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을 강한 욕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소설은 흐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메모를 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소설도 제법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들은 여전히 메모가 유효한 독서방법이 아닐까 싶다.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는 가계도를 그려놓고 그곳에 살을 붙여가며 읽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많은 등장인물과 소설의 장대한 스케일을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내 경우도 소설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어가지만 그 외의 책들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을 중간 중간 선택적으로 읽기도 한다. 특히 글을 써야할 경우는 그런 일은 흔하다.
독서는 책과 대화를 하는 일이다. 대화는 즐거워야 한다. 즐거운 대화를 하려면 대화 상대방과 친밀감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책을 늘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저자는 책을 서가에만 꽂아두지 않고 책상 위, 식탁 위, 거실 등 자주 앉는 곳이면 어디든 책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 경우는 거실에는 책을 잘 두지 않는다. 거실은 내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실에는 늘 집사람이 틀어놓은 텔레비전이 소리를 뿜어대고 있으며, 주방에서는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쉴 틈이 없다.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서재는 서재만이 주는 안온함이 있다. 작은 공간이 주는 아늑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독서는 분위기다. 정신이 맑지 않으면 읽고도 뭘 읽었는지 모른다. 뭘 읽었는지 모른다면 그건 그저 시간을 죽이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나는 그걸 독서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든 이동진의 『이동진 독서법』은 내 독서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만으로 충분한 책이다. 이동진 독서법이 있다면 나의 독서법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