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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칠성통하면 제주의 명동거리였다. 윤경중 어린이가 거기서 자랐다면,
이 정도의 갈치국에다 녹두를 섞은 곤밥이 놓인 제주도 호화밥상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옛적에는 국만 따로 그릇에 담고 밥은 낭푼이에 담아 밥상 가운데 놓고 같이 숟가락질을 했다.
그래서 입이 짧거나 먹성이 좋지 않으면 담는 양이 적어진다. 그런데다 지금과는 달리 입들이 많았으니.
1950년대 관덕정에서 칠성통 입구 모습
일도1동은 산지천하류 지역에 위치하여 인접동으로는 서쪽으로는 삼도2동, 남쪽으로는 일도2동, 이도1동, 동쪽으로는 건입동 등과 접해 있으며. 제주시의 "명동" 또는 "중앙동"으로서 금융기관 및 동문재래시장, 지하상가 등이 위치해 있으며 또한 극장 2개소가 있다. 또한 새주소의 도로명으로는 중앙로, 관덕로, 북신로, 칠성로, 간수로, 신흥로, 두성로, 동문로, 운주당로, 성지로, 동선1로, 삼천로, 남수각로 등이 있다.
제주시가지 - 사라봉에서 촬영한 제주시가지의 모습이다. 멀리 도두봉이 보인다.
칠성통(일도1동) 설촌유래
일도1동(一徒一洞)은 1955년 8월 13일 시제(市制)실시에 따라 일도리의 일부 생깃골, 막은골, 샛물골, 산지목골, 칠성골, 객사골, 해짓골 등을 갈라서 일도1동리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일도2동이 남쪽으로 계속 개발 확장됨에 따라 지금은 재구획되어 동문 성안은 거의가 일도1동에 속하고, 일도2동은 신산동과 인화동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일도1동은 산지천 동쪽 동문시장 일대의 내팟굴과 동문시장 안 구 동부교회에서 동양극장 뒷골목에 이르는 구명골, 구 영락교회, 운주당 등이 있었던 소로기동산, 고령전, 운주당골, 동문파출소 부근의 동문고로가 북쪽으로 공진정이 있었던 감리교회, 삼천서당이 있었던 선일 건재사 앞 산지목골, 칠성동 일대의 칠성골, 새문골, 막은골, 그리고 바다쪽으로는 해짓골 까지로 제주시에서 제일 작은 마을이지만 인구밀도가 조밀한 중심지이다.
일도1동에 속하는 마을은 내팟굴, 샛물골, 창신골, 칠성골, 운주당골, 막은굴, 배부른동산, 성굽, 고령밧, 산지목골, 알생깃골, 소로기동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1960년대 제주시 칠성통 거리
칠성통은 제주시 중앙우체국으로부터 동문로터리 분수대 옆 골목길을 기준으로 북쪽에 형성된 상가지역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주시의 제일가는 중심상가였다. 제주의 명동이라할까?
제주시 삼도2동 속칭 ‘무근성’ 지역에 제주도청, 제주경찰서, 법원, 제주세무서, 금융기관 등이 밀집돼 있었다. 이 주변에는 제주지역 토호(土豪)들이 거주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칠성통 상권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사람들이 칠성통의 상권을 잡았었다.
1955년 이후 1960년에 이르면서 미용실도 여러 군데 생겨났다. 사진 속에서도 미용실과 카텐사, 금은방 등의 간판이 눈에 띈다. 1980년대까지는 명실상부한 제주 최고의 상권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개발로 신제주와 일도지구 상권이 발전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제주시청 대학로 주변 상권이 급부상하면서 칠성통 상권은 점차 빛을 잃고 있다.
▲ 1960녀대의 동문로
칠성통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산지천 너머로 보이는 1960년대의 제주시 동문로 풍경이다. 그 당시 도로는 확장되었으나 아직 포장은 이루어지지 않아 자갈들이 길 위로 드러났다.
뭉개구름을 배경으로 오름들이 멀리 보이고 등짐을 진 두 아낙이 걸어오고 있다. 가느다란 가로수가 지지대를 받치고 가냘프게 섰다. 기와집 앞의 전봇대와 대조를 이룬다. 저 기와집이 1960년대 말 내가 제주시로 유학와서 고등핵교 일학년 때 1년동안 자취를 했던 변호사집이 아닌가 한다. 그 당시에 어쩐지 집안이 쇠락하던 분위기였다. 지금은 이 기와집 두 남매가 어찌 사는지...
▲ 칠성통 옛 동백다방터-1951년 피난왔던 계용묵선생의 문학산실이었다.
'칠성통'에 젊음과 낭만을 사러 오세요
칠성로 ‘패션-쇼핑의 거리’ 문화축제
2007.12.11 안현준 기자 <제주의 소리>
▲ 발레공연, 관객과 출연자가 서로의 호흡을 느낄 만큼 가깝다. ⓒ 제주의소리
통기타 반주에 맞춰 걸쭉한 제주사투리로 노래를 부른다. 키다리 피에로 아저씨가 경품권을 나눠주고 돌하르방이 걸어 다니자 아이들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멈춰서고 빈 의자가 가득 채워진다.
‘패션-쇼핑의 거리’ 문화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웬만해선 이런 신명나는 잔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 지하상가 '가을패션쇼'
오늘은 닉사이클팀의 비보이 공연도 있고, 헤라스 밸리댄스팀의 춤도 있다, 홍익핸드벨콰이어리틀샤이닝의 아름다운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자리에서 무대로 나와 신나게 춤을 추고,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온 아기를 잡으러 온 엄마도 노래 한 곡을 선물하고 내려간다. 오로지 즐거움만이 가득한 신나는 잔치 한마당이다.
오늘 축제를 주관한 제주칠성로상점가진흥사업협동조합 강승미 이사장은 “유럽 등에 가보면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이벤트 펼쳐지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부르는 등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상가가 너무 부러웠어요.”라며 칠성로를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젊음과 낭만을 사고파는 상가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축제가 끝나면 항상 평가회의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인교육을 통해 ‘고객은 왕이 아니라 신’이라고 배웠어요. 이제 우리는 신을 감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라는 말에서 칠성로 상가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석종 주민자치위원 간사는 “처음엔 주변상가에서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시끄럽다고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상인도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인들이 주민자치위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넵니다. 칠성로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앞으로 손님들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말입니다. 게다가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노인어르신에게 국수를 삶아드리는 행사에 상인회에서 빵과 간식을 사서 위문을 오는 등 이젠 정말 한가족이 된 것 같습니다.”라며 웃는다.
▲ 칠성통을 가득매운 축제 참여자들
옆에 있는 문원영 일도1동 직원도 “축제를 통해 지역주민과 상인 그리고 행정까지 모두가 한가족이란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요.”라며 이제는 모든 일에 협조가 너무 잘 이루어져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제는 말 그대로 ‘패션-쇼핑의 거리’ 문화 축제는 일도1동 모두의 것이었다. 일도1동 주민자치위원회와 칠성로상점가진흥사업협동조합, 지하상가상인회가 번갈아 가면서 무대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통장협의회에서는 청소와 차량통제를 부녀회에서는 음료봉사를 해주고 청년회에서는 질서유지에 협조해 주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역주민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 축제의 영원한 마스코트 '삐에로'
이제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 축제가 벌어진다는 무언의 약속이 시민과 이루어져 내년에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강승미 이사장이 말했던 것처럼 칠성로 상가에서 젊음과 낭만을 살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12월 17일 토요일에는 지하상가에서 저녁 8시부터 크리스마스이브행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선물도 마련되어 있고, 노래와 레크리에이션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하니 가족과 함께 찾으면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제주의소리>
‘함께걷는 행복한 동행길’ 상권 부흥 꿈꾸다
산지천 하류 지역 전형적 로데오 거리
도시 확장 밀려 상업 1번지 명성 퇴화
패션-쇼핑거리 만들기 통해 부활 시도
2009년 09월 09일 현민철 기자 <제민일보>
▲ 산지천 빛축제
제주의 상권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칠성통이다. 도심을 가르는 산지천을 중심으로 동문재래시장과 중앙지하상가가 위치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주시 상권이 중심이라는 의견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이들 상권이 위치한 제주시 일도1동은 지난 1955년 일도리의 일부 생깃골, 막은골, 샛물골, 산지목골, 칠성골, 객사골, 해짓골 등이 나눠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00여세대 인구 3700여명으로 도심지라고 보기에는 다소 작은 주민들이 모여 제주의 최고 상권이란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일도1동은 칠성로 상권으로 통상 불린다. 산지천 하류 지역에 위치해 예전부터 각종 금융기관과 동문재래시장, 중앙지하상가 등이 일찍 자리를 잡아 제주시의 명동으로 인식돼 왔다.
칠성로 상권은 크게 칠성로 상점가와 중앙지하상가, 동문시장 등 3곳으로 나뉘는데 칠성로를 따라 형성된 상점가는 패션점들이 몰려 있는 전형적인 로데오거리다.
400여개 점포가 들어서 있는 중앙지하상가는 제주시 인구가 41만명인 중소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또 동문재래시장은 제주항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에 힘입어 수산물을 주축으로 싱싱한 해산물과 특산물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과 도민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전형적인 재래시장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칠성로 상권은 제주시민은 물론 도민 모두가 의류나 잡화 등을 살 때 필수적으로 들르는 패션 쇼핑의 일번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주도에는 단 한 개의 백화점도 없기 때문이다. 지상의 의류점들은 대체로 중고가, 중앙지하상가는 저가로 차별화된다.
가격대를 기준으로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쇼핑공간으로 나눠진 셈이다.
중앙지하상가는 저가 브랜드와 보세 의류가 몰려 있는 쇼핑명소로 지상에 위치한 칠성로에 비해 여름과 겨울에 특히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이 이곳 상인들의 말이다.
일도1동이 자랑하는 패션-쇼핑의 거리문화 축제는 이런 칠성로 상권이란 토대에서 출발한다.
전통 재래시장 상권과 제주상업의 1번지, 제주시의 명동 등의 명성을 받아온 칠성로 상권이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행정과 지역주민, 상인들이 옛 명성을 살리기 위한 취지로 패션-쇼핑의 거리문화 축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함께 걷는 행복한 동행길'이라는 주제로 지난 2007년 5월 시작된 패션-쇼핑의 거리문화 축제는 매월 넷째주 토요일마다 다양한 주제로 열려 벌써 24회째를 맞았다.
올해 열린 패션-쇼핑의 거리문화 축제 내용을 보면 상인들이 손수 내놓은 제품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사랑의 경매 행사부터 청소년댄스경연, 비보이 경연, 란제리 패션쇼, 'Littie artist festival'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히 지난 5월에는 패션-쇼핑의 거리문화 축제와 함께 제2회 산지천 빛 축제가 열려 국내·외 쇼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일도1동의 상권 살리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동문시장내 낙후된 간판을 패션-쇼핑의 거리 만들기 차원에서 시장 판매품목과 시장분위기에 맞게 교체하는 등 간판이 아름다운 문화공간 조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상인회 등이 참여하는 찾아가는 친절교실이 운영되는가 하면 친절서비스 우수업체 비교 체험 견학 등을 통해 다시 오고 싶은 패션-쇼핑의 거리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 산지천교
▲ 산지천 음악분수
1960년대 어느 비내리는 날... 영춘빵집이 이 소시에 있었지 아마도!
제주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 중에 제주도민들의 삶의 애환이 가장 많이 담긴 곳이 바로 산지천이다. 제주시 건입동과 일도1동을 흐르는 하천으로 도심지 번화가를 통과하다보니 도심의 변화를 몸소 체험한 증인인 셈이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주택이 밀집, 생활하수와 쓰레기로 오염되는 문제가 생기자 지난 1966년 하천이 복개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복개된 후에도 오염 문제가 계속 생기면서 지난 1995년부터 복원사업 시작돼 지난 2002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됐다. 친환경 하천복원 사례로 널리 알려지면서 서울시 청계천 복원의 모델이 되며 제주의 또다른 관광명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금은 하천복원으로 깨끗한 물에만 산다는 은어도 볼 수 있고 하천을 따라 산책할 수 있도록 돌과 나무로 아치형 다리를 하천 중간 중간에 설치,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산지천광장에는 음악분수대가 설치돼 더운 여름철에는 어린이들이 음악분수의 노래에 맞춰 피서를 즐기는가 하면 하천을 따라 중간 중간에 산책로공원도 조성돼 있다. 이외에도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근처에는 중국피난선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다.
"유일한 토종 '코리아극장' 꼭 살렸으면 합니다"
'제주극장사' 산증인 '헐리우드 올드보이' 변승행씨…극장 인생 50년 마감
칠성통 상권과 '한 몸'…'향토 극장 살리기 운동' 조용히 일어
2007.06.17 양김진웅 기자 <제주의 소리>
▲ 제주지역 유일한 토종극장으로 남은 '코리아 극장'.
16일 오후 6시 코리아 극장.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모처럼 뜻 있는 다큐먼터리 상영이 있었다. (사) 제주씨네아일랜드가 제작하고 들꽃농장 항아리 콩나물로 유명한 오영덕씨가 연출한 '6월 나무'가 첫 선을 보인 것.
"제주사람의 냄새가 나는, 제주의 희망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는 6월 나무는 당시의 자료사진과 시위에 참가했던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적지 않은 시대적 의미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당시 상황 중심을 재현하는 인터뷰 방식에 치우치면서 20년이 지난 오늘의 제주현실을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담아내는데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 않느냐는 평도 뒤따랐다.
'제주극장사' 껴안은 산증인...50년 인생 마감
▲ '제주극장사'의 산증인 변승행씨. 극인생 50년을 마감했다.
더욱이 이날 극장 한켠에는 극장 인생 50년을 마감하는 초췌한 장년의 아저씨가 눈길을 끌었다. '헐리우드 올드보이' 변승행씨(67.제주시 3도2동). 한경면 금등리가 고향인 그는 13세 때 아버지를 돕다 정미소 벨트에 팔이 끼는 사고로 오른팔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한때 '별도봉 자살터'를 헤매던 그는 부산으로 가는 배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결심까지 하는 등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자책하며 오랜기간을 우울하게 보냈다. 어머니의 고향 한경면 조수리에서 4.3을 직접 체험한 그는 이후 제주시로 건너왔다. 그리고 10대 후반부터 시작한 극장 인생. 1956년 제주 '가설극장'시절부터 제주극장(현대극장), 제일극장, 동양극장은 물론 칠성통 입구에 있다가 일찌기 없어진 중앙극장까지 그가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후 옮긴 코리아극장에서만 정확히 36년 3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영화'가 희귀했던 시절, 우도와 추자도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도 우도에 영화를 상영하러 가던 중 배위에서 '발전기'를 빠뜨려 '곤욕'을 치렀다가 가까스로 마을발전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 다큐 '6월 나무'를 보러가는 관객들.
칠성로 상권과 '동고동락'...울고 웃던 영화와 그리고 삶
도내 중.장년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변주임'을 기억한다. 영화표를 살 돈이 없다는 이에게 몰래 들여보내 주던 일. 영화포스터 한장을 얻으러 오던 '제주의 헐리우드 키드' 이야기 등...
50년 넘게 영화관에서만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제주극장사'를 꿰고 있는 유일한 산증인인 셈이다. 그는 극장에 대한 열정과 경력을 인정받아 1999년 제주도극장협회의 추천으로 영화진흥공사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한평생 영화관에 몸을 던졌던 그가 이날로 '울고 웃던' 극장 인생을 마감한다. 제주도민 모두의 영화에 대한 향수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극장 지킴이'를 했던 그로선 감개무량할 만 하다. 현재의 코리아극장은 지난 2002년 9월 13일자로 각종 쇼핑몰과 함께 총 4개관으로 새로 오픈했다. 하지만 원래 있던 자리는 변치 않았다. 하지만 점차 상권 이동으로 인해 칠성 상권이 위축되면서 자연히 고객들도 줄어드는 등 어려움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로선 아쉬움이 크다. 칠성로의 상권과 한몸이었던 '코리아 극장'이 지난 3월 말 두 달여간 극장 사정으로 문을 닫았을 때도 가슴이 아팠다. 정확히 70일간 문을 닫았다. 소위 '돈되는 영화만 상영하라'는 배급사와의 미묘한 갈등으로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며 잠시 문을 걸어 놓았던 것이지만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쉬었을 뿐인데도 칠성로를 찾는 고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것도 직접 그의 눈으로 봤다. 이 모든 결정이 젊은 김재형 대표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다.
마지막 남은 향토극장 '코리아'...2개월 침묵 속에 다시 '재기'
지난 5일 영화 '황진이'와 가족오락영화 '슈렉3' 개봉으로 다시 문을 연 코리아극장은 앞으로 한국영화와 외국영화 상영비율을 적절히 조율해 나갈 예정이다.
▲ 6월 나무의 한장면
코리아 극장의 문상희 과장은 "잠시 쉬고 있는 와중에 '금새 망했다'는 소문이 가장 괴로웠다"며 "영화인을 비롯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코리아 극장을 찾았을 때 제주의 마직막 자존심인 토종 극장은 되살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리아극장에는 변씨 외에도 몸이 불편한 장애인 직원이 몇 더 있다. 물론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가진 김 대표가 기꺼이 채용하겠다는 마음이 작용한 탓이다. 실제 극장 건물을 신축할 때도 화장실, 엘리베이터, 문턱, 전용좌석 등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돈이 없다'는 문화 및 영화단체에게 선뜻 '문화공간'으로 상영관을 내주는 것도 김 대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하는 마음 씀씀에서 나온 것이다.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영화 사랑방'
▲ '6월 나무'의 연출감독을 맡은 오영덕씨
지난 2005년 4월 3일. 고(故) 김경률 감독이 4.3 장편다큐 '끝나지 않은 세월'을 마땅히 상영할 곳을 찾지 못했을 때도 선뜻 '코리아 극장'은 이를 내줬던 일, 또 지난 5월부터 한 달 넘게 진행된 제주도내 첫 영화사인 (주)컴투르픽쳐스가 마련한 '2% 필름 페스티벌'에서 무료 대관을 해준 것도 '영화 인구의 확장'과 '영상 관심층'의 확산을 위해 소리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김 대표의 마음씀에서 비롯됐다. 현재 이 곳을 찾는 몇몇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코리아극장 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극장 살리기 운동' 바람이 조용히 불고 있다.
'변주임'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는 그가 제주영화를 위한 자그만 바람이 있다면 뭘까? "인터넷 바람이 불면서 극장도 이제 잘 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영화는 우리들에게 풍부한 마음과 문화와 예술 사랑의 정신을 심어줍니다. 마지막 자존심인 코리아 극장 만큼은 살려야 합니다".
▲ 다큐 '6월나무'의 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