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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1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막 4:1-9; 눅 8:4-8)>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마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마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13: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13:10 <비유를 설명하시다(막 4:10-20; 눅 8:9-15)>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13: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31 <겨자씨와 누룩 비유(막 4:30-32; 눅 13:18-2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13:34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막 4:3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마13: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13:36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4 <세 가지 비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마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마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마13:51 <새 것과 옛 것>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마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3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다(막 6:1-6; 눅 4:16-30)>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마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13: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13:1
그 날에 - '그것' 또는 '그 사실' 등 바로 앞 내용을 가리키는 말인 '에케이노스'가 첨가된 '그 날'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 또는 일이 발생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로, 과거의 어느 막연한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그 무렵 쯤'의 뜻을 가진 '그때에'(토테)와는 구별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에 이 말은 천국 비유를 베푸신 그날은 자신의 육적(肉的) 모친과 그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바로 그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의 참 형제자매와 참 부모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임을 가르치셨던 날과 같은 날로서, 예수가 바로 이날 자신의 육적 가족을 만나 대접하는데 힘쓰지 않고 영원히 영적 가족이 될 이런 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는데에 먼저 힘쓴 것은 결국 예수가 죄인들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여겨 주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마태가 굳이 '에케이노스'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집에서 나가사 -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바닷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5-7장의 산상수훈), 바닷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바닷가에 앉으시매 -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해변가는 예로부터 레바논 산과 어우러진 푸른 물로 인해서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업(fishery)이 성해 소금에 절인 어류들이 멀리 스페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전 국토가 메마르고 험한 팔레스틴에서는 비교적 기름진 곳으로서 디베랴, 벱새다, 가버나움, 고라신 등의 많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비교적 한적한 시간과 때를 택하여 이곳에 앉아서 둘러싼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단순한 목가풍(牧歌風)의 수채화적 감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타성(楕性)을 깨는 진리에 귀기울이는 구도자(求道者)들의 기쁨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준다.
=====13:2
무리 - 원어 '오클로스'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플레도스'나 '데모스'와는 달리 천민 집단, 속(俗)된 무리라는 뜻으로 일종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말이다. 또한 '오클로스'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준수치않고 또 그럴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낮고 천한 지위나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인 히브리어 '암 하아레츠'(, 즉 '땅의 백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예수께로 달려나온다거나(13:2), 예수를 찾아다닌다거나(눅 8:40), 예수의 전도여행에 줄곧 동행하던(막 5:27; 눅 7:9) 무리들을 지칭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의 상류층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다. 어떤 경우에 '오클레스'는 예수의 친족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으나(막 3:31 ff)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구원자로서만 이해하고, 인간의 영원함과 관련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메시야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전파하시던 그 당시에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배 -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13:3
비유 - 예수께서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을 창시한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비유를 활용하여 영적 진리를 유효 적절하게 가르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다. 여기서 '비유'( 파라볼레)란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던지다'는 뜻의 '발라의 합성어이다. 즉 이는 '옆에 던지다'는 뜻으로 한 사물을 또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 비교함으
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진리 교육의 한 방법이다.
씨를 뿌리는 자(호 스페이론) - 여기 사용된 정관사는 대표 단수로서 어떤 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씨 뿌리는 자'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란 다음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예언하면서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렘 31:27)라고 선포했다. 실로 남은 자들의 거룩한 씨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심기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자신. 예수 이전에도 선지자와 많은 교사들이 율법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으나 많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자신은 밭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랑과 복음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37절에 따라 예수를 씨뿌리는 자로 이해하는 이러한 경우에 이 비유는 바로 자서전(自敍傳)적 요소를 갖고 있는 셈이다(Buttrick). (3) 모든 기독교인들. 귀중한 복음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한 씨를 뿌리도록 권고하였다(고전 9:11).
=====13:4
길 가(파라 텐호돈) - 이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된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진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을 의미한다. 본 비유에서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영혼이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진리에 대하여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배격,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 두가지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의식적 원인 :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학식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 (2) 무의식적 원인 : 이 땅에서의 삶이나 목숨보다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는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채 깨닫지 못하여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에 의한 것이다.
새 - 팔레스틴에는 약 삼백여 종(種) 이상의 새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흔한 새가 바로 '참새매'이다. 레 11:16과 신 14:15에서 부정한 새로 분류된 이 새는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이 새를 염두에 두셨는지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실로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천국과 멸망의 길이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것이다. 사실 복음의 반대 세력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血眼)이 된 채 적극 활동하고 있다.
먹어 버렸고(카테파겐) - 이는 '철저하다'는 뜻의 '카타'와 '먹다'는 뜻의 '에스디오'의 합성어로 조금도 남김
없이 완전히 먹어치워버렸음을 나타낸다.
=====13:5
흙이 얇은 돌밭 -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하고도 피상(皮相)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흙의 얕음은, 곧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그 행동은 빠르나 지속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물질문명과 기계의 발달로 극도의 속도와 거대한 분량만을 추구함으로써 대부분 인간의 심성이 표피화되어가며 또한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돌밭 유형의 사람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나고 발견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진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추구한다해도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표피화(表皮化)된 인간 심성과 경박함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13:6
해가 돋은 후에 -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 뿌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 생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니면 여기 해가 돋은 후에는 순간적 감격이 끝나고 이제 신앙인이 되어 일상적 신앙생활이 시작된 후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7절의 가시와 비교하자면 둘다 땅위에서 연단(鍊鍛)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해가 응당 치러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면 가시는 제 욕심, 염려에 의한 불필요한 시련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여기서 밭은 곧 인간의 영혼 상태의 상징이며, 얕은 돌밭은 결국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심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즉 겉마음은 경박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은 성령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밭으로는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 신앙 생활이 시작되어 해, 곧 시련이 봉착하게 되면 곧 그 복음의 씨는 말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 소망을 기대할 수 없다.
=====13:7
가시떨기 -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칸다'는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약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 저주(창 3:18), 황폐함(사 9:18) 등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본문에서의 가시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시떨기 밭은 가시가 자랄 수 있을 정도의 지력(地力)이 감춰진 곳이지만 생장력이 강한 가시나무 외에 다른 채소나 곡식은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거친 땅이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개간(開墾)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 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를 알고 믿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 세번째 부류의 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기운을 막았고 -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숨을 막아 질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영적인 의미로는 이 '숨' 또는 '기운'은 프뉴마를 번역한 말로 '성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함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길가밭과 돌밭의 경우는 주로 밭내부가 문제였으나 여기 가시밭은 밭 외부가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들은 마음 밭이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마음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 씨앗이 더 많은게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 밭 내부도 좋아야 하지만 외적으로 각종 신앙적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기운찬 영적 생명력과 진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3:8
좋은 땅 - '좋은'의 뜻으로 사용된 '칼로스'라는 말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땅이란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되어 있고(레 25:4, 5),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놀라운 수확량은 4분의 3의 상실,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손실을 충분히 보상하고서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결실의 창이에 대해서 포세트
(Pausett)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십 배는 가장 적은 결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며, 육십 배는 중간 정도의 결실이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곡식 낟알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한 예로서 사용된 숫자이므로 모든 결실이 항상 30, 60, 100배의 숫자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 200배 혹은 300배 까지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Herodotus). 어찌되었든지 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듯이 결실을 맺는 데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실을 하였느니라(에디두 카르폰) - 헬라어 원문은 미완료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결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할 만큼 겨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결실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한편 여기 결실은 (1) 내적으로는 복음 씨앗을 받은 각 성도의 영적 진보를, (2) 외적으로는 구속사 전개에 따른 천국 시민의 숫적 증가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성경의 여러 용례에서 '귀'는 복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한다. 즉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쓰던 표현법이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함이며 따라서 그 말씀을 욕으로 여겨서 즐겨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렘 6:10).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귀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요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이는 비유 자체가 갖는 이중 목적,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뜻을 명료하게, 순종할 의사가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참 진의를 숨기기 위한 목적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해서 '12사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행구절인 막 4:10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 묻자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수께 나아온 제자들의 정체(正體)는 그렇다 해도 이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다. 36절의 표현과 연결지을 때에는 군중집회중 잠시 틈을 내었을 때의 일로 볼 수 있고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마태의 기본적 편집 태도로 보면 아예 군중 집회가 완전히 파(罷)한 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일반 군중들 중에서 소수 제자들이 특별히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만은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먼저 예수의 계신 곳을 찾는 수고의 과정을 겪었으며(연단),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의 비유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참고 기다린 이후에(인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으며(적극성), 그 결과 그들은 천국 도래의 비밀을 알게 되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 이 물음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11-17절까지는 비유 사용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8-23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있다.
=====13:11
천국의 비밀 - 여기서 먼저 '비밀'(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가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소드'(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 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3:12
있는 자 ... 없는 자 - 이 말은 격언적 교훈으로서 마치 비정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수가 동조(同調)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심으로써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진리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더욱 더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조소(嘲笑)가 아니라 경고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며,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며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오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이다.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에게 베풀어졌던 천국복음 마저도 악한 자들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멸망에 처해 질 수 밖에 없다.
=====13:13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 말해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 곧 영적 소경(사 59:10; 막 4:12; 요 12:40; 롬 11:25), 영적 귀머거리(렘 6:10; 겔 12:2; 슥 7:11; 행 28:26)인 죄인의 영혼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 10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 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도 11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으로서,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루었으니 -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13:15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는 살이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실로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다.
듣기에 둔하고 - 여기서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 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함을 알 수 있다.
눈은 감았으니 - 여기서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실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에 밀납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돌이켜(에피스트려소신)- 이 말은 하나님 보다는 죄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으로서 '회심' 혹은 '회개'(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돌이킴'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5:7; 고후 7:10)과 제 2단계로서의 새생활에로의 전반적인 변화(막 1:15; 눅 13:3, 5; 행 2:38)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제 1단계의 자각은 죄된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다(눅 15:17).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 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행 13:46).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13:16
너희 눈은 ... 귀는 -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평히,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봄으로 ... 들음으로 - 여기 보고 듣는 대상은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이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6절은 단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지만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복이 있도다(마카리오이)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5:3).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눅 1:45),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요 20:29),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요 13:17)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웠다.
=====13:17
내가 진실로 -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으로서(대상 16:36),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대상 16:36)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미리 확증하시면서 우리를 각성시키고자 하실 때 사용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 못하였느니라 -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苦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야를 대망했을 뿐이며(히 11:13, 39)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受惠者)인 것이다(벧전 1:10-12, Homer A. Kent, Jr). 한편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뒤졌거나 또는 그들이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질적 차이 때문이었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1) 더 큰 감사와 (2)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개 때문이다. 한편 이런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언급으로는 11:11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그 위대한 구약의 이사야와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된 큰 축복을 받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13:18
그런즉 ... 들으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 안된 '너희'(휘메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13:19
아무나(판토스) -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파스'속격으로, 본문에서는 '들으면서'( 아쿠온토스)도 '깨닫지 못하는'(쉬니엔토스)의 뜻인 두 분사를 취하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Ereryone hearing ... and not
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씀을 듣고도 현재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잠시 유보하거나(행 24:25), 또 다른 말씀, 즉 거짓 진리에 대해서도 귀기울이며 이것 저것을 망서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천국 진리의 말씀을 잃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천국 말씀 - 막 4:14과 눅 8:11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씨는 기록된 말씀들로서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이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천국이 도래했다는 벅찬 내용으로 전파되고 있는 말씀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요 1:1) 그분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요 5:39).
악한 자 - 마가는 이를 '사단'이라고 (막 4:15) 했으며, 누가는 '마귀'라고(눅 8:12)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직접적 개입이나 그 하수인(새
들)을 통해 복음의 청취자가 지닌 영적인 은혜를 즉각 앗아간다(Homer A. Kent, Jr., 렘 5:26, 27). 실로 악한 자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하면(벧전 5:8)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진리의 말씀에 회의하고 외면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길가에 뿌리운 자(호돈 스파레이스) - 이는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3절에서의 '씨 뿌리는 자'(호 스페이론)와 대구를 이룬다. 즉 '뿌리운 자'는 씨를 받는 자, 즉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혹은 제자들, 혹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말씀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로서,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청중(the unresponsive hearer)이다. 그 사람들은 '새'로 비유되고 있는 사단에 의해 결국 말씀에 응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다.
기쁨으로 받되 -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13:21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
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환난이나 핍박 -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는 '밀어대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 )에서 나온 말로서, 삶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오그모스는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넘어지는(스칸달리조) -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경, 물질 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황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밭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 위가 손질되지 않아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난, 즉 순수와 세속이 혼재(混在)된 자아의 분열된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겸(兼)하여 섬기려는 사람이며,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므로써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질식(窒息)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에 물든 청중'(the worldly hear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은 결단코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세상의 염려란 내세(來世)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6:25-34). 즉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눅 12:22)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라는 뜻의 헬라어 '메림나'는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다. 실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淨)함이 없다(약 1:8).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즐거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부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하는 욕망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리'란 '많다', '풍성하다'의 뜻에서 나온 '플루토스'라는 말로서, '풍성한 재물' 혹은 '부요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
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誤謬)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 쓸 것을 미리 알고 채워주시므로 현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막혀 - 여기서 '막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프니게이'는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 욕
심이 영혼의 양식과 청결한 공기 및 거룩한 햇빛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의 영적 숨통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녕 말씀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세상이 지닌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해 거룩한 신앙적 성품과 영적 생명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결실치 못하는 자 - 천국 복음을 수용한 자의 궁극적 목적은 한 인격에 내재한 복음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열매 맺는 전(前)단계(싹, 잎, 줄기 등)가 아무리 탁월하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 이는 귀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갈 5:22, 23) 성공적인 청중들(the successful hearer)의 상태를 일컫는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 철저한 자기 부인과 겸손한 수용의지를 통해 복음을 듣고, 수납(受納)하고, 그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자를 가리킨다.
혹 백 배 ... 혹 삼십 배 - 소출(所出)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 및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25:24-30).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한 땅이라 해도 결실했다는 그 자체로서 '좋은 땅'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13:24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 여기서 ' ... 과 같다'는 말은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인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Jeremias). 따라서 본 구절은 '천국은 ... 한 사람의 상황(경우)과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좋은 씨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 밭에 뿌린 사람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라지(지자니온) -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안긴다.
덧뿌리고 갔더니(에피스페이로) -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와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 )의 합성어로서, 뿌린 시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진다.
=====13:26
결실할 때에 -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
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10:22).
=====13:27
집 주인 -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주여(퀴리에) - '주'라고 하는 호칭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다. 예수를 부를 때 '주'라고 하는 호칭과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로 제자들(8:25; 14:28; 16:22) 또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8:8; 20:30)이며, 예수를 '선생'으로 부르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유대 지도층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생'이라고 함은 그를 다만 예언자들중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랍비'(선생)가 아니라 '퀴리오스'(주님)이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바로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악이 이 세상 혹은 교회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물음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부정적 실재로서 이는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선(善)의 부재 혹은 결핍의 상태(Augustine) 이상을 의미한다. 아무튼 '인류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사상을 괴롭혔고 신앙을 시험한 이 악의 기원에 관한 악명높은 물음'(John S. Whale)에 대해서 성경은 종말의 날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6:20; 요일 3:8; 계 20:2, 10).
=====13:28
원수 -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
도(antichrist)이다.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종들의 이 두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3:29
가만 두어라 -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단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13:30
추수 때에(엔 카이로 투 데리스무) -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는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다.
곳간(아포테케) -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와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