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신 예수님 (마가복음 16장 1~20절)
[시작기도]
살아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죽었던 우리 모두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모든 삶을 주님께서 살리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하여 주옵시고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찾아오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핀란드 여 선교사가 폐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고향에서 휴양하며 농사일을 돕던 중에 이번에는 탈곡기에 한 쪽 팔을 크게 다쳤습니다. 여 선교사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이제 오른 팔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교회 주제 중에 하나가 믿음에는 왜? 가 없다 인데 이 여인도 왜 라고 하지 않고 무엇을 이라고 기도함으로써 고난의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인기 가수가 몇 해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됐습니다. 사고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서 헌신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사는가 궁금했는데 며칠 전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를 보니 그 사람이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몇 번 실패해도 계속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기자가 왜 그렇게 아이에 집착하는가 물었더니 자기 인생에 목적이 없는데 아이라도 생기면 사는 목적이 생길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확률이 5 ~ 7%인데 평생 안될 수도 있지만 될 때까지 해보겠다고 합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교통사고 보험금으로 22억을 받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가 많은 돈이 생겨서 좋겠다고 했더니 그것 말고도 나에게는 돈이 많다 고 하더군요. 무명 시절 일당 3만원을 받고 일할 때도 먹을 것 안 먹어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이 인생의 목적이었는데 지금 돈이 있어서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는 겁니다. 다리를 못 쓰는데 차가 좋으면 뭐 하겠냐구요.
그래서 기자가 만약에 다리가 온전해진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기자 생각으로는 그렇게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던 사람이니까 무대에 다시 서고 싶다고 할 줄 알았겠죠. 그런데 두 다리가 온전해지면 가장 하고 싶은 건 단 한 번이라도 시원하게 대소변을 보고싶다는 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옆에서 너무나 헌신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성욕도, 아무 의욕도 없다고 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까 마음도 불편해지고, 어느새 삶에 대해 꼬여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믿는 분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최대 일간지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주님을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 부활의 주님을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핀란드의 여 선교사와 그 가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환경이 좋아야만 축복일까요.
인생의 목적은 아이가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거룩을 아는 것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알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모르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살아나신 예수님을 우리만 모르는 게 아니라 제자들도 다 모르고 있습니다.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갔던 제자들이기 때문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전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직접 양육을 받았는데도 이성의 포로가 되어서 부활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지만 연약한 여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특별히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양육하시고 여러 모양으로 보이신 예수님처럼 오늘 부활절 아침에 부활이 안 믿어지는 분들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고, 또 설명하신 것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결국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다 간 것처럼 오늘 여러분이 안 믿어져도 예수님의 길을 가게 되실 줄 믿습니다.
15장 47절에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을 부자의 묘실에 장사하기 위해 묘실을 내주고 돌로 인봉하고 갔습니다.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거기를 봤다고 돼 있습니다. 늘 예수님께 집중해서 애정과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냥 가지 않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향품을 사두었다가 가져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져갔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보았던 살아 계실 때 예수님께 향유를 발랐던 여자, 베다니 마리아는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살로메는 갔는데 베다니 마리아는 가지 않았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서 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제자들의 멸시를 무릅쓰고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미 살아 계실 때 장례를 준비하고 향유를 부었기 때문에 시체에는 바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안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일만에 살아나신다고 했고, 부활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데 왜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은 사람은 베다니 마리아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는데 왜 안 왔을까 궁금해 하는 분이 있어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도 모르니까 천국에 가면 베다니 마리아에게 가서 물어봐야 겠습니다. 여러분도 베다니 마리아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시죠.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예루살렘에 일주일 계시면서도 시장해도 드실 곳이 없었는데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는 늘 찾아가서 식사를 하셨던, 그렇게 신뢰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시체를 찾았기 때문에 일행은 누가 돌을 굴려줄까 염려하며 갔습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갈 때 거부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리 큰 돌도 하나님은 굴려내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러 갈 때마다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살아나신 주님을 믿는다면 제가 복음 들고 갈 때 무슨 걱정을 하리요 하는데 이번 주에도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영접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 분이 천주교 신자에다 정말 센 분이라는데, 나를 믿고 오라고 했는데,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아니요 그러면 어떡하나..... 이런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구원을 위한 걱정이기 때문에 4절 말씀에서처럼 가고 나서보면 돌이 굴려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제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가서 보면 장애 요인이 제거 되어있고 영접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갈 거 없어, 갈 거 없어. 하는 사람은 제자들의 모습이고, 염려하면서도 가는 것이 여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염려하면서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자들보다 나은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갔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을 찾은 게 아니라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기에 여전히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보고 위로를 얻으려합니다. 부인이 죽고, 남편이 죽었을 때 매일 꽃들고 묘지에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아까운 시간에 날마다 묘지가서 꽃 놓고 뭐합니까. 남편의 죽음이 저에게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의 구원은 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날마다 보면서도 순간 죽은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구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느라고 하루 말씀을 못 보니까 놀람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성령의 도움으로 본문처럼 천사가 말씀을 보게 하시고, 해석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들어둔 말씀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6절 마지막에 보면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했습니다. 저도 남편 장례식을 저희 집에서 치렀습니다. 하루 아침에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이 자기가 누웠던 안방에 관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말씀으로 해석해주셨기 때문에 남편의 시신이 있던 자리를 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절에서도 증인이되라고 남편을 안방에서 가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7절에 주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엄청난 명령을 주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 네가 만난 예수님을 제자들, 특히 저주하며 부인했던 수세자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이렇게 엄청난 명령을 주십니다. 수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일행을 쓰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어떤 환경에 있어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렇게 대단한 일을 시키시는 주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를 보면서 이지선 양을 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지난 주 지구촌교회에서 강사로 초대되어 섰다고 하는데 그 자매가 그냥 평범하게 대학교 졸업해서 살았다면 그렇게 큰 교회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 일 없이 살았다면 죽을 때까지 그런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참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 엄청난 명령에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7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전에 들은 말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먼저 말씀을 보고, 큐티하고, 적용하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제자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예수님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실패한 제자들의 고향인데 그 고향에서 만나주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베드로부터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나도, 나도 하면서 다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옛생활로 돌아갔습니다. 3년 동안 공들여 양육했어도 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을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은 이 갈릴리를 너무 귀하게 생각하셔서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생각하기도 싫고, 찾아가기도 싫은 곳, 사람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14장 70절에서도 베드로가 비자 앞에서 무시 당할 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한 것처럼 멸시천대 받으면서 욕처럼 들은 소리가 갈릴리 당 이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나의 살아왔던 삶의 자리로 가서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내가 어느 자리에서 은혜 받았나를 생각하면서 첫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가난해서 예수 믿었다면 가난한 식구들 찾아가야 합니다. 그게 싫다고 하니까 오늘 그 갈릴리로 빨리 가라고 하십니다.
어느 두 형제가 있는데, 알콜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한 아들은 예수 믿고 의사가 돼서 지금 금주 운동을 하고 한 아들은 알콜 중독자가 됐습니다. 둘의 신분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습니다. 알콜 중독 아버지 때문에 예수 믿은 큰 아들이 그 힘든 환경 때문에 예수 믿게 됐는데도 그걸로 한참 영광을 받다보니까 생각하기도 싫은 아버지의 알콜 중독, 동생 알콜 중독을 찾아가기 싫어합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알콜 중독. 이것이 갈릴리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이 갈 길입니다.
이지선 자매가 화상을 당해서 주님을 만났는데 그 모습으로 전도해야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성형 수술해서 지금의 얼굴을 미워하고 예전 얼굴로 돌아갈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환경에서 나를 쓰시기 위한 뜻이 있으십니다. 하반신 마비가 된 가수가 돈이 있고, 불철주야 위해주는 아내가 있으니까 점점 냉소적이 되어갑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랑이 있어도, 어떤 돈이 있어도,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세상은 보여줍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순교와 배교에 관한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소설인데 썰물일 때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는 밀물 때에 와서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죽어가니까 포르투갈 선교사가 너무 괴로워서 언제까지 이 사람들을 죽이시렵니까. 제발 이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결코 침묵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주님과 고통을 나누다가 천국가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살아나야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을 찾아야 하는데 날마다 왜? 만 찾습니다. 이 사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만 따집니다.
주님은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네가 가기 싫은 그곳에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찾아가기 싫은 부모님, 직장 상사, 친구... 들에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8절에 보니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고 합니다. 이런 일 하라고 하면 여러분도 무섭죠.
마태복음을 보면 천사가 여인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 ...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고 하니까 여자들이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려갔다고 했습니다.(마28:5~8) 마태는 무서움에서 큰 기쁨으로 변한 감정의 변화를 기록했는데 마가는 계속 불신을 강조했습니다. 여인들이 이해가 되는 것이 마가복음 13장에서 하늘의 해, 달, 별이 떨어지면 인자가 구름 타고 영광 가운데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해가 남편이라고 한다면 일년도 아니고 하루 아침에 그 해가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또 하루 아침에 구원이 됐습니다. 이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은 사건도 놀라운 일이고, 살아나신 사건도 놀라운 일이고.. 이것도 저것도 다 놀라움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9절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신 예수님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며 제가 예수님이라면 부활의 주님을 누구한테 가장 먼저 보이고 싶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가장 잘 외쳐줄 사람은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마음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라고 이렇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사람 외모를 보고 평가하지 말아라. 진짜 예수 전할 사람은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다. 아멘
저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사람을 잘 분별하고 싶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사모하는 자에게 먼저 보이실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자들, 제자들 한 명도 안 가는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갔습니다. 주님이 먼저 보이시도록 사모했습니다. 두 가지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보이셨지만 나의 사모함도 같이 역사합니다.
우리들교회에 아픈 사람, 눌린 사람, 귀신 들린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귀신이 들렸습니까. 신경질 귀신, 돈 귀신, 공부 귀신, 여자 귀신, 남자 귀신... 진짜 귀신 들렸던 사람들. 더도 말고 딱 일곱 귀신만 물러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분들이 우리들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외치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감히 그러고 싶어요. 오늘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겁니다. 특심으로 사모하는 사람, 몇 사람 때문에 교회도 움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서운게 하나도 없습니다. 막가파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셨습니다.
10절에서 11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갑니다. 마가가 쓰면서 너무 창피해서 제자들 이라는 말도 못 쓰고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13장에서 향유를 붓는 베다니 마리아도, 말리던 제자들도 다 안 밝혔습니다. 지나고 나니 너무 창피했을 겁니다. 그래도 나중에 요한이 다 밝혀줬습니다.
제자들이 슬퍼하고 있는데 가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자기에게 보이신 것을 전했는데 11절을 보니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고 합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안 믿습니다. 귀신 들리고 창녀였다는 것 때문에 더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편의 구원을 에스겔 말씀으로 전했을 때 제 옆의 몇 몇 여인들은 간증을 듣고 기뻐했는데 목회자들은 참 안 믿더군요. 정말 심각하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평신도인 제가 에스겔을 읊어대니까 듣기 싫으셨을 수도 있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보니까 이해가 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이렇게 에스겔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만 제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한참 하다가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에스겔 말씀으로 목사님들이나 믿는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는 걸 포기했었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돌고 돌아서 3년 정도 지난 후에야 가까운 곳에서도 인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어떤 본문을 봐도 다 제 얘기일까요. 마리아는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왜 제자들은 안 믿는가 이 말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여자를 사람처럼 안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하면서 유서에 내 장례식에 여자는 못 오게 하라 고 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의 말은 법적으로 효력도 없습니다. 그렇게 무시하는데 마가복음 16장을 보니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보고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여자들입니다. 그것도 귀신 들렸던, 창녀였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교육을 받았어도 믿지 않습니다. 뭔가 이성적으로 아니면 그냥 아닌 겁니다. 이상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하도 안 믿으니까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나 주셨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자세히 풀어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에게 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고 합니다.
오늘 보니 마가복음 16장은 안 믿는다 가 주제가입니다.
역시 안 믿었습니다. 여러분, 특히 남자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도 안 믿어집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 부활의 주님이 그렇게도 안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안 믿으면 주님이 야단치시는 날이 옵니다. 14절에 야단을 치러 드디어 나타나십니다.
14절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제 꾸짖으시는 데 음식먹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 사람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음식을 안 드셔도 되지만 제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그 사람 밑으로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부활이 안 믿어지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여자들은 또 남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여자들은 수준이 높고 남자들은 수준이 낮다는 말 같은데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니까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또 아무리 수준이 높으면 뭐합니까. 우리들교회도 그렇고, 큐티선교회도 그렇고 여자가 천 명이 모여도 몇 명 안 되는 남자들이 일을 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자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은 다 남자들이 하니 어쩌겠습니까.
주님도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계속 제자들을 독려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이 다 주의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안 믿어지는 남자 제자들이 일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런 남자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자 분들이 대답을 안 하시네요. 조금있다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뽑으셨기 때문에 꾸짖을 자격이 있으셔서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은 사랑해야 되지만 죄는 미워해야 됩니다. 교회는 말씀과 권징과 치리로 구성돼 있습니다. 혼자 교제하다 잘못을 발견했을 때 그냥 말 안하면 되지 이럴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이 공동체를 와해한다면 치리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 사역을 위해서 제자들이 못 믿는 것을 참고, 참으시다가 꾸짖으셨습니다.
무엇을 꾸짖으셨나요.
자녀에게 화 낸다고 꾸짖으셨나요. 돈 못 번다고 꾸짖으셨나요. 부모, 직장 상사에게 대든다고 꾸짖으셨습니까. 물론 그것도 꾸짖음을 당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걸 꾸짖으신 게 아니라 믿음 없는 것 과 완악한 것 을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화도 안내고, 대들지도 않고, 돈도 잘 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날마다 회개하는 게 자기 가족 때문에, 자기 연민에 겨워서 자식 마음 상하게 한 것, 부인 마음 상하게 한 것, 남편 마음 상하게 한 것 회개합니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자기의 행위만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근본에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다가도 뭔가 일이 안되면 교회를 안 오기 시작합니다. 전화도 안 받고, 사람이 다 싫고, 지금은 교회 나갈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건이 하나 생기면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없다 는 것은 원어로 보면 믿음이 형성되지 않았다 는 뜻입니다.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할 때 쓰는 강한 뜻의 용어입니다. 완악하다 는 것은 확실한 것을 거절하는 바위같은 마음 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 한 번도 쓰신 적이 없는 강력한 단어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셨는데 제자들의 모습이 이렇게 완악하고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이 그동안 한 번도 안 쓰셨던 이 단어로 꾸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꾸짖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이 부족해서 꾸짖지도 못합니다. 너무 주님께 죄송스럽습니다. 꾸짖어야 될 사람이 많은데도 제가 사랑이 부족해서 못 꾸짖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확실하게 꾸짖으시는데, 교회를 위해서 저도 모든 걸 내놓고 꾸짖을 수 있어야 되는데 이 부분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평신도 집사로 시작했기 때문에 꾸짖는 부분이 참 약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셔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도 항상 기억하시고 기도해주시기 랍니다. 제가 아직도 교양이 우상이어서 싫은 소리 못하는 것도 있는데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꾸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살아나신 주님, 부활의 주님이 안 믿어졌다는 사실이 오늘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강력한 단어를 쓰셨는데 그래도 안 믿어지면 어떡합니까. 죽은 자의 주님만 찾으면 낭비입니다. 안 믿어져도 이렇게 주님이 계속 양육해 주실 때 와서 들어야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직분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믿음이 없는데 이 믿음이 없고 완악한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안타까이 꾸짖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이 사랑을 본받고 싶습니다. 너무나 큰 도전을 받습니다. 16장 내내 제자들이 믿었다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15절부터 18절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아니 세상에 믿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엄청난 약속을 주시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명령을 날마다 와서 들으시면 결국 언젠가는 이 길을 가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듣기 싫어도 와서 들으셔야 됩니다. 언젠가 듣고 싶어도 못 들을 때가 오나니...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을 때 들으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표적이 따릅니다. 말씀을 전하니까 표적이 따르고 복음을 전파하지 않기 때문에 표적이 안 따르는 겁니다. 나중에, 나중에만 하다가 표적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려고 마음 먹으면 표적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못했던 새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감사하다 이런 말을 못 했는데 이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 방언입니다. 이런 표적이 있게 되는 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들교회는 부활이 안 믿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애통함으로 기도 드립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가 다 이 제자의 길을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부활이 안 믿어지는 식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살아계신 주가 나의 죽어있는 모든 것을 살리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내가 안 믿어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갈 때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하고 복음에 대한 거부 반응을 염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식구들에게 애정만 있어서 죽은 예수님만 찾기에
여전히 가족관계에서 슬픈 나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찾아가야 될, 생각도 하기 싫은 갈릴리는 어디일까요.
아무리 살아나신 예수님을 전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이 꾸짖으시는 믿음 없음과 완악함이 내게 있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럼에도 내 자신의 쓸데없는 연민과 쓸데없는 감정들만 회개하느라고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예수님 처럼 내 자신도, 식구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살아계신 주님.
마가복음 16장을 보니 그다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살아계신 주와 살아계신 주를 증거하는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더라 고 합니다. 역시 믿지 아니하였더라 고 합니다.
주님, 우리들 가운데 믿어지지 않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이 몇 번 다른 모양으로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찾아가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식구들에게 애정만 가지고 있고 날마다 죽은 예수님만 찾기에 인생이 슬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생각도 하기 싫은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내 환경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나의 갈릴리를 찾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믿음 없는 것을 꾸짖으시는데 나의 회개는 너무 빈약하여서 자식이 화낼까, 남편이 화낼까, 부인이 화낼까, 그래서 우리 가정의 화평이 깨지면 어쩌나 그것만 두려워서 회개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과 완악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꾸짖고,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꾸짖을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저는 참으로 완악합니다. 제자들의 완악함을 우리 각자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끝까지 애쓰신 주님처럼 우리도 끝까지 내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서, 그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찾아가고 애쓰고 그 삶으로 내려가며 애정을 보일 수 있도록 권고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보이신 본을 보며 도전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죽은 것을 살리실 줄 믿습니다.
이 주님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영접하기 원합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