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난 대원군 이하응이다.
종친부 유사당상 등 한직을 지내면서
권력의 중심부는 얼씬도 못하고 변두리를 맴돌았지만
종친이기 때문에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이에 대원군은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안동김씨의 시선을 피하고
대낮에도 불량배와 어울려 술에 취해 주정뱅이 노릇을 하는 등
파락호로서 '궁도령''상갓집'라는 멸시의 칭호를 듣고 살아온 그다.
그의 둘째 아들 재황(고종)이 왕위에 오른다니
흥선군 아니면 모를 벅찬 감동이었을 것이다.
당시로는 기적같은 일이 흥선군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흥선군이 왕손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살아온 구름재 운현궁이다.
그렇게 살아온 흥선군에게 명당발복이 된 것이다.
운현궁이 자리한 구름재는 서울에서 제일 가는 터로 꼽힌다.
풍수전문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에 연재한 '최창조의 풍수산책'에서
운현궁 부문만 옮겨 함께 보도록 한다.
조선 왕조의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은
주산인 북악에 대하여 상극이 되고,
북악은 아궁인 창덕궁에 대하여 상극이다.
그 사이에 있는 운현궁은 수에 해당된다.
"동명연혁고"에 보면
운현궁 바로 남쪽에 있는 교동초등학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척거렸으므로 구름재라 불렸다고 한다.
또는 진골(泥洞)이라고도 하였다. 질척거리는 땅에서 구른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시 한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운현(雲峴)으로 바뀌고
이것이 운현궁의 지명 연원이 된다.
어찌 되었거나 서울의 주산인 북악은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극이고
경복궁은 북악에 대해서 상극인 꼴이 된 것이다.
주산과 명당 정혈이 상극이니
왕조의 집안꼴이 말이 아닐 것은 정한 이치이다.
오행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금생수(金生水)이니 운현궁 터는
북악과 잘 어울리는 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운현궁의 주인은 왕조의 적손(嫡孫)이 아니었다.
최창조 교수의 글을 다시한번 더 인용한다.
고종 등극 후 영의정에 오른 거의 유일한 안동김문의 김병학은
고종의 사저인 운현궁 노락당기에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임금이 되실 운을 받으시고
잠저에서 생활하시다가 임금 자리에 오르스니
"땅은 그 신령함을 다 하였고"하늘은 임금이 되실 조짐을 보이셨다.
"늘 상서로운 빛과 기운이 성상이 기거하시던 지역을 감돕고 있어
탁지부에 명하여 옛테에다 새집을 짓도록 하시었다"하였는데
그런 기운이 이 운현궁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인근 동쪽에 와룡동이 있고 인왕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니,
이는 청룡과 백호를 갖추었음이라
풍수 이론상 흠잡을 데 없는 곳이기는 하다.
운현궁 터는 현대그룹이 자리한 곳까지 합해서 관상감터로 불렀다.
왕기가 서려있는 명당으로 알려졌다고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이라고도 하는데,
고종의 잠저는 바로 서운관의 자리이며
그래서 이곳을 운현궁이라고 칭한다.
철종 초에 서울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나돌았고
또한 운현궁에는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얼마 안되어 지금의 왕인 고종이 탄생했다.
고종이 등극한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 곳을 말끔히 치워 새로이 하고
수리(數里)에 달하는 담장에는 네 개의 문을 만들었으며
대대를 장엄하게 꾸몄다.
고종이 태어난지 1년쯤 됐을 때이다.
경북 청도에서 올라온 관상가 박유붕(朴有鵬)이 흥선군을 찾았다.
서운관 근처에 서기(瑞氣)가 서려있다며
흥선군에게 그의 둘째 아들 재황의 관상을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흥선군이 재황이를 안고 방에 들어서자 박유붕은 부탁한다.
"대감마님, 사랑 근처에 잡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요."
박유붕은 벌떡 일어나
재황이를 안고 있는 흥선군에게 큰 절을 올렸다.
"대감마님께서만 알고 계십시요.
도련님께서는 천일의 기상이 역력하옵니다."
천일의 기상이란 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박유붕은 고종이 왕이 된 후대원군의 책사가 된다.
어느날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박유붕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대원군이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하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박유붕이 관상에 일가견 을 갖게 된 계기는
처갓집의 내력이 작용하였다.
장가를 '만경 두씨 (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다.
이 처갓집이 임진왜란 때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중국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두사충의 풍수서와 관상서 를 박유붕이 입수할 수 있었고,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갔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에게 떼어 주었다고 전한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 터는
운현궁 길 건너편
현 수운회관 뒤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