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전 7:1-2)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낫습니다.
다윗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풀이 봄에 나와 여름에 무성하지만, 가을이 되면 곧 시들어 죽게 됩니다.
그 꽃이 필 때는 심히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얼마 안가서 시들어 떨어지게 되고,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입니다.
좋은 날보다는 험악한 세월이 더 많았습니다.
수고와 슬픔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할까요?
1절 말씀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아멘.
산 자는 죽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죽음과 관련해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왜 솔로몬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그 날이 하나님께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음이란 말만 들어도 재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지고, 죽는 날을 하나님께 가는 이삿날이라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평안과 여유가 생깁니다.
죽음이 저주로 느껴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으면, 최상의 날이 펼쳐진다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죽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통이 축복의 기회인 것처럼, 죽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아멘.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말은 죽음을 묵상하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성은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점에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죽음을 축하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235장 1절과 4절 가사입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산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모하며,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